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철이 그런 식으로 말을 내뱉은 건, 결국 자기 얼굴을 보기 싫어서라는 걸 윤하경은 뻔히 알고 있었다.‘하긴, 외도 현장까지 아버지를 끌고 간 게 나였으니까. 그 앞에서 여자한테 배신당한 꼴을 딸에게 들켜버렸으니, 남성우월주의로 똘똘 뭉친 아버지로선 도저히 견딜 수 없었겠지.’‘그러니 눈앞에서 없애고 싶었을 거야. 안 보이면 마음도 편하겠지.’하지만 윤하경은 절대 이 집을 나갈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윤수철이 얼굴을 찌푸리면 오히려 좋았다.그동안 자신이 견뎌온, 토할 것 같은 기억들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윤수철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윤하경은 신경 쓰지 않았다.“아줌마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그 말에 윤수철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그리고 윤하연은요? 회사에서 바로 자르실 건가요, 아님 또 대충 눈감아줄 건가요?”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그딴 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네 일이나 잘해.”윤하경은 어깨를 으쓱였다.“그런데요, 제가 신경 안 써도 되는 일이었어요?”“제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아줌마한테 홀려서 뭣이 진짜인지 몰랐겠죠.”그녀는 윤수철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윤수철은 결국 들고 있던 수저를 식탁에 내던지듯 놓고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2층으로 올라갔다.윤하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국 좀 주세요.”곁에 서 있던 유 집사가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아가씨, 지금이야말로 기회예요. 이럴 때 조금씩 아버님과 관계를 회복하셔야지, 왜 계속 부딪히시기만 해요.”윤하경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유 집사의 말을 끊었다.“빨리요. 저 지금 배고파요.”물론 그녀도 유 집사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내가 그렇게 순하게 말 잘 듣는 성격이었으면 아버지랑 이렇게까지 틀어지지도 않았겠지.’식사를 마치자마자 윤하경은 회사로 향했다.요즘 윤수철은 회사 일에는 눈길도 주지 못하고 있었기에 지금이야말로,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그때 그 사건이 그렇게도 추하게 끝나버렸으니 지금 윤하경과 주미나 사이에 남아 있는 건 어색함 뿐이었다.그런 그녀가 느닷없이 연락을 해오자 윤하경은 직감적으로 느꼈다.‘좋은 일일 리 없겠네.’윤하경이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주미나는 그런 말에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결국 그녀는 직접 회사를 찾아왔다.퇴근길, 회사 정문을 나서던 윤하경은 검은색 차량 옆에 서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주미나였다.예전엔 단정하고 세련됐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피곤함에 절은 얼굴,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 불과 몇 달 사이에 그녀는 확연히 늙어 있었다.윤하경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미 그녀의 눈에 들고 말았다.“하경아.”주미나가 서둘러 다가왔고 윤하경은 돌아보며 담담하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과거엔 ‘어머님’이라 부르던 아이가 이제는 이름 석 자조차 입 밖에 내지 않자 주미나의 눈가가 붉어졌다.“그동안 잘 지냈니...?”윤하경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잘 지냈어요.”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윤하경이 직설적으로 물었다.“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거예요?”주미나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그냥... 네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오랜만이잖니.”손목시계를 흘끗 확인한 그녀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한 시간만. 너랑 얘기하고 싶어.”윤하경은 주저 없이 고개를 저었다.“저희 사이에, 더 이상 나눌 이야긴 없을 것 같은데요.”냉정한 말투에 주미나의 얼굴엔 실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하경아... 난 언제나 네가 지호랑 어떻게 되든, 내 딸처럼 생각했어...”진심 어린 말투.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는지 윤하경도 알고 있었다.사실, 그녀는 생전에 엄마가 가장 아끼던 친구였고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딱히 나쁘게 대한 적도 없었다.잠시 침묵이 흘렀고 결국 윤하경은 고개를 들었다.“좋아요. 어디서 이야기하실 건데요?”주미나는 안도한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레스토랑 하나 예약해 놓았어. 우리 차 타고 가자.”그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긴 아쉽잖니.”주미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 미소는 따뜻하지 않았다.입꼬리만 올라가 있을 뿐, 그 안엔 냉기와 뒤틀린 집착이 섞여 있었다.윤하경은 눈살을 찌푸린 채 움직이지도 않았다.