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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길 잃은 물고기
“전 이만 일어나 볼게요. 세린 씨는 마저 맛있게 드세요.”

한서윤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뒤에서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윤 언니, 제가 뭐 기분 나쁘게 한 거라도 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막 귀국해서 당장 머물 곳을 구하지 못하는 바람에 오빠에게 신세를 지게 된 것뿐이에요. 언니가 싫다면 오늘이라도...”

“됐어.”

강재진이 말을 끊고 임세린을 달랬다.

“세린아, 마음 쓰지 마. 신경 쓸 필요 없어.”

한서윤은 강재진의 말뜻을 정확히 알아챘다.

‘내가 불쾌해하든 말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라는 뜻이겠지.’

지금 이 자리에서 한서윤은 마치 불청객이 된 기분이었다. 오히려 강재진과 임세린, 강하준이야말로 진짜 가족 같았다.

‘괜찮아, 이 결혼은 이제 끝이니까.’

침실로 돌아가자, 캐리어가 열려 있었다.

박미숙은 한서윤이 피곤할까 봐 캐리어 속 짐을 꺼내 정리하던 중, 한서윤이 들어오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박미숙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황급히 내려놓았다.

봉투를 열어 안에 든 내용을 본 것이 분명했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닫은 뒤, 박미숙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사모님, 대표님과 이혼하시려고요? 그러시면 안 돼요!”

“왜 안 돼요?”

한서윤은 놀랄 만큼 담담했다.

“아주머니가 보기에도 강재진과 임세린이 진짜 부부 같지 않아요? 하긴, 두 사람은 원래 한 쌍이었잖아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데다 재벌가 도련님과 재벌가 아가씨라니, 얼마나 잘 어울려요.”

한서윤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번졌다.

“제가 갑자기 끼어들어 재성 그룹 사모 자리를 차지한 탓에... 저는 두 사람이 당당히 함께하지 못하게 막아선 사람일 뿐이에요. 그래도 둘은 몰래 만날 건 다 만나고 아이까지 낳았더라고요. 하하하...”

담담하게 웃던 한서윤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더니, 끝내 눈물이 얼굴을 가득 뒤덮었다.

가엾고도 우스운 꼴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박미숙은 큰 충격에 빠졌다.

“사모님, 대표님과 임세린 씨 사이에 아이가 있다고요?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요?”

“멀리 있을 줄 아셨죠?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이는 바로 눈앞에 있었어요. 하준이가 바로 두 사람의 아이예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박미숙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하준이는 사모님과 대표님께서 입양한 아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강재진이 직접 인정했어요.”

박미숙은 임세린이 어떻게 한서윤의 안주인 자리를 버젓이 차지한 채 강하준과 다정하게 지낼 수 있었는지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그동안 한서윤이 겪은 일을 알게 되자 가슴이 아파 눈물이 흘러나왔다.

“정말 그런 거라면 사모님께서 너무 큰 고통을 겪으신 거네요. 대표님은 어떻게 사모님께 이럴 수가 있어요? 사모님께서 아이를 잃으셨을 때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셨는데요...”

박미숙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하준이 나이를 따져 보면, 사모님께서 임신 중이었을 때조차 그 여우 같은 임세린 씨에게 속아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던 게 분명하네요.”

한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산의 고통을 홀로 견디는 동안 강재진은 마치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무심했고 위로 한마디 건넨 적도 없었다.

돌이켜 보니 모든 일에는 이미 조짐이 있었다.

한서윤은 짐을 다시 옷장에 넣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하며 남은 정리는 직접 하겠다고 박미숙에게 말했다.

박미숙이 나간 뒤 강재진이 침실로 들어왔다.

강재진은 한서윤이 캐리어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욕실로 향했다.

잠시 후 욕실 문이 열렸다.

강재진은 짙은 와인색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허리띠가 느슨하게 묶여 있어 단단한 가슴과 선명한 복근이 그대로 드러났다.

