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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 앞에 서는 사람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0 04:23:34

시온의 입장문은 유리가 아침 식사를 마칠 무렵 공개됐다. 소속사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은 예상보다 짧았다. 무단으로 유통된 사생활 사진의 촬영 경위가 확인 중이며, 온리원이 해당 사진들을 촬영하거나 판매하는 데 동의한 사실은 없다는 설명이 먼저 나왔다. 뒤이어 사진을 촬영하고 유통한 사람들의 책임은 각 행위에 따라 확인될 것이라는 문장이 붙었다. 마지막 문단은 시온이 직접 고른 말이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진을 찍히는 일을 하더라도, 모든 장소에서 모든 촬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유리는 글을 끝까지 읽은 뒤 휴대전화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자신의 본명도, 태준과의 관계도 없었다. 시온이 병원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보여 주는 사진 역시 붙지 않았다. 누군가의 잘못을 설명하기 위해 피해를 다시 전시하지 않아도 되는 글이었다. 맞은편에서 커피를 마시던 태준이 그녀를 바라봤다. “괜찮아?”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시온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보여.” “세 번 고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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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문을 여는 날

    첫 관람객은 개막 시간보다 십 분 일찍 도착했다. 중년의 여자와 성인으로 보이는 딸이었다. 유리는 입구에서 이름을 확인한 뒤 아직 조명을 점검 중이라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여자는 괜찮다며 딸의 코트 깃을 바로잡았다. 딸은 익숙한 듯 몸을 조금 피했고, 두 사람은 나란히 창가 의자에 앉았다. 유리는 그 모습을 보다가 안내지를 너무 세게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종이 끝이 손바닥 안에서 구겨져 있었다.문을 열자 사람들은 예상보다 조용히 들어왔다. 첫 액자 앞에 선 여자는 사진이 빠진 줄 알고 주변을 살폈다. 설명을 읽은 딸이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했고,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들어온 관람객은 첫 액자를 지나쳤다가 두 걸음쯤 가서 돌아왔다. 유리는 그 모습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으려 했다. 오래 서 있다고 감동한 것도, 빨리 지나쳤다고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오늘 그녀가 할 일은 사람들의 표정에서 전시의 성적을 매기는 일이 아니었다.한 시간쯤 지났을 때 한 관람객이 태준의 사진 앞에서 유리를 불렀다. 목에 카메라를 건 젊은 여자였다. 그는 사진 아래의 ‘T’를 보다가 물었다. “혹시 법조계 분이세요? 어디서 본 것 같아서요.” 유리는 잠깐 호흡을 고르고 답했다. “사진에 대한 질문이 있으시면 제가 설명해 드릴 수 있어요. 인물의 직업이나 개인 정보는 이번 전시에서 따로 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자는 조금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아, 제가 아는 분 같아서요.”유리는 함께 웃되 말을 더 보태지 않았다. 거짓말을 할 필요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는 듯 굳어질 필요도 없었다. 여자는 다시 사진을 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이 표정은 찍는 사람을 되게 믿는 것 같아요.” 예상하지 못한 말에 유리의 손끝이 멈췄다. 사진 속 태준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디에 서 있었는지까지 떠올랐다. 유리는 조금 늦게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느껴서 골랐어요.”관람객이 자리를 옮긴 뒤 유리는 벽 옆에 서서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문을 여는 날

    전시 개막을 나흘 앞둔 오후, 유리는 마지막으로 도착한 인쇄물을 바닥에 펼쳐 놓고 있었다. 무광 용지에 출력된 사진들은 모니터로 볼 때보다 조금 따뜻한 색을 띠었다. 창가에서 웃는 태준의 얼굴도 그랬다. 사진 옆에 쪼그려 앉은 한나가 턱을 괴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이 사람 누구야.” 유리가 포장지를 접으며 대답했다. “정태준.” “내가 아는 그 정태준 변호사?” “다른 정태준이랑 같이 살면 곤란하지 않을까.”한나는 대꾸하지 않고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 현석 씨한테는 저렇게 안 웃던데.” 유리는 들고 있던 테이프를 내려놓았다. 한나는 이미 내뱉은 호칭을 회수하려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가,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어깨를 으쓱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으로 했잖아.” 유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현석 변호사님이 드디어 현석 씨가 됐구나 싶어서.” 한나가 포장지 하나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남편 사진이나 잘 포장해.”웃음이 가라앉을 무렵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시에 참여하기로 한 촬영자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유리는 알림창에 나타난 첫 문장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죄송하지만 제 사진을 빼고 싶습니다.’뒤에는 여러 번 고친 흔적이 보이는 긴 설명이 이어졌다. 사진 속에 있는 본인과 동행인 모두 전시에 동의했지만, 최근 직장 동료가 전시 소식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뒤부터 누가 자신을 알아볼지 계속 신경이 쓰였고, 공개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줄에는 출력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말과, 지금 철회하면 유리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냐는 질문이 적혀 있었다.유리는 바닥에 놓인 사진들을 돌아봤다. 철회를 요청한 작품은 입구에서 두 번째 벽에 걸릴 예정이었다. 이미 안내 책자에도 들어갔고, 벽면 배치도 그 작품을 기준으로 맞춰 두었다. 솔직히 아쉬웠다. 준비한 것이 줄어들고 손볼 일이 늘어난다는 사실도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감정은 상대에게 해결하라고 넘길 일이 아니었다. 유리는 먼저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렌즈 앞에 서는 사람

