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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
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
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릴 때마다, 등골을 타고 찌릿한 소름이 돋아났다.
이내 커다란 손이 가슴을 소유욕 가득하게 거머쥐었다. 그의 지문이 닿는 곳마다 마치 뜨거운 인장이 새겨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느릿하게 허리선을 타고 내려가 가장 연약한 여성의 안쪽 살결에 닿는 손길은 지독하게 집요했고, 그가 지긋이 힘을 줄 때마다 나는 속절없이 떨리는 숨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아······!”
지극히 완만하면서도 잔인할 만큼 정확한 자극이 예민한 곳을 문지를 때마다, 뇌리를 찌르는 전율에 척추가 미친 듯이 휘어졌다.
나보다 내 몸의 반응을 더 기민하게 읽어내는 남자답게, 차준호는 내가 어느 지점에서 이성을 놓고 무너지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윽고 거칠게 속을 파고드는 그의 단단하고 묵직한 남성의 존재감이 온몸의 신경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몸의 온도가 가파르게 치솟아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창밖은 서슬 퍼런 겨울이었으나, 서로의 알몸을 빈틈없이 밀착한 채 생생한 온기를 탐닉하는 이 침대 위만큼은 한여름 태양이 작열하는 오후보다 더 뜨거운 열기로 넘실거렸다.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정막한 방 안을 야릇하게 채워나갔다.
“신하늘, 오늘도 예쁘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베이스 음성에 결국 참지 못한 신음이 젖은 숨과 함께 터져 나왔다.
그 매혹적인 목소리에 취해, 나는 그의 단단한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매달렸다. 그의 어깨 근육이 요동칠 때마다 내 손톱 끝에는 그의 살결이 깊게 박혔다.
“대표님도······ 여전히 멋지시네요.”
그가 내 허리를 단단히 받쳐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영혼을 저당 잡힌 듯 사로잡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는 완벽한 지배자이자 최고의 남자였다.
본래 나는 S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자마자 CH-컴퍼니의 게임 개발자로 지원했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내게 배정된 부서는 비서실이었다.
내 성향과는 전혀 다른 업무였지만, 그의 곁에서 완벽한 비서로 남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버텨낸 시간이었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고결한 얼굴을 매일 마주하고, 그가 무심히 건네는 따뜻한 배려의 잔상을 쫓는 것만으로도 나는 매 순간 황홀경에 빠졌으니까. 고된 업무조차 그와 함께라면 달콤한 유희처럼 느껴졌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긴밀하게 2년의 세월을 공유하며 지내다가, 우리의 물리적 거리가 좁혀진 것은 정확히 작년 이맘때였다.
은은한 와인 향에 취해 충동적으로 밤을 보낸 것이 도화선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사귀자는 명확한 언약도 없이 시작된 관계였지만, 지난 1년간 비밀스럽게 탐닉했던 살 떨리는 시간 동안 나는 과분할 만큼 행복했다.
스물여섯. 아니, 며칠 뒤면 스물일곱이 되는 나이.
차준호는 내 인생의 첫 남자였고, 여전히 갈망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관계를 정의 내리지 못한 채 떠도는 이 애매함이 늘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그의 미래에도 내가 함께하기를. 그 욕심을 오늘 전하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의 몸을 조련하고 열기를 피워 올리며, 고백할 타이밍을 집요하게 엿보았다. 그의 뜨거운 피부가 닿을 때마다 등골을 타고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듯 찌릿한 떨림이 일었다.
오늘 역시, 어제와 다름없이 완벽한 밤이어야 했다.
*** 최고의 남자인 차준호와 침대 위에서 맞이한 절정은 더할 나위 없이 황홀했다.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갈 정도로 격렬했던 정사 뒤에 찾아온 나른함마저 달콤했다. 몸을 섞은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니, 이제는 서로의 마음까지 나누어도 되지 않을까.
