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소지연의 속뜻을 전혀 모르고 감동 받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지연아, 정말 고마워. 사랑해.”손가락으로 하트를 날리자 소지연도 장난스럽게 받아줬다.“당연하지, 난 언제나 네 편이야.”그러면서도 소지연은 괜히 의미심장하게 강현우를 또 한 번 노려봤다.강현우 역시 그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 소지연과 눈을 마주쳤다.짧은 눈 맞춤만으로도 묘하게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전해졌다.소지연은 잠시 위축됐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친구를 위해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목을 쭉 세운 채로 강현우를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마지막에는 콧방귀를 퉁 하고 뀌며 고개를 돌렸다.윤하경은 소지연이 내는 소리에 케이크 상자를 열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왜? 무슨 일 있어?”“아니야, 아무 일도.”소지연은 대수롭지 않은 척 고개를 저었다.“그래?”윤하경은 다시 케이크를 한입 떴다. 식사가 끝나자 강현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회사에 볼 일이 좀 있어서. 너는 푹 쉬고 일 끝나면 다시 올게.”소지연은 옆에서 곁눈질로 강현우를 바라보다가 비꼬듯이 입꼬리를 올렸다.강현우는 그런 소지연의 표정을 보며 잠깐 시선을 주었지만 별말 없이 병실을 나섰다.강현우가 나가고 나서야 소지연은 윤하경 곁으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하경아, 너 요즘 현우 씨랑... 괜찮아?”윤하경은 케이크 맛에 한껏 기분이 좋아져, 숟가락을 한 번 더 뜨며 말했다.“응? 뭐가 괜찮냐는 거야?”그녀는 한 입 먹자마자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말차 향에 저절로 눈이 실룩 감겼다. 평소에는 특별히 먹는 걸 좋아하지 않던 윤하경이지만 이 집 케이크만큼은 정말 좋아했다.하지만 늘 두 시간씩 줄을 서야 하다 보니 번거로워서 자주 사 먹지는 않았다. 오늘은 마침 생각나던 참에 소지연이 사다 줬으니 역시 오래된 친구가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지연은 케이크만 신나게 먹는 윤하경의 모습이 조금 답답해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 강현우가 다른 여자에게 갔던
소지연은 유호천의 허스키하고 약간 서러워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어릴 적 품었던 풋풋한 감정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이젠 정말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스무 해가 넘게 살아오며 더 이상 어린 시절의 사랑에 평생을 얽매여 살 수는 없었다. 특히 누구에게도 축복받지 못하고 인정도 받지 못한 그런 관계라면 더더욱 말이다.한참을 말없이 있자 유호천이 불만스럽게 소지연을 다시 끌어당겼다.유호천은 거칠게 어깨를 움켜쥐고 거실에 들어오는 불빛 아래 그녀를 내려다봤다.“너 그동안 어디 있었어? 왜 나한테 연락 한번 없었어?”소지연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유호천을 똑바로 바라봤다.그의 눈빛은 술기운에 잔뜩 흐릿했고 표정도 평소답지 않았다.잠시 생각한 뒤, 소지연은 조심스럽게 유호천의 손을 자기 어깨에서 떼어냈다.“너 술 마셨어. 일단 좀 진정하고 내일 정신 차리면 말해.”만약 유호천이 여기 있는 걸 알았다면 애초에 집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려던 순간, 허리를 꽉 끌어안는 손길이 다시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놀랄 새도 없이 유호천의 입술이 강하게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익숙한 체온에 알코올 냄새까지 뒤섞여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지연은 힘껏 유호천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그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곧바로 입안에 피 맛이 퍼졌지만 유호천은 끝까지 그녀를 놓지 않았다끝내 소지연이 더 세게 힘을 주어 밀쳐내자 그제야 입술이 떨어졌다.짝 하는 소리와 함께 소지연은 주저 없이 유호천의 뺨을 힘껏 내리쳤고 텅 빈 집 안에 손바닥 소리가 크게 울렸다.유호천은 한쪽 볼을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가 조용히 그녀를 다시 바라봤다. 말은 없었지만 눈빛에는 흔들림이 가득했다.소지연은 한숨을 내쉬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호천아, 우리 이제 어른이잖아. 더는 애처럼 굴지 말자.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둘이 잘 될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그렇게
