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빠! 엄마! 그게 무슨 소리야? 담보라니! 계약이라니!”
한 별의 외침이 거실의 정적을 날카롭게 가르며 파고들었다.
넉넉하고 평온했던 집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진흙탕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 대표는 차마 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바닥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10년 전,
투자 유치를 위해 서명했던 가혹한 조항.
당시에는 사업을 일으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신 있게 써 내려갔던 문장들이었다.
분명 자신을 위해 작성했던 조항들이었지만 지금 와서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어있었다.
“별아 미안하다. 투자금을 돌려주지 못하면 네가 담보로 잡혀가야 해. 네가 가야 별푸드가 살 수 있어.”
아버지의 음성은 패배자의 그것처럼 힘없이 갈라져 있었다.
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보다 부모님의 절망적인 얼굴을 마주하는 고통이 더 컸다.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할게. 내가 갈게. 아빠는 회사 살려. 난 괜찮아.”
별은 도망치듯 씩씩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굳게 닫힌 문 너머, 홀로 침대에 앉자마자 긴장이 풀린 듯 참아왔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그 시각. 블랙 드래곤의 VIP 룸.
은은한 시가 향과 비싼 술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에서 지안은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낡은 묵주반지를 조용히 만지작거렸다.
화려한 실내 조명이 반지의 닳은 표면에 반사되어 위태롭게 흔들렸다.
“넌 계속해서 이렇게 놀기만 할 거야? 이제 곧 회사 경영에도 신경 써야 하지 않아?”
옆에 앉은 율의 물음에 지안은 감정 없는 눈으로 차갑게 답했다.
“천 회장 엿 먹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거든. 그러는 넌? 너도 이렇게 계속 놀기만 하잖아?”
“난 그냥 여자가 좋아서 이 자식아.”
“너 다운 대답이네. 난 그 애 빼고 여자는 다 증오해. 다 형편없고 더러워.”
“그 애? 누군데?”
“있다, 그런 애가”
지안은 말끝을 흐리며 이내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묵주반지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존나 그리워하는 년.”
[에필로그]
2년 전
우르르 쾅쾅! 하늘이 찢어질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굵은 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열일곱의 지안은 짐승처럼 젖은 몸을 이끌고 우산도 없이 분노가 가득 찬 얼굴로 길가를 뛰었다.
갈 곳 없는 발길이 멈춘 곳은 어느 웅장한 성당 앞이었다.
어둠 속에서 영롱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들려오자 미칠 것 같던 지안의 마음도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지안은 흠뻑 젖은 몸으로 성모마리아상 옆 벤치에 축 늘어지듯 주저앉았다.
“하, 비는 왜 계속 오고 지랄이야. 기분 엿 같게.”
가시 돋친 독설을 내뱉던 그때 머리 위로 쏟아지던 차가운 빗줄기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지안이 고개를 들자 잿빛 세상 속에서 노란 우산 하나가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우산을 든 앳된 얼굴의 한 소녀와 시선이 맞닿았다.
“뭐냐, 넌?”
“비… 너무 많이 맞고 있길래. 그러다 감기 걸려.”
“신경 꺼. 보다시피 이미 다 젖었어. 그러니까 꺼지라고. 혼자 있고 싶으니까.”
지안은 젖어 발등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응시하며 낮게 읊조렸다.
축축하게 젖어 몸에 달라붙은 셔츠만큼이나 기분이 불쾌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지안의 서늘한 거부에도 소녀는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훑는 눈빛에는 낯선 이에 대한 경계보다 기묘한 침착함이 서려 있었다.
“화가 많이 났나 보네.”
소녀는 지안의 거친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란 우산을 지안 쪽으로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 바람에 정작 소녀의 어깨 한쪽이 사정없이 쏟아지는 빗물에 서서히 젖어가는 줄도 모른 채지안은 제 머리 위로 드리워진 노란 그림자를 노려보며 이빨을 짓씹었다.
“꺼지라니까? 내 말 안 들려?”
지안이 고개를 치켜들며 사납게 쏘아붙였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살기등등한 눈빛이었지만 소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지안의 매서운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었다.
“그렇게 비 맞고 앉아 있는 거 보기 안 좋아. 가출 같은 건 더 좋지 않고. 어서 집에 들어가. 엄마가 걱정하셔.”
