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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숲속의사슴
유민자가 허둥지둥 방에서 뛰쳐나오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지진이에요? 지금 지진 난 거예요?”

장순영은 자지러지게 우는 아기를 안고 있다가, 요란한 소리에 놀라 맨발로 가방부터 움켜쥐고 현관 쪽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심지어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었다.

유민자와 장순영이 거실로 뛰어들었을 때, 두 사람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늘 차분하고 이성적이던 시유가 미친 사람처럼, 한때 그토록 아끼던 장식품들을 하나씩 바닥에 내던지고 있었다.

유민자는 다급히 시유에게 달려가 말렸다.

“사모님, 그만하세요! 제발 그만하세요! 무슨 일이든 차분히 말로 하셔야죠, 사모님!”

장순영은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아기를 흔들어 달래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얼른 멈추세요. 아기가 너무 놀랐어요!”

아기의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가 귀에 꽂히자, 시유는 온몸의 힘이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시유는 손에 들고 있던 청자 화병을 내려놓고 앞으로 다가가, 아기를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아기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울고 있었고, 작은 두 주먹은 꽉 쥐어져 있었다.

장순영이 가까이 다가와 다급하게 재촉했다.

“아마 배고픈 것 같아요. 제가 분유를 타 봤는데 젖병은 입에도 안 대요. 모유만 찾는 것 같아요. 사모님, 얼른 수유하셔야 할 것 같아요.”

시유는 거의 망설이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윗옷 자락을 올리려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시유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멈칫했다.

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여준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시선과 마주쳤다.

여준은 지난 몇 년 동안 시유의 빈틈없는 모습만 보아 왔다.

일할 때의 시유는 늘 단정했고, 화장은 정교했으며, 판단은 빠르고 행동은 거침없었다.

그런 여준이 시유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서 옷을 걷어 올리고 젖을 물리려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리 없었다.

이 자리에서 여준은 물론이고, 시유 자신도 견디기 힘든 수치심을 느꼈다.

하지만 아이의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시유는 더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여준에게 등을 돌린 뒤 윗옷 자락을 올리고, 아기의 작은 얼굴을 조심스럽게 가슴 쪽으로 붙였다.

공기는 금세 조용해졌다.

아기가 젖을 빠는 소리만 작게 이어졌다.

여준은 그 자리에 선 채, 수유하는 시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복잡했고,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민자는 말없이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장순영은 시유 가까이 다가와 수유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이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아기 모유 먹이겠다고 젖몸살 통증도 다 참으시고, 보름 넘게 마사지받고 유축하면서 겨우 젖 돌게 하셨잖아요.”

“아기가 모유 먹기 시작한 뒤로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어요. 보세요, 볼이 이렇게 통통해졌잖아요.”

“...”

시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속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런데도 귀는 자신도 모르게 뒤쪽으로 기울어졌다.

마음속은 실망으로 가득한데도, 등 뒤에서 작은 움직임이라도 들려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뒤, 마침내 뒤에서 아주 가볍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여준은 시유 앞까지 걸어왔다. 먼저 시유를 한 번 바라본 뒤, 시유 품 안에서 힘껏 젖을 빨고 있는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아기가 젖을 놓자, 시유는 서둘러 옷 앞섶을 여몄다.

여준은 몸을 낮췄다. 거의 무의식에 가깝게, 조심스러운 손길로 시유에게서 아기를 받아 안았다.

“아가, 아빠야. 우리 이제야 만났네.”

여준은 품에 안긴 아기를 깊이 내려다보았다. 늘 차갑고 딱딱하던 얼굴에 보기 드문 부드러움이 번졌다.

“대표님, 다들 아기가 대표님 닮았다고 하세요. 정말 붕어빵이에요.”

장순영이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여준이 고개를 들었을 때, 눈매에는 웃음이 어려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아기를 조금 더 품에 끌어안았다.

시유는 서로 닮은 아빠와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어 코끝이 시큰해졌다.

여준이 아이를 바라보는 눈에는 빛이 있었다.

시유의 팽팽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아주 조금 풀렸다. 분노도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바로 그때, 날카로운 핸드폰 벨 소리가 거실 공기를 찢었다.

여준이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뜬 ‘새나’라는 두 글자가 시유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그러고 나서 재빨리 한쪽으로 걸어가 전화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새나의 다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빠, 리오가 토했어! 너무 많이 토했어! 나 지금 너무 무서운데 어떡해?]

