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무실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불필요한 물건이 거의 없었다. 책상 하나. 의자 두 개. 벽면을 채운 책장. 그리고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회색 도로.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이라기보다, 판단을 내리는 공간 같았다. 강혁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악수도 청하지 않았다. 명함도 없었다. 그저 은유를 한 번 바라본 뒤 짧게 말했다. “앉으세요.” 은유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않았다. 가방은 의자 옆 바닥에 내려놓았다. 강혁은 아무 말 없이 지원서를 펼쳤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방 안에 작게 울렸다. 십 초. 은유는 기다렸다. 이십 초. 강혁은 여전히 지원서를 보고 있었다. 삼십 초. 은유는 처음 들어왔을 때와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강혁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늦지 않았네요.” “시간을 지켰습니다.” “일찍 오셨더군요.” 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혁은 창밖을 한 번 바라봤다가 다시 그녀를 향했다. “복도에 오래 계셨습니다.” 은유는 그제야 깨달았다. 복도에도 자신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는 걸. “문을 두드리지 않더군요.” “시간 전이었으니까요.” “들어와도 됐을 수도 있습니다.” “안 된다고도 안 쓰여 있었죠.”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안 들어왔습니다.” “확신이 없었습니다.” 강혁은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확신이 없으면 기다리는 편입니까.” 은유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을 한 번 머릿속에서 굴린 뒤 입을 열었다.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이번에는.” “기다리는 편이 손해가 적다고 판단했습니다.” 강혁은 지원서에 시선을 내렸다. 펜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손해를 계산하는 사람입니까.” “네.” “이익도.” “그것도요.” 강혁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원서를 한 장 넘겼다. 실제로는 넘길 내용이 없었다. 그는 빈 뒷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덮었다. “자기소개.” 지원서를 손끝으로 밀었다. “‘조건에 저를 맞춘 게 아닙니다.’” 은유는 자신의 글을 내려다봤다. “‘제가 이 조건에 맞았을 뿐입니다.’” 강혁이 이어 읽었다. “이 문장을 쓴 이유가 뭡니까.” “그게 사실이니까요.” “사실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까?” “필요한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어느 쪽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아직 모르겠습니다.” 강혁의 시선이 처음으로 조금 길어졌다. “모르는데도 그렇게 썼군요.” “그래서 짧게 썼습니다.” 은유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길게 쓰면 변명처럼 보일 것 같아서.”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강혁은 그녀를 바라봤다. 은유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 다 먼저 말을 잇지 않았다. 잠시 후 강혁이 지원서를 덮었다. “오늘은 질문보다 관찰을 많이 하게 되네요.” 그 말이 은유를 향한 것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었다. 강혁은 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예정했던 순서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강혁은 시계를 한 번 본 뒤 지원서를 덮었다. 원래라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경험. 계약 조건. 생활 패턴. 준비해 둔 항목은 많았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유 역시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정적이 길어졌다. 창밖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희미하게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강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앞으로 나오더니 창가까지 걸어갔다. 