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지난 몇 년 동안 밤마다 강현우의 눈앞에 아른거리던 윤하경의 모습이었지만 정작 이 순간에는 아득히 멀어지는 듯했다.강현우는 이름을 부르려 입을 열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윤하경을 향해 달려갔으나 끝내 차문 손잡이조차 잡지 못했다. 다만 차에 오르는 윤하경의 옆얼굴은 또렷이 보였다.4년 전과 다름없이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윤하경...”한참이나 멀어져 간 뒤에야, 강현우는 목구멍에서 윤하경의 이름을 간신히 끌어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부르던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온힘을 쥐어짜야 했다. 강현우는 이마의 핏줄이 불거졌고, 언제나 차갑던 눈빛이 떨렸고 눈시울이 붉어졌다.민진혁이 뒤쫓아왔을 때는 허리를 굽힌 채 앞만 뚫어지게 노려보는 강현우만 보였다. 처음으로 보는 강현우의 이런 모습이었다. 민진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다가가 강현우를 부축했다.“강 대표님, 괜찮으세요?”“차... 차...”강현우는 한참이나 숨을 고른 끝에야 겨우 그 한마디가 나왔다. 민진혁은 곧바로 스마트키 버튼을 눌러 옆 차의 문을 열며 말했다.“알겠습니다. 바로 모실게요.”그러나 막 차에 오르려던 민진혁의 팔을 강현우가 확 잡아끌더니, 스스로 운전석에 올라탔다.민진혁이 당황해 앞을 막아섰다.“강 대표님, 지금 상태로 운전은 위험합니다.”하지만 충혈된 눈으로 앞만 응시한 강현우는 어떤 말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아마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윤하경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민진혁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강현우는 엑셀을 깊게 밟자 차가 튀어나갔다. 민진혁은 차에 오를 겨를조차 없이 달려가는 차창을 몇 번 두드렸을 뿐, 아무것도 하지 못 했다. 그 자리에 홀로 남은 민진혁은 이를 악물고 바닥의 자갈을 발끝으로 걷어차며 낮게 혀를 찼다.한편.주승엽이 룸미러로 뒷좌석의 윤하경을 힐끗 봤다. 지금 윤하경은 멍한 얼굴로 윤하민만 꼭 껴안고 있었다. 방금 뒤에서 차를 바짝 따라붙이던 남자가 떠올라 주승엽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주승엽은 입술을 한 번 다문 뒤
“왜 나가 버린 건지 모르겠네요.”강현우가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전화해 봐.”그러자 민진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전화를 걸었다. 곧 한 남자가 받았다.“우리 통역은 왜 아직 안 오죠?”민진혁이 낮게 물었다. 스피커폰이라 강현우도 그대로 들을 수 있었다.전화 너머 남자가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어, 통역사님이 아직 안 왔나요? 분명 제게는 시간 맞춰 온다고 했는데요. 잠시만요. 제가 하경 씨에게 바로 전화해 보겠습니다.”옆에서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강현우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멎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민진혁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챘다.“지금 뭐라고 했죠? 그 통역분이 이름이 뭐라고요?”상대는 잠깐 놀라더니 가볍게 웃었다.“하경 씨요.”상대방은 강현우가 무슨 불만이 있는 줄로 알고 서둘러 덧붙였다.“강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하경 씨는 정말 프로예요. 아마 오늘은...”“뭐라고요?”그 한마디를 뗄 때 강현우의 손이 살짝 떨렸고 차갑던 눈시울도 붉게 물들었다. 강현우는 여러 번 깊게 숨을 들이쉬고서야 물을 수 있었다.“네. 윤하경입니다. 강 대표님, 혹시 지각했다고 너무 탓하진 마세요. 그...”뚜뚜뚜...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전화를 끊고 회의실 밖으로 내달렸다.민진혁도 뒤를 쫓아 나가다가 방 안에 남아 있는 해외 파트너들이 떠올라 발을 멈췄다. 그들을 향해 돌아서서 짧게 말했다.“대단히 죄송합니다. 오늘은 저희 대표의 개인 사정이 생겼습니다. 회의는 다른 날로 다시 잡겠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민진혁은 곧장 몸을 돌려 강현우를 뒤따라 나갔다.한편.윤하경은 엘리베이터 앞까지 달려가 버튼을 연거푸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밀어 넣고 문이 닫히는 순간에서야 마치 큰일을 넘긴 사람처럼 길게 숨을 내쉬었다.어젯밤 하석호에게서 전화받았을 때만 해도, 이번 일만 마무리하고 한동안 숨어 지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늘은 꼭 이렇게 장난을 쳤다. 그때는 서로 평화롭게 정리했
