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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길 잃은 물고기
“아주머니, 무슨 일이에요?”

한서윤은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다이닝룸에 들어서자, 식탁에는 강재진과 강하준뿐만 아니라 여자 한 명이 더 앉아 있었다.

바로 임세린이었다.

한서윤은 그제야 박미숙이 안절부절못했던 이유를 알아챘다.

박미숙은 강재진이 고용한 도우미였지만 한서윤과 오랜 세월 함께 지내며 서로 정이 깊이 들었다.

한서윤은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기에 어머니 또래인 박미숙을 늘 어른으로 존중했다.

박미숙도 그런 한서윤을 살뜰히 챙겼다.

특히 유산한 뒤에는 매일 보양식을 마련하며 한서윤의 컨디션 회복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박미숙은 임세린 때문에 한서윤이 유산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갑자기 돌아온 한서윤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한서윤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임세린의 옆에 앉은 강하준은 작은 손으로 임세린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한서윤이 나타나자, 강하준은 속으로 엄마라고 부르기조차 싫었다.

하지만 임세린은 강재진이 보는 앞에서 계속 한서윤을 엄마라고 불러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두었던 터였다.

만약 ‘엄마’라고 부르지 않으면 ‘가짜 엄마’가 속상해할 거라고 말해 두기까지 했다.

강재진도 같은 말을 했었기에 강하준은 어쩔 수 없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엄마, 여긴 왜 왔어요? 아빠랑 하준이가 세린 이모랑 지내는 게 싫어서 방해하려는 건 아니죠?”

한서윤의 가슴에 통증이 번져왔다.

강하준은 한서윤이 몇 년 동안 온 정성을 다해 키우고 보살핀 아이였다.

그런데 강하준은 한서윤이 돌아온 것을 보고 조금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서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임세린의 옷자락만 더욱 꼭 움켜쥐었다.

임세린의 눈에는 조롱과 우월감이 번졌지만, 겉으로는 강하준을 달래며 말했다.

“그럴 리 없어. 하준아, 무서워하지 마. 엄마는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이 아니야. 하준이가 이모랑 지내는 걸 좋아하는데 엄마가 막을 리 없잖아.”

임세린이 한서윤을 향해 비웃듯 물었다.

“그렇죠, 서윤 언니?”

한서윤은 임세린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을 찌르던 통증이 무딘 칼날로 살을 천천히 베어내는 듯한 고통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분명 한서윤이 없는 틈을 타 집 안에 들어온 사람은 내연녀인 임세린이었다.

임세린은 버젓이 한서윤을 대신해 안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한서윤의 남편과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면, 한서윤은 속이 좁고 아이를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몰리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잘못한 쪽으로 몰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한서윤은 돌아서며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차오른 눈물을 간신히 눌렀다.

‘애초부터 내 자리가 없었어. 이제 와서 무슨 미련이 남겠어...’

한서윤은 돌아서서 침실로 향했다.

캐리어에는 출장에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한서윤은 떠날 때 쉽게 챙겨 나갈 수 있도록 침실에 있는 개인 물건들까지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집에 더 머물 생각은 없었다.

방문이 열리더니, 흰 셔츠 차림의 강재진이 성큼성큼 들어오며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거면 아예 돌아오지 말지 그랬어. 돌아오자마자 누구한테 화풀이하는 거야?”

한서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세 사람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알 수 없었다.

‘활짝 웃으며 반갑게 맞아 줬어야 만족했을까.’

한서윤은 미간을 주무르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내내 일에 매달렸고 비행기에서도 제대로 못 쉬었어. 좀 쉬게 해 주면 안 돼?”

하지만 강재진은 한서윤의 손목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나가자. 같이 밥 먹어.”

한서윤은 강재진의 손을 뿌리쳤다.

“안 가. 피곤해서 자고 싶다고 했잖아!”

한서윤은 끝내 폭발해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강재진의 얼굴에는 한서윤을 이해하려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차가운 냉담함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강재진은 마치 한서윤도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한서윤을 빤히 바라봤다.

예전의 한서윤은 강재진 앞에서 늘 온순한 모습만 보였다.

항상 참고 고분고분 받아들이기만 했다. 아이를 잃었을 때조차 눈물만 흘렸다.

그런 한서윤이 화를 내며 했던 말이라고는 ‘다시는 당신의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는 말뿐이었다.

강재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었다.

“세린이를 당분간 집에 머물게 하면서 하준이를 돌보게 할 거야. 어차피 넌 아이도 제대로 못 키우잖아. 마침 잘됐어. 세린이가 어떻게 돌보는지 보고 배워.”

한서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구역질이 날 뻔했다.

한서윤은 그동안 강하준을 누구보다 세심하게 돌봤다. 아이를 잃은 뒤 모든 사랑을 강하준에게 쏟았고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며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웠다.

