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문이 닫힌 뒤에도 유리는 복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정체를 들킨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아찔했는데, 이제는 누군가 자신을 의도적으로 노렸을 가능성까지 생겼다.
그녀는 황급히 집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이중 잠금장치까지 걸고 나서야 카메라 가방을 내려놓았다. 평소라면 집에 돌아오자마자 렌즈부터 꺼내 닦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노트북을 켜고 메모리카드를 연결하는 동안에도 휴대전화 알림은 쉼 없이 울렸다. 온리원 계정에 달린 댓글의 분위기는 빠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왜 원본을 바로 공개하지 않아요?] [찔리는 게 있으니까 시간 끄는 거 아님?] [오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온리원 얼굴 알지 않아?] [예전부터 사생이라는 말 있었잖아.] 사실이 아닌 이야기는 출처도 없이 늘어났다. 유리는 비공개 일정을 촬영한 적이 없었고, 사생이라는 의심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 한 번 그런 말을 던지자 사람들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과거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동조했다. 유리는 댓글창을 닫고 메모리카드의 파일을 불러왔다. 촬영한 사진이 수천 장이었다. 행사 후반부로 시간을 좁힌 뒤 문제의 장면을 찾았다. 원본에는 예상대로 시온과 광고주 관계자 주변에 여러 사람이 함께 찍혀 있었다. 루미너스의 멤버 두 명과 매니저, 브랜드 담당자 세 명, 교복을 입은 어린 모델과 보호자까지 있었다. 미성년 모델이 행사 뒤에 시온에게 사인을 부탁했고, 광고주 관계자가 둘을 소개해주는 과정에서 시온과 악수를 나눈 것이었다. 열애설이라고 부를 만한 장면이 아니었다. 유리는 조작된 사진을 옆에 띄우고 원본과 비교했다. 인물의 자세와 조명 방향은 같았지만 시온의 손 위치가 미세하게 달랐다. 자신이 촬영한 연속 사진 가운데 한 장을 사용한 것은 분명한데, 온라인에 공개한 적 없는 장면이었다. 그녀의 손끝이 멈췄다. 오늘 행사장에서 노트북으로 사진을 옮긴 적은 없었다. 메모리카드도 계속 카메라 안에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거의 같은 위치에서 같은 순간을 촬영한 누군가가 온리원의 워터마크만 붙였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왜 하필 내 이름을 쓴 거지?’ 유리가 유명 홈마라서 신빙성을 얻으려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워터마크의 투명도와 글자 간격까지 그녀가 실제 사용하는 것과 똑같았다. 인터넷에 공개된 사진에서 워터마크만 복사해 붙였다면 가장자리의 흔적이 남아야 했지만 조작된 사진에는 그런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워터마크 원본 파일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파일을 공유한 사람은 한나뿐이었다. 생일 전시용 사진을 정리할 때 한 번 전달했지만, 한나가 사진을 조작했을 가능성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유리는 원본 여러 장을 별도 폴더에 복사한 뒤 등장인물의 얼굴을 표시했다. 시온의 결백을 밝히는 것만 생각하면 이대로 사진을 공개하면 됐다. 그러나 사진 속 미성년 모델은 정식 행사 무대에 오른 출연자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참석한 초대 손님이었다. 얼굴이 알려지는 순간 원치 않는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스타웨이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번호였다. 유리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스타웨이 엔터테인먼트 위기관리팀 최준호 팀장입니다. 온리원 님 맞으십니까? 유리는 대답하기 전에 현관문 쪽을 바라봤다. 벽 하나 너머에 태준이 있을 것이다. 정말 십 분도 되지 않아 소속사의 공식 연락이 온 것을 보면 그가 법률대리인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맞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인정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현재 유포 중인 사진과 관련해 정태준 변호사님에게 상황을 전달받았습니다. 온리원 님께서 오늘 행사의 원본을 보유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원본에는 시온 씨뿐 아니라 현장 관계자들이 함께 찍혀 있어요. 열애설과는 전혀 관계없는 공식 행사 장면입니다.” —소속사에서도 당시 현장 영상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다만 최초로 유포된 사진이 온리원 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어 정확한 비교를 위해 원본이 필요합니다. “신원 확인이 필요한 일반인과 미성년자가 찍혀 있습니다. 온라인 공개 없이 사건 담당자만 열람한다는 확인서를 보내주시면 원본을 제공할게요.” 전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유리가 비협조적이라고 생각할까 봐 가슴이 조였지만 요구를 거둘 생각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이메일로 비밀유지 및 이용범위 확인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원본은 정태준 변호사님께 직접 전달해주시면 됩니다. 