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천지그룹 본채의 서재 안, 무거운 공기 속에서 지안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천 회장은 아들의 단단해진 눈빛을 가만히 응시하며 물었다.“뭘?”지안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가운 포식자의 그것으로 변했다.그는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실어 대답했다.“범 무서운 줄 모르고 호랑이 굴에 함부로 들어온 이유를요.”천 회장은 아들의 기백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지안이 파악했음을 직감한 듯했다.“역시 네가 아는 녀석인 게 분명하구나.”그 말에 지안은 대답 대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배신감과 분노가 뒤섞인 침묵이었다. 천 회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보롬이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테이블에 쾅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눈에 불을 켠 보롬의 기세에 서린의 주위에 있던 여자들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언니 눈엔 대기업 타이틀 안 달고 있으면 다 급이 낮아 보여요? 우물 안 개구리도 아니고 하이클래스 타령은 무슨. 어디서 되도 않는 안목으로 남의 옷을 평가질이야? 언니가 입은 그 번쩍거리는 드레스보다 별이가 입은 게 훨씬 고급스럽고 비싸니까 그 입 좀 다무시죠?”“뭐, 뭐라고? 강보롬 너 지금…!”서린이 악에 받쳐 비명을 질렀지만 보롬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대신 와인에 젖은 별의 드레스를 느긋하게 훑어보았다.얼핏 심플해 보이지만,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현대적인 감성의 하이엔드 브랜드 한정판이었다.‘구할 능력도 안 되면서 눈만 높아가지고.’화려하게 치장만 할 줄 알았지, 진짜 세련된 가치는 알아보지도 못하는 서린의 무식함이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다.반면 서린은 제 자존심인 값비싼 드레스마저 보롬에게 하찮게 부정당하자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보롬이 어이없다는 듯 비죽 웃으며 서린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순간 서린의 안색이 험악해졌지만, 그보다 빠르게 초롬과 율이 보롬의 양옆을 가로막아 섰다.두 남자가 뿜어내는 묵직한 위압감에 서린이 헉 소리를 삼키며 주춤 물러섰다.안 그래도 보롬의 기세에 밀리던 서린은 두 대기업 후계자가 대놓고 압박해 오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감히 건드릴 수 없는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확실한 지원군까지 등 뒤에 둔 보롬이 더욱 기세등등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때 우진이 뒤에 숨어있지 말고, 내가 먼저 파트너 있냐고 물어볼 걸 그랬네요. 3년 내내 후회했거든요.”귀를 파고드는 낮고 선명한 음성에 별이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장난이라기엔 강륜의 눈동자가 너무 깊었고, 그 안에 담긴 열기가 지나치게 뜨거웠다.예상치 못한 고백의 무게에 별이의 뽀얀 얼굴이 순식간에 터질 듯이 붉어졌다.“어… 저, 그게…”당황한 별이가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연신 드레스 자락만 만지작거렸다.그런 별이를 내려다보는 강륜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3년 전과 똑같이 곤란해하는 그 버릇마저 미치도록 자극적이었다.강륜이 한 걸음 더 좁혀 들어오려는 찰나, 뒤에서 톡 쏘는 익숙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어라? 거기 문성그룹 대단하신 장남분 아니세요?”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화려한 샴페인 잔을 들고 한쪽 턱을 치켜든 채 다가오는 사람, 보롬이었다.그리고 그 뒤를 특유의 여유로운 비소를 머금은 채 따라오는 채 율이 보였다.보롬은 별이의 빨개진 얼굴을 슥 훑고는, 곧장 강륜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눈을 가늘게 떴다.“3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고만장한 자세는 여전하시네. 우리 별이한테 무슨 볼일이 있으셔서 그렇게 바짝 붙어 계실까?”“보롬아…”별이가 당황해서 보롬의 옷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강륜은 제 할 말 거침없이 다 하는 보롬의 까칠한 성질머
회사로 돌아온 뒤에도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창밖을 내다보는 강륜의 시선 끝에는 줄곧 한별이 걸려 있었다.어떻게 해야 저 오만한 천지안의 옆에서 별이를 떼어놓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온전히 제 손에 쥐게 될지. 머릿속이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생각을 끊어낸 건 타이밍 좋게 울린 연락이었다.KKM 방송국장 아들, 며칠 후에 있을 하우진의 생일파티 초대장.며칠후강륜은 가볍게 넥타이를 매만지며 파티장으로 향했다.파티장은 하우진의 화려한 인맥들로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었다.초롬해달, 신호유니, 율보롬을 비롯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가득했다.“어머, 문강륜 씨 맞죠? 오늘 오신다는 얘기 들었어요.”“강륜 씨, 이따 저랑 샴페인 한잔해요.”화려하게 꾸민 여자들이 끊임없이 다가와 강륜에게 말을 걸고 눈길을 보냈다.하지만 강륜은 건조하게 미소만 지어 보일 뿐, 대충 고개만 끄덕이며 받아넘겼다.그 어떤 화려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강륜의 시선은 오직 한 곳, 파티장 입구만을 향해 있었다.그때, 입구 쪽이 술렁이기 시작했다.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며 걸어 들어오는 두 사람.갓 퇴원해 아직 조금 창백한 얼굴의 별이, 그리고 그 곁을 완벽하게 에스코트하며 서 있는천지안이었다.순간, 강륜은 숨을 멈췄다.뇌리를 강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기묘한 감각.완전히 다른 장소, 다른 인파 속이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본 순간, 3년 전 그날의 풍경이 그대로 겹쳐 들었다. 지독한 데자뷰였다.주변의 소음이 순식간에 아득해졌
