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강혁은 모니터 한가운데 떠 있는 메모장을 바라봤다.
테스트 필요. 네 글자. 어제 면접이 끝난 뒤 적어놓은 그대로였다. 지우려다 몇 번이나 커서를 올렸다. 지우지 못했다. 다른 말로 바꿀 수도 없었다. ‘확인.’ ‘관찰.’ ‘판단.’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메모장을 닫지 않은 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발신자 없음. 익숙한 화면이었다. 문장을 길게 쓰지 않았다. [모레 오후 2시. 같은 장소.] [이번에는 신체 접촉이 포함됩니다.] [참여 여부를 오늘 자정까지 회신하십시오.] 전송. 메시지가 사라졌다. 강혁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바로 잡았다. 소매 끝도 한 번 정리했다. 그 버릇이 나온 뒤에도 방 안은 그대로 조용했다. 메모장은 여전히 빈칸을 남긴 채 깜빡이고 있었다. ⸻ 은유는 저녁을 막 마치려던 참이었다. 컵라면 뚜껑을 덮어놓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발신자 없음. 문자를 읽는 데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이번에는 신체 접촉이 포함됩니다. 은유는 화면을 끄지 않았다. 가만히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면접은 끝났다. 질문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체 접촉. 무엇을 한다는 걸까. 어디까지가 테스트일까. 겁이 나지 않는건 아니었다. 낯선 사람 앞에서 몸을 맡긴다는 건, 아무리 스스로 원했던 일이라도 쉽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은유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봤다. ‘안 가도 된다.’ 그 생각이 처음으로 스쳤다. 아직 계약도 아니었다. 거절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누가 비난할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발걸음이 뒤로 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면접 마지막 장면만 자꾸 떠올랐다. “왜 문을 두드리지 않았습니까.” “손해가 적다고 판단해서요.” “긴장 안 했습니까.” “안 보이려고 했으니까요.” 그 질문들보다 더 선명한 건, 질문 사이사이 길게 이어지던 침묵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 사람을 읽으려는 눈. 아니. 읽어내지 못해서 더 오래 바라보던 눈. 은유는 천천히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답장은 짧았다. [참여하겠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른 뒤에도 화면을 바로 끄지 못했다. 이번에는 캡처하지도 않았다. 지우지도 않았다. 복원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결정을 내린 뒤에는, 더 확인하고 싶은 게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대폰 화면이 천천히 꺼졌다. 은유는 식어버린 컵라면을 내려다봤다. 젓가락을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대신 가슴 한가운데가 아주 조금 뜨거워져 있었다. 다음 날. 은유는 오후 한 시 오십 분에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시계를 확인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끝만 평소보다 조금 차가웠다. 17층. 복도는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회색 벽. 검은 문. 문패도, 초인종도 없었다. 은유는 문 앞에서 멈췄다. 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이번에도 두드리지 않았다. 잠시 뒤. 철컥.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강혁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책상 뒤가 아니었다. 문을 연 채 은유를 잠깐 바라본 뒤 짧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은유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사무실 안은 달라져 있었다. 책상은 벽 쪽으로 밀려 있었고, 가운데 공간이 비어 있었다. 회의실처럼 꾸며진 것도, 상담실처럼 편안한 것도 아니었다. 불필요한 물건이 거의 없었다. 공간 전체가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강혁은 은유가 방 안을 훑어보는 시간을 막지 않았다. 대신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은 면접이 아닙니다.” 은유가 그를 바라봤다.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알겠습니다.” 강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탁자 위에서 서류 한 장을 집어 은유 앞으로 내밀었다. “읽어보세요.” 은유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길지 않았다. 오늘 진행되는 절차에 대한 안내와 중단 의사 표현, 종료 기준 같은 기본적인 내용만 간결하게 적혀 있었다. 은유는 끝까지 읽은 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한 번 더 읽었다. 강혁은 재촉하지 않았다. “질문 있습니까.” 