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똑똑- 그 순간 고요를 깨는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녀가 대답하자 묵직한 문이 열렸고 김 실장은 조심스럽게 서류를 건넸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는 재벌가 충복 특유의 절제된 기운이 감돌았다. “아가씨, 여기 도련님 정보입니다.” “네.” “그럼 쉬세요.” 김 실장이 그림자처럼 방에서 나가자 그녀는 건네받은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빳빳한 종이 위로 낯선 남자의 삶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름 천지안. 나이 열아홉 살. 뭐야, 나보다 한 살 많네? 고3인가? 성격은 차갑고 냉철한 빌런. 완전 나쁜 남자잖아?” 서류 속 사진을 들여다보는 별이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사진 속에서도 느껴지는 서늘한 아우라가 오히려 묘한 도전 정신을 자극했다.
“왜 이 집에서 빌런이래? 자세히 보니까 빌런 이 자식… 내 스타일 같기도? 한번 꼬셔 봐? 뭐, 친해져야 악당을 인간으로 순화시키든가 하니까.” 불안을 억누르려는 듯 짐짓 의지로 불타올라 짐 정리를 하던 별이는 낯선 환경이 주는 피로감에 긴장이 풀렸는지 침대 맡에서 저도 모르게 얕은 잠이 들었다. *** “야, 강 초롬?” 모던하고 깔끔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커다란 거실. 대리석 바닥을 타고 새초롬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소파에 앉아 있던 초롬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넌 오빠한테 야가 뭐냐?” “아 됐고, 어제 별이 잘 만났어?” “잘 만났지. 왜?” “아니, 연락이 안 되길래…” “그래? 어제 집 앞까지 잘 데려다줬는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겠지?” 항상 천진난만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보롬이가 오늘따라 어울리지도 않게 걱정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하자 애써 무심한 척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초롬의 눈빛에도 내심 신경 쓰이는 기색이 역력했다.별이의 소식이라면 평소보다 몇 배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초롬이었다.
“내가… 별이 집에 가볼까?” 초롬이 무심하게 휴대전화를 집어 들며 던지듯 물었다. 그러자 보롬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저기요? 생각을 해보세요. 상식적으로 내가 가는 게 맞지 않아? 내가 별이 베프거든?” “뭐, 그건 그렇지…” 보롬의 기세등등한 말에 초롬은 말문이 막힌 듯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보롬은 그런 오빠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팔짱을 낀 채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너 지금 어디 나가려는 거 아니었어?” “어~ 율이 만나러.” “뭐? 율이 선배?? 어디 가는데? 나도 갈까? 율이 선배 보고 싶은데!!” 방금까지 걱정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율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보롬의 눈이 순식간에 반짝였다.갑자기 쏟아지는 동생의 호들갑에 초롬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관심 끄셔. 나 간다.” 매몰차게 집을 빠져나가는 초롬이었지만 현관문을 닫는 손길에는 숨길 수 없는 일말의 초조함이 묻어났다.둔한 보롬은 모를, 초롬만의 예민한 직감이 자꾸만 별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멀어지는 오빠의 뒷모습을 입술을 삐죽이며 흘겨보던 보롬은 다시 어두운 휴대폰 화면만 만지작거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별이 그 계집애는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야. 걱정되게…” 보롬의 혼잣말이 정막한 거실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 별이가 침대에 기대앉아 얕은 잠에 빠져있던 그때, 달칵. 잠겨 있지 않던 방문이 예고 없이 거칠게 열렸다.별이는 날카로운 마찰음에 놀라 번쩍 눈을 떴다.
열린 문틈 사이로 긴 그림자가 괴물처럼 드리워지더니 이내 압도적인 아우라를 풍기는 남자가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 비… 빌런?” 지안을 본 별이는 숨을 들이켰다.실물은 서류 사진보다 훨씬 매혹적이고 치명적이었다.
공간을 단숨에 장악하는 그의 서늘한 체온이 피부에 닿는 듯했다.
지안은 먹잇감을 살피는 포식자처럼 별이를 빤히 훑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너냐? 우리 집에 끌려온 담보가?” 지안의 목소리는 낮고 자극적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별이가 마른침을 삼키며 겨우 인사를 건넸지만 지안은 대답 대신 별이의 코앞까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그러더니 다짜고짜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별이의 턱을 살며시 잡아 올렸다.