“네가 왜 거기에 있지?”지안의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강륜의 귓가를 때렸다.강륜은 순간 몸이 굳었다.지안의 시선이 마치 제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아 덜컥 당황스러웠다.방금 전 별이를 보며 제어할 수 없이 날뛰었던 심장 소리를, 혹시 지안이 눈치챈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3년 전처럼, 또다시 별이에게 쏠린 제 시선을 들킬까 봐 초조해졌다.하지만 이내 주머니 속 손에 힘이 들어갔다.이번만큼은 순순히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지안을 완전히 끌어내리겠다는 목적 뒤로, 한별이라는 여자를 저 오만한 놈에게 다시는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강륜은 억지로 표정을 지워내며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지안을 향한 눈빛에는 조금의 동요도 남겨두지 않았다.“질문이 이상하네, 천지안.”강륜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침대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하지만 시선은 지안을 똑바로 받아쳐 냈다.“생명의 은인이 병문안 온 게, 그렇게 눈을 부릅뜰 일인가?”아닌 듯 긴 듯한 아슬아슬한 도발이었다.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공기에 별이가 의아한 듯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지안의 턱끝이 딱딱하게 굳어졌다.강륜의 입에서 나온 은인이라는 단어가 지안의 신경을 거칠게 긁어내렸다.“맞잖아. 3년 전 그날, 내가 너랑 같이 물속에 뛰어든 건 한별 씨도 기억하고 있던데. 아니라고 부정이라도 하게?”강륜이 던진 팩트에 지안의 시선이 별이에게
잠시 뒤.지안이 서류를 정리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상할 만큼 절묘한 타이밍으로 두 사람의 동선이 엇갈렸다.VIP 병동 602호.강륜은 무거운 숨을 내쉬며 병실 문 앞에 멈춰 섰다.손에 쥔 휴대폰 화면엔 아직 꺼지지 않은 기사와 숫자들이 떠 있었다.천지호텔, 그리고 천지안.강륜은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꺼버렸다.별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뒤숭숭했다.지안을 무너뜨릴 완벽한 기회를 잡았음에도 머릿속은 원인 모를 소음으로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그 순간, 병실 안에서 희미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강륜은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문을 열었다.창밖의 노을을 바라보던 별이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어…”지안을 기다리던 얼굴이 낯선 상대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그러다 이내, 기억의 파편을 찾아낸 듯 별이의 눈빛이 밝아졌다.“혹시… 문성그룹 문강륜 씨?”강륜의 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호명에 심장이 기분 나쁘게 일렁였다.“…나를 기억합니까?”“3년 전에… 저 도와주셨잖아요.”별이의 그 맑은 대답은 강륜을 단숨에 3년 전 그날 밤으로 끌어내렸다.3년전, 파티장 입구“야, 문강륜. 표정 좀 풀어라. 여기까지 와서 시위하냐?”하우진이 투덜거렸지만 강륜
강남 도심의 야경을 등진 문성그룹 전략통제실.본부장 문강륜은 세 개의 대형 모니터가 내뿜는 푸른 광원 속에 파묻혀 있었다.화면에는 실시간으로 폭락 중인 천지호텔의 주가 그래프가 붉은 숫자를 토해내고 있었다.“이번엔 아니지, 천지안.”강륜은 태블릿 위에 무심하게 서명을 갈겼다.천지호텔의 투매 물량을 우회 자금으로 긁어모으라는 최종 승인이었다.별이가 깨어난 지금이야말로 지안이 가장 허술해진 타이밍이었고, 강륜에겐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모니터 속 지안의 파파라치 컷을 훑었다.하지만 강륜의 그 웃음 뒤엔 3년 전, 지안에게 처참하게 밀렸던 기억이 잔상처럼 박혀 있었다.3년 전, 강원도 리조트 입찰장.수영장 사고 직후 지안이 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강륜은 나름대로의 선을 지켰다.지안을 향한 증오와는 별개로, 사경을 헤매는 여자를 둔 남자의 등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당시 강륜의 곁을 지키던 KKM 방송국장 아들 하우진은 그런 강륜의 결정을 묵묵히 지켜봤다. 오랜 친구로서, 강륜이 누구보다 지안을 경계하면서도 왜 지금 끝내지 않는지, 그 오만한 자존심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하지만 지안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별이가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지안은 무너지는 대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다시 눈을 떴을 때, 천지그룹에서 사고만 치던 망나니가 아닌, 그녀를 온전히 지탱할 수 있는 주인이 되어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그 절실함은 천 회장의 첫 임무로 이어졌다.흑룡그룹의 석과 시우가 치밀파에게서 되찾아온 설계 경매 건.지안에겐 실패해서는 안 될 테스트였고, 그 문턱에서 맞붙은 상대가 바로 강륜이었다.강륜이 서류에 펜을 대던 순간, 입찰장의 문이 열렸다.서늘한 병원 기운을 풍기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수트 차림의 지안이 걸어 들어왔다.“그 오만한 착각 때문에 오늘 문성이 날아가는 거야. 문강륜 본부장.”지안은 당황한 강륜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무심한 듯 말을 던졌다.“그 땅, 네 손으로 낙찰받는 순간, 문성그룹 재무는 박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