“여기 어디예요? 왜 절 이런 데로 데리고 온 거죠?”“누구 좀 보여주려고.”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느꼈다.‘이건, 단순한 만남이 아니다.’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기어올랐다.윤하경은 조용히 가방 속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눈을 떼지 않고 주미나를 응시했다.“말로 하세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잖아요.”“우리 사이, 약혼 문제 외엔 특별한 감정도 없었잖아요. 제가 아줌마한테 뭘 잘못했다고 이러세요?”입으론 말을 이어가면서도, 윤하경의 시선은 차창 밖을 바쁘게 훑었다.‘진작에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야 했는데... 내가 멍청했지.’그 순간, 주미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야. 넌 나한텐 잘못한 게 없어.”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점점 서늘하게 식어갔다.“그런데 말이지... 내 아들이 지금 반쯤 죽어가고 있어. 침대에 누워서 눈도 못 뜨고 있는데 그걸 보면서 내가 가만히 있어야겠니?”윤하경의 얼굴이 굳어졌다.“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죠?”“아직도 그런 소리가 나와?!”주미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솟구쳤다. 붉어진 눈시울이 더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지금이야.’윤하경은 순간적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나와 문 옆에 서 있던 주미나를 힘껏 밀쳐버렸다.“꺄악!”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구는 주미나를 넘어, 윤하경은 맨발로 달리기 시작했다.굽 높은 힐은 도망치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이곳은 주미나가 일부러 고른 장소였다.외진 들판,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는 황량한 도심 외곽에, 게다가 해까지 뉘엿뉘엿 저물고 있어 주위는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뒤에서 주미나가 이를 갈며 고함쳤다.“뭘 멍하니 서 있어! 당장 쫓아가!”대기 중이던 사내들이 비로소 움
작은 오두막 안.윤하경은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손발이 꽁꽁 묶인 채 내던져졌다.팔은 쓸리고 옷은 너덜너덜해졌으며 머리카락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있었다.‘이 정도 외진 곳이면, 소리친다고 누가 와주겠어.’윤하경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비명은 무기 아닌 소음일 뿐이었다.‘지금은 소리칠 때가 아니야. 도망칠 틈을 봐야 해.’그 순간,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싸늘한 공기를 베며 다가왔다.문이 벌컥 열리며 주미나가 들어섰다.그녀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아직도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말 좀 해봐. 구지호한테 뭐가 그렇게 원한이 깊어서 애를 그 지경으로 만든 거야?”주미나의 표정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눈빛은 번들거렸고 억눌린 분노는 거의 광기에 가까웠다.“지금 그 애가 어떤 상태인지 알긴 하니?”입엔 여전히 역겨운 수건이 틀어막혀 있어 윤하경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주미나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지금 그 애... 병상에 누워 반쯤 죽은 상태야. 의사는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댔어.”윤하경은 눈으로만 대답했다.말하지 않아도 그 눈빛이 말해줬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그 반응에 분노가 치민 주미나는 결국 수건을 잡아당겼다.“말해봐. 왜 그랬어. 왜 구지호한테 그런 짓을 했어?!”입이 너무 오래 막혀있었던 탓에, 윤하경은 입을 조금 움직이고 나서야 겨우 말했다.“몇 번이나 말했죠.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거짓말!”짝!주미나의 손이 윤하경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윤하경의 얼굴이 옆으로 꺾였고 하얀 살결 위로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번졌다.그러나 윤하경은 끝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노려봤고 그 태도에 주미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아직도 거짓말할래? 증인도 있다고!”“증인이요?”윤하경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주미나를 바라보았다.“누가 그런 소릴 했는지 정말 궁금하네요.”“들어와.”주미나는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곧,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누군