은유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확인하지 않고 서명하는 습관은 좋지 않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은유는 다시 종이를 내려다봤다. 이번에는 문장 하나하나를 천천히 읽었다. 강혁은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몇 분 뒤. 은유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괜찮습니까?” 강혁이 물었다. “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읽고 이해한 뒤에 결정했으니까요.” 강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좋습니다.” 은유는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종이를 건네자 강혁은 바로 치우지 않았다. 서명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파일에 넣었다. “오늘 제가 보는 건 잘하는지를 보는게 아닙니다.” 은유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지시를 들었을 때 어떻게 판단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은유는 짧게 대답했다. “네.” “억지로 버틸 필요도 없습니다.” 강혁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높이를 유지했다. “불편하면 말하세요.” “말하면.” 은유가 처음으로 질문했다. “끝입니까?” 강혁은 잠시 생각한 뒤 답했다. “아닙니다.” “그럼.” “그 시점부터 다시 판단합니다.” 은유는 그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녀가 기대했던 답도, 예상했던 답도 아니었다. 강혁은 시계를 한 번 바로잡았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비어 있는 공간을 가볍게 가리켰다.“이쪽으로 오세요.” 은유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졌다. 강혁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 침묵은 면접의 침묵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시작되기 직전의 침묵이었다. 강혁이 은유 앞에 섰다. 설명은 없었다. “무릎.” 한 단어였다. 은유는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명령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 말이 정말 자신에게 내려진 거라는 사실을, 몸이 받아들이는 데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강혁은 바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와 자세를 살폈다. 무릎 사이 거리. 허리가 세워진 각도. 손의 위치. 턱과 시선. “손, 허벅지 위.” 은유의 손이 어색하게 자리를 잡았다. “손바닥을 펴세요.” 펼쳤다. “나를 보세요.” 은유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이 자세로 그를 올려다보는 건 처음이었다. 눈높이의 차이가 이렇게 크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강혁은 그 시선을 잠시 마주 봤다.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떨어져 서서, 방금 만들어진 그림을 눈에 담듯 오래 바라봤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은유와,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 강혁이 검은 커프를 들고 왔다. “손.” 은유가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강혁은 채우기 전에 물었다. “계속합니까?” “네.” 커프가 손목을 감쌌다. 완전히 조이지는 않았다. 움직임을 제한하되 통증을 주는 정도는 아니었다. 강혁이 손가락을 커프 안쪽으로 넣어 조임을 확인했다. 손이 그녀의 손목에 닿았다. 살갗과 가죽 사이, 손가락 하나 들어갈 여유를 재는 손길이었다. 은유는 그 순간 자신이 정말로 움직일 수 없게 됐다는 걸 실감했다. 지금까지의 자세 교정은 스스로 풀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건 아니었다. 강혁이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세요.” 손을 쓰지 못하는 상태로 일어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게중심이 흔들렸다. 강혁의 손이 팔을 붙잡아 바로 세웠
강혁은 모니터 한가운데 떠 있는 메모장을 바라봤다.테스트 필요.네 글자.어제 면접이 끝난 뒤 적어놓은 그대로였다.지우려다 몇 번이나 커서를 올렸다.지우지 못했다.다른 말로 바꿀 수도 없었다.‘확인.’‘관찰.’‘판단.’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았다.그는 결국 메모장을 닫지 않은 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발신자 없음.익숙한 화면이었다.문장을 길게 쓰지 않았다.[모레 오후 2시. 같은 장소.][이번에는 신체 접촉이 포함됩니다.][참여 여부를 오늘 자정까지 회신하십시오.]전송.메시지가 사라졌다.강혁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바로 잡았다.소매 끝도 한 번 정리했다.그 버릇이 나온 뒤에도 방 안은 그대로 조용했다.메모장은 여전히 빈칸을 남긴 채 깜빡이고 있었다.⸻은유는 저녁을 막 마치려던 참이었다.컵라면 뚜껑을 덮어놓고 휴대폰을 확인했다.발신자 없음.문자를 읽는 데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하지만 마지막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이번에는 신체 접촉이 포함됩니다.