유리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분한테요?” —이번 사건의 법률 대응을 총괄하고 계십니다. 현재 온라인 유포 기록을 확보하는 중이라 사무실로 이동하실 시간이 없으시면 변호사님이 직접 방문하실 겁니다. 방문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으니 현관문만 열면 됐다. 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소속사에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확인서를 검토한 뒤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치자 거의 동시에 이메일이 도착했다. 유리는 첨부된 확인서를 열어 조항을 하나씩 읽었다. 원본의 사용 목적은 조작 여부 확인과 유포자 추적, 법적 대응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촬영자의 인적 사항 역시 담당자 외에는 공개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정태준의 이름이 있었다. 유리는 서명란을 내려다보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온리원이라는 정체를 가장 숨기고 싶었던 사람에게 모든 사진을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필이면 최애의 형이었고, 하필이면 옆집에 살며, 하필이면 자신을 조금도 믿지 않는 남자였다. ‘이 정도면 악연도 재능이다.’ 그녀는 전자서명을 마치고 필요한 사진의 복사를 시작했다. 파일 용량이 커 전송에는 시간이 걸렸다. 원본을 외장 저장장치에 옮겨 직접 전달하는 편이 빨랐다. 복사가 절반쯤 진행됐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유리의 어깨가 움찔했다.유리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정확히는 몸을 돌리려다가 종아리가 당겨서 깼다. 전날 하루 종일 갤러리 바닥을 걸어 다닌 여파였다. 이불 속에서 발목을 조금 움직이자 옆에서 팔이 뻗어 왔다. 허리에 느슨하게 얹힌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몇 시야.” 잠이 덜 깬 태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유리는 협탁 위 시계를 확인했다. “일곱 시 조금 전.” “아직 자도 돼.” “몸이 먼저 출근했어. 다리가 아주 성실하네.”태준이 눈을 뜨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유리는 괜찮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종아리가 아프다고 했다. 태준은 몸을 일으켜 이불을 조금 걷었다. “세게 누르지는 않을게. 아프면 말해.” 그의 손바닥이 발목 위를 천천히 감쌌다. 유리는 베개를 끌어안고 옆으로 누웠다. 아침의 희미한 빛 아래에서 남편이 자기 다리를 살피는 모습이 조금 간지러웠다. 결혼 전에는 이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을 주로 입맞춤과 밤의 체온으로 상상했는데, 실제로는 이런 아침도 있었다.“왜 웃어?” 태준이 묻자 유리는 베개에 턱을 묻었다. “어제는 작가였는데 오늘은 근육통 환자라서.” “겸직 가능한 직업들이네.” “남편은 직업이 몇 개야. 변호사에 운전기사에 도시락 배달에.”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그중에 제일 오래 하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유리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가 웃었다. “남편.” 너무 뻔한 대답이었다. 그런데도 유리는 베개를 조금 더 높이 끌어올렸다. 태준은 그녀의 붉어진 귀를 보고도 모르는 척 손의 힘을 풀었다.잠시 뒤 유리가 먼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제 됐어. 고마워.” 태준이 이불을 덮어 주려는데 그녀가 손을 놓지 않았다. 몸을 조금 당겨 가까이 오게 한 뒤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태준의 시선이 그녀의 입가에 머물렀다. “그게 치료비야?” “응.” “아침 진료 수가가 괜찮네.” 그가 다시 고개를 숙이자 유리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허리를 받치는 손이 따뜻했다. 조금 길어진 입맞춤 끝에 숨이 섞였고, 유리는 그의 셔츠 앞섶을 쥔 채
세은은 다른 관람객들 사이에 섞여 전시를 보았다. 유리는 그녀가 어느 사진 앞에 오래 서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입구에 들어온 부부에게 동선을 설명하고, 질문 카드가 떨어진 자리에 새 묶음을 놓았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세은의 옷자락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몸이 조금 굳었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그치지는 않았다.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는 것과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직 다른 일이었다.관람이 끝난 세은은 준비실 앞에서 유리를 기다렸다. “잠깐 말씀드려도 돼요?” 유리는 시계를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세은은 가방을 열지 않고 먼저 말했다. “자료 제공 경위에 관한 진술서, 어제 대리인 통해 제출했어요. 제가 확인할 수 있는 대화 기록도 같이 냈고요.” 유리는 세은의 얼굴을 보았다. “네.” “여기서 사과를 길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답을 기다리지 않겠다고 말씀드리려고요.”