“언니가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에요!”윤하연은 다급히 외쳤고 목소리엔 분노보단 불안이 실려 있었다.“얘는 지호 오빠랑 약혼했을 때부터 강현우랑 이미 그런 사이였어요. 강현우가 그런 짓을 한 것도, 전부 언니 말 듣고 지호 오빠한테 복수하려던 거라고요!”“복수?”윤하경은 비웃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윤하연을 바라보았다.“그럼 말해봐. 내가 뭘 복수하려고 했는데?”윤하연의 입이 덜컥 멈췄다.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떼던 그녀는 결국 스스로 무덤을 팠다.“그, 그거야 내가 지호 오빠한테 사람 시켜서 언니를 강간하라고...”순간, 본인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은 윤하연은 입을 틀어막은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주미나를 바라보았다.“계속 말해보지 그래.”윤하경은 차갑게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그럼 지난번에 날 노렸던 게 실패해서, 이번엔 아예 어머님을 이용해 날 무너뜨릴 생각이었던 거야?”“하연아. 너 사람이 할 짓을 해야지. 나한테 누명 씌우기 전에 증거라도 들고 오지 그랬니?”“예를 들면 네 엄마가 바람피웠다는 증거, 나 그거 갖고 있거든. 지호 씨가 저렇게 된 게 내 탓이라면 그에 맞는 증거는 있어?”윤하경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그녀는 지금 도박을 걸고 있었다.주미나가 아직 자신에게 남은 믿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에 전부를 건 것이다.“어머님.”윤하경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말했다.“저를 오랫동안 봐오셨잖아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정말 윤하연 말 하나만 믿고 저를 이렇게까지 대하신다면 저도 더는 드릴 말씀이 없네요.”그녀는 눈을 감고 벽에 몸을 기대었고 지친 숨결과 조용한 체념이 그 공간에 퍼졌다.윤하연은 그 태도에 질투와 분노가 폭발했다.“뭐야, 지금 연기하는 거야? 네가 한 짓이잖아! 왜 인정 안 해!”화를 주체하지 못한 윤하연은 그대로 발을 들어 하경을 걷어차려 했다.그 순간, 윤하경의 눈이 번쩍하며 살기 띤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윤하연은 본능적으로 움찔했고
“너희 중 누구라도 날 속인 게 밝혀지면 그 대가, 반드시 치르게 될 거야.”주미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부잣집 사모님으로 살아오며 익힌 우아함 뒤에는 결코 적지 않은 더러운 수단들이 감춰져 있었다.그 위압감에 윤하연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푹 숙였다.잠시 후, 주미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오두막을 나섰고 멀리서 자동차 시동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윤하경, 넌 진짜 사람 인생 망치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어.”발을 쾅 내디딘 윤하연이 돌아서며 이를 갈았다.“왜! 왜 지호 오빠가 너 때문에 다쳤다는 걸 인정 안 해?”윤하경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좀 꺼져줄래? 네 목소리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리니까.”쌓인 감정이 고개를 들었고 윤하경은 더 이상 받아줄 여유조차 없었다.“지금 네가 처한 상황, 진짜 모르고 그러는 거야?”윤하연이 몸을 숙여 윤하경의 턱을 잡아 올렸다.“넌 지금 납치된 거라고.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하지만 윤하경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서? 쓸데없는 말 다 했으면 좀 꺼져. 나, 자야 되니까.”그 무심한 말투에 윤하연의 분노가 폭발했다. 손을 들어 그대로 뺨을 내려치려던 순간, 윤하경의 눈빛이 칼처럼 날카로워졌다.“쳐. 마음껏 쳐보라고. 네가 나한테 어떻게 하든, 그 대가는 네 엄마한테 열 배로 돌아갈 거니까.”“뭐?”윤하연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눈동자가 흔들렸고 그녀는 낮게 으르렁댔다.“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 한 거야?”윤하경은 희미하게 웃었다.“다 말해줄게. 대신 이거 풀어줘. 그럼 너희 엄마가 지금 어딨는지 알려줄게.”윤하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또 날 속이려는 거지? 이젠 안 속아, 윤하경.”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그래. 그럼 말든가. 어차피 난 피곤하니까, 말 걸지 마.”그 말에 윤하연은 치를 떨며 돌아섰고 쾅 소리를 내며 문을 세게 닫았다.오두막 안.정적 속에 홀로 남겨진 윤하경은 천천히 눈을 떴다.‘강현우 씨
윤하연이 다시 돌아온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윤하경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무슨 짓 하려고.”윤하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예쁘지도 상냥하지도 않았고 그저 뒤틀린 증오로 일그러져 있을 뿐이었다.“무슨 짓이냐고?”윤하연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강현우가 남자들을 시켜 날 그렇게 망가뜨렸을 땐, 자기 여자가 내 손에 들어올 거란 건 상상도 못 했겠지?”“뭐?”“날 무시하고 조롱하고, 깔봤지? 넌 뭐가 잘났다고, 이젠 너도 나랑 똑같이 만들어줄게.”윤하연이 뒤를 돌아 외쳤다.“들어와.”문이 열리자, 덩치 큰 남자들이 하나둘 방 안으로 들어섰고 그중 두 명은 아까 윤하경을 쫓던 자들이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윤하경.”“윤하연, 미쳤어? 지금 그만둬도 늦지 않았어. 이건 범죄라고.”“그만둬?”윤하연이 속삭이듯 말했다.“난 혼자 죽지 않아. 내가 겪은 지옥, 어디 너도 한번 겪어봐.”윤하경은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는 걸 알아채고 침착하게 남자들 중 가장 리더처럼 보이는 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지금이라도 멈춰. 