소지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핸드폰을 꺼내 윤하경에게 전화를 걸었다.마침 막 잠들었던 윤하경은 갑작스러운 전화에 게으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응, 지연아. 무슨 일이야?”소지연은 당장이라도 강현우가 윤하경 모르게 다른 여자 만나러 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그 말을 하려다 멈췄다.혹시라도 윤하경이 이 얘기를 듣고 상처받거나 몸까지 더 안 좋아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생각하니 입이 꼭 붙은 것처럼 아무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한동안 아무 말이 없자 윤하경이 다시 물었다.“왜? 무슨 일 생긴 거야?”“아니 아무 일 아니야. 그냥 나 집에 잘 도착했다고 알려주려고 전화했어.”소지연은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윤하경이 안도하는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그래, 다행이다. 오늘 정말 고생 많았지. 얼른 푹 쉬어.”“응...”전화를 끊기 직전, 소지연은 다시 망설이다가 윤하경을 불렀다.“저기, 하경아...”“응? 무슨 일 있는데?”윤하경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소지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늘 밤에는 너 혼자 병원에 있어? 강현우는 안 와?”그러자 윤하경은 웃으며 대답했다.“설마 그게 궁금해서 전화한 거야? 현우 씨 요즘 정말 바빠. 이제 막 대표 자리로 돌아왔고 할아버지 장례도 끝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마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못 오는 거 아닐까 싶어.”그 대답을 들은 소지연은 속으로 이를 꽉 물었다.‘무슨 바빠... 남의 여자나 만나러 다니는 주제에... 정작 자기 아내는 병원에 두고서...’하지만 윤하경의 몸 상태가 아직 다 낫지 않았다는 생각에, 차마 더 이상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꾹 참았다.잠시 망설이다가 소지연은 힘없이 말했다.“그래, 알겠어. 얼른 쉬고... 아프지 말고.”사실 아직까지 강현우가 그 여자와 뭔가 결정적으로 잘못한 현장을 본 것도 아니라 섣불리 말해서 윤하경의 마음만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전화를 끊고 소지연은 한참 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소지연은 주차장 한쪽에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멀찍이 자동차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강현우를 바라보았다.아마 윤하경을 챙기러 병원에 왔겠구나 싶어서 인사를 건네려고 다가가려던 순간, 민진혁이 다른 쪽에서 걸어왔다.“대표님.”민진혁이 강현우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신인아 씨가 깨어나셨습니다. 대표님을 꼭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민진혁이 휴대폰을 내밀었고 소지연은 이 말을 듣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잠시 망설이다가 옆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강현우는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주차장은 워낙 조용해서 소지연도 어렴풋이 그의 목소리와 신인아와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지금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내일 다시 갈게.”신인아가 뭐라고 말했는지, 강현우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고 잠시 고민 끝에 짧게 대답했다.“알았어.”전화를 끊은 강현우는 바로 윤하경의 병실로 올라가지 않고 민진혁에게 말했다.“가자.”그는 이내 차 문을 열고 올라탔고 민진혁도 조수석에 탔다.강현우의 차는 소지연이 지켜보는 가운데 병원을 빠르게 떠났다.소지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바로 택시를 세워 따라가기로 했다. 강현우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멀찍이 따라가 달라고 했는데 택시 기사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경찰 도와서 용의자 미행해 본 적 있습니다. 이런 건 노하우가 있거든요.”소지연은 잠깐 어이없었지만 이미 택시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뒤따라 달리고 있었다.차 안에서 소지연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말 강현우가 윤하경을 두고 다른 여자에게 간 건 아닐까, 별의별 걱정과 의심이 들었다.택시 기사도 옆에서 계속 수군댔지만 소지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창밖만 바라봤다.“설마 바람피우는 거 아니에요? 저 앞에 탄 남자가 혹시...” 택시가 멈추자마자 그녀도 황급히 내렸다.