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인 줄 알았던 복수

사랑인 줄 알았던 복수

By:  푸른불씨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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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착한 딸로 살아온 최한나.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무모했던 선택은 언니의 숙적인 남자를 사랑한 것이었다. 그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남들 앞에서는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장소에서조차 기꺼이 몸을 맡겼다. 캠핑장 텐트 안, 서로의 숨결이 뒤엉키던 그날. 한나는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 남자가 끝내 손에 넣지 못해 가슴 깊이 품고 있던 여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친언니였다. 그가 건넨 다정한 눈빛도, 애틋한 속삭임도, 사랑이라 믿었던 모든 순간도. 결국 언니를 향한 복수의 일부였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한나는 수술기록지 한 장만 남긴 채, 미련 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이 다시 마주했을 때. 더 이상 순종적이고 다정한 한나는 없었다. 그녀의 곁에는 눈부시게 사랑스러운 남매 쌍둥이가 있었다. 밤낮없이 사무치는 그리움에 남자의 오만함마저 산산이 무너졌다. 그 남자는 한나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돌아와. 아이들도 내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할게.” 그러나 한나는 그의 손을 차갑게 떼어 내고, 구겨진 옷자락을 가볍게 털었다. 붉은 입술 끝에 싸늘한 비웃음이 걸렸다. “우리 애들, 아빠 있어. 당신은 남의 자식 아빠 노릇까지 할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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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밖에서 하면 더 짜릿하다던데... 내가 갈아입혀 줄까?”

캠핑 텐트 안.

송기혁의 셔츠가 벌어져 있었다. 선명한 가슴 근육 위로 붉은 자국들이 겹쳐 보였다.

조금 전 기혁의 달콤한 부추김에 한나가 남긴 흔적이었다.

최한나가 눈을 내리깔고 작게 말했다.

“오늘은 안 하면 안 돼?”

기혁의 표정이 잠깐 멈췄다.

“생리 시작했어?”

“아니.”

기혁은 매번 오래 한나를 붙들었고, 몸의 움직임도 과감하고 컸다.

오늘은 친구들까지 함께 캠핑을 왔다.

한나는 부끄러워 목소리를 낮췄다.

“밖이라 소리 다 들리잖아.”

말하지 못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임신한 것이다.

“살살 할게. 너도 신음만 조금 참아. 텐트끼리 이 정도 떨어져 있으면 안 들려.”

기혁이 한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이마를 맞대고 달래듯 속삭였다.

“오빠 말 들어. 자기야?”

침대 위의 기혁은 다정하게 아껴 주다가도 능숙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한나는 얼마 버티지 못했다.

텐트에는 따스한 조명이 가득했다.

기혁은 분위기를 내겠다며 별빛 프로젝터까지 챙겨 왔다.

텐트 천장 위로 별들이 흐르고 있었다.

한나를 끔찍이 아끼는 듯한 입맞춤이 이어지자, 텐트가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나가 입었던 핑크색 토끼 의상은 조각조각 찢어졌다.

일을 끝내자 기혁은 금세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돌아왔다.

한나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돌아다니지 말고 있어. 내가 조금 있다가 널 캠핑카로 안고 가서 씻겨 줄게.”

기혁의 입은 달콤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기혁은 늘 이렇게 다정했다. 사랑을 나눈 뒤 몸을 씻는 일조차 기꺼이 직접 해 주었다.

기혁이 나간 뒤, 한나의 핸드폰에 모르는 사람에게서 친구 요청이 왔다.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최한나 씨, 꼭 알려 드릴 일이 있어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한나는 요청을 수락했다.

곧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기혁의 혼인관계증명서와 결혼사진이었다.

신부의 얼굴과 인적 사항은 덧칠해 가려져 있었다. 혼인신고일은 한 달 반 전이었다.

최씨 집안은 가풍이 엄격했다. 송씨 집안과는 깊은 악연이 있어 몇 대에 걸쳐 물과 기름처럼 지냈다.