지안의 시린 손끝이 턱끝을 자극했다.
“이거 놔요! 뭐 하시는 거예요?” 별이가 당혹감에 고개를 비틀었지만 지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마치 물건을 감정하듯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천 회장이 하도 담보, 담보 하길래 대단한 게 오는 줄 알았더니.” 지안이 손을 거칠게 거두며 차갑게 뱉었다. “별거 없네.” 순간 별이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두려움보다 먼저 치솟은 것은 자존심이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재수 없게 하세요?” 지안의 눈썹이 꿈틀했다.예상치 못한 반격이라는 듯 무감각하던 그의 눈동자에 생경한 빛이 스쳤다.
“뭐?” “재수 없다고요, 그쪽!” 별이는 지안의 서늘한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뺨에 열기가 올랐지만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남의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얼굴 평가는 왜 하는데요? 내가 담보지, 인형이에요?” 지안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비웃음 같기도, 흥미 같기도 한 기묘한 미소였다.그는 다시 별이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심장 소리가 들릴 듯한 거리에서 그의 나른한 숨결이 별이의 뺨을 스쳤다.
“너,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그의 낮은 목소리가 별이의 귓가를 긁듯이 파고들었다. “넌 그냥 우리 집에 끌려온 인간 담보일 뿐이야. 주제넘게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 순식간에 지안의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기운에 방 안의 온도가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난 너같이 돈만 밝히는 골 빈 년들, 딱 질색이니까.” 별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모욕적인 언사보다 그 차가운 눈빛이 심장을 정면으로 찌르는 것 같았다. 이것이 앞으로 펼쳐질 지옥 같은 동거의 시작이었다.정원의 공기는 밤이 깊어질수록 차갑게 가라앉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온도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별이가 정원을 가로질러 본채로 돌아가려던 찰나 지안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녀린 팔목을 낚아챘다.“가지 마.”그녀의 귓가에 지안의 목소리가 낮고 뜨겁게 울려 퍼졌다.평소의 서늘한 명령조가 아닌 어딘가 애원하는 듯한 떨림이 섞인 목소리였다.예상치 못한 붙잡음과 고백 같은 그 한마디에 별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지안은 대답 대신 별이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갑작스러운 포옹에 별이의 고개가 지안의 단단한 가슴팍에 파묻혔다.지안은 말없이 별이를 안은 채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전해지는 은은한 샴푸 향과 기분 좋은 온기를 느꼈다.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지만 지안은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마른침을 삼킨 그가 품에서 별이를 살짝 떼어내어 그녀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선배, 무슨 일 있어요?”별이가 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묻자 지안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음을 깨달았다.그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별이의 하얀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차가운 밤공기와 대비되는 그의 손바닥 온기가 별이의 피부에 닿았다.지안은 단숨에 그녀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포개었다.별이의 숨결이 멎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달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졌고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정원을 가득 채웠다.짧지만 강렬했던 첫 입맞춤 끝에 지안이 수줍은 듯 입을 열었다.