등을 돌린 채 한동안 밖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은유는 그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지금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기다려야 할까. 잠깐의 망설임이 스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혁이 다시 돌아섰다. “지원자가 많았습니다.” 첫 질문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이었다. “그렇겠죠.” “대부분은 비슷했습니다.” 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혁이 말을 이었다. “자기소개를 읽으면 끝까지 읽을 필요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그런 글 많이 써봤어요.” 강혁의 시선이 은유에게 멈췄다. “써봤다고요.” “취업 준비하면서요.” 은유는 담담하게 말했다.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요.” 잠시 침묵. “효과는 없었습니다.” 강혁은 의자 등받이에 손끝을 올렸다. “이번에는 안 그랬군요.” “이번에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왜.” “그렇게 쓰면 저도 수백 명 중 하나가 될 것 같아서요.” 강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유도 말을 보태지 않았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강혁은 천천히 책상으로 돌아왔다. 지원서를 다시 펼쳤다. 사진. 이름. 자기소개. 같은 문장을 다시 훑었다. 처음 읽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문장보다 사람 쪽으로 시선이 더 오래 머물렀다. 은유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편안한 얼굴도 아니었다. 손가락 끝이 무릎 위에서 한 번 포개졌다가 다시 풀렸다. 강혁은 그 작은 움직임을 봤다. “긴장하십니까.” 은유는 잠깐 웃었다. “당연하죠.” “안 그런 줄 알았습니다.” “안 보이려고 했으니까요.” 그 대답에 강혁은 짧게 시선을 내렸다. 지원서 위에 놓인 펜을 손끝으로 한 번 굴렸다. 질문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예정보다 일찍 끝난 면접이었다. 은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들고 문 쪽으로 몇 걸음 옮기다가 멈췄다. 뒤돌아본 것은 아니었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물었다.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강혁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서류를 다시 읽으신 건… 원래도 그러세요?” 짧은 정적. 강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유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사무실 안에는 다시 적막만 남았다. 문이 닫혔다. 사무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강혁은 그대로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은유가 앉아 있던 의자를 한 번 바라본 뒤, 천천히 책상으로 돌아왔다. 지원서를 다시 펼쳤다. 사진. 이름. 나이. 체중. 조건. 전부 처음 봤을 때와 같았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같은 지원서가 조금 전과 다르게 읽혔다. 강혁은 펜을 들었다. 면접이 끝나면 항상 같은 순서였다. 짧은 메모. 평가. 다음 지원자. 오늘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펜 끝이 종이 위에 닿았다. 잠시 뒤 한 줄이 적혔다. 테스트 필요. 강혁은 다음 줄로 내려갔다. 평소라면 여기부터 빨랐다. 반응. 판단. 위험 요소. 확인 항목. 몇 단어면 충분했다. 커서가 멈추듯 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방금 면접을 머릿속으로 다시 훑었다. 복도에서 기다렸다. 시간 전에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침묵을 견뎠다. 필요 없는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질문을 돌려보냈다. 긴장은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전부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느 하나도 평가 항목 안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강혁은 펜을 내려놓았다.