한나의 친언니 최혜나는 특히 기혁을 질색했다.

사업에서도 한 치의 양보가 없었다.

지난 2년간 신재생에너지 시장을 선점하려 맞붙으면서 둘은 그야말로 앙숙이 됐다.

그런 사이였기에, 2년째 사귄 남자친구가 기혁이라는 사실을 집에는 알리지 못했다.

한 달 반 전 가족들은 마지막 통보를 했다.

남자친구를 데려오지 않으면 집에서 정한 상대와 결혼을 추진하겠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기혁은 약혼식 준비에 들어갔다.

언니 혜나와도 지난 일을 풀고, 직접 한나의 부모님에 인사를 드리겠다고 했다.

그랬던 바로 그날 다른 여자와 혼인신고를 했다는 사실을 한나는 믿을 수 없었다. 옷을 챙겨 입고 기혁에게 직접 물으러 나가려고 했다.

주위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캠핑카 옆에서 몇 개의 붉은 담뱃불이 밝아졌다 흐려졌다 했다. 한나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시간까지 쟀잖아. 꼬박 한 시간 반이더라. 텐트 무너지는 줄 알았다니까. 기혁이 형, 벌써 2년이나 최한나를 데리고 노는데 아직도 저렇게 좋나? 진짜 사랑에 빠진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전에 완전히 넘어오게 하려고 정관수술까지 했잖아. 최한나가 애 낳아 주겠다고 매달리니까 복원수술 받은 거고.”

“한 달 넘었으니 형 정도면 벌써 임신시켰을 수도 있지. 저렇게 오래 몰아붙이면 형 바람대로 유산시키고 수술비까지 아끼겠네.”

한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머릿속에서 윙윙 소리가 났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심장을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았다.

몸 안의 피가 모조리 얼어붙었다.

가족들이 둘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혁에게 아이를 갖자고 졸랐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면, 자신을 아끼는 가족들도 결국 결혼을 허락해 줄 거라고 믿었다.

정신을 놓고 그 앞으로 뛰쳐나갈 뻔했다.

그쪽에서 또 한 번 낄낄거리는 웃음이 들려왔다.

“형은 자기를 장난감으로만 보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약혼할 거라고 믿는지 모르겠다. 형수도 따로 있잖아.”

“한 달 반 뒤 약혼식에서 형이 버리면 나도 한번 데리고 놀고 싶어. 엉덩이도 예쁘고, 보기만 해도 군침이 싹 돌던데...”

“난 형이 찍은 코스튬 영상이 제일 기대돼. 제대로 한 수 먹였지. 최혜나한테 복수하려면 이만한 방법이 어디 있어? 형한테 차갑게 굴면서 고백을 거절했잖아.”

“그 잘난 최혜나가 금이야 옥이야 키운 동생 망가진 꼴을 보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벌써 그 얼굴을 보고 싶다니까!”

“...”

한나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손가락을 움켜쥐자 손톱이 손바닥의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기혁은 친구들 사이에 한나를 소개하려 했다. 최씨 집안의 귀에 들어갈까 두려워 나가지 않은 건 한나였다. 둘은 그렇게 몰래 연애를 해 왔다.

아무도 이 둘의 관계를 모를 거로 생각했다.

혼인관계증명서를 처음 봤을 때조차 믿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전부 사실이었다.

기혁의 친구들은 이미 다른 여자를 ‘형수’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불륜 상대가 되어 있었다.

친구들이 말한 코스튬 영상까지...

지난 2년간 끈질기게 조르는 기혁 때문에 못 이겨 수백 벌의 서로 다른 의상을 입었다.

둘만의 은밀한 재미인 줄 알았다.

실상은... 이토록 더러웠다.

낄낄거리는 소리는 계속됐지만, 한나는 더 듣지 못했다.

목 안에 무언가 걸린 듯 숨이 막혔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토록 사랑한 남자에게 자신은 장난감이었다.