너희가 한 일, 지금은 그냥 납치일지 몰라도, 이 선 넘으면 인생 끝장이야. 평생 감옥에서 썩는다고.”그 말에도, 남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윤하경 씨 걱정 마세요.”“우린 일 깨끗하게 처리합니다. 증거? 절대 안 남죠.”“그리고...”그중 하나가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비열하게 웃었다.“이렇게 예쁜 여자면 몇 년 감옥에서 썩어도 충분히 가치 있지.”윤하경이 속으로 욕지거리했다.‘이거 완전 미친놈들이네.’윤하연이 그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걱정 마. 오늘 여기서 벌어진 일 아무도 모를 거야.”그녀는 돌아서며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내 언니, 잘 부탁해.”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멀어질수록 윤하경의 심장은 더 거세게 뛰었다.“윤하연… 내가 살아 나가면 널 반드시 가만 안 둬.”“살아서 나가고 나서 그런 말 해. 지금은 아
어두운 방.희미한 불빛 아래, 남자들의 눈빛이 들짐승처럼 번뜩였다.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그때, 왜 윤하연까지 같이 끝장내지 않았을까. 임수연 그 여자랑 같이 잡아들였어야 했는데.’하지만 이 세상에 후회 약 따윈 없었다.“윤하경 씨, 그럼 재미를 좀 보자고.”비릿한 웃음과 함께 누군가의 더러운 손길이 그녀의 몸 위를 더듬었고,피부에 닿는 그 촉감은 마치 수천 마리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 소름 끼쳤다.탕!그 순간, 묵직한 총성이 바깥에서 울려 퍼졌다.윤하경 위로 올라타려던 남자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누구야?”쿵, 쿵, 쿵.답 대신, 문이 거칠게 열리며 몇몇 남자들이 쏜살같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그들 앞에는 짧고 검은 권총을 들고 선 사내가 있었다. 강현우의 오른팔, 우지원이었다.건달들은 아직도 욕망에 취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었고 순간, 우지원이 쏜 총알이 한 건달의 허벅지를 정통으로 꿰뚫었다.“악!”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당신들 누구야!”절박한 외침에, 문 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되받아쳤다.“누구냐고? 네 주제에 감히, 나한테 그 질문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냐?”목소리는 낮고 서늘했으며 단어 하나하나에 살기가 서려 있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다.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문가에 선 그 사람을 보자마자 참고 있던 눈물이 제멋대로 흘러내렸다.강현우였다.그는 조용히, 그러나 모든 것을 압도하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묵직한 존재감이 공기를 흔들었다. 그의 시선이 윤하경을 스치고 그 뒤로 웅크린 남자들을 향했다.“이거 재밌네?”건달들도 강현우를 알아보고 혼비백산해 땅에 머리를 박았다.“아닙니다! 저희는 대표님의 사람인 줄 모르고...”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그 세력이 어떤지 건달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윤하경을 내려다봤다.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
“내리면 알게 돼.”강현우가 먼저 차에서 내려 한 손으로 문을 잡아주며 윤하경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윤하경은 잠깐 망설였다. 오늘의 강현우는 뭔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도 부드럽게 느껴지고 말투도 평소보다 훨씬 여유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강현우의 따뜻한 손에 이끌려 함께 산장 안으로 들어섰다. 겉으로 보기엔 딱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조용히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산장 안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기사에서나 보던 유명 인사들도 눈에 띄었고 명실상부한 상류층의 모임이었다. 강현우는 윤하경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안으며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했고 차가운 분위기 때문인지 아무도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둘은 준비된 좌석에 자리를 잡았고 그제야 윤하경은 이곳이 경매장이란 걸 알게 됐다.경매라면 몇 번 참석해 본 적 있지만 이 정도 규모는 흔치 않았다. 강현우처럼 평소 시끌벅적한 자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굳이 참석할 정도면 오늘은 정말 뭔가 중요한 물건이 나오는 날이겠구나 싶었다.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고 옆에 앉은 강현우도 특별히 말을 거는 건 아니어서 윤하경은 조금 지루해졌다.그러던 중, 강현우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숨결이 귀를 스치며 속삭이듯 말했다.“맘에 드는 거 있으면 그냥 불러. 내가 다 사줄게.”윤하경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젯밤 일을 사과하려는 걸까? 오늘따라 이 사람, 지나치게 다정하네.’“알겠어요.”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강현우의 기분을 굳이 망칠 필요는 없었다.“여자 달래는 데 돈 쓰는 게 제일 편하시겠어요. 역시 돈 많은 남자답네요.”강현우는 웃으며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그런 쓸데없는 질투는 그만해.”그 말은 다정하게 들리면서도, 왠지 모르게 선을 긋는 느낌도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이 사람에게 사랑을 바란다는 건 애초에 무리라는 걸 알았다.그는 착각하게 만들 만큼 다정할 뿐, 진심은 절대 내보이지 않는 사람이다.윤하경은 그 어깨에 살짝 기대며 웃었다.“그러게요,