소녀의 목소리는 비 오는 날의 공기처럼 차분하면서도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안은 그 걱정이라는 단어가 주는 생경함에 비릿하게 코웃음을 쳤다.
입가에는 조소와 함께 서늘한 열패감이 번졌다.
“걱정은 무슨. 그리고 나 걱정해 줄 엄마 같은 거 없거든? 그러니까 오지랖 그만 부리고 꺼지라고.”
지안은 비릿하게 코웃음을 치며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노가 서린 눈빛은 짐승의 것처럼 사나웠다.
하지만 지안의 날 선 반응에도 소녀는 당황하거나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더 깊고 따뜻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는 값싼 연민보다 더 깊은 이해 혹은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자만의 단단함이 담겨 있었다.
“아… 미안. 그래도 힘내. 지금은 죽을 만큼 힘들겠지만, 결국엔 그 힘듦도 세월에 못 이겨서 과거가 되어있을 테니까.”
그녀의 담담한 위로는 이상하게도 지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을 툭 건드렸다.
“별아! 한 별! 어디 있니!”
멀리서 누군가 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소녀의 눈동자가 다급해졌다.
그녀는 엉겁결에 우산을 지안의 손에 쥐여준 채 싱긋 웃었다.
“엄마가 찾는다! 나 먼저 갈게!”
그렇게 그녀는 짧은 인사만 남긴 채 빗줄기 너머로 멀어졌다.
소녀가 떠난 자리, 벤치 위에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남겨져 있었다.
지안은 그것을 집어 천천히 눈높이로 올렸다.
“묵주반지?”
비에 젖어 차가운 은빛 반지 안쪽에는 아주 작은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H.B.]
“H와 B…? H와 B라…”
지안은 피식, 옅은 실소를 지으며 반지를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차가웠던 손끝에 소녀가 머물다 간 미세한 온기가 남아 가슴을 간질였다.
“내 힘듦도… 정말 과거가 되긴 할까? 웃겨.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중저음으로 읊조리는 지안의 말투는 전보다 아주 조금 유해져 있었다.
미나는 밝고 활기찬 에너지로 석이의 팽팽한 긴장을 유쾌하게 풀어주었다.비정한 조직의 생활 속에서 평생을 칼날 위에 선 듯 살아온 정 석에게 미나는 그의 일상에 유일하게 허락된 따뜻한 빛이었다.두 남자는 각기 다른 결의 사랑을 받으며 차가운 겨울바람을 견뎌내고 있었다.시우에게는 은수의 정적인 위로가 석이에게는 미나의 동적인 응원이 세상 그 무엇보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통화를 마친 두 남자의 눈빛은 다시 현장의 냉혹한 현실로 돌아왔다.하지만 은수와 미나의 목소리가 남긴 잔상은 그들이 짊어진 조직의 그림자를 잠시나마 잊게 만들었다.시우와 석이는 짧은 휴식을 뒤로하고 각자의 연인이 기다리는 서울로 돌아갈 그날을 위해 다시 차가운 금속음이 난무하는 현장 깊숙이 발을 들였다. ***신호와 유니의 세상은 이제 완벽히 바뀌어 있었다.더 이상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골목길을 헤매는 데이트는 없었다.신호는 유니와의 연애를 세상 앞에 당당히 공개했고 사랑에 솔직한 그의 정면 돌파는오히려 대중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반전을 불러왔다.천지호텔 로비를 가로지르는 신호의 걸음걸이에는 감출 수 없는 여유가 묻어났다.누군가의 시선을 피해 숨어들던 과거의 긴장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이제는 투숙객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나 직원들의 선망 가득한 눈빛을 여유로운 미소로 받아낼 만큼 그는 유니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위치에서도 당당해져 있었다.그는 단순히 스타의 연인에 머물지 않았다.혹독한 현장 실무 경험을 완벽하게 마친 신호는 마침내 실력을 인정받아 천지호텔 F&B 총괄 지배인 자리에 올랐다.빳빳하게 다려진 수트와 가슴에 달린 금
