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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한 지 10년이 되는 해
짝사랑한 지 10년이 되는 해
Author: 율희

제1화

Author: 율희
그녀가 열여덟 살이던 해, 나는 대학 강당 맨 뒷자리에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까치발로 서서 신입생의 꿈을 적는 벽면에 자신의 미래를 적던 여자.

그녀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 나는 그녀가 늘 가던 카페 창가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꽃 한 다발을 품에 안고 다른 남자의 우산 아래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27살이 된 지금, 나는 직접 그녀의 약혼남이 바람피우는 영상을 그녀의 메일함으로 보냈다.

그녀가 웨딩숍 안에서 울다시피 내 품으로 달려오던 순간을 나는 조용히 지켜봤다.

사실 다른 사람을 사랑했던 적이 있어도 괜찮았고 그녀가 나를 잊은 적이 있어도 상관없었다.

10년을 걸쳐 준비한 일, 그 마지막엔 결국 그녀는 내 아내가 될 것이다.

...

전지훈의 외도를 처음 발견한 건, 고아린이 그의 휴대폰으로 업무 메시지를 회신하던 순간이었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숨겨진 아이콘을 눌러버리자 화면이 전환되며 바탕화면이 바뀌었다.

거기엔 전지훈이 한 여자의 이마에 입 맞추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그 여자를 고아린은 알고 있었다.

석 달 전 본사 비서실로 새로 전입된 공지연.

사진 속 전지훈은 그토록 다정했다.

그녀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연애 7년. 그는 태연하게 휴대폰 비밀번호를 알려주며 아무거나 봐도 된다고 말했다.

이제야 알았다.

그건 ‘이중 시스템’ 덕분이었다는 걸.

손이 덜덜 떨렸지만 고아린은 채팅 기록을 열어보았다.

대화의 시작은 4년 전, 마지막 메시지는 30분 전이었다.

[자기야, 그 여자가 웨딩드레스 입은 게 그렇게 예뻐? 내가 빨간색 치마를 입은 때보다? 내가 이렇게 섹시한데?]

[그 치마. 오늘 밤에 입고 나한테 보여줘.]

[흥. 안 입을 거야. 아침에 그 늙은 여자를 키스한 벌로.]

[굳이 너랑 걔를 비교할 필요 있나? 늘 굳은 얼굴에 재미도 없고 남자 흥미 다 떨어지게 생겼지. 안 그랬으면 내가 왜 7년 동안 손도 안 댔겠어?]

[쳇, 입만 살아서는! 내일은 그 여자랑 웨딩드레스 보러 가지 마.]

[알겠어. 네 말이 곧 명령이니까.]

화면 속 글자 하나하나가 고아린의 목을 죄는 듯했다.

아침에 삼켰던 식은 죽이 속에서 역류하며 그들이 말한 단어들이 날 선 칼날이 되어 가슴을 찔렀다.

마치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

고아린은 곧 결혼할 사람이 이런 대화를 불륜녀랑 나눈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5년 전, 대학을 갓 졸업하자마자 전지훈은 그녀를 회사로 불렀고 그는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린아, 회사는 이제 막 시작이야. 네가 내 비서가 돼주면 좋겠어. 조금만 안정되면 다시 네 일 시작하자. 그러면 우리 매일 함께 있을 수 있잖아.”

그때의 고아린은 도자기 전공자였다.

치마 끝에 마르지 않은 흙이 묻어 있었고 꿈이란 단어를 믿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묵묵히 기다렸다.

무려 5년 동안.

그 5년 동안, 고아린은 화려한 색의 옷을 버리고 검은 정장과 단정한 올림머리를 택했다.

술자리에서 전지훈을 대신해 술을 마셔주고, 거래처의 눈치를 보며 심한 모욕도 꾹 삼켰다.

오로지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

“고아린, 넌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그녀는 결국 회사에서 프로페셔널한 비서로 인정받았지만 동시에 전지훈에게는 ‘재미없는 여자’로 불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믿었다.

그 모든 희생이 결국 사랑으로 돌아올 거라고.

결혼이 눈앞이라며 행복을 꿈꿨다.

하지만 진실은 전지훈의 눈에 고아린은 단지 지루한 ‘노처녀’였다.