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안내지를 내려놓았다. 세은은 말을 고르느라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 “제 피해 자료는 반환받기로 했어요. 그걸 받는다고 제가 한 일까지 정리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예전 같았으면 그 말 다음에 용서를 구하는 문장이 붙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오지 않았다. 세은이 한 걸음 물러났다. “전시 잘 봤습니다.” 유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은이 떠난 뒤에도 한동안 손끝에 힘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를 붙잡아 무언가 더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현석은 폐관 직전 잠시 유리를 불렀다. 박소라 측에서 새 합의안을 보냈고, 문제가 됐던 포괄적인 발언 제한 조항은 삭제되어 있었다. 정정과 반환에 드는 비용을 먼저 부담하겠다는 항목도 포함됐다. 다만 배상 범위와 지급 일정, 자료 정리 방식은 여전히 확인해야 했다. 유리는 휴대전화 화면에 뜬 문서 제목을 보고도 열지 않았다. “오늘 꼭 봐야 해요?”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일 같이 보자. 오늘은 전시부터 끝내.”고맙다는 말이 바로 나왔다. 사실 그 합의안이 좋은지 나쁜지 지금은 판단할 힘이
첫 관람객은 개막 시간보다 십 분 일찍 도착했다. 중년의 여자와 성인으로 보이는 딸이었다. 유리는 입구에서 이름을 확인한 뒤 아직 조명을 점검 중이라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여자는 괜찮다며 딸의 코트 깃을 바로잡았다. 딸은 익숙한 듯 몸을 조금 피했고, 두 사람은 나란히 창가 의자에 앉았다. 유리는 그 모습을 보다가 안내지를 너무 세게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종이 끝이 손바닥 안에서 구겨져 있었다.문을 열자 사람들은 예상보다 조용히 들어왔다. 첫 액자 앞에 선 여자는 사진이 빠진 줄 알고 주변을 살폈다. 설명을 읽은 딸이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했고,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들어온 관람객은 첫 액자를 지나쳤다가 두 걸음쯤 가서 돌아왔다. 유리는 그 모습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으려 했다. 오래 서 있다고 감동한 것도, 빨리 지나쳤다고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오늘 그녀가 할 일은 사람들의 표정에서 전시의 성적을 매기는 일이 아니었다.한 시간쯤 지났을 때 한 관람객이 태준의 사진 앞에서 유리를 불렀다. 목에 카메라를 건 젊은 여자였다. 그는 사진 아래의 ‘T’를 보다가 물었다. “혹시 법조계 분이세요? 어디서 본 것 같아서요.” 유리는 잠깐 호흡을 고르고 답했다. “사진에 대한 질문이 있으시면 제가 설명해 드릴 수 있어요. 인물의 직업이나 개인 정보는 이번 전시에서 따로 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자는 조금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아, 제가 아는 분 같아서요.”유리는 함께 웃되 말을 더 보태지 않았다. 거짓말을 할 필요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는 듯 굳어질 필요도 없었다. 여자는 다시 사진을 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이 표정은 찍는 사람을 되게 믿는 것 같아요.” 예상하지 못한 말에 유리의 손끝이 멈췄다. 사진 속 태준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디에 서 있었는지까지 떠올랐다. 유리는 조금 늦게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느껴서 골랐어요.”관람객이 자리를 옮긴 뒤 유리는 벽 옆에 서서
전시 개막을 나흘 앞둔 오후, 유리는 마지막으로 도착한 인쇄물을 바닥에 펼쳐 놓고 있었다. 무광 용지에 출력된 사진들은 모니터로 볼 때보다 조금 따뜻한 색을 띠었다. 창가에서 웃는 태준의 얼굴도 그랬다. 사진 옆에 쪼그려 앉은 한나가 턱을 괴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이 사람 누구야.” 유리가 포장지를 접으며 대답했다. “정태준.” “내가 아는 그 정태준 변호사?” “다른 정태준이랑 같이 살면 곤란하지 않을까.”한나는 대꾸하지 않고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 현석 씨한테는 저렇게 안 웃던데.” 유리는 들고 있던 테이프를 내려놓았다. 한나는 이미 내뱉은 호칭을 회수하려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가,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어깨를 으쓱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으로 했잖아.” 유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현석 변호사님이 드디어 현석 씨가 됐구나 싶어서.” 한나가 포장지 하나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남편 사진이나 잘 포장해.”웃음이 가라앉을 무렵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시에 참여하기로 한 촬영자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유리는 알림창에 나타난 첫 문장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죄송하지만 제 사진을 빼고 싶습니다.’