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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카메라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0 15:07:56

그날 그 자리에, 유리와 태준 말고도 카메라를 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오현석이 노트북 화면을 확대했다. 낡은 필름 특유의 입자가 뭉개진 사진 속에서 스무 살의 민유리는 카메라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에는 검은 코트를 입은 스물다섯 살의 정태준이 서 있었다. 유리가 직접 찍어 간직했던 사진과 정확히 반대되는 구도였다.

태준을 찍은 유리.

그리고 그런 유리를 찍은 누군가.

유리는 화면 가까이 몸을 숙였다. 오래된 사진은 흐렸지만 기억은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찬 바람에 귀가 시렸고, 카메라를 잡은 손가락은 곱아 있었다. 태준은 법학관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유리는 그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허락을 받은 뒤 셔터를 눌렀다.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원본 파일의 촬영 정보는?”

태준의 질문에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박소라가 한 번 손댄 파일이라 메타데이터는 믿을 수 없어. 다만 독일 쪽에서 압수한 인쇄물 뒷면에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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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세 번째 카메라

    그날 그 자리에, 유리와 태준 말고도 카메라를 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오현석이 노트북 화면을 확대했다. 낡은 필름 특유의 입자가 뭉개진 사진 속에서 스무 살의 민유리는 카메라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에는 검은 코트를 입은 스물다섯 살의 정태준이 서 있었다. 유리가 직접 찍어 간직했던 사진과 정확히 반대되는 구도였다.태준을 찍은 유리.그리고 그런 유리를 찍은 누군가.유리는 화면 가까이 몸을 숙였다. 오래된 사진은 흐렸지만 기억은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찬 바람에 귀가 시렸고, 카메라를 잡은 손가락은 곱아 있었다. 태준은 법학관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유리는 그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허락을 받은 뒤 셔터를 눌렀다.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원본 파일의 촬영 정보는?”태준의 질문에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박소라가 한 번 손댄 파일이라 메타데이터는 믿을 수 없어. 다만 독일 쪽에서 압수한 인쇄물 뒷면에 희미한 표기가 남아 있었어. 유통용으로 새로 출력하면서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 모양이야.”현석이 사진을 뒤집어 촬영한 이미지를 띄웠다. 종이 뒷면 한구석에 연필로 쓴 듯한 글씨가 있었다.MHK. 07-11. 기다림.유리는 세 글자를 보는 순간 숨을 멈췄다.“문하경 선배.”“아는 사람이야?”“대학교 사진 동아리 선배예요. 그날 과제를 지도해 준 사람이기도 하고요.”기억 속의 목소리가 뒤늦게 들려왔다. 유리야, 너무 멀리 가지 마. 필름 아껴. 그리고 동아리 활동을 기록해야 한다며 회원들을 따라다니던 은색 카메라. 하경은 결과물뿐 아니라 사진을 찍는 사람의 모습도 남겨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유리가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그날 선배가 있었어요. 아예 잊고 있었어.”“몰래 찍은 겁니까?”태준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유리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동아리 기록 촬영은 미리 동의를 받았어요. 저도 찍히는 걸 알고 있었고요. 다만 이 장면이 남았다는 건 몰랐어요.”“그럼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내 이름으로 만든 거짓말

    —신분만 확보하면 계약은 제가 만들게요.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민유리가 직접 넘긴 것처럼 보이면 됩니다.녹음이 끝난 뒤에도 박소라의 목소리는 거실에 남아 있는 듯했다. 유리는 뒤집어 놓은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발음됐는데도, 그 안의 민유리는 자신이 아니었다. 박소라가 범죄를 숨기기 위해 만든 가짜 인물이었다. 남의 사생활을 찍고, 사진을 팔고, 계약서까지 조작하는 사람. 실제 유리와는 아무 관련도 없으면서 이름과 신분만 같은 허수아비였다.“나머지도 들을래?”현석이 전화 너머에서 물었다.“음성 파일이 네 개라고 했죠?”—응. 방금 들은 건 첫 번째 파일의 일부야. 두 번째는 최민규와 판매 가격을 조율하는 내용이고, 세 번째는 독일 유통업체에 보낼 파일의 정보값을 바꾸는 방법에 관한 대화야. 마지막 파일은 박소라 혼자 녹음한 메모로 보여. 위조 계약서에 넣을 항목을 읽어 놓았어.태준이 유리를 살폈다. 지금은 변호사가 아니라 남편으로 곁에 있겠다고 했지만, 그의 눈에는 이미 증거의 구조가 정리되고 있었다. 음성 원본의 생성 시각, 녹음 장치, 편집 여부, 계약서와의 일치점. 묻고 싶은 것이 많을 텐데도 그는 먼저 유리의 선택을 기다렸다.“전부 한 번만 들을게요.”유리가 말했다.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지금?”“응. 나중으로 미루면 계속 상상할 것 같아요. 실제보다 더 나쁜 말이 들어 있을까 봐.”—그럼 파일을 보내지는 않을게. 내가 필요한 구간만 순서대로 재생하고, 중간에 멈추고 싶으면 바로 말해.“그렇게 해 주세요.”현석은 두 번째 파일부터 재생했다. 최민규의 목소리는 박소라보다 작고 불분명했지만, 대화의 의미는 분명했다.—병원 사진은 빼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건 바로 문제 될 텐데.—그래서 값이 붙는 거예요. 얼굴이 잘 나온 것만 고르세요. 가족 사진은 정시온 혼자 있는 것보다 묶어서 팔아야 하고요.—출처 물어보면 뭐라고 합니까?—팬이 찍었다고 하면 돼요. 요즘 팬들은 병원까지 따라가잖아요.유리의 손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지우기 전에 지켜야 할 것