20살부터 27살까지,

고아린의 가장 빛나던 시간은 전지훈의 ‘이중 계정’ 뒤에 숨겨진 농담거리에 불과했다.

“고 비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고아린은 재빨리 모든 창을 닫고 다시 원래의 시스템으로 돌아왔다.

곧, 전지훈이 몇몇 임원들과 함께 걸어왔다.

“고 비서, 잠깐 들어올래?”

“무슨 일이세요?”

사무실 문이 닫히자 그는 곧바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무슨 일 있어?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고아린은 미묘하게 몸을 피하며 고개를 들었다.

늘 그렇듯 깔끔한 정장, 부드럽고 진심 어린 눈빛.

‘정말 역겹네.’

불과 30분 전, 전지훈은 다른 여자와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지금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웃고 있다.

“네 핸드폰, 아까 대신 몇 개 업무 메시지 보냈어.”

그는 태연했다.

“고작 그거였어? 요즘 회사 일 좀 많지. 이번만 지나면 같이 여행 가자.”

전지훈은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받아 들며 손으로 고아린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솔직히 고아린은 속이 뒤집혀 당장 토할 것 같았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검사는 안 해봐? 내가 혹시 작은 비밀이라도 봤을지 몰라.”

그러자 전지훈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린아, 내 폰은 언제든 봐도 돼. 내가 뭐 숨길 게 있겠어?”

‘숨길 게 없다고?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하지?’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켰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곧, 전지훈이 다시 다가와 고아린의 허리를 감싸안고 입을 맞추려는 순간 그녀는 몸을 틀며 피했다.

꽉 쥔 주먹 탓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픈 만큼 정신이 또렷해졌다.

“내일 오후 5시, 웨딩드레스 피팅 있어. 잊지 마.”

고아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전지훈의 표정은 잠깐 굳었지만 이내 다시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기억하지. 다만 내일 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너 먼저 가 있어. 최대한 빨리 갈게.”

그는 일부러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요즘 퍼스트 룩이 유행이래. 결혼식 당일, 처음 보는 신부의 모습이 제일 감동적이잖아.”

고아린은 그 말을 들으며 전지훈을 똑바로 바라봤다.

혹시라도 그의 얼굴에서 죄책감의 그림자를 찾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세상 모든 바람난 남자는 이토록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지훈아, 우리 결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그녀는 낮게 물었다.

5년 동안, 고아린은 전지훈을 ‘전 대표님’이라고 불렀고 전지훈은 그녀를 ‘고 비서’라고 불렀었다.

하지만 고아린이 필요하면 늘 다정하게 다가와 ‘아린이’라고 불러줬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수 십 억짜리 프로젝트도 네가 다 해내잖아. 결혼식 하나로 날 실망시키지 않겠지? 고아린, 넌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그 말이 또다시 귓가에 울렸다.

사실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아린아, 난 네가 필요해.”

“고아린, 왜 이렇게 재미가 없어? 조금만 더 여자답게 굴어줄 순 없을까?”

수없이 들었던 말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난 대체 뭘 기대한 거지? 후회? 아니면 사과?’

순간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지 깨달았다.

희망을 놓지 못한 어리석은 광대 같았다.

“물론이지.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

그제야 전지훈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나가봐.”

고아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떠나려했지만 손은 덜덜 떨렸고 발걸음은 허공을 밟는 듯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곧이어 화장실에 가자마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는 심하게 구토했다.

아침에 먹은 죽과 위산이 뒤섞여 올라와 목이 타들어 갈 듯 아팠다.

거울을 올려다보니 창백한 얼굴, 번진 화장, 검은 정장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게 보였다.

이게 고아린이었다.

전지훈의 말대로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여자.

그녀는 거울 속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고아린, 넌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웨딩숍에서 온 확인 문자였다.

[내일 오후 5시, 예약 확인되었습니다.]

[네, 시간 맞춰 갈게요.]

답장을 보낸 고아린은 머리핀을 뽑았다.

단정히 묶였던 머리칼이 흐트러지고 단추 몇 개를 풀자 숨이 조금은 쉬어졌다.

고아린은 5년 만에 처음으로 전지훈이 만들어놓은 규칙과 틀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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