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다른 종이를 꺼냈다. 새 면접 평가표였다. 첫 번째 항목. 순응성. 잠시 바라보다 줄을 그어 지웠다. 두 번째. 판단력. 쓰려다 멈췄다. 세 번째. 계산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 단어도 끝내 적지 않았다. 종이를 구겨 휴지통에 던졌다. 툭. 작은 소리가 사무실 안에 울렸다. 강혁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상한 지원자는 있었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을 꾸며내는 사람도 수도 없이 봤다. 하지만 오늘처럼, 어느 쪽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책상 위 휴대폰 화면이 잠깐 켜졌다. 다음 면접 예정 알림. 오후 4시. 강혁은 화면을 한 번 본 뒤 알림을 지웠다. 다음 지원서를 열지 않았다. 다시 서은유의 지원서를 열었다. 자기소개 한 줄이 화면에 떠올랐다. 조건에 저를 맞춘 게 아닙니다. 제가 이 조건에 맞았을 뿐입니다. 강혁은 그 문장을 끝까지 읽고도 화면을 넘기지 않았다. 손끝이 마우스 위에서 멈춰 있었다. 몇 초가 흘렀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그는 천천히 메모 창을 다시 열었다. 커서가 깜빡였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창을 닫지도 못했다. 그저 커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처음 생긴 문제는, 저 지원자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아니었다. 무슨 기준으로 확인해야 하는지조차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그건 처음 겪는 종류의 오류였다.은유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집 안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신발을 벗다가 잠깐 멈췄다.강혁은 주방에 있었다.셔츠 소매를 걷은 채 테이블 위에 그릇을 놓고 있었다.은유가 가방을 내려놓았다.“오늘 일찍 오셨어요?”“응.”“연락하시지.”“왜.”“저도 일찍 올 수 있었는데요.”강혁이 은유를 한번 봤다.“왔잖아.”“그렇긴 한데.”은유가 주방으로 갔다.테이블에는 이미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다.거창한 건 아니었다.둘이 평소 집에서 자주 먹는 것들.그런데 한쪽에 작은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은유가 바로 그걸 봤다.“저건 뭐예요?”“뭐.”“저거요.”강혁이 시선을 따라갔다.“디저트.”“그건 저도 알아요.”은유가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작은 케이크가 두 조각 들어 있었다.은유가 한쪽을 보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이거 제가 좋아하는 건데.”“응.”“일부러 사오셨어요?”“지나가다.”은유가 강혁을 봤다.“거짓말.”강혁이 의자를 빼며 말했다.“밥 먹어.”은유는 앉지 않았다.“주인님.”“왜.”“뭐 있어요?”“뭐가.”“오늘.”강혁이 은유를 봤다.“오늘이 왜.”은유가 눈을 가늘게 떴다.“그걸 제가 묻고 있잖아요.”“아무것도 없어.”“그런데 디저트를 사오셨다고요?”“먹으라고.”“평소에는 제가 사오잖아요.”강혁이 의자에 앉았다.“그래서 오늘은 내가 샀어.”은유는 한동안 그를 봤다.강혁은 태연하게 젓가락을 들었다.은유도 결국 맞은편에 앉았다.“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응.”“생일도 아니고.”“알아.”“무슨 기념일도 아니고.”강혁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은유가 그걸 봤다.“잠깐.”강혁이 다시 반찬을 집었다.“왜.”은유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지금 왜 멈추셨어요?”“안 멈췄어.”“멈추셨잖아요.”“밥이나 먹어.”은유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뭔데요.”“은유야.”“네.”“먹어.”이번에는 조금 달랐다.은유는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그래서 더 묻지 않았다.대