은유는 화면을 끄지 않았다.가만히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이번에는.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면접은 끝났다.질문도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번에는 신체 접촉.무엇을 한다는 걸까.어디까지가 테스트일까.겁이 나지 않는건 아니었다.낯선 사람 앞에서 몸을 맡긴다는 건, 아무리 스스로 원했던 일이라도 쉽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은유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가로 걸어갔다.창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봤다.‘안 가도 된다.’그 생각이 처음으로 스쳤다.아직 계약도 아니었다.거절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누가 비난할 일도 아니었다.그런데도 이상하게 발걸음이 뒤로 가지 않았다.머릿속에는 면접 마지막 장면만 자꾸 떠올랐다.“왜 문을 두드리지 않았습니까.”“손해가 적다고 판단해서요.”“긴장 안 했습니까.”“안 보이려고 했으니까요.”그 질문들보
사무실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불필요한 물건이 거의 없었다.책상 하나.의자 두 개.벽면을 채운 책장.그리고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회색 도로.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이라기보다, 판단을 내리는 공간 같았다.강혁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그는 일어나지 않았다.악수도 청하지 않았다.명함도 없었다.그저 은유를 한 번 바라본 뒤 짧게 말했다.“앉으세요.”은유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않았다.가방은 의자 옆 바닥에 내려놓았다.강혁은 아무 말 없이 지원서를 펼쳤다.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방 안에 작게 울렸다.십 초.은유는 기다렸다.이십 초.강혁은 여전히 지원서를 보고 있었다.삼십 초.은유는 처음 들어왔을 때와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강혁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늦지 않았네요.”“시간을 지켰습니다.”“일찍 오셨더군요.”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강혁은 창밖을 한 번 바라봤다가 다시 그녀를 향했다.“복도에 오래 계셨습니다.”은유는 그제야 깨달았다.복도에도 자신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는 걸.“문을 두드리지 않더군요.”“시간 전이었으니까요.”“들어와도 됐을 수도 있습니다.”“안 된다고도 안 쓰여 있었죠.”짧은 침묵이 흘렀다.“그런데 안 들어왔습니다.”“확신이 없었습니다.”강혁은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확신이 없으면 기다리는 편입니까.”은유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질문을 한 번 머릿속에서 굴린 뒤 입을 열었다.“상황에 따라 다릅니다.”“이번에는.”“기다리는 편이 손해가 적다고 판단했습니다.”강혁은 지원서에 시선을 내렸다.펜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손해를 계산하는 사람입니까.”“네.”“이익도.”“그것도요.”강혁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원서를 한 장 넘겼다.실제로는 넘길 내용이 없었다.그는 빈 뒷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덮었다.“자기소개.”지원서를 손끝으로 밀었다.“‘조건에 저를 맞춘 게 아닙니다.’”은유는 자신의 글을 내려다봤다.“‘
면접 안내 문자는 전날 밤 열한 시를 조금 넘겨 도착했다.발신자 없음.[오후 3시, 강남 OO빌딩 17층.][지각 시 자동 탈락. 예외 없음.]끝이었다.주소도, 시간도.필요한 말만 남아 있었다.은유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혹시 다른 안내가 더 오지 않을까 싶어 새로고침을 몇 번 눌러봤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다음 날.은유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집을 나섰다.늦을 가능성을 하나씩 지워나갔다.지하철 연착.길을 헤매는 일.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전부 계산에 넣었다.강남역에 도착했을 때도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은유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지 않았다.옷에 커피 냄새가 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대신 건물 맞은편에서 사람들만 한동안 바라봤다.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다.회사원들이 종이컵을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택배기사가 상자를 들고 나왔다.누군가는 뛰었고,누군가는 통화를 하며 걸었다.모두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은유도 그 건물을 올려다봤다.17층.유리창이라 안은 보이지 않았다.⸻오후 2시 52분.은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로비는 생각보다 평범했다.