뒤에는 여러 번 고친 흔적이 보이는 긴 설명이 이어졌다. 사진 속에 있는 본인과 동행인 모두 전시에 동의했지만, 최근 직장 동료가 전시 소식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뒤부터 누가 자신을 알아볼지 계속 신경이 쓰였고, 공개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줄에는 출력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말과, 지금 철회하면 유리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냐는 질문이 적혀 있었다.유리는 바닥에 놓인 사진들을 돌아봤다. 철회를 요청한 작품은 입구에서 두 번째 벽에 걸릴 예정이었다. 이미 안내 책자에도 들어갔고, 벽면 배치도 그 작품을 기준으로 맞춰 두었다. 솔직히 아쉬웠다. 준비한 것이 줄어들고 손볼 일이 늘어난다는 사실도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감정은 상대에게 해결하라고 넘길 일이 아니었다. 유리는 먼저
유리는 그를 창가에 앉혔다. 해가 기울면서 들어오는 빛이 얼굴 한쪽을 부드럽게 감쌌다. 태준은 카메라를 보다가 유리를 보고, 다시 렌즈를 보았다. 그녀는 노출을 맞추며 말을 걸었다. “정면으로 꼭 안 봐도 돼.” “어디를 보면 좋을까?” “보고 싶은 데.” 태준의 시선은 즉시 유리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카메라 뒤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너무 성실하게 대답해서 문제였다.처음 몇 장은 어색했다. 태준은 움직이지 않으려고 턱에 힘을 주었고, 유리는 그럴수록 웃음이 났다. “변호사 프로필 아니야.” “알아.” “모르는 것 같은데.” “움직이면 흐려질까 봐.” 유리가 카메라를 잠시 내렸다. “오빠는 나한테 가만히 있으라고 한 적 없잖아.” 그 말에 태준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그녀는 다시 렌즈를 들었다. 셔터가 짧게 울렸고, 화면 안에서 그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유리는 질문을 바꿨다. 오늘 점심은 뭘 먹었는지, 시온은 새 입장문이 마음에 든다고 했는지, 서한나가 만든 도시락을 현석이 정말 전부 먹었는지. 마지막 질문에서 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 먹었어. 나한테 김치 달라고 왔더라.” 유리는 그 순간 셔터를 눌렀다. 웃음이 끝나기 직전의 얼굴, 눈가가 접히고 입가에 장난기가 남은 얼굴이었다. 카메라를 확인한 유리의 가슴이 조용히 벅차올랐다.이 사람을 오래전에도 찍었다. 그러나 그때는 기다리는 이유를 묻지 않았고, 지금은 점심 메뉴와 친구의 도시락까지 알고 있었다. 코트 안에 붕어빵을 품었던 손이 이제는 그녀의 머리를 말려 주고, 식탁 위에 커피를 놓고, 피곤한 날이면 먼저 잠들어도 된다고 이불을 당겨 주었다.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온 거리 안에서 카메라를 드는 일이었다.“그 표정은 찍지 마.”태준이 갑자기 말하자 유리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곧바로 카메라를 내렸다. “어떤 표정?”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네가 지금 짓고 있는 표정.” 유리가 눈을 깜빡이자 태준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사
유리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담당자도 등을 곧게 폈다. 그녀는 빈 액자가 표시된 도면을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첫 작품에 제가 뭐라고 적었는지 봐 주세요. 사진에 남은 사람이 공개하지 않기로 선택해서 비워 둔 자리예요. 그런데 전시를 알리는 데 제 가족 관계를 먼저 쓰면, 관람객한테는 다른 말을 하면서 제 생활은 예외로 취급하게 돼요.”담당자는 도면과 홍보안을 번갈아 보았다. 곧바로 수긍하지는 않았다. 그는 공간 대관료와 인쇄 비용, 외부 지원사의 관심도를 설명했다. 주목받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말은 현실적인 사정이기도 했다. 유리는 그 설명을 끝까지 들었다. 비용이 들지 않는 것처럼 이상적인 이야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결혼을 홍보 수단으로 쓰는 데 동의한 적도 없었다.“그럼 규모를 줄이는 안부터 같이 봐 주세요.” 유리는 도면의 두 번째 방을 가리켰다. “추가 공간을 빼고, 대형 출력 세 점도 작은 크기로 바꾸면 얼마나 줄어들까요? 개막 행사도 토크 형식으로 크게 하지 않고 예약 관람으로 진행할 수 있어요. 홍보가 필요한 건 알아요. 대신 홍보할 내용을 제가 정하고 싶어요.”담당자가 계산기를 켰다. 잠시 숫자를 두드리던 그가 말했다. “후원 없이 전부 진행하는 건 어렵습니다.” “후원을 받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제 사생활을 전제로 하지 않는 조건을 먼저 제안해 보고 싶다는 거예요.” 유리는 가방에서 다른 종이를 꺼냈다. 전시 설명을 어려워할 관람객을 위해 준비한 질문들이었다. 내가 올린 사진에 함께 찍힌 사람은 어디까지 동의했는지, 오래된 사진을 다시 공개할 때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좋아하는 사람을 잘 찍고 싶다는 마음과 그 사람의 경계를 어떻게 함께 지킬지.담당자는 종이를 받아 읽다가 세 번째 질문에서 멈췄다. “이건 팬들이 와서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팬이 아니어도요. 가족사진을 올리는 사람, 아이 사진을 찍는 사람, 친구와 여행 다녀온 사람도요.” 유리는 빈 테이블이 그려진 자리를 손끝으로 짚었다. “사진을 가져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