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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향鐵響 三十一

Author: 김굉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3 17:00:00

어머니를 망가지게 만든 것은 결국 나다. 그런 나를 지우지 못해 어머니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숙부님을 증오했다.

결국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을 보고 모든 걸 쏟아내어버린 어머니는 그대로 허물어지듯 이승을 등졌다. 현덕은 메마른 나뭇가지 같은 어머니가 서리 내린 쇳덩이같이 될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안고 있었다. 제 죄를 속죄하듯 꽉 붙잡고 있었다. 자신을 품고 있었던 기간까지 스물여덟 해를 그리 원망하고 사셨을 어머니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남지 않아서, 이렇게 될 때까지 무지했던 죄가 너무 커서 짓눌리듯 안겨 있었다.

눈을 뜨고 있음에도, 눈에 맺히는 형상이 분명히 있음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에게서 항상 나던 말리화의 희부연 향이 얼어붙고 진득한 시취가 코를 찌르며 눌러붙었다. 차가움이 지겨워진 손은 뜨거움을 갈구하며 스스로 열을 내기 시작했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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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향   철향鐵響 五十二

    매령은 큰 눈을 끔벅이다 동그랗게 떴다. 나를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저런 말을 하실까. 지금 살면서 가장 심란한 상태라는 걸 알고 저러시는 걸까. 그래도 답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간단히 겸양만 표한다. “저를 이리 좋게 봐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 고향에서 제다한 차이지만, 저는 어찌 만드는지조차 모르옵니다. 저도 그저 즐기는 입장인 것이지요.” 역시 이연이 사랑할 여인은 이쪽이 좋겠다. 은령은 싱긋 웃으며 차를 마저 들었고, 매령과 민하도 찻잔을 들었다. 야멸찬 봄볕이 짙어짐에 따라 향이 농익고 차맛은 스러져갔다. 목이 충분히 적셔지니 목소리가 수월히 나오기 시작한다. ”여긴 사냥터가 없는가. 계속 궁에만 있으려니 찌뿌드드하군.” “사냥을 직접 나가십니까?” 유독 맑고 큰 눈이 질문에 숨겨진 속뜻 같은 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은령은 그런 매령을 사랑스럽다는듯 바라보며 답했다. ”사냥매도 다루고 말도 타고 활도 쏘지. 우 소저는 무예를 익히지 않았는가? 아까운 신체인데.” 키가 크고 뼈대가 곧다. 찻잔을 잡는 사소한 움직임에서도 유연함이 돋보인다. 안타깝게도 여인들은 타고난 재능을 발견조차 하지 못하고 버려버리기 일쑤다. 은령은 전장을 누비던 귀비에게서 승마를 배웠다. 탄력이 넘치는 귀비의 몸과 매령의 모습은 비슷해 보인다. 아마 매령이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도 꽤나 근사하리라. “무예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호위로 함께 온 강 공자에게서 호신술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춤을 즐깁니다.” ”설마 춤을 직접 추신다는건 아니겠지요?” 조심스럽게 다가온 목소리지만 내용은 전혀 조심스럽지 않다. 은령은 저도 모르게 민하를 흘겨보았다. “아, 손 소저. 저는 가무를 보고 듣는 것도 즐기지만,

  • 철향   철향鐵響 五十一

    환관들이 무거운 물동이와 화로를 가져와 불을 피우고 솥에 물을 부어 끓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궁녀들이 찻상을 차리고 커다란 병합 세 개를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둥근 접시처럼 보이는 보이차가 들어있다. 매령은 익숙한 형태의 병합을 보고 지금 이 자리가 나를 내보이기 위한 자리임을 눈치챘다. 운남에서부터 가져온 공물이다. 탁자마다 자리를 잡은 궁녀들이 보이차를 해괴(쪼개기)하기 시작했다. 매령은 그들을 신중히 살펴보았다. “그렇게 잡으시면 손 다치십니다.” 매령이 가까운 궁녀에게 다가가 조곤조곤 말을 걸며 손바닥을 내밀어보였다. 궁녀는 조금 망설이다 매령의 손에 송곳의 손잡이를 넘겨주었고, 매령은 안심시키듯 살짝 웃어보이며 송곳을 바로 쥐었다. 검지로 위를 잘 지지하며 찻잎의 틈을 찾아 깊게 찔러넣었다. 은령은 그걸 보며 신체에 틈을 만들며 칼을 쑤셔박는 상상을 했다. 뭐든 처음이 어렵다 했던가. 베는 건 해봤으니 다음은 찌르는 것이 좋겠다. -엇, 은령이 왔니? 마침 너 좋아하는 황어 부레가 남아있어!- 은령은 미간을 찌푸리며 슬쩍 눈을 감았다. 요즘 불현듯 떠올랐다 사라지는 환청이다. 머리를 괴는 척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다른 궁녀들이 매령이 하는 모습을 보며 따라한다. 매령은 그것을 죽 둘러보고 궁녀에게 다시 송곳을 내밀었다. “흐음.” 매령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민하가 자신이 데려온 궁녀에게 귓말을 하였다. 그 궁녀는 품에서 작은 함을 꺼내 열었다. 궁녀의 손이 황동 향받침을 꺼내고 길고 가는 향을 하나 꺼낸 뒤 촛불을 당겨 불을 붙이려 하자 민하가 손을 들어 막았다. 민하는 보시시 미소를 지으며 은령과 매령을 향해 한껏 나긋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번에 려에서 좋은 향이 들어왔습니다. 오늘 다과자리에 어울릴듯하여