[네.]윤하경은 글자만 툭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오늘따라 강현우가 왜 이렇게 한가하지?’의아한 마음으로 화면을 들여다보자,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어젯밤 수고했어.]“...”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마치 아무것도 못 본 척 내려놨다.한 대 때리고 나서 사탕 하나 쥐여주는 짓은, 강현우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수법이었다.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이 시야에 들어오자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강현우가 정말 박소희랑 약혼하게 된다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답은 하나였다. 이제는 더 이상 이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는 것.그런 고민들 때문에 하루 종일 마음이 복잡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결국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퇴근 시간이 됐다.사무실을 나서는데 어김없이 배경빈이 나타났고 언제나처럼 해맑은 얼굴이었다.“퇴근하세요? 오늘 저녁 시간 있으세요?”윤하경은 단칼에 대답했다.“없어요.”배경빈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요즘 대표님, 기분 안 좋아 보이셔서요.”윤하경은 배경빈이 그저 말 많은 동생처럼 느껴져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그가 또 따라 내려왔다.“그렇게 차갑게 굴지 마시고요. 오늘 괜찮은 파티 하나 있는데 같이 가요. 기분 전환도 할 겸.”하이힐 소리가 주차장 바닥을 울리는 가운데 윤하경은 말없이 걸었다.그러다 고개를 들자, 눈에 익은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검은차 옆에 기대선 남자, 담배를 손에 들고 무심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강현우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낀 채, 윤하경과 배경빈을 보자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윤하경은 곧장 다가가 물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강현우는 낮게, 무심히 말했다.“네 퇴근 기다리러.”차가운 듯 낮게 깔린 목소리였지만 그 안엔 알 수 없는 따뜻함이 섞여 있었다. 만약 그가
전화기 너머에서 한선아는 부드럽게 웃었다.“그래, 잘했어. 소희는 정말 착해. 시간 나면 집에 들러서 나랑 차 한잔하자꾸나.”전화를 끊은 뒤, 한선아는 꺼진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 집사가 조용히 다가와 물뿌리개를 건넸다.“사모님, 소희 아가씨는 솔직히 너무 순하고 단순하신 것 같아요. 윤하경 씨 같은 애한테는 상대도 안 될 텐데요.”속내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이 집사의 말투엔 이미 머리가 나쁘다는 뜻이 묻어 있었다.한선아 역시 그 뜻을 알아차린 듯 조심스럽게 재스민 화분에 물을 주며 가볍게 웃었다.“우리 집안엔 똑똑한 사람 많아. 박소희 같은 애도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말을 멈추고 손에 들고 있던 물뿌리개를 내려놓은 뒤, 가위를 들어 시든 꽃 한 송이를 조용히 자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나름 귀한 구경거리지. 나중에 혹시라도 집안에 싸움이 일어날 일도 없고 조용하게 있어 주기만 하면 더할 나위 없지.”한참 생각하던 한선아는 이 집사를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근데 말이야, 요즘 현우가 해외에 갔다 왔다며? 혹시 그 사람... 다시 데려온 거니?”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가볍게 웃었고 항상 부드럽기만 하던 얼굴이 살짝 굳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사람 좀 붙여봐. 윤하경이야, 그 사람에 비하면 별로 신경 쓸 것도 없어.”한편, 윤하경은 어제 배경빈이 배지훈에게 질질 끌려 나가는 걸 보고 오늘은 안 나오겠거니 했지만 막상 출근해 보니 그는 여전히 회사에 있었다.그것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의 자리에서 앉아 있었다.윤하경은 입술을 다물고 아무 일도 없던 척 그를 지나쳐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의자에 앉기도 전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고개를 들자, 여전히 해맑은 얼굴의 배경빈이 활짝 웃고 있었다.“무슨 일이세요?”그는 손에 뭔가를 감추고 있다가 천천히 책상 앞에 다가와 그걸 내밀었다.“짜잔. 요즘 대표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여서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윤