“어디 나가세요?”주승엽은 회색 셔츠에 청바지, 위에는 검은색 트렌치를 걸쳤다. 키가 크고 균형 잡힌 몸매 때문에 코트 라인을 더 살렸다.윤하경이 올려다보자 주승엽의 반듯한 이목구비가 먼저 들어왔다.윤하경이 웃으면서 대답했다.“네. 오늘 일이 있어서 시내에 좀 다녀와야 해요.”주승엽이 바로 말을 이었다.“그럼 같이 가요. 저도 사야 할 게 있어요. 하경 씨가 일 보시는 동안 하민이는 제가 봐 줄게요.”윤하경은 거절하려다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윤하민의 눈을 보는 순간 차마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하민이를 데리고 밖에 나온 지도 꽤 됐다.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부탁할게요. 대신 좀 늦어질 수도 있어요.”“괜찮아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승엽이 허리를 숙여 윤하민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민아, 시내에 가면 아저씨가 놀이공원에 데려가 줄까?”“네. 좋아요!”윤하민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고 방금까지 눈가에 맺혔던 눈물 자국은 금세 웃음에 묻혔다.윤하경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한숨을 내쉬었다.아이를 낳은 뒤로 예전처럼 칼같던 윤하경의 성격은 윤하민의 앞에서 싹 무뎌졌다. 기준선도 한 번, 두 번 낮아졌다.하지만 윤하경도 어쩔 수 없었다. 윤하민은 그 정도로 너무 사랑스러웠다.주승엽의 약속이 마음에 쏙 든 윤하민은 윤하경이 품에 안으려 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두 사람은 윤하민을 데리고 나왔다. 운전은 주승엽이 맡고 윤하경은 하민이와 함께 뒷좌석에 앉아 창밖 풍경을 바라봤다. 이곳의 사계는 늘 보기 좋았다. 다만 그들이 머무는 곳에서 시내까지는 꼬박 한 시간 반이 걸렸다.고객과 만나기로 한 호텔 앞에 도착하자 윤하경이 차에서 내리며 손을 흔들었다.“승엽 씨, 그러면 저 먼저 다녀올게요. 하민아, 얌전히 있어. 알았지?”“네.”윤하민이 아기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손을 흔들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일 보고 오세요. 저는 아저씨 말을 잘 들을게요.”윤하
그 순간, 하석호는 짜증이 치밀었다.“말해 줄 수 없어요.”강현우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짙은 눈빛으로 하석호를 곧장 바라보았다.“하경이가 유러인에 있다는 거 알아요. 대략 어디인지, 위치만 알려 줘요.”하석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절대 말할 수 없다는 표정이 그대로 적혀 있는 것 같았다.“강 대표님.”민진혁이 때맞춰 밖에서 들어와 강현우 앞에 섰다.“시간이 다 됐습니다.”“그냥 갈 길 가세요. 배웅은 못 합니다.”하석호는 민진혁의 말에 바로 쫓아내듯 말을 맺었다.강현우는 오래도록 하석호를 짙은 눈빛으로 뚫어지게 보다가 끝내 몸을 돌려 나갔다.그의 뒷모습만 봐도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하석호는 혀를 차며 낮게 한마디 했다.“자업자득이지.”하석호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들어 윤하경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때 윤하경은 막 잠자리에 들 참이었다. 벨 소리에 화면을 확인하니 하석호였다.윤하경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전화를 받았다.“오빠, 이 시간에 일은 안 하고 전화할 여유가 있네?”“이렇게 늦었는데 아직 안 자?”“응. 일 하나 더 맡아서 자료를 미리 좀 보는 중이야.”윤하경이 웃으며 말했다.“근데 무슨 일로 전화했어?”“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야.”하석호가 짧게 응답했다.“강현우가 조만간에 유러인으로 갈 것 같아. 평소처럼 좀 피해 다녀.”강현우라는 이름을 다시 들은 건 4년 만이었다. 윤하경의 심장이 본능처럼 한 번 움찔했다. 하지만 시간은 통증을 조금씩 무디게 만들어 두었다.“와도 상관없어. 이제 나랑은 아무 관계도 없어.”하석호가 덧붙였다.“방금 내 사무실에서 나가면서 네가 지금 정확히 어디 있는지 캐물었어.”윤하경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가볍게 웃었다.“그래? 그럼 이번 일만 마무리하고 한동안은 새 의뢰 안 받을게. 집에서 지내면서 밖엔 나가지 않겠어.”“응.”하석호가 낮게 대답했다.“몸 잘 챙겨. 이제 너랑 하민이 보러 갈게. 지난번에 하민이가 바비 인형 갖고 싶다 했잖아. 사람 시켜
