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여진은 몇 번의 심호흡 후에야 겨우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다. 파르르 손끝이 떨렸지만 피곤함에 찌든 진시우의 목소리를 떠올린 민여진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만약 임재윤이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그 역시 어떻게든 진시우를 도우려고 했을 것이다.“그래. 지금 바로 동진으로 가는 항공권 예약할게. 같이 가.”몸을 돌려 문을 여는 박진성을 민여진이 불러세웠다.“잠깐만.”민여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나도 조건 있어.”박진성이 차가운 눈빛으로 민여진을 쳐다보았다.“조건은 지난번과 같아.”“널 안지 않는 거?”박진성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얘기할 줄은 몰랐던 민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하지만 곧 비웃는 박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제 그 상황에서도 결국 널 건드리지 않았는데 뭘 걱정해. 넌 나한테 특별한 매력이 있는 여자는 아냐.”수치스러움에 얼굴을 붉힌 민여진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약속한 건 꼭 지켜.”대답이 없던 박진성은 잠시 후 민여진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가자.”민여진의 손을 잡고 호텔을 나선 박진성은 차에 몸을 싣고 공항으로 향했다.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약방으로 향하는 박진성의 모습에 민여진은 그제야 뭔가를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당신 아픈 거...”그러자 박진성이 냉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안 죽어. 그러니까 그런 가식적인 걱정은 넣어둬.”마치 민여진의 한 마디가 그의 분노에 불을 지피기라도 한 듯 박진성의 말투에는 원망이 잔뜩 섞여 있었다.박진성이 갑자기 괜한 화를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 민여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비행기에 탑승한 박진성은 곧바로 잠이 들었다. 가끔 기침하던 박진성의 쿨럭이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자 민여진은 뜨거운 물 한 잔을 스튜어디스에게 부탁했다.“진성 씨, 일어나서 물 마시고 다시 자. 따뜻한 물이라 목이 조금은 덜 아플 거야.”지끈거리는 머리를 뒤로 한 채 눈을 뜬 박진성이 곧 다시 눈을 감으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아프
박진성이 화제를 바꾸며 진시우에게 물었다.“동진에서 무슨 일 있었어? 여진이 말로는 나한테 부탁할 일이 있다고 했다며.”동진에서 있었던 일을 박진성에게 얘기한 진시우가 말을 이었다.“네가 날 도와줘야 할 것 같아. 그 모녀에게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난 언제나 눈엣가시였어. 이번엔 어떤 수를 써서든 날 쳐내려고 할 거야. 진성아, 난 후계자 자리를 잃을 수 없어.”다정한 말투를 가진 진시우는 말도 늘 예쁘게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얼음처럼 차갑게 날카로운 말을 뱉어냈다. 진시우가 이번만큼은 독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갈 테니까.”진시우는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난 일단 좀 자야겠어. 하루 종일 얘기하느라 한숨도 못 잤거든.”“그래.”통화를 끝낸 박진성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미 민여진과 이혼을 진행하기로 약속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바로 민여진과의 이혼 절차를 밟는다면 진시우의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잠시 생각하던 박진성이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침대에 앉아 있던 민여진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두 손을 꼭 잡은 채 물었다. “얘기 끝났어?”긴장한 민여진의 모습을 보며 박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어떻게 됐어?”민여진은 애써 불안함을 지우며 물었다.“시우 씨 도와줄 거야?”“시간 없어.”지그시 민여진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며 박진성이 대답했다.“처리하기 곤란한 일이기도 하지만 일단 너와 이혼부터 해야 하잖아. 진시우 부탁을 들어주면 최소한 이틀 정도는 시간이 지체될 텐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잖아. 아니면...”박진성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아니면 네가 진시우를 위해서 나와 이혼할 기회를 희생할래?”그 말에 민여진은 그만 멍해졌다.박진성이 이혼을 동의하기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을 견뎌왔는지, 그가 얼마나 변덕이 많은 사람인지 민여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박진성이 또다시 후회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이