“신하늘, 오늘 유난히 특별하게 구네?”
그는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에도 흐트러짐 없는 몸짓으로 느긋하게 로브를 걸치며 입을 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나 역시 침대 시트 사이에 흩어진 속옷을 챙겨 입은 뒤 분홍색 니트 원피스를 걸쳤다. 등 뒤로 손을 뻗던 그때, 그가 다가와 지퍼의 고리를 잡아 천천히 올려주었다. 차가운 금속이 여열이 남은 살결을 훑으며 올라갈 때마다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이런 사소한 순간마다 그는 지독하게 다정했다. 이 다정함에 취해 준비한 책을 건네며 고백하려던 찰나였다.
차준호가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한 채, 낮고 서늘하게 속삭였다.
“신하늘, 참고로 나한테 고백 따위는 하지 마. 난 연애 안 해.”
순간 귀를 의심했다.
척추를 타고 차가운 한기가 오소소 돋아나며 뜨거웠던 몸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의 얼굴은, 남의 불행을 구경하듯 지나치게 태연하고 덤덤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손끝이 잘게 떨려와, 애꿎은 원피스 자락만 바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
“대표님이 저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으신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봐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지만,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보여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무너져 내리는 자존심을 간신히 붙잡으며 억지로 무표정을 가장했다. 걸을 때마다 타이트한 치맛단이 연신 말려 올라가 허벅지를 노골적으로 지분거렸다.
사실 그가 선물해 준 이 원피스는 몸매 라인이 지나치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옷이라, 오늘 하루 종일 굶다시피 한 상태였다.
긴장감과 허기, 그리고 배신감이 뒤섞여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바닥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을 쥔 CC그룹의 후계자이자 CH-컴퍼니의 수장. 185cm가 넘는 압도적인 실루엣과 서른한 살의 농익은 남자.
그는 마치 신이 공들여 빚어낸 조각상처럼 수려하고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가장 잔인한 성정을 숨긴 남자였다.
지난 3년간 그를 보필하며, 그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이 스위트룸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나는 내가 특별한 줄 알았다.
‘비서의 품격이 회사와 대표의 얼굴’이라며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조율해 주던 그의 손길이 사랑인 줄 알았다.
그때, 미니바 쪽으로 걸어가던 차준호가 잔인할 정도로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내뱉었다.
“친절과 호감을 혼동하면 안 되지. 신하늘, 순진하네?”
내 머리는 그저 장식품에 불과했던 걸까.
남녀 사이의 그 얄팍한 역학 관계에 이토록 무지했다니.
걷잡을 수 없는 자괴감이 가슴을 짓눌렀고, 조금 전까지 그와 맞닿아 뜨겁게 달아올랐던 내 몸은 이제 얼음장보다 더 차갑게 식어버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작가[silver구슬]입니다. 이 소설은 전 종로 및 광역수사대 이회림(드라마 시그널, 더킹, 보이스, 영화 선물, 사냥의 시간 등 다수의 시나리오 자문 경험)형사님의 범죄 법률 자문과,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송X(본 작가의 소설 닥치고 내게로 와, 아기를 품은 앙큼한 그녀, 언더커버 스캔들 등 자문)의사 선생님의 의학 자문을 받아 소설에 내실을 기했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나쁜 남자 차준호에게 애증을 느끼는 신하늘의 눈으로 독자님들께 통쾌하고 처절한 사랑에 대한 섬세한 서사를 선보이고자 합니다. 매력있는 등장인물의 각자의 사랑 이야기가 얽혀서 펼쳐 나가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매일 한국시간 1시 5분/ 13시 5분에 글을 예약걸었습니다. 참고해주세요.)