  • 철향   철향鐵響 五十

    그 전에 현장을 목격한 또다른 인물인 강현의 입을 막아야했다. “너희들도 이 일에 대해선 함구하라.” 소우 장군은 앞에 서있는 강현이 아니라 담장 그늘에 숨은 도라를 향해 말했다. 질문은 도라가 아닌 강현에게서 나왔다. “어찌 아셨습니까?” 강현은 뒤따라오는 도라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었으나 어둠 속에 묻힌 모습은 감쪽같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부러 소우 장군 앞에서도 아는 체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질문으로 강현도 도라의 은신을 눈치채고 있었다는 것을 은근히 드러냈다. “나도 비류족이다. 부마님만큼은 아니지만 밤에도 어느 정도 보이는 편이지.” 밤눈이 어두운 강현으로서는 참으로 탐나는 능력이다. 무인으로서 그리고 금군으로서 이만한 강점이 또 있을까. 도라는 한숨을 쉬며 두건을 벗고 밝은 곳으로 나왔다. 금군 중에서도 대장군을 만만히 보고 대들어서는 안 된다. 소우의 앞으로 와 고개를 조아렸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소우 장군은 도라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강현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넌 어째서 여기까지 온 것이지?” 소우 장군도 자신의 능력에 대해 밝혔는데, 굳이 비밀로 할 건 아니다. 어차피 금군이 되면 밝혀야 할 것이다. 강현은 솔직히 답했다. “소리를 듣고 왔습니다. 단 한 합이었지만, 분명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였습니다. 궁에서 이 시간에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라 판단하였기에 소리의 근원을 찾아 달려온 것입니다.” “하, 네가 묵고 있는 곳은 목련궁이지. 후궁의 서편에 해당하는 곳이고, 여기는 후궁의 동쪽 끝이다. 지금 그걸 믿으라는 건가?” 강현은 눈 앞에 바위처럼 서있는 소우 장군보다 옆에서 눈을 반짝이며

  • 철향   철향鐵響 四十九

    장문인은 다시 차를 우리며 말을 풀어냈다. “국사는 곤륜파지요? 곤륜산은 도가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불교의 성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불교가 국교인 월국에 속했던 점창파도 진법을 구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창파 도사들은 병법에도 능하다 하지요.” “그렇다면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군요.” “저희는 오갈 곳 없는 아이 하나라고 소홀히 여기는 파렴치들이 아닙니다. 소중히 키운 아이입니다.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주고자 했습니다. 다만 서툴렀을 뿐이지요. 너무 아끼다 시기를 놓쳐버렸고요.” 물이 조금 식어 연하게 우러난 차가 앞에 놓이고, 현덕은 그것이 꼭 애매하게 존재하는 나 자신처럼 느껴져 한입에 털어넣었다. 밍밍하고 비리다. 비싼 바탕을 지녀도 제대로 취급하지 않으면 이렇게 형편없이 존재하다 사라지는 것이다. 백현이라는 도사는 글, 약학, 무공을 지율에게 가르쳐보려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거문고를 가르치는데 성공하셨다. 어머니는 나라는 아들을 실패하고 지율이라는 제자를 훌륭히 키우셨다. 어머니를 떠올리자마자 씁쓸해졌다. “그러다 어머니께서 지율의 재능을 찾아내셨군요.” “마마님이 보시기에 금객으로서 지율이의 실력은 어느 정도인 것 같습니까?” “저도 잘 모릅니다. 궁은 음악을 유흥으로 즐기는 환경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 귀에는 듣기 좋았습니다.” “궁정악사로는 모자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목적이군요.” 장문인은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빈 찻잔을 거둬갔다. 다구를 정리하는 손놀림이 춤사위같아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반주삼아 장문인의 설명이 이어진다.