여준의 표정이 굳었다.

“진정해. 내가 바로 갈게.”

여준은 거의 망설임 없이 소파 위에 놓인 코트를 집어 들고 나가려 했다.

그러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걸음을 멈췄다.

“새나는 이제 막 엄마가 돼서 모르는 게 많아. 내가 가서 확인만 하고 바로 올게.”

시유는 말문이 막혔다. 조금 녹았던 마음이 다시 완전히 식어 버렸다.

성큼성큼 집을 나서는 여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유는 지독한 비웃음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여준은 집에 머문 시간은 채 30분도 되지 않았다.

새나의 전화 한 통에 이 남자는 곧장 떠났다.

‘부여준이 그렇게까지 소새나를 챙기는 이유가 정말 친구를 대신해서일까?’

‘아니면 부여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일까?’

장순영은 아기를 안은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사모님, 대표님이 저렇게 그냥 가신 거예요? 방금 누가 이제 막 엄마가 됐다고 하신 거예요? 사모님이야말로 이제 막 엄마가 되신 분인데, 대표님은 정말...”

여준이 시유를 얼마나 외면하고 있는지, 집에서 일하는 사람 눈에도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

유민자는 얼른 장순영에게 눈짓했다. 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시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눈빛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아기 물건 챙겨 주세요. 저도 위층에 올라가서 짐 정리할게요. 이 집에서는 더 안 살아요.”

장순영은 놀라 입을 벌렸고, 유민자 역시 깜짝 놀라 시유를 막아섰다.

“사모님, 이렇게 충동적으로 결정하시면 안 돼요. 대표님이 평소에는 사모님께 잘하셨잖아요. 대표님은... 그냥 너무 바쁘셔서 그런 거예요.”

“사모님 임신하셨을 때 대표님이 곁에 자주 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매주 꽃은 보내셨잖아요. 보세요. 저기 해바라기도 아직 싱싱해요. 오늘 온 거예요.”

해바라기는 시유가 가장 좋아하던 꽃이었다. 늘 위를 향하고, 어떻게든 자라며,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꽃이라서 좋아했다.

하지만 여준은 시유가 임신한 내내 새나를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해 주면서, 시유에게는 해바라기 몇 송이를 보낸 것이 전부였다.

스스로 강해지라는 격려처럼.

시유는 갑자기 그 꽃이 끔찍하게 싫어졌다. 바로 유민자를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당장 버려요. 보기만 해도 역겨워요.”

시유는 더는 화를 누르지 못한 채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유민자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지만, 시유의 말대로 그날 막 도착한 해바라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위층으로 올라간 시유는 망설임 없이 짐을 정리했다.

막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던 때, 핸드폰이 윙윙 울렸다. 절친 윤마리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시유는 감정을 조금 가라앉힌 뒤 전화를 받았다.

“마리야.”

[시유야, 네 남편이 오늘 점심에 딸 한 달 된 거 축하하는 자리 한다고 사람들 엄청 불렀다며. 근데 왜 나는 안 불렀어? 우리 둘 사이가 그렇게 가벼웠냐?]

시유가 말했다.

“내 딸을 위해 연 자리가 아니야. 남의 집 아들 축하 자리였어.”

마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폭발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네 남편 바람났어? 밖에서 아들까지 낳았어?]

시유가 임신부터 출산까지 혼자 꿋꿋이 버텨 왔다는 사실을... 마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리는 오래전부터 여준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일이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지경까지 갔을 줄은 몰랐다.

시유는 입꼬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웃음은 처참할 만큼 쓸쓸했다.

“말로는 사촌 여동생이랑 절친의 아들이래. 강영우, 기억하지? 우리 학교 다닐 때 유명했던 수재. 지금 해외에서 기밀 프로젝트 한다고 못 돌아온대. 부여준은 절친 아들 챙기는 게 당연한 의리라고 생각하나 봐.”

마리는 더 화가 났다.

[설령 그렇다 쳐도 자기 딸은 내팽개치고 남의 아들 일에만 저렇게 매달리는 게 말이 돼? 임신했을 때 나 몰라라 한 것도 모자라, 딸이 태어난 지 한 달 된 지금까지 이래? 너 대체 부여준한테 뭘 기대하고 지금까지 산 거야?]

시유의 눈 밑으로 차가운 기운이 깔렸다. 들끓는 감정을 힘껏 눌렀다.