‘언니에게 구애까지 했다니...’

‘언니가 왜 그렇게 송기혁을 싫어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네.’

‘언니는 진작 송기혁의 본모습을 간파했을 거야.’

‘나만 속아 넘어갔어! 내가 너무 어리석이야!’

‘우리 집안과 사사건건 맞서는 남자가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일 거라고 믿었는데...’

‘...’

한나는 넋이 빠진 채 텐트로 돌아와 안의 불을 모조리 껐다.

숙박업소에서 몰래카메라를 달아 돈을 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확인 방법도 살펴봤다.

핸드폰 플래시로 렌즈에 반사되는 빛을 찾는 방법이었다.

핸드폰을 꺼내 플래시를 켜고 텐트 안을 훑었다.

금속 장식도 유리 제품도 없는 공간이라 카메라는 금방 눈에 띄었다.

한나는 세포 하나하나가 떨리는 기분이었다.

기혁은 정말 주도면밀하게 몰래 찍었다. 카메라는 별빛 프로젝터에 달려 있었다.

함께할 때마다 기혁이 별빛을 켜 준 이유를, 한나는 낭만이라고 믿었다.

실은 그걸 위해서...

아랫입술이 찢어질 만큼 이를 꽉 깨물었다.

‘그래서 매번 그런 옷을 입으라고 달랬던 거야?’

지난 2년간 기혁은 주변의 여자들을 모두 정리했다. 한나는 자신 때문에 마음을 잡은 줄 알았다...

기혁은 정말 그런 비열하고 저열한 수법을 한나에게 썼다.

그녀는 혼인관계증명서와 한 달 반 뒤 약혼식을 떠올리자,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피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텐트 밖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한나는 눈꺼풀을 떨며 넘칠 듯한 눈물을 눌러 삼켰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기혁의 친구들이 말한 영상을 처리해야 했다.