민여진이 말했다.“괜찮아요. 깨어나면 저희가 알아서 갈게요.”“네.”직원이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민여진이 젖은 옷을 가지고 나와 건조를 부탁했다. 잠시 후, 직원이 건조를 마친 옷을 갖고 돌아오자 민여진이 욕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욕실에서 나오자 소파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박진성이 마른기침을 하며 잠에서 깨어났다.민여진이 말했다.“테이블 위에 약과 따뜻한 물이 있어. 마른 옷은 침대에 있고.”박진성은 잠시 호흡을 고르고 나서야 서서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고마워.”먼저 옷을 갈아입은 박진성이 약을 삼켰다. 분명 쓴 약이었지만 얼굴도 찡그리지 않은 그가 입을 열었다.“오늘 나랑 양성에 잠깐 다녀와.”그 말에 민여진이 고개를 들어 박진성을 빤히 쳐다보았다.“왜?”물을 한 모금 마신 박진성이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이혼할 거라며? 돌아가서 서류도 준비해야지.”예상치 못한 말에 민여진이 멍해졌다.잠에서 깨어난 박진성이 처음으로 한 일이 민여진과의 이혼 준비라니, 믿어지지 않았다.민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같이 가.”“응.”박진성이 차키를 꺼내며 말했다.“바로 출발해.”“잠깐만.”민여진이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당신이 자고 있을 때 시우 씨가 전화했었어. 할 얘기가 있다고 하던데, 먼저 전화해 봐.”진시우가 전화했었다는 말에 박진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민여진의 표정을 빤히 쳐다보던 박진성은 멀쩡한 민여진의 모습에 그제야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진시우가 왜.”짜증이 가득한 태도에 민여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자세한 건 묻진 않았는데 중요한 일인 것 같았어. 일단 시우 씨에게 전화부터 해 봐.”민여진을 바라보던 박진성이 전화를 꺼내 진시우에게 전화를 걸며 문을 열었다.곧 전화를 받은 상대방이 피곤함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여보세요?”박진성이 말했다.“나야.”박진성의 목소리에 그제야 긴장의 끈을 놓은 진시우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덮고 있던 이불을 젖힌 진시우가 창밖의
“제가 예전처럼 진성이라고 부른 건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어쨌든 부탁하는 쪽은 저니까요. 나쁜 태도로 다가갈 수는 없잖아요.”“여진 씨도 기억하죠? 제가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 물었잖아요. 아직도 저한테 화가 난 거냐고요.”“그건 제가 박진성의 성격 때문에 절교를 선언하고 나서 갈등이 심해져도 묵묵부답으로 대응했던 탓에 박진성이 절 많이 원망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어요. 절 도와주고 싶지 않아서 전화를 끊은 건 줄 알았거든요.”민여진은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진시우가 그 말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만약 박진성과 진시우가 여전히 친구로 지내고 있다면 그 질문 자체가 두 사람의 관계와는 모순되는 것이었다.일그러졌던 민여진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풀어졌다. 민여진이 입술을 꾹 깨물며 물었다.“진짜 무슨 일 생긴 거예요?”“네.”“해결하기 힘든 일이에요?”민여진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박진성에게까지 전화를 한 걸 보면 간단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잠시 침묵하던 진시우가 말했다.“동진에 도착한 다음 날, 형수님이 갑자기 몰래 절 찾아오셨어요. 절 상대하기 위해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마침 큰형이 찾아와서 자세한 건 물을 수가 없었어요.”“그렇군요.”미간을 찌푸린 민여진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진시우와 그의 형수는 복잡한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피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피하는 편이 서로를 위해 좋았다.“하지만.”진시우가 말을 이었다.“저에게 조심하라고 얘기를 하는 걸 보면 파티에서 꽤 큰 문제를 일으키겠다는 얘기겠죠. 그래서 저는 문제가 생기면 저 대신 나서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러면서도 큰형의 눈에 나지 않을 그런 사람이 말이에요.”“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사람이 박진성밖에 없더라고요.”“재윤이는요?”민여진이 물었다.“재윤이가 도와줄 수는 없어요?”진시우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재윤이는 아직 해외에