박소희는 오늘 아침 일찍 전화를 받고 사무실로 찾아왔다.그동안 강현우가 단 한 번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아서 그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원래 외모를 중시하던 그녀는, 정면에 앉아 있는 강현우의 깊고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바라보는 순간, 지난번의 불쾌했던 기억 따위는 다 잊어버렸다.강현우는 손가락 끝으로 턱선을 천천히 훑으며 입을 열었다.“이번 약혼 기사, 박 회장 쪽에서 낸 거지.”강현우의 차가운 말투에 박소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강현우는 원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고 얼굴에 감정 하나 없었으며 목소리 또한 무미건조했다.박소희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그게... 꼭 그렇다기보다는,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두 사람 일이 언젠가는 정리돼야 하잖아. 그래서 아버지랑 상의해서 먼저 언론 쪽에 알린 거야.”강현우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그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어제 기사가 올라왔을 때 자신은 전혀 몰랐다.이건 단순히 박소희 쪽만이 아니라, 사 집안, 아니 어쩌면 아버지까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었다면 자신도 모르게 이런 기사가 나갔을 리 없으니까.박소희는 강현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자,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박소희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나도 알아요. 남자들이야 원래 좀 그런 거잖아. 지금은 나를 안 좋아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알게 될 거야.”박소희는 원래 인형처럼 귀여운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그런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니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였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보았고 박소희는 또다시 용기 내어 말했다.“윤하경을 좋아한다는 거 나도 알아. 그런데 남자 주변에 여자 하나 없는 게 이상한 거지, 누가 뭐라겠어. 나는 괜찮아. 너랑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런 거 아무 상관 없어.”그녀는 자신감 있게 말했지만 입꼬리에 맺힌 억지웃음은 지우지 못했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윤하경은 마침내 조금 겁이 났다.“현우 씨... 지금 뭐 하려는 거예요?”그가 평소에도 제정신 아닌 짓을 할 때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하필 지금 그녀는 어깨에 상처까지 있는 상태였는데 손목에 수갑까지 채워지고 침대 머리맡에 묶여버리니 진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방에는 은은한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다. 노란 불빛 아래, 강현우의 눈빛은 더욱 깊이를 알 수 없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시선에, 온몸이 살짝 떨릴 만큼 진심으로 무서워졌다.강현우가 몸을 숙였고 거칠고도 긴 손끝이 그녀의 입술을 스치더니 가느다란 목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저... 잘못했어요.”윤하경은 눈치 빠르게 바로 항복을 선언했다.하지만 문제는, 이 남자는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거였다.“이제 와서 잘못했다고? 좀 늦은 거 아니야?”그의 말은 평온했지만 뜨거운 숨결이 그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짧지 않다 보니 강현우는 윤하경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가 손을 뻗는 곳마다, 그녀는 마치 어딘가 맥이 끊긴 듯 힘이 빠졌고 금세 거부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돼버렸다.최후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어 그녀는 입술을 꽉 물고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강현우는 어째서인지 그런 부분까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결국, 억눌러온 숨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그럼에도 강현우는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사냥감을 손에 넣고도 당장 삼키지 않는 맹수처럼, 그저 길게, 천천히 그녀를 가지고 놀았고 윤하경은 수치심에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올 정도였다.“제발... 그만 좀 해요...”윤하경의 목소리는 원래도 부드러웠지만 지금은 훨씬 더 유혹적이었다.울음이 섞인 듯한 떨림은 듣는 사람의 신경을 단단히 자극할 만큼 말이다.강현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뭘 그만 해?”“...”윤하경은 말없이 그를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제 위치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어요.”윤하경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입꼬리에 맺힌 쓴웃음은 감추기 어려웠다.아무리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든, 그런 씁쓸한 미소였다.