공개되면 자신뿐 아니라 최씨 집안 전체가 무너질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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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밖에서 하면 더 짜릿하다던데... 내가 갈아입혀 줄까?”캠핑 텐트 안. 송기혁의 셔츠가 벌어져 있었다. 선명한 가슴 근육 위로 붉은 자국들이 겹쳐 보였다. 조금 전 기혁의 달콤한 부추김에 한나가 남긴 흔적이었다.최한나가 눈을 내리깔고 작게 말했다. “오늘은 안 하면 안 돼?”기혁의 표정이 잠깐 멈췄다. “생리 시작했어?”“아니.” 기혁은 매번 오래 한나를 붙들었고, 몸의 움직임도 과감하고 컸다. 오늘은 친구들까지 함께 캠핑을 왔다. 한나는 부끄러워 목소리를 낮췄다. “밖이라 소리 다 들리잖아.”말하지 못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임신한 것이다.“살살 할게. 너도 신음만 조금 참아. 텐트끼리 이 정도 떨어져 있으면 안 들려.” 기혁이 한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이마를 맞대고 달래듯 속삭였다. “오빠 말 들어. 자기야?”침대 위의 기혁은 다정하게 아껴 주다가도 능숙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한나는 얼마 버티지 못했다.텐트에는 따스한 조명이 가득했다. 기혁은 분위기를 내겠다며 별빛 프로젝터까지 챙겨 왔다.텐트 천장 위로 별들이 흐르고 있었다.한나를 끔찍이 아끼는 듯한 입맞춤이 이어지자, 텐트가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한나가 입었던 핑크색 토끼 의상은 조각조각 찢어졌다.일을 끝내자 기혁은 금세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돌아왔다. 한나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돌아다니지 말고 있어. 내가 조금 있다가 널 캠핑카로 안고 가서 씻겨 줄게.”기혁의 입은 달콤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기혁은 늘 이렇게 다정했다. 사랑을 나눈 뒤 몸을 씻는 일조차 기꺼이 직접 해 주었다.기혁이 나간 뒤, 한나의 핸드폰에 모르는 사람에게서 친구 요청이 왔다.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최한나 씨, 꼭 알려 드릴 일이 있어요.]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한나는 요청을 수락했다.곧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기혁의 혼인관계증명서와 결혼사진이었다.신부의 얼굴과 인적 사항은 덧칠해 가려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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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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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오늘은 기혁의 생일이었다. 예년에는 친구들과 모임을 마치고 나면 한나와 단둘이 다시 조촐하게 생일을 보냈다.한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약속이란 결국 준비해 둔 옷을 입고 침대에서 만족시켜 주는 일 아닌가.핸드폰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켰다. 해외 대학에 지원할 준비를 했다.한나는 올해 막 20살이 된 대학 2학년이었다. 18살에 수능을 치른 뒤 원래는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제작을 더 배우러 유학할 계획이었다.기혁을 다시 만나면서 유학 기회를 포기하고 해운시의 대학을 택했다. 기혁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온 것이다.그렇게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2년을 허비했다.남은 시간까지 쓸모없는 일에 낭비할 수는 없었다.지원 정보를 입력하고 시계를 보니 7시가 다 돼 갔다. 한나는 언니를 깨우러 갔다.혜나는 미리 금빛정의 룸을 예약했다. 장소를 듣자 한나가 멈칫했다.해운시에서 손꼽히는 고급 레스토랑 세 곳 중 하나였다. 오늘 기혁도 친구들과 그곳에서 생일 저녁을 먹었다.하지만 한나는 곧 표정을 평소처럼 되돌렸다.룸에 들어가 궁금한 듯 물었다. “언니, 이번엔 무슨 프로젝트 때문에 왔어?”“내 공유 충전소에 인공지능 시스템을 연결하려고.”“설마 HM테크?”혜나가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 한나 똑똑하네.”최근 인공지능 분야는 급격히 성장했다. HM테크도 짧은 기간에 치고 올라와 시가총액이 수조 원에 이르렀다.“한창 잘나가는 데다 업계 선두잖아. 언니 성격이면 당연히 HM테크를 골랐겠지.”“역시 내 동생. 나를 훤히 아네.” 혜나가 애정 어린 눈으로 한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회사 일까지 걱정하지 마. 넌 너 하고 싶은 공부 잘하고, 하고 싶은 일 잘하면 돼.”한나는 언니가 안쓰러웠다. 혜나는 체력도 달리는 와중에 최씨 집안의 이 세대에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장녀로서 회사의 미래까지 짊어져야 했다. 어릴 때부터 집안의 요구도 유독 엄격했다.반대로 한나는 훨씬 편하게 자랐다.“언니, 일 많이 힘들어?”