신하늘을 내보낸 차준호는 갑자기 강소희가 한국 왔냐며 귀신같이 전화를 걸어온 바람에 휴대전화를 들고 창가로 향했다.수화기 너머로 빽 소리를 지르는 강소희의 목소리에 차준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두통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차준호, 너 진짜 너무하잖아! 몸도 성치 않으면서 왜 그렇게 무모하게 굴어?“지금 무리 안 하면 언제 해. 난 시간이 없는데.”상하이에 머무는 동안, 아예 그곳에 게임과 엔터 쪽 사업을 아우르는 신규 지사를 건립할 타당성을 검토하고 부지 매입과 중국 당국의 허가 절차까지 직접 살피느라 일정이 예상보다 훨씬 지체되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겨우 몇 년 남짓인데, 이렇게 판을 크게 키우며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자신이 참 무모하다 싶기도 했다.― 그래도 그렇지, 명줄 단축될까 봐 겁도 안 나? 일 좀 작작해.강소희의 핀잔에도 차준호는 무심하게 서류를 넘길 뿐이었다.눈을 감는 그날, 하고 싶은 건 전부 해두어야 미련이 남지 않을 테니까. 그 생각 하나로 허기찬을 채근하며 몇 달 동안 상하이에서 미친 사람처럼 일에만 파묻혀 지냈다.자신도 아버지 차진철을 닮아 뼛속까지 일중독자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그렇다고 한국에 홀로 남아 있을 신하늘을 떠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방금 전, 비서실에서 몇 달 만에 마주친 그녀의 얼굴을 보니 차라리 상하이에 데리고 갈걸 그랬다는 후회가 막심하게 밀려들었다.“네가 왜 남의 비서를 입에 올려? 끊어.”― 잠깐만! 오늘은 최기범 때문에 연락한 거란 말이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김희주 의원 때문이야. 제발 나 좀 살려줘, 진짜 싫어 죽겠어! 또 XX당 행사에 와서 봉사 좀 하래.차준호의 입가에서 깊은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세종동을
나는 몇 달 내내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차준호를 막상 눈앞에서 마주하자 실감이 나지 않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8월 초, 그렇게 예고도 없이 상하이로 불쑥 가버리더니. 내 눈앞에 나타날 때도 바람처럼 기습적이었다.“대표님, 오셨어요? 그리고 허 실장님도 고생하셨습니다.”허기찬은 환하게 웃으며 내 앞으로 고급 디저트 상자를 내밀더니 무성한 머리를 쓸어 올렸다.“어휴, 신 비서. 나 게임 론칭하러 상하이 갔다가 대표님한테 구박만 받았어. 나도 이제 퇴근하고 게임이라도 좀 해야 할 것 같아. 밥줄 안 끊기려면.”그의 앓는 소리에 도쿄 출장 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허기찬을 달달 볶을 거였으면 나를 데리고 가지.’ 나도 모르게 입술을 내밀며 차준호를 응시했다.그런데 마주한 그의 얼굴은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생소해서 순간 굳어 버렸다. 과연 차준호와 내가 손을 잡고 온기를 나누었던 사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묵직한 거리감이 들이닥쳤다.“허기찬은 총무과 다녀오고, 신하늘은 들어와. 할 말 있어 보여.”그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월요일 휴가 건으로 전전긍긍하던 걸 그새 눈치채기라도 한 건가.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반가운 마음도 잠시, 도국의 입대 배웅은 꼭 함께해야 했기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대표님, 저······ 다음 주 월요일에 연차 좀 사용하고 싶습니다.”그러자 차준호가 가볍게 팔짱을 끼더니, 나를 나른하게 내려다보며 물었다.“내 얼굴 보자마자 갑자기 출근하기 싫어졌어?”“그게 아니라·&mid