지안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제안에 율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살폈다.“이열~ 천 지안 뭐야!! 며칠 사이에 여자 기분도 생각할 줄 아는 스윗남이 다 되셨네?”“있잖아, 율아. 넌 진짜 그 입이 문제야.”“내 입이 왜? 내 입술이 상당히 치명적이야?”“… 됐고, 초롬이랑 보롬이도 우리 집으로 오라 해.”지안의 뺨에 붉게 그어진 생채기를 발견한 율이 짓궂게 물었다.“그런데 네 얼굴은 왜 이러냐? 설마~ 유하나한테 맞았냐?”“… 시끄러워.”“천하의 천 지안 얼굴에 상처를 입히다니… 유 하나 대범하긴 하다.”“… 지랄~”“넌 맨날 할 말 없으면 지랄, 지랄하더라?”“알면 눈치껏 닥치고 있어.”지안의 짜증 섞인 말투에도 율은 그저 옅은 미소를 지었다.친구의 눈빛이 전보다 훨씬 맑아진 것이 반가웠기 때문이다.율은 초롬과 보롬을 부르기 위해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아~ 곧 회장님 오실 때 됐는데 왜 안 들어와~”생각지도 못한 지안의 늦은 귀가에 별이는 대문 앞을 서성이며 중얼거렸다.상처 난 얼굴로 나간 그가 혹여 또 사고라도 당했을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그때, 가로등 불빛 사이로 지안의 실루엣이 보였다.저만치 서 있는 별이를 발견한 지안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왜 나와 있
지안과 율은 세련된 대리석 복도를 지나 블랙드래곤으로 향했다.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은은한 매립등이 켜지며 그들의 길을 안내했다.이곳은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없는 대한민국 상위 0.1%의 자제들만이 모여금기된 유흥과 정보를 나누는 은밀한 아지트였다.벽면에는 이름만 대면 알법한 거장들의 현대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공기마저 갤러리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정갈하고 고급스러웠다.평소 지안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뒷문을 선호하곤 했지만 오늘은 보란 듯이 정문의 묵직한 황금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화려하면서도 절제된 조명이 쏟아지는 로비에서 이곳의 실질적인 운영이자 정신적 지주인 석이가 그들을 반겼다.“어~ 어서오… 왔냐?”석이는 평소와 달리 날이 서 있는 지안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짐짓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지안은 인사조차 생략한 채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네. 유 하나는요? 어디에 있어요?"“4번 룸.”“다녀올게요.”이제는 정말 다 끝내야 했다.억지로 이어온 인연의 끈을 끊어내기 위해 지안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하나의 방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까칠하고 히스테릭한 하나에게 시달릴 친구의 모습이 눈에 선했던 율이 뒤에서 작게 외쳤다.“명복을 빈다. 친구.”“제발… 넌, 그 입 좀 다물어….”날이 잔뜩 선 지안의 목소리가 복도 끝에 차갑게 박혔다.석이는 그런 지안의 뒷모습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지안이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석이는 옆에서 구경하듯 서 있는 율에게 시선을 옮겼다.석이가 턱끝으로 지안이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며 넌지시 물었다.“지안이는 그렇다 치고. 넌 왜 왔냐?”“와, 형. 섭섭하게. 전 여기 오면 안 돼요?”율이 억울하다는 듯 가슴에 손을 얹으며 능청을 떨었다.하지만 석이는 속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율의 화려한 재킷을 위아래로 훑었다.“너 평소에 뒤풀이 없으면 발도 안 붙이잖아.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기어 들어왔냐고.”“아니
피식-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지안이 답답한지 율은 성큼성큼 다가와 다시 물었다.“응?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줄래? 내 머리로는 지금 저 방 안에서 벌어지는 게 최고의 구경거리거든.”율의 물음에도 지안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그는 손목에 감긴 고가의 시계를 한 번 슥 훑고는 사냥을 끝낸 포식자의 눈빛으로 율을 향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한마디로 쟤네 X됐다는 말씀. 내가 집에서 나올 때 저 새끼들 부모한테 연락했거든. 천지 호텔 스위트룸으로 오라고.”지안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액정의 푸르스름한 빛이 그의 서늘한 얼굴을 비추었다.“ 정확히 10분 뒤면 도착할 거야.”지안의 목소리에는 그들이 맞이할 파멸을 확신하는 지독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지안의 말에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한 율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감탄을 터뜨렸다.지안의 복수는 단순히 그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일회성 유흥이 아니었다.창민과 태리의 집안은 대대로 앙숙이었다.사업상 라이벌이자 서로의 사생활을 헐뜯지 못해 안달 난 그들이 자신들의 자식이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뒤엉켜 있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면?그것은 두 사람의 파멸이자 두 가문의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이 될 터였다.“진짜? 대박!!! 천 지안 제대론데? 저 새끼들 이제 빼박이네? 쟤네 둘이 저러고 다니는 거 보면 두 집안 사람들 중에 어느 한 명 쓰러지겠네? 특히 이태리네 아빠, 뒷목 잡고 쓰러지는 거 아니냐?”“에이~ 또 모르지. 이 기회로 사이가 더 좋아질지?”지안이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리며 툭 던졌다.앙숙인 두 집안이 자식들 사고 덕분에 사돈이라도 맺게 될 끔찍한 시나리오를 떠올린 듯 그의 눈엔 서늘한 유머 감각이 스쳤다.“와우! 생각할수록 대박이네!”율은 전율이 돋는 듯 제 팔을 감싸 쥐며 복도가 울리도록 낄낄거렸다.하지만 지안은 이미 흥미가 다 식어버린 표정으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한바탕
