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집안의 착한 딸로 살아온 최한나.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무모했던 선택은 언니의 숙적인 남자를 사랑한 것이었다. 그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남들 앞에서는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장소에서조차 기꺼이 몸을 맡겼다. 캠핑장 텐트 안, 서로의 숨결이 뒤엉키던 그날. 한나는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 남자가 끝내 손에 넣지 못해 가슴 깊이 품고 있던 여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친언니였다. 그가 건넨 다정한 눈빛도, 애틋한 속삭임도, 사랑이라 믿었던 모든 순간도. 결국 언니를 향한 복수의 일부였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한나는 수술기록지 한 장만 남긴 채, 미련 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이 다시 마주했을 때. 더 이상 순종적이고 다정한 한나는 없었다. 그녀의 곁에는 눈부시게 사랑스러운 남매 쌍둥이가 있었다. 밤낮없이 사무치는 그리움에 남자의 오만함마저 산산이 무너졌다. 그 남자는 한나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돌아와. 아이들도 내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할게.” 그러나 한나는 그의 손을 차갑게 떼어 내고, 구겨진 옷자락을 가볍게 털었다. 붉은 입술 끝에 싸늘한 비웃음이 걸렸다. “우리 애들, 아빠 있어. 당신은 남의 자식 아빠 노릇까지 할 필요 없어.”
View More기혁이었다.한나는 순간 온몸이 굳어 버렸다.요즘은 어째서인지 어디를 가든 기혁과 마주치는 것 같았다.기혁은 한나의 어깨를 붙잡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어디 아파?”“요즘 심장이 좀 불편해서 순환기내과에서 검사받았어. 다행히 별문제는 없대. 그런데 오빠는 여기 왜 왔어?”“나는...”“오빠!”기혁이 대답하려던 순간, 누군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말이 끊겼다.한나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예쁜 혜나’가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검사 결과지를 들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곧장 기혁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더니 환하게 웃었다.“오빠, 초음파 봐 주신 선생님이 아기 건강하대. 심장도 벌써 뛰고 있대.”그 말을 듣는 순간, 한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다행히 기혁이 재빨리 한나의 팔을 붙잡아 몸을 지탱해 주었다.‘예쁜 혜나’는 그런 한나를 보고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오빠, 아는 사람 만났어?”“응.”짤막한 대답에 한나의 입가에 씁쓸한 비웃음이 스쳤다.법적으로 아내가 된 여자 앞에서 자신은 그저 아는 사람에 불과했다.게다가 ‘예쁜 혜나’의 아이도 이제 막 심장박동이 확인됐다면, 두 사람의 임신 시기도 비슷하다는 뜻이었다.순간 한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이제는 기혁과 관련된 일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이런 광경을 마주하니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그때 ‘예쁜 혜나’가 한나를 향해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나우혜예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최한나예요.”한나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렇게 정식으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언젠가 이 관계가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기혁은 우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아직 채혈 하나 더 남았지? 같이 가자.”“응.”우혜는 다시 한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한나 씨, 다음에 또 봬요.”그녀의 미소는 눈부실 만큼 밝았다.