  • 철향   철향鐵響 四十八

    사실 추종향은 필요없다. 나부터도 자호란의 매향은 기억하고 있고, 자호란의 귀동이었던 기탁은 더 잘 알 것이다. 한 사람을 기억하는데 가장 잊히지 않는 것이 향기라고 했던가. “장문인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알겠습니다. 제가 하려는 일에 추종향은 필요가 없군요. 저희가 아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니 추적술만 배우면 될 뿐, 도사를 쓰는 것이 낭비나 다름없는 일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이런 어찌 그리 서운하게 말씀하십니까. 제 나름대로 하나라도 더 알려드리려 구상해본 것입니다. 도문의 지식이 그리 쉽게 나갈 수는 없지요.” “그럼 약도 어렵겠습니까?” 장기간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건 아플 때 치료가 녹록치 않은 것이라고 했다. 항상 의원이 있는 도시만 다닐 수도 없다. 산 속에서 아니면 사막 한가운데서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기탁은 맡아본 적 없지만, 타국으로 나가는 임무를 맡은 금군에게는 도사를 붙여주거나 도관 출신의 금군을 보낸다고 했다. ”약은 넉넉히 드릴 수 있습니다만, 약도 보관이 잘되지 않으면 금방 상해버립니다. 약학은 방대하기도 하고 지역에 따라 약초도 달라져, 수준이 높은 의약방 도사라도 타국에서 약을 지어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럴바에는 구급법을 조금 배워가심이 좋을 테지요. 기탁 공자께서 손끝이 야무지시더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두 분 모두 배워두심이 옳습니다. 어디서 누가 다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나이에 비해 경험과 배움이 부족한 것도 안다. 그러나 궁에서 나오자마자 속세에서 벗어난 곳에 또다시 박혀있으려니 거부감이 올라오는 것도 사실이다. “친절은 감사하오나, 저와 기탁은 도문에 적을 올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민폐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리 절학을 알려주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향낭 하나 만들고 부목 대

  • 철향   철향鐵響 四十七

    꽃은 다 떨어지고 잎이 무성한 매화밭을 지나간다. 동글동글 맺힌 매실들이 귀엽다. “현판 아래 지율이 놓여있었을 때, 다들 일단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지율을 맡게 된 세 명의 도사 중 한 명이 저였습니다. 염소젖을 구해 먹이는 것이 제 담당이었습니다. 험한 곳이지만 아기가 버려져 있는 경우도 간혹 있어, 의약방에서는 아기 키우는 법도 익힙니다.” 마침 의약방 근처를 지나가니, 알싸하고 짙은 약재의 향이 진득히 흘러나온다. ”이름은 화산에서 지었습니까?” “아닙니다. 강보에 적혀있었습니다.” 보지 못하는 아이에게 지어 줄만한 이름이 아니다. 문관이나 법관에게 어울릴법한 이름이다. 길을 막으며 기단이 띄워진 거대한 건물이 떡하니 나타난다. 책과 그림들이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바닥을 지면에서 조금 띄워 지은 서고이다. 이 건물 뒤에 장문인의 거처가 있다. ”글은 익혔습니까?” “지율 말씀이십니까?” 이제는 나란히 걷고 있어 옆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아니요. 불가능했습니다. 획수가 조금만 많아져도 다른 사람이 알아보게 쓰는 것이 어렵더군요. 붓의 먹물을 조절하는 것도 보아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작은 초가집이 장문인의 처소이다. 방 한 칸 마루 한 칸의 작은 공간. 지율의 암자보다도 작다. 그 중 마루에는 먼저 온 기탁이 앉아있다. “그럼 어느 정도 답이 되셨길 바랍니다.” 백현은 현덕에게 인사하고 물러났다. 지난 번 장문인의 처소에 들렀을 때, 지율의 존재에 대해 여쭈었다. ”한 사람에 대해 정신 오락가락하는 노친네가 말하는 걸로 어찌 다 아시겠습니까. 먼저 본인을 직접 대면해 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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