회식이 끝난 건 열 시가 조금 안 돼서였다.은유에게서 문자가 왔다.[이제 끝났어요.]강혁은 이미 근처에 와 있었다.짧게 답했다.[앞이야.]가게 맞은편에 차를 세웠다.몇 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강혁은 운전석에 앉은 채 그대로 봤다.은유는 네댓 명 사이에 있었다.평소 집에서 보던 모습과 조금 달랐다.머리는 목덜미 가까이 묶여 있었고,코트 단추는 반쯤 풀려 있었다.옆에 있던 여자가 뭔가 말하자 은유가 바로 웃었다.다른 사람이 말을 얹자 이번에는 은유가 먼저 한마디 했다.사람들이 같이 웃었다.강혁은 가만히 보고 있었다.은유가 저렇게 크게 웃는 걸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그런데 자기가 모르는 얘기로,자기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건 조금 달랐다.그때 누군가 편의점에서 나와 봉투를 열었다.간식 몇 개를 나눠주는 모양이었다.남자 직원 하나가 은유 쪽으로 과자를 내밀다가 멈췄다.“아, 은유 씨 이거 안 먹지.”은유가 봤다.“이제 기억하시네요.”“몇 달을 같이 밥 먹었는데 그걸 모르겠어요?”남자가 다른 걸 골라 건넸다.은유가 받아 들었다.“이건 먹어요.”“그건 알죠.”별것 아닌 대화였다.강혁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그 순간 은유가 도로 쪽을 봤다.강혁과 눈이 마주쳤다.표정이 바로 밝아졌다.은유가 옆 사람들에게 짧게 뭐라고 말하고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이쪽으로 걸어왔다.조금 전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웃던 얼굴 그대로였다.조수석 문이 열렸다.“많이 기다리셨어요?”“아니.”은유가 차에 타며 안전벨트를 맸다.“오늘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요.”강혁이 시동을 걸었다.“응.”차가 출발했다.은유는 아까 받은 과자를 무릎 위에 올려놨다.“이거 드실래요?”강혁이 한번 봤다.“안 먹어.”“맛있는데.”“너나 먹어.”은유가 봉지를 뜯었다.한입 먹고 창밖을 봤다.“오늘 팀장님이 진짜 웃겼거든요.”강혁은 앞을 봤다.“뭐가.”은유가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누가
강혁이 먼저 은유를 봤다.소파에 기대앉은 은유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강혁은 그대로 두고 한동안 노트북 화면을 넘겼다.그러다 불렀다.“은유야.”“네?”“씻고 와.”은유가 휴대폰 화면을 껐다.강혁 쪽을 한번 봤다.방금 전까지는 평소랑 다를 것 없는 저녁이었다.배달 음식 먹고, 설거지하고.은유는 소파에 늘어져 있었고 강혁은 옆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그런데 목소리가 달랐다.아주 많이는 아니고.그래도 은유는 알아들었다.자리에서 일어났다.“네.”욕실로 가다가 돌아봤다.“주인님도요?”“나중에.”“알겠어요.”욕실 문이 닫혔다.곧 물소리가 났다.강혁은 노트북을 덮었다.침실로 들어가 서랍 하나를 열었다.안쪽에 정리된 도구들 사이를 훑다가 길고 가느다란 케인을 꺼냈다.한 번 손에 쥐어봤다.익숙한 무게였다.침대 옆에 내려놓았다.⸻은유가 나온 건 십여 분 뒤였다.머리카락 끝에서 아직 물이 떨어졌다.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강혁을 보고 방 안으로 들어오던 은유가 케인을 발견했다.걸음이 반 박자 늦어졌다.강혁이 말했다.“옷 벗어.”은유 얼굴에 남아 있던 생활의 표정이 사라졌다.“네, 주인님.”옷을 하나씩 벗었다.강혁은 재촉하지 않았다.은유가 다 벗고 서자 케인을 들었다.“앞으로.”두 걸음.“팔 위로.”은유가 양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팔꿈치를 펴고 손을 모았다.강혁이 일어나 가까이 섰다.손으로 한쪽 팔을 살짝 밀었다.“조금 더.”은유가 맞췄다.“그대로.”“네.”케인이 허공을 갈랐다.얇은 바람 소리.은유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첫 타격은 종아리에 떨어졌다.찰싹.“읏.”무릎이 흔들렸다.은유는 그대로 섰다.강혁도 바로 다음을 치지 않았다.은유가 한번 숨을 뱉고 다시 들이마셨다.두 번째.이번에는 첫 자리보다 위였다.찰싹.은유가 입술을 깨물었다.머리 위로 올린 팔이 팽팽해졌다.“괜찮아?”“네, 주인님.”대답은 빨랐다.숨은 아니었다.강혁이 케인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주인님.”강혁이 소파에서 고개를 들었다.은유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화면을 몇 번 넘기다가 말했다.“우리 어디 좀 갈래요?”강혁이 잠깐 봤다.“어디.”“바다요.”“갑자기?”“바다 보고 싶어요.”은유가 화면을 보여줬다.속초 숙소 사진이었다.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여기 괜찮아 보여요.”강혁이 휴대폰을 받아 한 번 봤다.“이번 주말?”“네.”“가.”은유가 눈을 깜빡였다.“이렇게 바로요?”“가고 싶다며.”“생각 좀 하실 줄 알았어요.”“왜.”은유가 웃었다.“아니에요.”강혁이 다시 화면을 봤다.“여기 말고.”“왜요?”“주차 불편해.”“그걸 먼저 보세요?”“그럼 뭘 봐.”“바다요.”강혁이 은유를 봤다.“바다는 다 있잖아.”“속초 숙소에 바다가 다 있어요?”“바다 보러 간다며.”은유가 웃음을 참다가 결국 터뜨렸다.“진짜 낭만 없으세요.”“지금 알았어?”“조금씩 더 알아가고 있어요.”강혁이 다른 숙소를 몇 개 넘겼다.은유가 옆으로 붙었다.“이건요?”“방 작아.”“둘인데요.”“짐 있잖아.”“하룻밤인데요.”“그래도.”은유가 강혁 어깨에 기대 화면을 같이 봤다.몇 개를 더 넘기다가 강혁이 하나를 눌렀다.“여기.”은유가 사진을 확대했다.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큰 창.침대 하나.작은 테이블.“좋은데요.”“응.”“비싸네요.”“그래서?”은유가 강혁을 봤다.“그냥 말한 건데요.”“예약해.”“제가요?”“네가 가고 싶다며.”은유가 웃었다.“네.”그렇게 주말 일정이 정해졌다.⸻토요일 아침.은유가 평소보다 먼저 준비를 끝냈다.작은 여행 가방을 현관에 세워놓고,강혁이 나오길 기다렸다.강혁이 차 키를 들고 나오다가 가방을 봤다.“그게 다야?”“하룻밤인데요.”“지난번엔 훨씬 많았잖아.”“그땐 거의 이사였잖아요.”강혁이 피식 웃었다.은유가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뭐 드실래요?”“뭐가.”“가는 길에요.”“아침 먹었잖아.”“휴게소요.”“벌써?”은유가