“나중에 하경 씨가 혼자라는 걸 알았을 때, 그땐 아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주승엽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저는 하민이와도 잘 맞는 것 같아요. 나중에 하민이 아빠가 되...”“주승엽 씨.”윤하경이 눈을 들어 주승엽을 보면서 말했다.“주승엽 씨는 여러모로 훌륭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저와 함께한다면 주승엽 씨에게 부담이 아주 클 거예요.”이웃 별장을 덜컥 살 만큼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라면 집안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런 곳일수록 배경과 출신을 더 볼 터였다.윤하경은 한동안 그런 틀에 묶여 살았고 앞으로 연애한다면 마음까지 내어주며 휘말릴 생각은 없었다. 가벼운 감정이면 몰라도 진지하게 만난다면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주승엽의 성격은 지나치게 진중했고 그 진중함을 윤하경은 받아 줄 수 없었다.그래서 지금 미리 선을 긋기로 했다.윤하경의 말에 주승엽이 잠시 굳어졌다. 정확히 핵심을 찌른 한마디였다.윤하경은 그런 표정을 보고도 부드럽게 웃었다.“괜찮아요. 승엽 씨, 앞으로 우리는... 그냥 친구로 지내요.”윤하경이 잔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잘 부탁해요.”이 정도로 말했으면 웬만하면 더는 나올 말이 없다.그런데 주승엽은 한참 윤하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하경 씨.”“이미 제 마음을 아는 이상, 제가 쉽게 물러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겠죠. 아직 저는 제대로 시작해 보지도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정식으로 윤하경 씨를 향해 다가가 볼 거예요. 그리고 그때도 안 된다고 느껴지면, 깔끔히 포기할게요.”주승엽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까... 제가 좀 과하게 마신 것 같네요. 먼저 돌아갈게요.”“잠깐만요!”윤하경이 주승엽을 불렀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훠궈는 이제 막 끓기 시작했는데, 손님은 떠나가 버렸다.윤하경은 입술을 다물고 남은 음식을 조용히 먹었다.조금 전의 고백과 다짐은 마음 한구석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주승엽이 남긴 말들은 윤하경의 가벼운
주승엽은 준수한 얼굴에 예술가 특유의 은근한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대부분의 시간에는 느긋하고 점잖았고 어른스러운 신사 같은 기품이 있었다.윤하경은 주승엽이 이 별장에 자주 드나드는 까닭이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어른들 사이에서 쓸데없이 빙빙 돌려 말하는 건 더 피곤할 뿐이었다.윤하경은 많은 일을 예전에 이미 내려놓았다. 인생은 길고 지나간 건 보내고 앞으로 걸어가면 된다.주승엽은 사람도 괜찮았고 윤하경도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사랑이 쉬운 건 아니었다.보글보글 끓는 훠궈에 윤하경이 소고기 완자를 하나 떨어뜨리며 물었다.“주승엽 씨, 예전에 연애해 본 적 있어요?”“컥, 컥!”막 물을 삼키던 주승엽이 그 말을 듣고는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한참이 지나서야 기침이 멈췄고, 그제야 주승엽은 고개를 들었다.“네... 대학 때 해봤어요.”“그랬군요.”윤하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결혼은요? 아니면...”말끝을 잠시 고른 뒤, 윤하경은 미소로 마무리했다.“승엽 씨도 이제 나이도 적지 않아 보이는데...”제법 큰 체구의 남자임에도 주승엽의 얼굴이 순식간에 과수원 사과처럼 붉어졌다.“아직... 결혼은 아직 안 했어요.”“알겠어요.”윤하경은 냄비에 채소를 더 넣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저는 돌려 말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앞으로는...”이 말은 윤하경이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준비해 둔 말이었다. 다만 주승엽이 먼저 꺼내지 않으니 아무런 맥락 없이 말을 시작하기가 애매했을 뿐이다.그렇다고 1년이나 이렇게 오가는데 계속 모른 척하는 것도 과한 예의였다.젓가락을 멈춘 주승엽이 놀란 눈으로 윤하경을 바라봤다.“왜요?”주승엽은 말을 내뱉고서야 자신이 다소 격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멈추더니 젓가락을 내려놓고 정면으로 윤하경을 바라봤다.“제 말은... 우리가 한 번만 서로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윤하경은 작게 웃으며 손을 씻고 나오는 윤하민을 힐끗 보았다.“보세요. 저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