강원도 리조트에서의 소란스러웠던 일정이 끝나고 한 달.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도심은 회색빛 겨울 안개에 잠겨 있었다.천지호텔 부총지배인 집무실의 무거운 정적을 깨뜨린 것은 서류가 책상 위로 떨어지는 건조한 마찰음이었다. “부총지배인님, 별푸드 밀키트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기존에 계약했던 핵심 공장 세 곳에서 오늘 오전, 일제히 가동 중단을 통보해 왔습니다.” 한 별 비서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날이 서 있었다.별푸드는 그녀의 아버지가 평생을 일궈온 회사였기에 이 사태는 단순한 업무적 결함을 넘어선 공격이었다. 별이는 보고서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위생 설비 점검이라지만 세 곳이 동시에 움직였다는 건 배후가 있다는 뜻입니다. 전략기획실의 서희 실장이 최근 해당 업체 관계자들과 잦은 미팅을 가졌다는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지안은 창밖을 응시하던 시선을 돌려 별이를 바라보았다.별이는 지금 준휘와 서희가 파놓은 함정의 깊이를 모른 채 오직 문제 해결을 위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서희 실장이 전략기획실의 권한을 이용해 거래처들을 압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총지배인님, 제가 오늘 오후에 직접 공장들을 돌며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버지 회사와 연결된 일인 만큼 제가 직접 가서 사태를 파악해야 합니다.” “한 비서, 직접 움직이지 마. 이건 전략기획실 차원에서 던진 미끼야.” 지안의 만류에도 별이는 고집스럽게 서류 더미를 챙겼다. “지안 씨 프로젝트이자 저희 아버지의 자부심이 걸린 일이에요. 제가 가서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별이는 단호한 목례를 남
지안의 말은 가시 돋쳐 있었다.과거 200억 사건과 납치의 기억이 서린 서늘한 경고였다.시우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고 집게를 쥔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지안의 곁에 앉은 별이는 그의 날 선 반응에 잠시 눈을 내리깔며 빈 잔만 매만졌다.하지만 은수는 흔들리지 않았다.그녀는 지안의 차가운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오히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전 시우 씨의 그런 점이 좋아요. 남들은 모르는 그 단단한 속내가.” 은수의 단호한 대답에 지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시우가 별이를 지키기 위해 했던 희생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지안이었기에 은수의 말은 그의 급소를 정확히 찌른 셈이었다.사실 지안은 치밀파에게 붙잡혀 있던 시우를 구하러 갔던 그날, 설계도에 얽힌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미 그를 용서했었다.사건 직후 열린 파티에 시우를 초대했던 순간부터 지안의 마음속에 앙금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다만 자책의 굴레에 갇혀 스스로 벽을 치는 시우를 보며 지안 역시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기다려주었을 뿐이다.오늘 던진 가시 돋친 말 역시 은수가 시우의 그 지독한 속내까지 감당할 수 있는 여자인지 확인하고 싶은 지안만의 서툰 테스트였다.잠시 침묵하던 지안이 피식, 짧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들고 있던 잔을 비워냈다.날을 세우고 있던 눈빛에서 서늘함이 걷히고 그 자리엔 오래된 친구를 향한 해묵은 안도감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지안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새로 술을 따르며 시우가 아닌 은수를 향해 잔을 살짝 들어 보였다. “…시우 이 녀석, 보기보다 손이 많이 갈 겁니다.” 무심하게 툭 던진 말이었
가볍게 감탄하는 대신 상황의 본질을 짚어내는 은수의 말에 시우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은수의 눈동자엔 장난스러운 호기심 대신 시우가 처한 난처함을 이해한다는 듯한 깊은 온기가 담겨 있었다. “멋있네요. 시우 씨 곁에 이렇게 든든한 사람들이 많다는 거.” 은수는 율의 재력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시우를 위해 기꺼이 소란을 피우는 그들의 진심을 읽어준 것이었다.그 순간, 옆 테이블에서 지안의 잔을 채워주던 별이가 고개를 돌려 은수와 눈을 맞췄다.기억을 잃었어도 몸에 배어있는 별이의 우아함과 처음 보는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은수의 단단함이 허공에서 묘하게 부딪혔다. “시우 선배, 고기 좀 타는 것 같아요.” 별이가 조용히 웃음을 터뜨리며 건넨 한마디에 시우의 손이 움찔거렸다.멍하니 석쇠 위를 떠돌던 집게가 갈 곳을 잃고 멈춰 섰다.아무렇지 않게 미소 짓는 별이의 얼굴을 마주하자 시우의 심장 뒷벽이 서늘하게 긁히는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시우가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모든 현실과 비밀을 남김없이 공유하고 싶었던 여자였다.캄캄한 어둠 속에서 오직 그녀만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 줄 거라 믿으며 그 품으로 도망치고 싶었던 밤이 얼마나 많았던가.하지만 지금 별이는 지안의 곁에서 그의 보호 아래 가장 평온한 빛을 내고 있었다.시우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지켜내고 싶었던 그 눈부신 그림 속에 이제 시우의 자리는 없었다.쓰라린 잔상이 시야를 흐리던 찰나 시우의 시선이 앞에 앉은 은수에게 닿았다.별이가 지나간 과거의 선명한 흉터라면 은수는 지금 이 순간 시우의 무채색 일상에 무섭도록 짙은 색채를 들이붓고 있는 현실이었다.지안의 품에서 안