그 순간, 민여진은 온몸이 차가운 물 속에 풍덩 빠진 것만 같았다.수화기 너머로 여전히 목소리가 들려왔다.“박진성? 내 말 듣고 있어?”늘 그렇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는 상대방에 의아함이 가득 묻은 말투였다.민여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고 두 눈은 빨갛게 달아올랐다.진시우...진시우의 목소리였다. 처음엔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지만 두 번째는 확신할 수 있었다.머리가 새하얗게 된 민여진은 휴대폰 화면을 잘못 누른 탓인지 전화가 끊어졌다.에어컨을 크게 튼 탓에 주변의 공기를 뜨거웠지만 민여진은 으스스 몸을 떨었다. 심지어 이도 덜덜 떨렸다.바닥에 주저앉은 민여진은 머리가 어지럽게 울렸다.‘어떻게 된 거지?’‘진성 씨와는 진작 연락을 끊었다고 하지 않았었나?’‘이제 두 사람은 남보다도 못한 사이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왜 진성 씨에게 전화한 거지? 심지어 왜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는 거야.’박진성이 아픈 탓에 민여진이 진시우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녀는 평생 감쪽같이 속았을 것이다.하지만 민여진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진시우는 왜 박진성과 사이가 나쁘다고 그녀를 속이고 또 몰래 박진성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일까...의아함과 불안함에 잠겨 있던 그때, 휴대폰이 또다시 울렸다.깜짝 놀란 민여진이 벨 소리가 울리는 휴대폰을 놓쳐버렸다.심호흡하며 겨우 마음을 진정한 민여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수화기 너머로 의아한 진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박진성, 전화는 왜 끊어? 아직도 화 난 거야?”‘화가 나?’민여진이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시우 씨, 저예요.”진시우가 움찔, 몸을 떨었다.“여진 씨?”놀란 목소리로 되묻던 진시우가 곧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박진성 번호가 맞는데... 왜 여진 씨가 이 전화를 받는 거예요?”민여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얘기하자면 길어요. 나중에 천천히 설명할게요. 그 전에 한 가지, 시우 씨가 솔직하게 얘기해줬으면 하는 게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내뱉은 그런 것뿐이야라는 박진성의 말에 흔들리던 민여진의 마음이 부서졌다.주먹을 꽉 움켜쥔 민여진은 겨우 박진성의 뺨을 내리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었다.“양심의 가책? 당신이 얼마나 많은 나쁜 짓을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망가뜨렸는데... 고작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게 전부라는 거야? 당신이라는 인간은 대체...”“할 얘기 끝났어?”박진성의 검은 눈동자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날카로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이미 지난 일이야. 설마 내가 무릎 꿇고 빌기를 바라는 거야? 다 큰 성인이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굴어.”“내가 유치해?”민여진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그래. 내가 유치하긴 하지. 내가 어떻게 감히 그 대단한 박진성 씨가 무릎 꿇고 사과하기를 바라겠어. 내가 어떻게 감히 당신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겠어. 내가 주제를 몰랐어.”박진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더 이상 민여진을 마음 아프게 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픈 몸 때문에 더는 사고를 이어갈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몰랐다.바로 이때, 화를 가라앉힌 민여진이 숨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그래서 내가 해준 비빔국수를 다시 먹고 싶다던 말도 잠꼬대라는 거지?”“그래.”박진성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민여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진성이 미친 듯이 기침하고 나서야 민여진은 뭔가를 떠올린 듯 굳었던 몸을 움직였다. 테이블에서 약을 가져온 민여진이 박진성에게 건네며 말했다.“먹어.”의아해하는 박진성에게 민여진이 말했다.“얼른 먹고 쉬어. 그래야 내일 이혼 신청하러 법원에 갈 거 아냐.”박진성의 눈에 빛나던 작은 희망의 불씨가 다시 꺼졌다.결국 두 사람의 결말은 이렇게 될 거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따금 발작하는 두통에 박진성의 머릿속은 어지럽기만 했다. 목은 꽉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약을 삼키고 침대에 누워서야 박진성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