    최종 접속 오전 9시 14분.그 한 줄을 확인한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는 오 년 전의 거래와 침해를 복원하는 자리였지만, 이제는 누군가가 바로 오늘 증거에 손을 댄 사건이 되었다. 현석은 화면을 닫지 않은 채 포렌식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접속 시각 이후의 활동 기록부터 확인해 주세요. 파일 열람, 이동, 삭제, 다운로드, 공유 링크 생성까지 전부요. 계정에 직접 들어가지는 말고 현재 확보된 토큰과 서버 로그 범위 안에서만 확인하십시오. 동시에 사업자 측에 긴급 보전 요청을 보내고요.”전화를 끊기도 전에 다른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시온의 소속사 법무팀에도 즉시 연락이 들어갔다. 정시온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저 사람이 지금 사진을 지우고 있는 거예요?”“아직은 몰라.”태준의 답은 짧았다.“접속만 했을 수도 있고, 내려받거나 다른 계정으로 옮겼을 수도 있어. 확인 전에는 단정하지 마.”“형은 이미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잖아.”“그래서 단정하지 말라는 거야.”시온은 입을 다물었다. 태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오른쪽 검지 마디가 희게 변할 만큼 주먹을 쥐고 있었다. 유리는 테이블 아래에서 그 손목에 가볍게 손을 댔다.태준이 돌아봤다.“당신이 직접 맡으면 안 돼요.”“알아.”대답은 빨랐지만 손의 힘은 풀리지 않았다.“현석 씨가 지휘하게 해요. 당신은 시온이 형이고, 사진에 찍힌 당사자이기도 해요. 이번에는 변호사 자리보다 가족 자리에 있어요.”태준은 몇 초 동안 유리를 바라봤다. 보호해야 할 사람이 둘이나 같은 방에 있고, 침해한 자의 움직임은 화면 속 숫자로만 보이는 상황에서 사건의 지휘권을 내려놓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혼식 날 했던 약속은 편안한 순간에만 지키는 문장이 아니었다. 그는 마침내 쥐었던 손을 펴고 자신의 노트를 현석 쪽으로 밀었다.“오현석.”“응.”“내가 이 사건에서 직접 대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찍지 않은 사진의 주인

    “정시온 씨의 전 매니저요.”강세은의 말이 떨어진 뒤, 회의실 안에서는 종이를 넘기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태준의 손을 꽉 잡았다. 태준의 손가락이 곧바로 맞물려 왔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처음에는 남편으로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의 턱선이 단단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보면 묻고 싶은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했다.현석이 먼저 침묵을 깼다.“전 매니저의 이름을 말씀해 주십시오.”세은은 마른 입술을 적신 뒤 대답했다.“최민규요. 정시온 씨가 데뷔한 해부터 약 이 년 동안 로드 매니저로 일했던 사람입니다.”기록 담당자의 손이 움직였다. 현석은 세은 앞에 놓인 휴대전화와 작은 외장 저장 장치를 가리켰다.“오늘 제출하겠다고 한 자료가 그 사람과 관련된 겁니까?”“네. 예전에 사용하던 휴대전화와 백업 파일이에요. 박소라와 주고받은 메신저 대화, 메일, 받은 사진의 미리 보기 파일이 남아 있습니다. 원본 사진은 저장하지 않았어요. 무서워서 열어 본 뒤 바로 지웠는데…… 복구될 수도 있다고 해서 기기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잠금 비밀번호와 포렌식 분석 동의서는 준비하셨습니까?”“네.”세은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손이 너무 떨려 종이 모서리가 테이블에 몇 번이나 부딪혔다. 현석은 서두르지 않고 봉투를 받아 증거 목록과 대조했다. 그동안 유리는 세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최민규가 찍은 사진이라는 건 언제 알았어요?”유리의 질문에 세은이 고개를 들었다.“파일을 받은 날에는 몰랐어요. 박소라는 전부 온리원이 찍은 거라고 했습니다. 민유리 씨가 공개 스케줄에서는 팬들에게 좋은 사람인 척하면서 뒤로는 사생활 사진을 모아 해외 구매자에게 팔고 있다고 했어요.”“그 말을 왜 믿었죠?”세은의 눈가가 붉어졌다.“믿고 싶었던 것 같아요.”변명보다 더 잔인한 대답이었다. 유리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태준이 그 힘을 고스란히 받아 냈다.“내가 그런 사람이길 바랐다는 뜻이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이름을 넘긴 사람