강재진은 그윽한 눈빛으로 한서윤을 바라봤다.

한서윤은 강재진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무시하며 계속 짐을 정리했다.

잠시 후 강재진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피곤하다며? 왜 아직도 안 씻었어?”

한서윤은 강재진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강재진은 한서윤이 피곤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씻고 나오면 자연스럽게 잠자리를 가질 생각뿐이었다.

사실 씻지 않아도 상관없는 눈치였다.

한서윤이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이미 씻었을 거로 생각한 강재진은 힘센 팔을 한서윤의 엉덩이 아래로 넣어 한 손으로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한서윤은 재빨리 빠져나왔다.

“나한테서 떨어져.”

강재진은 한서윤의 거부 의사를 알아차리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서윤아, 아직도 화났어? 세린이는 막 귀국해서 갈 데가 없잖아. 그냥 잠깐 같이 지내는 것뿐이야. 네가 이렇게까지 속 좁은 줄은 몰랐네.”

“갈 데가 없다고?”

한서윤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호텔이 전부 만실이래? 아니면 세 살짜리 애라서 혼자 집도 못 구하나?”

강재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보다 세린이가 여기서 지내고 싶어 해. 회복에도 도움이 될 거고. 세린이는 우울증을 앓고 있어. 하준이가 곁에 있으면 좀 나아질 거야. 서윤아, 이제 그만 속 좁게 굴어. 세린이는 곧 나갈 거야. 너한테 피해 갈 일도 없어.”

“좋아. 대신 원하면 임세린한테 가. 다른 여자한테 가서 욕구를 풀도록 양보하겠다는 건데, 이 정도면 속이 좁은 게 아니라 오히려 너그러운 편 아닌가?”

강재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굳었다.

한서윤이 이토록 모욕적인 말을 내뱉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강재진은 곧 나름대로 이유를 찾아 스스로 이해했다.

한서윤이 시골에서 자라며 거친 말들을 들으며 컸기 때문에, 재벌가 영애로 곱게 자란 임세린과는 애초에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강재진은 한서윤이 순간 욱하는 마음에 내뱉은 말일 뿐이라고 단정하며 치밀어 오르는 불쾌한 감정을 억눌렀다.

여러 해를 부부로 지내온 만큼 강재진은 한서윤과의 잠자리에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5년 전 그 일 이후로는 임세린과 다시 관계를 가진 적도 없었다.

한서윤을 향한 마음은 변함없었기에, 강재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서윤을 달래려 했다.

“한 번만...”

그리고 한서윤에게 입을 맞추려 다가갔다.

하지만 한서윤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피했다.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한서윤은 속이 뒤틀릴 만큼 역겨움을 느꼈다. 다시 강재진과 몸을 섞는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한서윤은 협의이혼신청서를 집어 들려 했지만 곧바로 강재진에게 붙잡혔다.

강재진의 손은 너무 커서 한서윤의 두 손을 한꺼번에 감싸 쥘 수 있었다.

한서윤은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는 강재진을 내려다봤다.

몸을 돌려 피하려 했지만 강재진이 다시 한서윤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거부하지 마.”

신음에 가까운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를 거부하지 마!”

강재진은 어느 때보다 낯설어 보였다.

평소의 냉담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온몸은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굴은 욕정으로 붉게 물들었고 한껏 커진 동공에는 욕망이 가득 차 있었다. 검고 짙은 속눈썹 아래 드러난 표정에서도 억누르지 못한 욕망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서윤은 지금 강재진이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그저 욕망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랑은 상대를 존중하고, 언제나 곁을 지키며 보호하는 거지.’

한서윤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손을 뻗어 강재진을 힘껏 밀쳐 냈다.

강재진은 밀려난 뒤에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토록 달래 줬는데도 한서윤에게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이 팽팽하게 대치하던 순간, 다급한 전화벨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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