다행히 강현우와 민진혁은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윤하경은 소지연의 전화 목소리가 너무 커서 잠깐 폰을 귀에서 멀리 뗐다가 다시 귀에 대며 말했다.“그래서 당분간 회사에 못 나갈 것 같아.”차마 다친 몸을 이끌고 출근할 수는 없었고 괜히 회사 분위기까지 흐릴까 걱정됐다.그러자 소지연 쪽에서 뭔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야, 지금 그런 게 중요하냐? 일단 가만히 있어. 나 당장 서울로 갈 거야!”“아니 굳이 그렇게까지...”윤하경이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소지연이 벌써 전화를 끊어버렸다.윤하경은 멍하니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참, 얘는 늘 이렇지.’아무래도 빨라도 내일 아침쯤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소지연은 한밤중에 병원에 도착했다.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윤하경 병실로 달려온 것이다.도착하자마자 병실 앞에서 경호원들에게 가로막혔는데 윤하경이 흐릿하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잠이 깨 눈을 떴다.“들여보내 주세요.”몸을 일으켜 밖을 향해 말하자 경호원이 그제야 소지연을 들여보냈다.비몽사몽한 윤하경이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기도 전에 소지연이 성큼 다가와 물었다.“너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소지연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이지만 이토록 오래 가까이 지내다 보니 소지연은 이제 친자매나 다름없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밤중에 왔어? 나 정말 별일 없어. 그렇게 서둘러 올 필요 없었는데...”소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윤하경을 향해 시원하게 눈을 흘겼다.“네가 납치에 다치기까지 했다는데 내가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지! 이걸 그냥 넘어가면 내가 친구냐?”손수 윤하경의 상처 부위를 살펴보며 진짜로 크게 다친 데가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소파에 털썩 앉았다.늦은 봄이건만 서울에는 아직도 눈이 흩날리고 있었고 허겁지겁 달려온 소지연의 속눈썹에도 하얀 성에가 맺혀 있었다.윤하경은 잠시 웃으며 물었다.“이번에 여행 다녀온 건 어땠어?”소지연은 어깨를 으쓱였다.“괜찮았어. 머릿속이 복잡하
강현우는 윤하경이 억울하게 입을 내민 모습을 보자 그제야 미소를 머금었다.“손은 이제 안 아파?”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아파요. 그래도 왼손으로는 먹을 수 있어요.”오른손이 다친 탓에 식사하는 것도 불편했다. 그래서 방금 전까지 왼손으로 어떻게든 먹으려던 참이었다.강현우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숟가락을 들어 죽을 떠서 윤하경 입 앞에 내밀었다.갑작스럽게 식사를 챙겨주는 그 모습에 윤하경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결국 순순히 입을 열어 죽을 받아먹었다.솔직히 이렇게까지 강현우가 챙겨주는 게 조금은 어색했지만 그는 평소처럼 담담하고 태연했다.섬세하게 음식을 먹여주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윤하경은 속으로 이 사람이 이렇게 세심한 면이 있었나 싶어 새삼 놀랐다.식사를 마치고 나자 몸을 뒤로 살짝 기대며 강현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신기한 생물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강현우는 우아하게 그릇과 수저를 내려놓은 뒤, 민진혁을 불러 식탁을 치우게 하고 나서야 윤하경을 바라봤다.“왜 그렇게 봐?”윤하경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밖에서 사람들이 만약 대표님이 이렇게 젊고 돈도 많으면서 세심하기까지 하단 걸 알면 또 마음 흔들릴 여자들이 늘겠네요.”윤하경은 장난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한 번 흘겨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보니까 납치범들이 좀 약하게 굴었나 봐. 아직 농담할 힘은 남았네.”윤하경은 삐진 얼굴로 다친 손을 흔들며 투정했다.“이런 말까지 하실 거예요? 정말 너무하신 거 아세요?”강현우는 그녀의 붕대 위로 피가 스며 나온 걸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이미 범인들은 잡혔어. 그리고 강경원은 병원에서 치료 중이고 배후로서 처벌도 받게 될 거야.”윤하경은 하루 사이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지, 그제야 제대로 실감했다.“혹시 더 바라는 거 있어?”강현우가 진지하게 물었다.“아니요, 없어요.”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강현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말했다.“곧 강호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