가을이 깊어가 어느새 11월 말이 되었다.차가운 계절의 변화를 증명이라도 하듯 목요일 저녁의 공기는 제법 서늘했다. 집안 청소를 하던 도중, 현관 벨 소리에 맞춰 퀵 배달 기사에게 커다란 박스 상자를 받았다.상자 안에는 정갈하게 접힌 도톰한 아이보리 색상의 겨울 모직 코트와, 캐시미어 소재의 단정한 블랙 원피스가 담겨 있었다.정작 본인은 한국에 있지도 않으면서 차준호가 보내온 선물이었다.상하이에 머무는 동안에도 차준호는 주 3회씩 잊지 않고 다정하게 선물을 보내 주었다. 그리고 내 일상과 안전을 세심하게 챙겼다.[신하늘, 추우니 옷 따뜻하게 입고 다녀. 게임 개발팀 진행 상황 보고서는 메일로 내일까지 보내.][신하늘 당분간 4시에 퇴근해. 연습생 하나가 부상을 입었다며. 4개월씩 전부 연기하라고 엔터팀에 전달해.][홍보팀에 연락해서 게임 굿즈 발매 제안서 허기찬에게 보내라고 전해. 신하늘,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지?]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도쿄 출장 이후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내심 기대했던 내 바람과 달리, 그는 아예 상하이에 가버려 졸지에 철저한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그 한계선이 매일 아침 차갑고 선명하게 다가왔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속에 고여갔다.‘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네.’그는 대표, 나는 비서. 업무 이야기 아니면 나누는 대화도 없었다. 통화도 하지 않는 사이라 커져 가는 마음을 천천히 눌러 낸 시간이었다.나는 그가 보내준 옷을 내일 출근할 때 입기 편하도록 행거에 잘 꺼내어 걸어두었다. 청소를 모두 마치고 서리 내린 창문을 닫으려던 순간, 입가에서 작은 하얀 입김이 부서져 나갔다.계절은 이제 막 겨울의 입구에 서 있었지만, 차준호가 없는 회사는 이미 한겨울의 한복판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대표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지독할 정도로 고요했다.나는 홀로 남아 멍하니 켜진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신하늘, 쉬운 여자 아니네. 고생했어. 퇴근해.]도대체 사람들은 하나같이 왜 아리송한 말만 하는 걸까.새벽부터 들이닥쳐 샌드위치나 먹고 사라진 차진철 회장도 그렇고, 쉬운 여자 아니라고 고생했으니 이 시각에 퇴근을 하라는 차준호도 그렇고.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오려던 그 순간이었다.“신 비서님, 고생 많으셨어요. 큰일 하셨네요.”시계를 보니 겨우 아침 8시를 조금 넘긴 시각인데, 총무과의 서진원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비서실 문을 열고 내 자리로 다가왔다.대체 다들 왜 이 아침부터 이토록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말만 던지는 것인지.“제가 뭐 한 게 있나요.”“모르셨어요? 가끔씩 회장님이 감찰하듯 대표님 없을 때 오셔서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시거든.”“네? 그럼 제가 큰일 했다는 게 그럼······.”그때 서진원이 손으로 대표실 문 앞을 가리켰다.“오늘 회장님께서 수가 틀리셨으면, 임원단들 다 저기로 호출하셨을 거예요. 회장님을 일찍 돌아가시게 만들었잖아요. 대단하십니다.”서진원은 그 말을 남기고 얼른 가서 쉬라며 비서실 문을 열어 주었다.결국 나는 얼떨결에 떠밀리듯 가방을 챙겨 들고 나서야 했다.남들이 이제 막 출근 지옥을 뚫고 빌딩 숲으로 밀려드는 시각, 나는 역주행하듯 그곳을 나가던 찰나였다.다시 한번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한 순간, 나는 놀