안내데스크.엘리베이터.화분.특별한 것은 없었다.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뒤 거울에 비친 자신을 한 번 봤다.셔츠 깃.머리카락.주름.다 괜찮았다.손끝으로 셔츠 소매를 한 번만 정리했다.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17층.문이 열리자 공기가 달라졌다.아래층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복도는 길지 않았다.사무실도 많지 않았다.맨 끝.검은색 문 하나.문패는 없었다.회사 이름도 없었다.초인종도 없었다.문 옆 벽에 작은 숫자만 붙어 있었다.은유는 잠시 멈춰 섰다.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2시 57분.조금 일렀다.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복도 끝 창문으로 오후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엘리베이터가 한 번 열렸다가 닫혔다.누군가 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은유는
첫날은 아무렇지 않았다.어차피 수백 명 중 하나다.답이 안 와도 이상할 게 없다고, 은유는 스스로에게 말했다.둘째 날은 조금 달랐다.일부러 확인하지 않으려고 휴대폰을 서랍에 넣어뒀다.세 시간도 못 버티고 다시 꺼냈다.셋째 날 밤, 은유는 공고를 다시 검색했다.혹시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공고가 내려간 건 아닐까.혹은 자신이 이미 걸러져서 알림조차 안 오는 건 아닐까.공고는 그대로 있었다.지원자 수만 계속 늘어 있었다.수백 명 중 하나.이불 속에서 은유는 낮에 읽었던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연기할 수 있는 사람 말고, 원하는 사람을 찾습니다.이상하게, 그 말은 잊히지 않았다.나흘째 새벽.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 없음.은유는 잠긴 눈으로 화면을 봤다.[1차 서류 합격을 안내드립니다.][2차는 대면 면접입니다.][일시와 장소는 확정 24시간 전 개별 통보됩니다.]메시지는 짧았다.축하한다는 말도, 인사말도 없었다.그리고 마지막 한 줄.지각자는 그 자리에서 자동 탈락 처리됩니다.예외는 없습니다.은유는 그 문장을 두 번 더 읽었다.얼굴도, 이름도, 목소리도 모르는 사람이었다.그런데 그 한 줄만으로 방 안의 공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누군가 이미 정확히, 흔들림 없이 규칙을 정해놓았다는 감각.은유는 그 메시지를 캡처했다.캡처해서 뭘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손이 먼저 움직였다.사진첩을 열어 방금 찍은 화면을 다시 들여다봤다.지웠다.몇 초 뒤, 휴지통에서 다시 복원했다.'이게 뭐라고.'댓글에도, 의심에도, 흔들리지 않던 사람.그런데 그 완벽한 통제 사이에 딱 한 번, 서두른 흔적이 남은 문장 하나.원하는 사람을 찾습니다.'그 틈, 나만 본 걸까.''아니면 다들 봤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까.'은유는 몸을 돌려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낮에 떠올랐던 대답을, 이번에는 밀어내지 않았다.이 남자를 만나면, 그 대답이 맞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혹은 자신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도.강혁은 모니터를
1화. 최고의 조건, 최고의 서브 "최고의 조건. 최고의 서브." 은유는 그 문장을 세 번 다시 읽었다. 화면 속 공고는 광고라기보다 계약서에 가까웠다. 나이 25~29세. 키 160~168. 체중 45~52kg. 비흡연자. 문신·피어싱 없을 것. 계약 기간 6개월. 전세 보증금 지원(최대 2억). 월 급여 별도 협의. 조건은 상세했다. 사람은 없었다. ⸻ 은유는 그 조건들을 하나씩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조건이 아니라, 조건을 쓴 사람을 읽는 눈으로. 체형까지 세밀하게 적어둔 이유가 뭘까. 보통은 이런 조건일수록 대충 얼버무린다. '예쁘고 어린 사람.' 그런데 이 사람은 숫자로 못박았다. 허용 범위, 제외 항목, 예외 없음. 취향이 확고하다는 뜻이거나, 취향조차 관리 대상으로 다룬다는 뜻이었다. 은유는 뭐가 맞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다음으로 넘어갔다. 급여는 협의였다. 그런데 전세 보증금은 최대 2억이라는 숫자가 확정으로 박혀 있었다. '돈에는 별 미련이 없나.'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련이 없는 게 아니라, 협상 자체를 놓치기 싫어하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채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 댓글 창은 이미 수백 개였다. *미친 조건이네ㅋㅋ 전세 2억을 왜 줘* *이거 사기 아니야?* *나 지원함ㅎㅎ 궁금해서* 의심하는 사람들. 장난치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지원서만 넣고 사라진 사람들. 은유는 세 번째 부류가 몇 명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침묵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의심하지도, 장난치지도 않으면서 조용히 사라진 사람들. 그들도 자신처럼 어딘가 걸린 게 있었던 걸까. 은유는 그 생각을 오래 붙잡지 않았다. 대신 스크롤을 내리다 멈췄다. 댓글 정렬을 최신순에서 인기순으로 바꿨다. 가장 많이 눌린 댓글이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