    유리는 그를 창가에 앉혔다. 해가 기울면서 들어오는 빛이 얼굴 한쪽을 부드럽게 감쌌다. 태준은 카메라를 보다가 유리를 보고, 다시 렌즈를 보았다. 그녀는 노출을 맞추며 말을 걸었다. “정면으로 꼭 안 봐도 돼.” “어디를 보면 좋을까?” “보고 싶은 데.” 태준의 시선은 즉시 유리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카메라 뒤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너무 성실하게 대답해서 문제였다.처음 몇 장은 어색했다. 태준은 움직이지 않으려고 턱에 힘을 주었고, 유리는 그럴수록 웃음이 났다. “변호사 프로필 아니야.” “알아.” “모르는 것 같은데.” “움직이면 흐려질까 봐.” 유리가 카메라를 잠시 내렸다. “오빠는 나한테 가만히 있으라고 한 적 없잖아.” 그 말에 태준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그녀는 다시 렌즈를 들었다. 셔터가 짧게 울렸고, 화면 안에서 그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유리는 질문을 바꿨다. 오늘 점심은 뭘 먹었는지, 시온은 새 입장문이 마음에 든다고 했는지, 서한나가 만든 도시락을 현석이 정말 전부 먹었는지. 마지막 질문에서 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 먹었어. 나한테 김치 달라고 왔더라.” 유리는 그 순간 셔터를 눌렀다. 웃음이 끝나기 직전의 얼굴, 눈가가 접히고 입가에 장난기가 남은 얼굴이었다. 카메라를 확인한 유리의 가슴이 조용히 벅차올랐다.이 사람을 오래전에도 찍었다. 그러나 그때는 기다리는 이유를 묻지 않았고, 지금은 점심 메뉴와 친구의 도시락까지 알고 있었다. 코트 안에 붕어빵을 품었던 손이 이제는 그녀의 머리를 말려 주고, 식탁 위에 커피를 놓고, 피곤한 날이면 먼저 잠들어도 된다고 이불을 당겨 주었다.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온 거리 안에서 카메라를 드는 일이었다.“그 표정은 찍지 마.”태준이 갑자기 말하자 유리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곧바로 카메라를 내렸다. “어떤 표정?”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네가 지금 짓고 있는 표정.” 유리가 눈을 깜빡이자 태준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사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렌즈 앞에 서는 사람

    유리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담당자도 등을 곧게 폈다. 그녀는 빈 액자가 표시된 도면을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첫 작품에 제가 뭐라고 적었는지 봐 주세요. 사진에 남은 사람이 공개하지 않기로 선택해서 비워 둔 자리예요. 그런데 전시를 알리는 데 제 가족 관계를 먼저 쓰면, 관람객한테는 다른 말을 하면서 제 생활은 예외로 취급하게 돼요.”담당자는 도면과 홍보안을 번갈아 보았다. 곧바로 수긍하지는 않았다. 그는 공간 대관료와 인쇄 비용, 외부 지원사의 관심도를 설명했다. 주목받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말은 현실적인 사정이기도 했다. 유리는 그 설명을 끝까지 들었다. 비용이 들지 않는 것처럼 이상적인 이야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결혼을 홍보 수단으로 쓰는 데 동의한 적도 없었다.“그럼 규모를 줄이는 안부터 같이 봐 주세요.” 유리는 도면의 두 번째 방을 가리켰다. “추가 공간을 빼고, 대형 출력 세 점도 작은 크기로 바꾸면 얼마나 줄어들까요? 개막 행사도 토크 형식으로 크게 하지 않고 예약 관람으로 진행할 수 있어요. 홍보가 필요한 건 알아요. 대신 홍보할 내용을 제가 정하고 싶어요.”담당자가 계산기를 켰다. 잠시 숫자를 두드리던 그가 말했다. “후원 없이 전부 진행하는 건 어렵습니다.” “후원을 받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제 사생활을 전제로 하지 않는 조건을 먼저 제안해 보고 싶다는 거예요.” 유리는 가방에서 다른 종이를 꺼냈다. 전시 설명을 어려워할 관람객을 위해 준비한 질문들이었다. 내가 올린 사진에 함께 찍힌 사람은 어디까지 동의했는지, 오래된 사진을 다시 공개할 때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좋아하는 사람을 잘 찍고 싶다는 마음과 그 사람의 경계를 어떻게 함께 지킬지.담당자는 종이를 받아 읽다가 세 번째 질문에서 멈췄다. “이건 팬들이 와서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팬이 아니어도요. 가족사진을 올리는 사람, 아이 사진을 찍는 사람, 친구와 여행 다녀온 사람도요.” 유리는 빈 테이블이 그려진 자리를 손끝으로 짚었다. “사진을 가져오게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렌즈 앞에 서는 사람