혜나가 메뉴를 고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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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들킬까봐 걱정된 한나는 꽉 안고 있는 기혁을 밀며 순하게 대답했다. “화장실이야. 방금 모기한테 물렸어.”기혁이 눈썹을 들며 다시 입을 맞추려 했다. 한나는 입을 손으로 막고 급히 말했다. “언니, 조금만 기다려. 바로 갈게. 끊어.”서둘러 전화를 끊자 기혁이 목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송기혁!”밀어 내고 거울 앞으로 갔다. 길고 흰 목에 키스마크가 남았다. 한나가 눈썹을 찌푸리며 따졌다. “언니한테 일부러 들키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기혁이 다가와 안았다. “남자친구 데려오라고 계속 그러잖아. 물어보면 내가 같이 인사하러 가면 되지.”한나의 눈동자가 좁아졌다. 기혁은 함께 집으로 가서 가족을 만나겠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걱정돼 거절했던 사람은 한나였다.그렇게까지 언니를 보고 싶은가 보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기혁을 혜나에게 데려갈 수 없었다. 예전에 숨겼던 이유와는 전혀 달랐다.“양쪽 집안 다 당장은 허락 안 할 거라는 거 알잖아. 알면서 왜 그래?” 한나가 목의 자국을 만지며 화난 눈으로 봤다. “다음부터 이러지 마. 먼저 갈게. 언니를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돼.”화장실 문으로 가는데 기혁이 뒤에서 허리를 안았다. 다정하게 사람을 홀리는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그럼 빨리 아이 갖자.”‘아이...’한나는 시선을 내려 아랫배를 봤다.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응.”기혁이 그제야 놓아주었다. “가 봐. 밤에 보자.”한나는 빠르게 화장실을 나왔다. ‘또 보자고?’‘누가 만나 준대? 아이는 꿈도 꾸지 마!’룸으로 돌아가자 혜나는 목의 자국부터 알아봤다. 또렷한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모기였어?”“아니. 남자친구.”혜나가 바로 말했다. “어디 있어? 마침 만났으니 인사하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봐 줄게.”“안 해도 돼. 방금 헤어지자고 했더니 억지로 입 맞춘 거야. 언니가 괜히 찾아가서 다툴까 봐 모기라고 했어.”눈이 어두워지고 기분도 가라앉았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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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기혁이 한나의 허리를 붙잡았다. “나랑 안 자면 어떻게 임신하고, 어떻게 공개해? 오늘 좀 노력하자.”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그런 능청스러운 말도 매력적이었다.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함이었다.사랑이 식고 나면 그저 천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한나가 다시 말했다. “생리 중이라고.”기혁이 놓아주었다. 포기하나 했더니 말을 바꿨다. “그래도 오늘 내 생일인데. 약속한 선물은 아직 못 받았잖아.”선물은 더는 없었다.최고의 선물이라 여겼던 것은 아직 ‘한나의 집’의 소파 아래에 있었다.혜나가 가면 한나는 가장 먼저 뱃속의 아이들을 지울 것이다.결과지도 가져와야 했다. 계속 거기 두기에는 위험했다.오늘은 붙들린 김에 ‘한나의 집’에 다녀오기로 했다.“먼저 내려가서 차에서 기다려. 바로 갈게.”기혁은 그제야 한나를 놓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한나는 방으로 돌아와 서랍에서 사파이어 블루 커프스를 꺼냈다.어제 백화점에서 보자마자 기혁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샀다. 아직 건네지 못한 선물이었다.커프스를 가방에 넣고 잠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급히 나갔다.엘리베이터에서 혜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언니 먼저 자. 친구가 열이 많이 나는데 돌봐 줄 사람이 없대. 가 볼게. 나 기다리지 마.]내려가니 기혁이 차 문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붉은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깜빡였다.한나가 가까이 갔다.푸르스름한 연기가 기혁을 감싸 얼굴을 더욱 신비롭고 잘생겨 보이게 했다. 길고 좁은 눈이 한나를 오롯이 바라봤다.눈빛이 너무 깊었다. 한 사람에게 집중하면 사랑이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한나도 한때는 거기에 빠졌다.은은한 담배 냄새가 공기 중에 떠돌았다. 꽁초만 남자 기혁은 바닥에 던지지 않고 조금 떨어진 재떨이에 대고 담배를 눌러 껐다.예의 바르고 품위 있는 남자라고 할 만했다.직접 듣지 않았다면 그런 비열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평생 믿지 못했을 것이다.기혁이 정중하게 차 문을 열어 주었다. 한나가 올라탔다.겉으로는 차분하지만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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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아니... 