새벽잠을 설친 여파로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밤새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일까. 도국은 새벽 5시가 되자마자 매니저 차를 타고 휙 나가 버렸고, 이아준 역시 6시가 조금 넘자마자 자리를 떴다.한여름이라 해가 일찍 뜬 덕분에 녀석들은 밤새 게임에 몰두하다 쪽잠만 대충 자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차준호도 없고, 상하이로 떠난 마당에 나는 분명 어제 허기찬 실장의 문자를 받고 출근을 거절하려 했다. 여행까지 다녀온 터라 피곤에 찌든 몸을 생각하면 오늘은 집에서 푹 쉬었어야 마땅했다.‘왜······ 회장님이?’내가 CC그룹으로 방문하지 않겠다고 거절해서 직접 확인하러 오기라도 한 걸까.생각할수록 머릿속 한쪽이 찌릿찌릿 지끈거렸다. 집에 혼자 남아 심란하게 뒹굴러봤자 불안만 커질 뿐이었다. 결국 나는 친구들이 떠난 직후 서둘러 출근 채비를 시작했다.옷장은 무엇을 입어야 할까 한참을 서성였다. 화려한 원피스나 치명적인 차림새는 오늘따라 전혀 손이 가지 않았다. 대신 예전에 이아준이 넌지시 챙겨주었던 단정한 검은색 슬랙스 바지에, 깨끗한 흰색 시폰 긴팔 블라우스를 꺼내 입었다. 머리도 최대한 흐트러짐 없도록 단정하게 하나로 묶어 올렸다.버스를 타고 회사를 향해 달리는 내내 머릿속은 온통 거대한 안개처럼 어지러웠다. 마침내 정류장에 내려 회사 로비로 걸어 들어가는 동안, 입술이 바짝 말랐다. ‘이렇게 회사가 가기 싫었던 적이 또 있었던가’ 하는 서글픈 탄식이 절로 새어 나왔다.터덜터덜 걸어가며 평소처럼 대표실 전용 프라이빗 엘리베이터를 탈까 하다가, 왠지 오늘은 그럴 용기조차 나지 않아 23층까지 운행하는 일반 엘리베이터를 탔다.그리고 비상구를 통해 25층 대표실 구역으로
"도국아!"오늘 웬일로 녀석이 찾아온 걸까.반가운 마음에 손부터 흔들었다.그리고 그 뒤에 세단도 한 대 도착했다. 바로 이아준이었다."저번에 그 난리를 부리더니, 뭐냐? 낙서 또 시작되었잖아?""제대로 수사하나 했더니, 쯧!"녀석들은 내 등 뒤로 펼쳐진, 페인트 테러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나만큼이나 친구들이 걱정해 주니 오히려 민망할 지경이었다.사실 나는 늘 익숙한 일이라 다시 낙서가 시작되어도 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이례적으로 경찰 측에서 피해자 보호도 해주면서 적극적으로 나서 주더니, 지금은 흐지부지된 상황임이 분명해 보였다."너무 신경 쓰지 마. 경찰관 분들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들어가자. 너희들을 위해 줄 선물이 있어."나는 녀석들에게 그래도 좋아할 법한 술과 주전부리 간식, 그리고 게임 팩이 든 쇼핑백을 건넸다.경제적으로 아쉬울 게 없는 녀석들이지만, 국내에 출시되지 않은 게임 칩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순식간에 어린아이처럼 받아 들고는 기뻐했다."아, 재미있겠다! 요즘 스트레스 잔뜩인데, 하하!""하늘아, 뭘 또 사 가지고 왔어."굳은 얼굴을 풀며 친구들을 안으로 들였다.그래도 오늘 같은 날 할 말이 많은데 친구들이 찾아와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도 가벼워졌다.***집도 그대로, 가구도 그대로.에어컨도 최저 온도로 틀고, 모니터 앞에 자리 잡고 앉고 나니 역시 내 집이 마음이 가장 편하다고 느껴졌다.맥주도 앞에 놓고 내가 준 해산물을 말린 것과 견과류 기념품을 풀고는 우린 게임을 시작했다."도국아 진짜 겨울에 군대를 가냐? 국보급 연예인인데."투덜거리는 이아준의 말에 도국은 입꼬리를 천천히 올리며 대답을 건넸다."국보는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