“만나서 얘기하자. 나 아직 몸이 안 좋아서 운전 못 해. 와서 나랑 아기 좀 데려가 줘. 나 여기서 더 못 살겠어.”

이제 시유에게 이 신혼집은 혐오스러운 공간일 뿐이었다.

벽마다 걸린 지난 5년간 여준과 찍은 사진들은... 시유를 견딜 수 없을 만큼 역겹게 했다.

시유는 사진들을 모조리 뜯어냈다. 그리고 가위로 잘게 잘라 버렸다.

이어 망치를 찾아와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유리장을 깨뜨렸다.

여준이 선물했던, 애초에 시유의 취향과는 전혀 맞지 않았던 가방들도 하나씩 가위로 찢었다.

시유는 모든 ‘쓰레기’를 상자에 담아 마당으로 끌고 나갔다.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이곳에 있는 물건은 단 하나도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 시유가 원하는 건 파괴뿐이었다. 전부 부숴 없애고 싶었다.

거센 불길이 검은 연기를 감싸고 위로 치솟았다.

탄내가 사방으로 퍼지자, 이웃들이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집에 불이 난 줄 알고 놀란 사람들도 있었다.

유민자와 장순영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유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세에 눌려, 감히 앞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유민자는 몰래 화장실로 들어가 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세 번을 걸어도 여준은 받지 않았다.

...

마리가 차를 몰고 도착했을 때, 시유는 얇은 잠옷만 걸친 채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

불빛은 여자의 창백하고 차가운 얼굴 위로 어른거렸다.

마리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곧장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시유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미쳤어? 아직 산후조리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몸도 찬데 외투도 안 입고 여기 서 있다가 산후풍이라도 오면 어떡해! 네 남자는 그렇다 쳐도,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눈이 없어?”

마리는 욕하듯 말하면서도 시유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고 나서 시유의 손에서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

마리의 품에서 따뜻함이 느껴지자, 시유의 긴장이 풀렸다.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리며 의식이 멀어졌다.

“시유야, 임시유!”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눈꺼풀은 너무 무거웠고, 시유는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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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준은 의자에 축 늘어져 앉아 손가락으로 미간을 세게 눌렀다.속에서 밀려오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있을 때였다.노크 소리와 함께 유란이 사무실로 들어왔다.또각또각 울리는 하이힐 소리에는 평소처럼 단호한 기세가 묻어 있었다.“여준아, 어제 찬훈이 서명받으려고 가져온 서류들 어디 있어? 내가 다시 한번 확인해 볼게.”여준은 맨 위에 놓인 서류 한 부만 빼고 나머지를 건넸다.유란은 여준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너 왜 그래? 괜찮아?”여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간 듯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괜찮아. 누나, 나 시유랑 이혼하기로 했어.”“빛나 양육권도 시유한테 넘길 거야. 시유가 요구한 것도 다 주려고.”여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그래도 5년이나 나랑 살았는데 제대로 된 결혼식 하나 못 해 줬잖아. 내가 시유한테 미안한 게 많아.”유란은 잠시 굳었다가 단호하게 말했다.“시유한테 보상해 주는 건 좋아. 무리한 요구만 아니면 나도 찬성이야. 그런데 빛나까지 포기하면 어떡해?”“여준아, 네 첫아이잖아. 엄마 아빠처럼 아들만 귀하다고 생각하지 마. 요즘 세상에 아들이든 딸이든 다 똑같이 소중한 자식이야.”여준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깊은 눈에는 오랜 불면과 마음고생으로 인한 피로가 짙게 배어 있었다.“누나, 시유는 빛나를 정말 사랑해. 절대 나한테 안 줄 거야.”“이렇게 오래 끌고 오니까 나도 너무 지쳤어. 이제는 그냥 다 끝내고 싶어.”여준이 고개를 숙였다.“나가 줘. 혼자 있고 싶어.”유란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을 다물었다.동생이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결국 두 사람의 문제였다.아무리 가족이라도 끼어들 수 없는 일이었다.유란은 서류를 들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그리고 서류를 하나씩 꺼내 꼼꼼히 확인하기 시작했다....점심을 먹은 뒤 시유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 모습을 본