주말 저녁이었다.초인종이 울리자 강혁이 현관으로 갔다.문을 열자 태준이 서 있었다.한 손에는 술이 든 봉투,다른 손에는 대충 사 온 안주가 들려 있었다.“오랜만.”“들어와.”태준이 신발을 벗다가 멈췄다.현관 한쪽에 여자 구두가 몇 켤레 놓여 있었다.낯선 건 아니었다.문제는 너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는 거였다.태준이 안으로 들어왔다.거실을 한번 둘러봤다.소파 위에는 얇은 담요가 접혀 있었고,테이블 한쪽에는 작은 머리끈이 놓여 있었다.의자 등에는 여자 카디건이 걸쳐져 있었다.태준이 말했다.“나 집 잘못 찾아온 줄 알았네.”강혁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돌아봤다.“주소 알잖아.”“그 얘기가 아닌데.”“그럼 뭔데.”태준이 잠깐 강혁을 봤다.“됐다.”강혁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얼굴이었다.그때 침실 쪽 문이 열렸다.은유가 나왔다.편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이었다.머리는 느슨하게 묶여 있었다.태준을 보자 바로 웃었다.“오랜만이에요.”태준이 잠깐 멈췄다.“어.”은유가 소파 쪽으로 오다가 태준이 들고 온 봉투를 봤다.“많이 사 오셨네요.”“얘가 먹잖아.”태준이 강혁을 가리켰다.강혁이 봉투를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렸다.은유가 자연스럽게 그 안을 들여다봤다.“이건 냉장고 넣어야겠는데요.”“응.”강혁이 대답했다.은유는 병 하나를 꺼내 주방으로 가져갔다.태준이 그 뒷모습을 봤다.다시 강혁을 봤다.강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컵을 꺼내고 있었다.“너.”“왜.”태준이 입을 열었다가 말았다.“아니다.”“뭔데.”“좀 있다가.”강혁이 미간을 찌푸렸다.“이상한 새끼.”은유가 주방에서 웃었다.“태준 씨 원래 저러잖아요.”태준이 바로 은유를 봤다.“나 원래 이래요?”“조금요.”“강혁아.”“왜.”“얘 원래 나한테 이렇게 말했냐?”강혁이 컵을 내려놓았다.“뭐가.”은유도 고개를 갸웃했다.“제가 뭐라고 했는데요?”태준이 둘을 번갈아 봤다.둘 다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태준이 한숨을 쉬었
은유가 먼저 눈을 떴다.아직 알람이 울리기 전이었다.평소 같으면 옆자리가 먼저 비어 있을 시간인데,오늘은 아니었다.강혁이 그대로 누워 있었다.은유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처음에는 그냥 더 자는 줄 알았다.그런데 이상했다.숨이 조금 무거웠다.이불 밖으로 나온 손도 가만히 있었다.은유가 몸을 돌렸다.“주인님.”대답이 없었다.조금 더 가까이 갔다.“주인님.”강혁이 그제야 눈을 떴다.“응.”목소리가 잠겨 있었다.은유가 바로 상체를 일으켰다.“왜 그래요.”“뭐가.”“목소리가요.”강혁이 미간을 한번 찌푸렸다.“자다 깨서 그래.”“아닌 것 같은데요.”은유가 손을 뻗었다.강혁의 이마에 손바닥을 올렸다.잠깐 그대로 있었다.“뜨거워요.”“조금.”“조금 아니잖아요.”강혁이 은유의 손을 잡아 내렸다.“괜찮아.”은유가 그 손을 내려다봤다.“안 괜찮은데요.”“열 좀 난다고 안 죽어.”은유가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누가 죽는다고 했어요.”강혁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은유는 이미 침대에서 내려가고 있었다.“어디 가.”“체온계 가지러 가요.”“됐어.”“안 됐어요.”은유가 서랍을 열었다.체온계를 찾아 돌아왔다.강혁이 그걸 보자 한숨을 쉬었다.“진짜 괜찮다니까.”“가만히 계세요.”은유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강혁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체온계를 귀에 가져다 댔다.삑.은유가 화면을 확인했다.“38도 넘잖아요.”“그래서.”“그래서가 아니죠.”은유가 체온계를 내려놓았다.강혁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은유가 바로 어깨를 눌렀다.“누워 계세요.”강혁이 그 손을 봤다.“은유야.”“그렇게 불러도 안 돼요.”“뭐가 안 돼.”“일어나는 거요.”강혁이 잠깐 은유를 봤다.그러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휴대폰을 집었다.화면을 켰다.은유가 그걸 보자 바로 손을 내밀었다.“주세요.”“왜.”“뭐 하시려고요.”“확인만.”“뭘요.”“메일.”은유가 강혁 손에서 휴대폰을 빼갔다.강혁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