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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묵주반지의 비밀

Penulis: 연화령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3-12 00:12:29

“아빠! 엄마! 그게 무슨 소리야? 담보라니! 계약이라니!”

한 별의 외침이 거실의 정적을 날카롭게 가르며 파고들었다.

넉넉하고 평온했던 집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진흙탕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 대표는 차마 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바닥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10년 전,

투자 유치를 위해 서명했던 가혹한 조항.

당시에는 사업을 일으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신 있게 써 내려갔던 문장들이었다.

분명 자신을 위해 작성했던 조항들이었지만 지금 와서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어있었다.

“별아 미안하다. 투자금을 돌려주지 못하면 네가 담보로 잡혀가야 해. 네가 가야 별푸드가 살 수 있어.”

아버지의 음성은 패배자의 그것처럼 힘없이 갈라져 있었다.

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보다 부모님의 절망적인 얼굴을 마주하는 고통이 더 컸다.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할게. 내가 갈게. 아빠는 회사 살려. 난 괜찮아.”

별은 도망치듯 씩씩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굳게 닫힌 문 너머, 홀로 침대에 앉자마자 긴장이 풀린 듯 참아왔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그 시각. 블랙 드래곤의 VIP 룸.

은은한 시가 향과 비싼 술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에서 지안은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낡은 묵주반지를 조용히 만지작거렸다.

화려한 실내 조명이 반지의 닳은 표면에 반사되어 위태롭게 흔들렸다.

“넌 계속해서 이렇게 놀기만 할 거야? 이제 곧 회사 경영에도 신경 써야 하지 않아?”

옆에 앉은 율의 물음에 지안은 감정 없는 눈으로 차갑게 답했다.

“천 회장 엿 먹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거든. 그러는 넌? 너도 이렇게 계속 놀기만 하잖아?”

“난 그냥 여자가 좋아서 이 자식아.”

“너 다운 대답이네. 난 그 애 빼고 여자는 다 증오해. 다 형편없고 더러워.”

“그 애? 누군데?”

“있다, 그런 애가”

지안은 말끝을 흐리며 이내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묵주반지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존나 그리워하는 년.”

​[에필로그]

2년 전

우르르 쾅쾅! 하늘이 찢어질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굵은 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열일곱의 지안은 짐승처럼 젖은 몸을 이끌고 우산도 없이 분노가 가득 찬 얼굴로 길가를 뛰었다.

갈 곳 없는 발길이 멈춘 곳은 어느 웅장한 성당 앞이었다.

어둠 속에서 영롱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들려오자 미칠 것 같던 지안의 마음도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지안은 흠뻑 젖은 몸으로 성모마리아상 옆 벤치에 축 늘어지듯 주저앉았다.

“하, 비는 왜 계속 오고 지랄이야. 기분 엿 같게.”

가시 돋친 독설을 내뱉던 그때 머리 위로 쏟아지던 차가운 빗줄기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지안이 고개를 들자 잿빛 세상 속에서 노란 우산 하나가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우산을 든 앳된 얼굴의 한 소녀와 시선이 맞닿았다.

“뭐냐, 넌?”

“비… 너무 많이 맞고 있길래. 그러다 감기 걸려.”

“신경 꺼. 보다시피 이미 다 젖었어. 그러니까 꺼지라고. 혼자 있고 싶으니까.”

지안은 젖어 발등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응시하며 낮게 읊조렸다.

축축하게 젖어 몸에 달라붙은 셔츠만큼이나 기분이 불쾌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지안의 서늘한 거부에도 소녀는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훑는 눈빛에는 낯선 이에 대한 경계보다 기묘한 침착함이 서려 있었다.

“화가 많이 났나 보네.”

소녀는 지안의 거친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란 우산을 지안 쪽으로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 바람에 정작 소녀의 어깨 한쪽이 사정없이 쏟아지는 빗물에 서서히 젖어가는 줄도 모른 채지안은 제 머리 위로 드리워진 노란 그림자를 노려보며 이빨을 짓씹었다.

“꺼지라니까? 내 말 안 들려?”

지안이 고개를 치켜들며 사납게 쏘아붙였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살기등등한 눈빛이었지만 소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지안의 매서운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었다.

“그렇게 비 맞고 앉아 있는 거 보기 안 좋아. 가출 같은 건 더 좋지 않고. 어서 집에 들어가. 엄마가 걱정하셔.”

소녀의 목소리는 비 오는 날의 공기처럼 차분하면서도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안은 그 걱정이라는 단어가 주는 생경함에 비릿하게 코웃음을 쳤다.

입가에는 조소와 함께 서늘한 열패감이 번졌다.

“걱정은 무슨. 그리고 나 걱정해 줄 엄마 같은 거 없거든? 그러니까 오지랖 그만 부리고 꺼지라고.”

지안은 비릿하게 코웃음을 치며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노가 서린 눈빛은 짐승의 것처럼 사나웠다.

하지만 지안의 날 선 반응에도 소녀는 당황하거나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더 깊고 따뜻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는 값싼 연민보다 더 깊은 이해 혹은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자만의 단단함이 담겨 있었다.

“아… 미안. 그래도 힘내. 지금은 죽을 만큼 힘들겠지만, 결국엔 그 힘듦도 세월에 못 이겨서 과거가 되어있을 테니까.”

그녀의 담담한 위로는 이상하게도 지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을 툭 건드렸다.

“별아! 한 별! 어디 있니!”

멀리서 누군가 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소녀의 눈동자가 다급해졌다.

그녀는 엉겁결에 우산을 지안의 손에 쥐여준 채 싱긋 웃었다.

“엄마가 찾는다! 나 먼저 갈게!”

그렇게 그녀는 짧은 인사만 남긴 채 빗줄기 너머로 멀어졌다.

소녀가 떠난 자리, 벤치 위에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남겨져 있었다.

지안은 그것을 집어 천천히 눈높이로 올렸다.

“묵주반지?”

비에 젖어 차가운 은빛 반지 안쪽에는 아주 작은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H.B.]

“H와 B…? H와 B라…”

지안은 피식, 옅은 실소를 지으며 반지를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차가웠던 손끝에 소녀가 머물다 간 미세한 온기가 남아 가슴을 간질였다.

“내 힘듦도… 정말 과거가 되긴 할까? 웃겨.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중저음으로 읊조리는 지안의 말투는 전보다 아주 조금 유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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