언니가 캐물으니까 둘러댄 거야. 사업하면서 자주 만날 거 아냐. 언니 성격 어떤지 어느 정도 알잖아.”기혁이 앞에 멈췄다. “정략결혼을 하겠다는 약속도 둘러댄 거고?”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기혁이 턱을 움켜쥐었다. 힘이 세서 한나는 아픔에 미간을 찌푸렸다.표정은 없었고 눈은 어두웠다.“우리 한나가 말을 안 듣네.”붙들린 턱이 욱신거렸다.한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파.”놓아줄 기색은 없었다. 기혁이 길고 반듯한 눈을 가늘게 떴다. “나를 속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지난 2년간 한나는 기혁이 한 모든 말에 고분고분 따랐기에 별문제가 없었다.그녀가 조금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을 보이자 기혁은 꼭 이렇게 손을 댔다.한나는 이제야 알았다. 역시 자신이 너무 어리석었다. 기혁의 모든 행동을 좋은 쪽으로만 보고 있었다.혼자 사랑이라 여긴 것에 빠져 있었을 뿐이다.그건 사랑이 아니었다.진짜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도 이제 알 수 없었다.한나는 통증을 참으며 여전히 온순하게 말했다.허점을 보이면 안 됐다.검사 결과지는 아직 못 가져왔다.그 많은 영상이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지도 몰랐다.너무 일찍 들키면 손해는 자신만 볼 것이다.“속인 거 아니야. 언니가 알까 봐 걱정한 것뿐이야. 남자친구가 오빠인 거 알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떼어 놓으려고 할걸.”턱을 잡았던 손이 마침내 풀렸다. 기혁은 한나의 손을 꽉 쥐고 눌렀던 자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낮고 차분하게 말했다. “미안해. 네가 떠날까 봐 너무 걱정했어.”이어서 목덜미를 감싸 단단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한나는 움직이지 않다가 차분히 말했다. “내가 어떻게 오빠를 떠나겠어. 이제 가야 해. 안 그러면 언니가 진짜 유학 보내.”“데려다줄게.”기혁이 품에서 놓아준 뒤 손을 잡고 저택 밖으로 나갔다.한나는 안방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임신 사실이 적힌 그 검사 결과지...가져오지 않는 한 들킬 위험은 매일 있었다.불안한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아파트로 돌아와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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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한나는 갑자기 생각났다. 기혁도 박람회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았다. 그는 오늘 갈 것이다.그렇다면 검사 결과지를 가지러 가도 기혁과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나갈 채비를 마친 혜나가 말했다. “참, 네 차 좀 빌려줘.”한나는 속으로 아찔했다.‘송기혁도 거기 갈 텐데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하지만 언니에게 차를 아끼는 척할 수는 없었다. “키는 신발장 위에 있어.”“아침밥 주문해 뒀어. 일어나면 먹어. 먼저 간다.”혜나가 나가자마자 기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언니가 내 차로 박람회 가. 오빠도 간다고 했지? 비밀 지켜 줘.]‘이 메시지를 보면 송기혁... 박람회에 더 가고 싶겠지. 언니는 송기혁이 얻지 못한 사랑이었으니까.복수하려 이런 비열한 방법까지 썼다. 깊이 사랑했으니 깊이 미워하는 것이겠지.언니를 보고 싶을 것이다.남자는 처음 사랑한 여자를 쉽게 못 잊는다고 했다.생각할수록 마음이 시큰거렸다.언니가 부러운 게 아니라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너무 쉽게 다정한 덫에 걸려들었다.기혁의 답장이 왔다.[걱정 마.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아침을 먹고 나가려고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말끔하고 고고한 기혁이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한나가 멈칫하며 눈꺼풀을 떨었다. “언제 왔어?”기혁이 담배를 끄고 다가왔다.“아래에서 네 언니가 차 몰고 나가는 거 보고 올라왔어.”‘몰래 언니 보러 오기라도 한 거야?’“왜 멍하니 있어. 들어오라고 말도 안 해?”“급한 일 있어서 나가야 읍!”기혁이 입술을 막았다.한나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자 재미없다는 듯 놓아주었다.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우리 얌전한 아가씨, 혼나고 싶어?”송기혁이라는 남자가 상황에 맞춰 유혹하는 말을 쓰는 데 능했다.사랑할 때는 그런 말도 마음을 울렸다. 짓궂으면서도 아껴 주는 이 남자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두 모습을 이토록 능숙하게 오가는 사람을 한나는 이 남자 말고는 더 알지 못했다.사랑이 식으니 같은 말을 들어도 예전처럼 심장이 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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