  •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제245화

    오랫동안 팽팽하게 이어지던 줄다리기가 마침내 끝난 것 같았다.서로 지칠 대로 지친 순간, 상대가 갑자기 잡고 있던 줄을 놓아 버렸다.그런데 시유가 느낀 건 후련함이 아니었다.오히려 온몸의 힘이 한순간에 빠져나가는 듯한 허탈함이 밀려왔다.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마음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 버렸다.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던 시유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그래.]태양파크 거실에는 여준이 혼자 앉아 있었다.앞에 놓인 와인병은 이미 비어 있었고, 잔에는 아직 술이 반쯤 남아 있었다.창문을 활짝 열어 둔 탓에 늦가을 찬바람이 거실 안으로 거세게 밀려들었다.온몸이 서늘했지만 가슴속 답답함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여준은 핸드폰 자판에 몇 번이나 문장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손에 너무 힘을 준 탓에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고 나서야 겨우 두 줄의 메시지를 보냈다.시유가 후련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아니면 화를 내며 몇 마디 쏟아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돌아온 건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짧은 한마디뿐이었다.[그래.]마음이 완전히 떠나고 나면 이렇게 되는 걸까?싸우는 것조차 의미가 없었다.남은 건 적막뿐이었다.여준은 그 한마디를 뚫어져라 바라봤다.눈이 따끔거렸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시야가 흐려졌다.그는 소파에 굳은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이혼 합의서가 바람에 날려 바닥으로 떨어졌다.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텅 빈 거실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차갑게 나열된 조항들이 두 사람이 함께한 지난 5년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여준은 눈가가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결국 허리를 숙여 서류를 주웠다.사실 합의서 내용은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았다.앞부분에 적힌 재산 분할 조항 몇 줄만 훑어봤을 뿐인데도 가슴을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여준은 서명란에 멍하니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서명을 마친 합의서는 서류봉투에

  •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제5화

    “환자분은 출산 후 체력 소모가 심한 상태입니다. 이전에 대량 출혈로 응급 처치까지 받으셨고요.”“이런 상태에서는 저혈당으로 쓰러지기 쉽습니다. 영양 보충 꼭 잘 하셔야 하고,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리는 일도 피하셔야 합니다.”검사가 끝난 뒤에도 시유는 병실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의사는 병실 안에서 마리에게 시유의 상태를 차분히 설명했다.장순영이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사모님은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 하셨어요. 첫 보름은 젖몸살이 너무 심해서 음식도 마음대로 못 드셨고, 그 다음엔 아기가 소화를 잘 못 시켜서 밤마

  •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제7화

    여준은 난장판이 된 거실을 바라보다가, 힘이 빠진 사람처럼 소파에 주저앉았다.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깊게 한 모금 빨아들였지만, 답답하게 막힌 가슴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이모님, 제가 아내한테 그렇게 못했습니까? 시유가 이렇게까지 화낼 일입니까?”유민자는 바닥에 흩어진 파편을 쓸어 담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이 사모님께 못하신 건 아니에요. 두 분 결혼하고 5년 동안 큰소리 한 번 오가는 걸 못 봤으니까요.”“다만 여자가 아이를 낳고 나면 마음이 많이 흔들릴 수 있어요. 산후 우울감도 올 수 있고요. 이럴 때일수록

  •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제6화

    마리는 시유가 더 상처받을까 봐, 여준이 메시지조차 확인하지 않았다는 말은 끝내 꺼내지 않았다.시유가 퇴원하는 날까지도 여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퇴원 후, 시유와 마리는 젖먹이 빛나와 장순영을 데리고 시유가 반년 전 ‘태양파크’ 아파트단지에 사 둔 집으로 들어갔다.마리의 집은 바로 맞은편이었다. 서로 마주 보는 앞집에 살자는 건 대학 시절부터 두 사람이 농담처럼, 하지만 진심으로 꿈꿔 왔던 일이었다.그래서 반년 전 마리의 맞은편 집이 매물로 나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시유는 망설임 없이 그 집을 계약했다.집에는 기본 가

  •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제3화

    시유는 액셀을 깊게 밟아, 두 사람의 신혼집이 있는 단독주택 단지 ‘그림빌’로 차를 몰았다.현관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이 집에서 오래 일한 가사도우미 유민자와 시유가 따로 고용한 시터 장순영이 아이를 어르고 있었다.시유의 새하얗게 질린 낯을 본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사모님, 어디 편찮으세요?”시유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괜찮아요. 배가 좀 고파서요. 따뜻하게 닭칼국수 한 그릇만 해 주세요.”장순영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든 시유의 복잡하게 뒤엉킨 마음은, 보드랍고 발그레한 아기 얼굴을 보자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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