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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빌런, 천 지안.

Author: 연화령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3-12 00:26:06

똑똑- 그 순간 고요를 깨는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녀가 대답하자 묵직한 문이 열렸고 김 실장은 조심스럽게 서류를 건넸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는 재벌가 충복 특유의 절제된 기운이 감돌았다.

“아가씨, 여기 도련님 정보입니다.”

“네.”

“그럼 쉬세요.”

김 실장이 그림자처럼 방에서 나가자 그녀는 건네받은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빳빳한 종이 위로 낯선 남자의 삶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름 천지안. 나이 열아홉 살. 뭐야, 나보다 한 살 많네? 고3인가? 성격은 차갑고 냉철한 빌런. 완전 나쁜 남자잖아?”

서류 속 사진을 들여다보는 별이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사진 속에서도 느껴지는 서늘한 아우라가 오히려 묘한 도전 정신을 자극했다.

“왜 이 집에서 빌런이래? 자세히 보니까 빌런 이 자식… 내 스타일 같기도? 한번 꼬셔 봐? 뭐, 친해져야 악당을 인간으로 순화시키든가 하니까.”

불안을 억누르려는 듯 짐짓 의지로 불타올라 짐 정리를 하던 별이는 낯선 환경이 주는 피로감에 긴장이 풀렸는지

침대 맡에서 저도 모르게 얕은 잠이 들었다.

***

“야, 강 초롬?”

모던하고 깔끔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커다란 거실.

대리석 바닥을 타고 새초롬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소파에 앉아 있던 초롬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넌 오빠한테 야가 뭐냐?”

“아 됐고, 어제 별이 잘 만났어?”

“잘 만났지. 왜?”

“아니, 연락이 안 되길래…”

“그래? 어제 집 앞까지 잘 데려다줬는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겠지?”

항상 천진난만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보롬이가 오늘따라 어울리지도 않게 걱정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하자 애써 무심한 척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초롬의 눈빛에도 내심 신경 쓰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별이의 소식이라면 평소보다 몇 배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초롬이었다.

“내가… 별이 집에 가볼까?”

초롬이 무심하게 휴대전화를 집어 들며 던지듯 물었다. 그러자 보롬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저기요? 생각을 해보세요. 상식적으로 내가 가는 게 맞지 않아? 내가 별이 베프거든?”

“뭐, 그건 그렇지…”

보롬의 기세등등한 말에 초롬은 말문이 막힌 듯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보롬은 그런 오빠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팔짱을 낀 채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너 지금 어디 나가려는 거 아니었어?”

“어~ 율이 만나러.”

“뭐? 율이 선배?? 어디 가는데? 나도 갈까? 율이 선배 보고 싶은데!!”

방금까지 걱정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율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보롬의 눈이 순식간에 반짝였다.

갑자기 쏟아지는 동생의 호들갑에 초롬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관심 끄셔. 나 간다.”

매몰차게 집을 빠져나가는 초롬이었지만 현관문을 닫는 손길에는 숨길 수 없는 일말의 초조함이 묻어났다.

둔한 보롬은 모를, 초롬만의 예민한 직감이 자꾸만 별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멀어지는 오빠의 뒷모습을 입술을 삐죽이며 흘겨보던 보롬은 다시 어두운 휴대폰 화면만 만지작거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별이 그 계집애는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야. 걱정되게…”

보롬의 혼잣말이 정막한 거실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

별이가 침대에 기대앉아 얕은 잠에 빠져있던 그때, 달칵. 잠겨 있지 않던 방문이 예고 없이 거칠게 열렸다.

별이는 날카로운 마찰음에 놀라 번쩍 눈을 떴다.

열린 문틈 사이로 긴 그림자가 괴물처럼 드리워지더니 이내 압도적인 아우라를 풍기는 남자가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 비… 빌런?”

지안을 본 별이는 숨을 들이켰다.

실물은 서류 사진보다 훨씬 매혹적이고 치명적이었다.

공간을 단숨에 장악하는 그의 서늘한 체온이 피부에 닿는 듯했다.

지안은 먹잇감을 살피는 포식자처럼 별이를 빤히 훑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너냐? 우리 집에 끌려온 담보가?”

지안의 목소리는 낮고 자극적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별이가 마른침을 삼키며 겨우 인사를 건넸지만 지안은 대답 대신 별이의 코앞까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별이의 턱을 살며시 잡아 올렸다.

지안의 시린 손끝이 턱끝을 자극했다.

“이거 놔요! 뭐 하시는 거예요?”

별이가 당혹감에 고개를 비틀었지만 지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마치 물건을 감정하듯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천 회장이 하도 담보, 담보 하길래 대단한 게 오는 줄 알았더니.”

지안이 손을 거칠게 거두며 차갑게 뱉었다.

“별거 없네.”

순간 별이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두려움보다 먼저 치솟은 것은 자존심이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재수 없게 하세요?”

지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예상치 못한 반격이라는 듯 무감각하던 그의 눈동자에 생경한 빛이 스쳤다.

“뭐?”

“재수 없다고요, 그쪽!”

별이는 지안의 서늘한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뺨에 열기가 올랐지만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남의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얼굴 평가는 왜 하는데요? 내가 담보지, 인형이에요?”

지안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비웃음 같기도, 흥미 같기도 한 기묘한 미소였다.

그는 다시 별이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심장 소리가 들릴 듯한 거리에서 그의 나른한 숨결이 별이의 뺨을 스쳤다.

“너,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그의 낮은 목소리가 별이의 귓가를 긁듯이 파고들었다.

“넌 그냥 우리 집에 끌려온 인간 담보일 뿐이야. 주제넘게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

순식간에 지안의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기운에 방 안의 온도가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난 너같이 돈만 밝히는 골 빈 년들, 딱 질색이니까.”

별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모욕적인 언사보다 그 차가운 눈빛이 심장을 정면으로 찌르는 것 같았다.

이것이 앞으로 펼쳐질 지옥 같은 동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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