    시온의 입장문은 유리가 아침 식사를 마칠 무렵 공개됐다. 소속사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은 예상보다 짧았다. 무단으로 유통된 사생활 사진의 촬영 경위가 확인 중이며, 온리원이 해당 사진들을 촬영하거나 판매하는 데 동의한 사실은 없다는 설명이 먼저 나왔다. 뒤이어 사진을 촬영하고 유통한 사람들의 책임은 각 행위에 따라 확인될 것이라는 문장이 붙었다. 마지막 문단은 시온이 직접 고른 말이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진을 찍히는 일을 하더라도, 모든 장소에서 모든 촬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유리는 글을 끝까지 읽은 뒤 휴대전화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자신의 본명도, 태준과의 관계도 없었다. 시온이 병원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보여 주는 사진 역시 붙지 않았다. 누군가의 잘못을 설명하기 위해 피해를 다시 전시하지 않아도 되는 글이었다. 맞은편에서 커피를 마시던 태준이 그녀를 바라봤다. “괜찮아?”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시온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보여.” “세 번 고쳤대.” “오빠한테 보내서?” “두 번은 담당자한테. 마지막 한 번은 나한테.”“뭐 고쳐 달랬는데?”“‘앞으로 더욱 조심하겠습니다’를 뺐어.”유리는 화면을 다시 켰다. 그런 문장은 없었다. 대신 앞으로 촬영과 자료 관리 과정에서 필요한 기준을 소속사와 함께 정비하겠다는 말이 남아 있었다. 시온이 더 조심해야 했던 일이 아니라는 것을, 형은 짧은 수정으로 돌려주었다. 유리는 태준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한 번 눌렀다. “잘했네.” 태준이 컵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오늘 업무 시작 전 평가가 좋군.” “계속 유지해.” “난이도가 점점 올라가는데.”입장문이 공개된 뒤 온리원의 오래된 계정에도 알림이 쌓이기 시작했다. 유리는 아직 계정을 다시 운영할 생각이 없었지만 정정 안내를 올리기 위해 접속 권한을 정리해 두었다.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보낸 메시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제라도 사실이 밝혀져 다행이라는 말, 당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해 미안했다는 말, 남아 있는 사진을 다시 올려 줄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이름을 돌려주는 문장

    집에 돌아온 유리는 손을 씻은 뒤 침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을 힘도 아까워 그대로 두고 침대 끝에 앉았다. 조금 뒤 태준이 마른 수건을 들고 와 그녀의 젖은 머리끝을 감쌌다. 그가 가까이 서자 셔츠에 밴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유리는 그의 허리 양옆을 잡고 이마를 배에 기댔다. 아까까지 버티고 있던 어깨가 그제야 내려갔다. 태준의 손도 머리 위에서 멈췄다.“잠깐 이러고 있을래?”유리는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태준은 재촉하지 않았다. 수건을 내려놓고 유리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일정한 손길에 호흡이 조금씩 길어졌다. 유리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오늘 누가 내 이름을 안 쓰겠다고 했을 때, 잠깐 서운했어.”태준이 그녀를 내려다봤다.“공동 정정문에서?”“응. 같이 이름을 돌려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나는 내 이름을 숨기고 싶었던 시간을 잊고 있었더라.”그녀는 그의 셔츠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내가 괜찮아졌다고 남도 준비됐을 거라고 생각했어.”“말하기 전에 멈췄잖아.”“마음속으로는 못 멈췄는데.”태준은 유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마음속에서 처음 든 생각까지 항상 맞을 수는 없지. 그다음에 뭘 했는지가 중요해.”유리는 그 말을 곱씹다가 고개를 들었다. 태준의 얼굴이 가까웠다. 자신을 향해 내려온 시선에는 오늘의 선택을 평가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셔츠 깃을 잡아당겼다.“오늘은 위로도 잘하네.”“보상이 또 구체적이지 않을까 봐 걱정인데.”유리는 대답 대신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태준이 물러나지 않자 두 번째 입맞춤은 조금 길어졌다. 그의 손이 유리의 허리를 받치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몸이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움직였다. 유리는 그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가까워진 체온에 차갑던 손끝이 녹았다. 태준이 입술을 떼고 그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기댔다.“저녁부터 먹을까.”유리는 그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낮게 웃었다.“지금 그 말을 할 수 있어?”“할 수는 있지. 지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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