    ONLYONE_REAL_ID.zip.파일명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도는 노골적이었다. 익명으로 활동하던 사람의 진짜 이름을 확인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 위해 묶었다는 뜻. 박소라가 우연히 인화 주문서에서 유리의 신분증 사본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처음부터 ‘온리원’의 정체라고 표시해 건넸다는 증거였다.유리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은 채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따뜻했던 태준의 체온이 바로 옆에 남아 있었지만 손끝은 차갑게 식었다. 온리원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던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그 이름 뒤에 민유리가 있다는 사실까지 아는 사람은 손에 꼽혔다. 가족과 한나를 제외하면 과거 공동 전시나 인화 작업 때문에 실명을 교환한 몇몇 팬 사이트 운영자뿐이었다.“누가 떠올라?”태준의 물음에 유리는 곧바로 이름을 대지 않았다. 의심만으로 과거의 사람을 범인으로 정하고 싶지 않았다.“몇 명은 있어요. 그런데 지금 말하면 내가 기억을 그 사람한테 맞추게 될 것 같아요.”“알겠어.”태준은 더 묻지 않고 현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상이 연결되자 현석은 이미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 한국은 이른 아침이었지만 뒤편 회의실의 불까지 모두 켜져 있었다.—두 분 예정대로 오늘 귀국하는 거 맞지?“응. 비행기 바꾸지 않았어.”—잘했어. 여기 있어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보다 파일 발신자를 특정할 단서가 나왔어.유리의 어깨가 굳었다.“메일 주소가 복원됐어요?”—주소 전체는 아직이지만, 압축 파일 내부에 삭제되지 않은 메타데이터가 남아 있었습니다. 맥 운영체제에서 만든 파일이고 사용자 계정명이 ‘POLARIS’로 기록돼 있어요. 첨부된 화면 캡처 중 하나에는 메신저 알림 일부도 남아 있고요.폴라리스.그 이름을 듣는 순간 유리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모른다고 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정시온의 데뷔 초부터 활동했던 팬 사이트로,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사진과 푸른 색감으로 유명했다. 운영자는 강세은. 온리원보다 두 살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사람은 분류표가 아니다

    현석이 보낸 화면에는 유리의 과거가 폴더명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대학, 출판사, 공연장, 자택 주변. 자신이 붙인 적 없는 이름들이었고, 자신이라면 결코 사용하지 않았을 분류 방식이었다. 그 아래에는 사진에 우연히 등장했거나 유리와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표처럼 나열되어 있었다.A—유명인 또는 판매 가치가 높은 인물.B—가족, 연인, 소속사 관계자 등 유명인과 연결 가능한 인물.C—일반인. 신원 확인 불필요.정태준의 이름 옆에는 B가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정시온의 친형 추정’, ‘법률대리인 활용 가능성’, ‘민유리와의 직접 접촉 기록 없음’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작성 날짜는 두 사람이 처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기 석 달 전이었다.유리는 문서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얼굴만 기억나는 사람도 있었다. 공연장 근처 카페에서 자주 마주쳤던 직원, 사진 인화를 맡기러 갔을 때 상담해 주었던 기사, 출판사 동료와 거래처 디자이너. 그들은 유리의 삶을 스쳐 간 사람이었지만 박소라의 표에서는 A와 B와 C 중 하나였다.“C는 신원 확인 불필요라네요.”유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판매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겠지.”태준은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 화면을 확대했다. 표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지만, 유리는 그의 엄지가 지나치게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알아봤다. 화가 날수록 말과 행동이 더 차분해지는 사람이었다.“사람을 가격표처럼 나눴어요.”“응.”“시온이는 A고, 당신은 B고, 이름 모르는 사람은 C. 그런데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어요.”분류표의 주인은 유리였지만 정작 표 안에 유리는 없었다. 박소라에게 민유리는 사진을 찍은 사람도, 삶을 살아온 사람도 아니었다. 다른 인물들을 연결하는 통로였고 파일의 출처를 꾸미기 위해 빌릴 수 있는 이름이었다.태준이 현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한 번 울리자마자 현석이 받았다.—보고 있었지?“응. 외장 장치 원본 이미징은 끝났어?”—독일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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