해외 출장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늘 곁을 지키며 최선을 다했는데도, 강재진의 눈에는 한서윤이 아이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충분히 보살피지도 않는 여자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강하준은 애초부터 임세린이 이 집에 들여보낸 아이였다.

어쩌면 임세린이 틈날 때마다 몰래 아이를 부추겨 어린 나이부터 한서윤에게 반항심을 품게 했을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한서윤이 더 이상 애쓸 필요가 있을까.

이제 강하준은 한서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아이였다.

한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이 서류에 서명해.”

한서윤은 침대 옆 협탁에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둔 서류봉투를 발견했다.

집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라고 신신당부했던 데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지만, 봉투를 묶은 끈의 매듭은 떠날 때와 똑같았다.

강재진은 서류를 아예 열어보지도 않았다.

한서윤이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고 당부해도 강재진은 늘 무시했다.

한서윤이라는 존재 자체를 대하는 태도부터 줄곧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서윤은 서류봉투를 집어 강재진에게 내밀었다.

강재진이 봉투를 열려던 순간, 방문 앞에서 임세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진 오빠, 서윤 언니 아직도 화났어? 내가 들어가서 설명이라도 할까?”

“됐어.”

강재진은 서류봉투를 아무렇게나 옆으로 던져 놓고 임세린을 달랬다.

“괜찮아, 세린아. 우린 나가자.”

한서윤은 협의이혼신청서를 다시 주워 강재진에게 펼쳐 보이려 했다.

그러자 강재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밥부터 먹고 얘기해.”

한서윤은 먹고 싶지 않았지만, 식사를 마쳐야 강재진이 서류에 서명할 것으로 보이자, 당장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임세린이 대체 무슨 속셈인지 지켜볼 생각으로 일단 식탁에 마주 앉기로 했다.

강재진은 한서윤을 다이닝룸으로 데려가 식탁 의자를 빼더니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박미숙에게 지시했다.

“아주머니, 수저 좀 가져다주세요.”

한서윤은 식욕이 없었다.

그때, 임세린이 먼저 말을 걸었다.

“서윤 언니, 저 얼마 전에 귀국했잖아요. 오랜만에 뵙는 거라 선물 하나 준비했어요.”

한서윤은 고개를 들었다가 임세린의 행동에 시선이 멈췄다.

임세린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자연스럽게 넘기자, 귓불에 달린 눈부신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드러났다.

한서윤은 한눈에 귀걸이를 알아봤다.

오랫동안 갖고 싶어 했던 그 디자인이었다.

좀처럼 매물로 나오지 않다가 어렵게 경매에 출품되자, 강재진은 반드시 낙찰받아 선물하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그 귀걸이는 지금 임세린의 귀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게다가 강재진이 낙찰받았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했기 때문에 임세린이 직접 산 물건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재진이 임세린에게 선물한 거네...’

한서윤이 분명 갖고 싶다고 말했는데도 강재진은 돌아서자마자 잊어버렸다. 그리고 경매에서 낙찰받은 뒤 임세린에게 선물한 모양이었다.

한서윤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비웃음을 억누른 채, 임세린이 악의가 다분한 미소를 지으며 내민 보석함을 열었다.

안에는 귀걸이 한 쌍이 들어 있었지만 벌집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디자인은 끔찍할 정도로 보기 흉했다.

무엇보다 한서윤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말벌이었기에 구역질이 올라올 뻔했다.

임세린은 일부러 한서윤을 불쾌하게 만들려고 이런 선물을 고른 것이었다.

한서윤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자 임세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언니, 표정이 왜 그래요? 제가 드린 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요?”

임세린은 곧 상처받았다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한서윤은 보석함을 닫았다.

임세린이 일부러 보기 흉한 귀걸이를 골라 기분을 상하게 하려 했다고 말해 봐야 강재진은 믿지 않을 테고, 오히려 한서윤에게 안목도 없고 예의도 모른다며 나무랄 게 분명했다.

애초부터 강재진은 임세린의 편이었으니까.

한서윤은 아무 말 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잠시 후, 윤기가 흐르는 먹음직스러운 소갈비가 새로 식탁에 올랐다.

강재진은 임세린에게 한 점 집어 주려고 젓가락을 뻗다가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리고 곧바로 요리사를 불렀다.

“분명 고수는 넣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요리사는 억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고수를 좋아하셔서 이 소갈비에는 늘 넣었습니다.”

강재진의 얼굴이 음침하게 가라앉았다.

“오늘 저녁은 서윤이를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세린이는 고수를 먹지 않습니다. 또 이런 실수를 할 거면... 차라리 그만두세요.”

한서윤은 평소 누구에게도, 어떤 일에도 무심하던 강재진이 고수 하나 때문에 요리사까지 몰아붙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역시 임세린을 챙기는 일이라면 강재진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오늘 저녁은 나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한서윤은 더는 먹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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