천지 호텔 최상층,두터운 정적이 감도는 스위트룸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어 번쩍였지만 그 빛은 따스함 대신 서늘한 냉기만을 머금고 있었다.그 차가운 바닥 위로 학교에서는 기세등등하던 창민과 태리가 사시나무 떨듯 무릎을 꿇고 있었다.“있지? 얘들아? 내가 너희를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야.”지안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지만 그 울림은 방 안의 모든 가구 위로 날카롭게 박혔다.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그들을 내려다보는 지안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그 옆을 지키는 율 역시 평소의 장난기 어린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사형 집행관처럼 무거운 침묵을 유지했다.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창민은 이대로 맥없이 당하는 것이 억울했는지 파르르 떨리는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리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래서… 우리를 잡아 와서 어쩌려고…?”지안의 눈동자가 서서히 창민을 향해 구르며 멈췄다.“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궁금하냐?”“…때릴 거면 빨리 때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는 말도 있잖아.”하. 요것 봐라.창민의 영혼 없는 헛소리에 지안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하지만 그 웃음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지안의 기분이 극도로 언짢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창민은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싶어 급하게 다시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지안은 단단한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딱,딱하고 불길하게 울릴 때마다 창민의 어깨가 움찔거렸다.지안이 저에게 다가올까 봐 노심초사하는 창민의 예상과는 다르게 지안은 두 걸음 정도 천천히 떼더니 태리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공포심에 젖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태리에게 지안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이름을 불렀다.“이태리.”“어…?”“네가 잘하는 게 있다며?”잘하는 것? 태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떨리는 눈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그 눈동자 안에는 지안을 향한 오랜 집착과 뒤틀린 동경, 그리고 지금 마주한 거대한 공
석이는 능수능란하게 그녀들을 VIP 전용 구역으로 안내했다.블랙드래곤은 지안과 율, 초롬같은 트리니티가 자리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날의 공기가 달라질 만큼, 그들의 존재감이 압도적인 공간이었다.지안을 찾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낮은 대화 속에 섞여드는 블랙드래곤의 밤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소란스러웠다.한편, 지안의 호출에 율이 나가고 집안에 단둘이 남은 초롬과 보롬은 넓은 거실을 가득 채운 기묘한 정적 속에서 서로 눈치만 살폈다.TV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공간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 어색하게 교차했다.“뭐. 할 말 있냐?”머쓱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뗀 초롬이 삐딱하게 앉아 있는 보롬을 바라보며 물었다.보롬은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평소의 장난기를 지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였냐?”“뭐가?”초롬은 짐짓 모르는 척 시선을 피했지만 이미 굳어진 그의 어깨가 긴장을 드러내고 있었다.“별이 좋아한 거.”“알아서 뭐 하게?”“아~ 진짜 재수 없어~ 강 초롬.”입술을 쭉 내민 보롬을 보고 초롬은 헛웃음을 삼켰다.그는 이내 시선을 거실 유리창 너머 어두운 먼 곳으로 던지며 아주 오래된 비밀을 꺼내놓듯 낮게 중얼거렸다.“10년.”“뭐? 10년이라고? 그럼 몇 살이야… 9살? 대박! 첫사랑이나 다름없네.”보롬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열 손가락을 다 접어가며 날짜를 계산하자 초롬은 대답 대신 무거운 침묵으로 긍정했다.그의 눈동자엔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인 별이에 대한 연심이 일렁였다.“그동안 왜 숨겼어?”“숨긴 게 아니라 네가 궁금해하지 않으니까 말 안 한 건데?”“그래서 별이 일이라면 매번 발 벗고 나섰구나? 진짜 강초롬 대박이다~~”“대박은 무슨… 나 들어간다?”쑥스러움이 한계치에 다다른 초롬이 서둘러 방으로 몸을 돌렸다.그 순간, 보롬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나도!! 고… 고마웠어!!! 어릴 적에 나 놀리던 애들 다 혼내줘서…”초롬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