지금 한나가 바라는 것은 벌여 놓은 일들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자기에게 상처만 남긴 이곳을 떠나는 것뿐이었다.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 결국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은 가족뿐이라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달았다.“그때는 어려서 바깥세상이 궁금했어. 그런데 이제는 집이 제일 좋다는 걸 알겠어.”“괜찮아. 이제 졸업도 얼마 안 남았잖아.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동안 보고 싶으면 휴가 내고 집에 와. 엄마 아빠도 너 많이 보고 싶어 하셔.”한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모든 일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돌아가야 했다.마침내 한나는 손을 흔들며 언니를 배웅했다.혜나는 그동안 집안을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해 온 사람이었다.앞으로는 한나도 언니와 가족들을 위해 더 많이 신경 쓰고 싶었다.공항에서 나온 한나는 곧바로 공항고속도로에 올라 병원으로 향했다.그런데 임신중절 수술을 받으러 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운전대에서 한 손을 떼어 아랫배 위에 올렸다.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팠다.고속도로를 빠져나온 한나는 안전하게 차를 세울 만한 곳을 찾았다.차를 세운 뒤에는 운전대에 이마를 묻었다.한나의 손가락이 운전대를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가죽 커버를 깊숙이 파고들 정도였다.한나는 한때 기혁의 아이를 간절히 갖고 싶었다.자기 집안에서는 혼전 임신을 알게 되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터였다.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두 집안이 사돈을 맺게 되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악연도 자연스럽게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기혁의 생각은 달랐다.결국 뱃속의 두 아이에게 남은 것은... 비극뿐일 것이다.한나는 평소 다인이 남자들을 두고 이 사람도 쓰레기, 저 사람도 쓰레기라며 욕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하지만 그중에서도 최악의 남자를 자신이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한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리
유삼순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사람 몇 명 불러서 이 소파 좀 옮겨 주세요.”그 말을 듣는 순간, 한나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듯했다.소파를 옮기면 그 아래 숨겨 둔 검사 결과지가 드러날 터였다.그러면 기혁이 한나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네, 대표님. 바로 사람을 부르겠습니다.”유삼순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한나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기혁에게 물었다.“커프스 찾으려고 소파까지 옮기게?”“응.”“그냥 단추 하나잖아.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도 되는데...”한나는 어떻게든 소파를 옮기는 일을 막고 싶었다.하지만 기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어떻게 신경을 안 써? 네가 생일 선물로 준 건데. 소파 밑으로 들어간 것뿐이니까 옮기면 금방 찾을 수 있어.”한나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어떡하지?’그사이 직원 몇 명이 금세 안으로 들어왔다.기혁은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커프스가 소파 밑으로 굴러 들어갔어요. 이것 좀 옮겨 주세요.”“네, 대표님.”직원들은 곧바로 소파를 옮기기 시작했다.쿵- 쿵- 쿵-한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이제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어차피 기혁은 아이를 원하지 않잖아.’‘임신한 걸 들키더라도 나중에 기회를 봐서 지우면 돼.’한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잠시 후, 직원들이 소파를 옆으로 밀어냈다.그리고 그 아래에서 한나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검사 결과지가 모습을 드러냈다.순간 한나는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평소 청결에 유난히 예민한 기혁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발견하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는 곧바로 직원에게 말했다.“저 쓰레기도 좀 치워 주세요.”다행히 검사 결과지는 글씨가 적힌 면이 바닥을 향한 채 뒤집혀 있었다.기혁은 종이의 내용을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기혁의 깔끔한 성격을 잘 아는 직원은 그가
혜나는 원래 결단이 빠른 만큼 걸음걸이도 거침없었다.라운지 홀 한쪽에 앉아 있던 한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오는 언니를 발견했다.그런데 기혁이 곧바로 혜나의 뒤를 따라 나왔다.기혁은 혜나가 차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혜나를 차체 쪽으로 밀어붙였다.“오늘 굳이 나를 찾아와 경고까지 한 게 정말 내가 네 동생을 건드릴까 봐서야? 아니면 아직도 나를 사랑해서야?”기혁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말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혜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혜나는 기혁을 거칠게 밀어내며 냉소를 흘렸다.“예전에도 너한테 관심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혼자 착각하지 마.”멀리서 지켜보던 한나에게는 두 사람의 움직임만 보일 뿐, 대화 내용까지 들리지는 않았다.하지만 기혁이 언니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다.반면 혜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밀어냈다.그 모습을 보자 한나는 더 확신하게 됐다.언니야말로 기혁이 끝내 손에 넣지 못한 여자가 맞았다.기혁이 아무리 다정한 말과 행동으로 유혹해도 혜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에 비하면 자신은...한나는 언니와 감히 비교할 수도 없었다.한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도로변에서 택시를 잡아탔다.차에 올라탄 한나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깊은 밤, 화려한 네온사인이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한나가 집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혜나도 돌아왔다.‘역시 언니는 다르구나.’이렇게 빨리 돌아온 것을 보면 기혁도 더는 언니를 붙잡지 못한 모양이었다....한편, 혜나가 떠난 뒤 기혁은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그는 소파에 앉자마자 와인잔을 집어 들고 술을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그 모습을 본 성모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얼굴에 와인까지 뒤집어쓰고도 또 쫓아갔다가 결국 차인 거야? 그런데 너, 최한나 만나는 거 정말 최혜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기혁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술만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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