“강 대표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다면 이제 약혼하실 거라면 저도 그만 놓아주세요. 이쯤에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끝내죠.”그 말은 단호했고 동시에 진심이었다.이 얼마간 강현우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시선 하나에도 반응하는 자신을 느꼈다.강현우 같은 남자는, 어느 여자라도 쉽게 마음을 지키기 어려운 사람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항상 자신을 단속하며 살아왔다.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자신과 강현우는 애초에 시작조차 허락되지 않은 사이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가 약혼을 앞두고 있다면 더는 이 관계를 이어갈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오히려 지금이, 서로에게 가장 덜 상처 줄 수 있는 시점이었다.자신이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 강현우의 눈빛이 얼마나 짙게 가라앉았는지 윤하경은 몰랐다.“정리하고 끝내자고?”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고 아까까지 가라앉았던 냉기가, 다시금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방 안의 어둑한 조명 아래, 윤하경은 그 말투에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애써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네, 정리하고 끝내요.”말끝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강현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밀쳤다. 그녀는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고 몸이 이불에 파묻히기도 전, 강현우는 그대로 그녀 위로 몸을 덮쳤다.그의 숨결은 뜨겁고도 날카로웠고 숨 쉴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윤하경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강현우는 양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머리 위로 고정해 버렸다.입고 있던 얇은 재킷은 흘러내렸고 속의 슬립 원피스는 그녀의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그녀 입장에서 바라본 강현우의 얼굴은 위압적일 만큼 가까웠고 그 상황 자체가 모욕적이었다.윤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윤하경은 끝까지 강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강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갑자기 액셀을 밟자 차가 순간적으로 속도를 올리며 쏜살같이 도로를 질주했다.윤하경은 강현우가 일부러 이러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손으로 안전벨트를 꼭 쥐었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입술은 다문 채였다.한참을 그렇게 달린 후에야 강현우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고 차는 결국 그들의 집 강현우의 별장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강현우는 먼저 내렸다가, 따라오지 않는 윤하경을 돌아봤다.그 눈빛이 꽤 날카로워서 윤하경은 움찔했지만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오늘 밤은 제집으로 돌아갈 예요.”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다물며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말끝이 어쩐지 자신 없어졌다.왜 이렇게 말하는 게 미안한 느낌이 드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강현우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하루 안 본 사이에 말이 좀 세졌네?”그러더니 성큼 다가와 그녀를 차 문에 가둬 세웠고 차가운 눈빛이 바로 코앞에서 쏟아져 내렸다.그의 존재감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숨이 막히도록 강했고 윤하경은 자연스레 뒤로 물러섰다.“아니에요. 그냥... 너무 오래 신세를 졌으니까요. 폐 끼치기도 했고...”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현우가 그녀의 턱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고 표정이 냉랭하게 바뀌었다.“윤하경,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 지금 무슨 일인데 이렇게 피하는 건데.”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 말에, 윤하경의 속이 울컥해졌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한가득인데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전부 무너질 것 같았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그녀의 거짓말에 강현우의 눈빛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그는 원래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이었다.“그래, 말을 안 하겠다면 몸으로 말하게 해야겠네.”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우는 몸을 낮춰 윤하경을 번쩍 들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