당혹 섞인 시우의 물음에 지안이 여유롭게 웃으며 다가왔다.아무런 예고도 없이 강원도 공사 현장까지 들이닥친 지안과 초롬, 율.시우는 시계를 힐끗 보았다.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이들이 올 줄 알았다면 오늘 은수와 그런 약속을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지안의 곁에는 그의 여자친구인 별이가 서 있었다.사고로 과거를 잃어버렸음에도 별이는 시우를 향해 예전과 다름없는 정중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시우 선배,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기억을 잃기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시우 선배’라는 부름.그 짧은 인사 한마디에 시우가 지켜온 긴 시간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초롬의 배우자인 해달은 학창 시절 딱 두세 번 마주친 게 전부라 여전히 서먹했고 석이만이 조카들을 만난 듯 아이들 틈에서 신이 나 있었다. “야, 윤시우! 너 왜 그래? 친구들이 여기까지 왔는데 표정이 왜 이래?” 석이가 눈치 없이 시우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시우는 대답 대신 입술을 짓씹었다.지금쯤 은수는 어제 그 고깃집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가슴 한구석을 여전히 아릿하게 만드는 과거의 약속 같은 별이와 지금 당장 달려가고 싶은 현재의 약속인 은수.시우는 제 앞의 웅성거리는 소음 너머로 고깃집의 그 서늘하고도 뜨거운 공기를 떠올렸다. “미안한데, 나 선약이 있어서.” 시우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지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지안은 시우가 현장 관리직을 맡은 이후 단 한 번도 선약 때문에 자신들을 밀어낸 적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
시우의 돌직구에 테이블 위의 소음이 진공상태처럼 사라졌다.석은 입에 넣으려던 쌈을 든 채 멈춰 섰고 은수의 친구 미나 역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희대의 사기꾼이었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본능적으로 사람의 심리를 읽는데 능한 시우였다. 그는 지금 자신의 말이 은수에게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 그녀의 짧은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동물적으로 감각하고 있었다.은수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가만히 시우의 눈을 마주하다 이내 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내일도 보면 그다음엔요?” 예상보다 더 직설적인 은수의 반문에 시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머릿속에선 이미 수십 가지의 세련된 답변이 스쳐 지나갔지만 시우는 기교를 부리는 대신 은수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다음은, 그때 가서 제가 다시 묻겠습니다. 그럼 대답 들을 기회는 주시는 걸로 알고.” 시우의 확신에 찬 어조에 은수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밀고 당기는 지루한 탐색전 대신 서로의 패를 단번에 확인한 듯한 팽팽한 텐션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좋아요. 내일도 이 시간에 여기로 올게요. 대신 그때는 제가 궁금한 거 다 대답해 주셔야 해요.” 은수가 시원하게 잔을 비워내며 답하자 시우의 입가에도 아주 옅은 미소가 걸렸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석이 참지 못하고 꽥 소리를 질렀다. “아니~~ 야, 나랑 미나 씨는 지금 투명 인간이냐? 야! 윤시우! 너 언제부터 이렇게 진도가 빨랐어?” 석이 분위기를 깨며 호들갑을 떨자 가만히 듣고 있던 미나가 갑자기 석의 팔뚝을 낚아채듯 제 쪽으로 당겨 팔짱을 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