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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
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
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릴 때마다, 등골을 타고 찌릿한 소름이 돋아났다.
이내 커다란 손이 가슴을 소유욕 가득하게 거머쥐었다. 그의 지문이 닿는 곳마다 마치 뜨거운 인장이 새겨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느릿하게 허리선을 타고 내려가 가장 연약한 여성의 안쪽 살결에 닿는 손길은 지독하게 집요했고, 그가 지긋이 힘을 줄 때마다 나는 속절없이 떨리는 숨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아······!”
지극히 완만하면서도 잔인할 만큼 정확한 자극이 예민한 곳을 문지를 때마다, 뇌리를 찌르는 전율에 척추가 미친 듯이 휘어졌다.
나보다 내 몸의 반응을 더 기민하게 읽어내는 남자답게, 차준호는 내가 어느 지점에서 이성을 놓고 무너지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윽고 거칠게 속을 파고드는 그의 단단하고 묵직한 남성의 존재감이 온몸의 신경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몸의 온도가 가파르게 치솟아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창밖은 서슬 퍼런 겨울이었으나, 서로의 알몸을 빈틈없이 밀착한 채 생생한 온기를 탐닉하는 이 침대 위만큼은 한여름 태양이 작열하는 오후보다 더 뜨거운 열기로 넘실거렸다.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정막한 방 안을 야릇하게 채워나갔다.
“신하늘, 오늘도 예쁘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베이스 음성에 결국 참지 못한 신음이 젖은 숨과 함께 터져 나왔다.
그 매혹적인 목소리에 취해, 나는 그의 단단한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매달렸다. 그의 어깨 근육이 요동칠 때마다 내 손톱 끝에는 그의 살결이 깊게 박혔다.
“대표님도······ 여전히 멋지시네요.”
그가 내 허리를 단단히 받쳐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영혼을 저당 잡힌 듯 사로잡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는 완벽한 지배자이자 최고의 남자였다.
본래 나는 S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자마자 CH-컴퍼니의 게임 개발자로 지원했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내게 배정된 부서는 비서실이었다.
내 성향과는 전혀 다른 업무였지만, 그의 곁에서 완벽한 비서로 남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버텨낸 시간이었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고결한 얼굴을 매일 마주하고, 그가 무심히 건네는 따뜻한 배려의 잔상을 쫓는 것만으로도 나는 매 순간 황홀경에 빠졌으니까. 고된 업무조차 그와 함께라면 달콤한 유희처럼 느껴졌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긴밀하게 2년의 세월을 공유하며 지내다가, 우리의 물리적 거리가 좁혀진 것은 정확히 작년 이맘때였다.
은은한 와인 향에 취해 충동적으로 밤을 보낸 것이 도화선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사귀자는 명확한 언약도 없이 시작된 관계였지만, 지난 1년간 비밀스럽게 탐닉했던 살 떨리는 시간 동안 나는 과분할 만큼 행복했다.
스물여섯. 아니, 며칠 뒤면 스물일곱이 되는 나이.
차준호는 내 인생의 첫 남자였고, 여전히 갈망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관계를 정의 내리지 못한 채 떠도는 이 애매함이 늘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그의 미래에도 내가 함께하기를. 그 욕심을 오늘 전하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의 몸을 조련하고 열기를 피워 올리며, 고백할 타이밍을 집요하게 엿보았다. 그의 뜨거운 피부가 닿을 때마다 등골을 타고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듯 찌릿한 떨림이 일었다.
오늘 역시, 어제와 다름없이 완벽한 밤이어야 했다.
*** 최고의 남자인 차준호와 침대 위에서 맞이한 절정은 더할 나위 없이 황홀했다.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갈 정도로 격렬했던 정사 뒤에 찾아온 나른함마저 달콤했다. 몸을 섞은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니, 이제는 서로의 마음까지 나누어도 되지 않을까.
“신하늘, 오늘 유난히 특별하게 구네?”
그는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에도 흐트러짐 없는 몸짓으로 느긋하게 로브를 걸치며 입을 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나 역시 침대 시트 사이에 흩어진 속옷을 챙겨 입은 뒤 분홍색 니트 원피스를 걸쳤다. 등 뒤로 손을 뻗던 그때, 그가 다가와 지퍼의 고리를 잡아 천천히 올려주었다. 차가운 금속이 여열이 남은 살결을 훑으며 올라갈 때마다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이런 사소한 순간마다 그는 지독하게 다정했다. 이 다정함에 취해 준비한 책을 건네며 고백하려던 찰나였다.
차준호가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한 채, 낮고 서늘하게 속삭였다.
“신하늘, 참고로 나한테 고백 따위는 하지 마. 난 연애 안 해.”
순간 귀를 의심했다.
척추를 타고 차가운 한기가 오소소 돋아나며 뜨거웠던 몸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의 얼굴은, 남의 불행을 구경하듯 지나치게 태연하고 덤덤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손끝이 잘게 떨려와, 애꿎은 원피스 자락만 바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
“대표님이 저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으신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봐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지만,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보여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무너져 내리는 자존심을 간신히 붙잡으며 억지로 무표정을 가장했다. 걸을 때마다 타이트한 치맛단이 연신 말려 올라가 허벅지를 노골적으로 지분거렸다.
사실 그가 선물해 준 이 원피스는 몸매 라인이 지나치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옷이라, 오늘 하루 종일 굶다시피 한 상태였다.
긴장감과 허기, 그리고 배신감이 뒤섞여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바닥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을 쥔 CC그룹의 후계자이자 CH-컴퍼니의 수장. 185cm가 넘는 압도적인 실루엣과 서른한 살의 농익은 남자.
그는 마치 신이 공들여 빚어낸 조각상처럼 수려하고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가장 잔인한 성정을 숨긴 남자였다.
지난 3년간 그를 보필하며, 그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이 스위트룸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나는 내가 특별한 줄 알았다.
‘비서의 품격이 나의 얼굴’이라며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조율해 주던 그의 손길이 사랑인 줄 알았다.
그때, 미니바 쪽으로 걸어가던 차준호가 잔인할 정도로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내뱉었다.
“친절과 호감을 혼동하면 안 되지. 신하늘, 순진하네?”
내 머리는 그저 장식품에 불과했던 걸까.
남녀 사이의 그 얄팍한 역학 관계에 이토록 무지했다니.
걷잡을 수 없는 자괴감이 가슴을 짓눌렀고, 조금 전까지 그와 맞닿아 뜨겁게 달아올랐던 내 몸은 이제 얼음장보다 더 차갑게 식어버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작가[silver구슬]입니다. 이 소설은 전 종로 및 광역수사대 이회림(드라마 시그널, 더킹, 보이스, 영화 선물, 사냥의 시간 등 다수의 시나리오 자문 경험)형사님의 범죄 법률 자문과,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송X(본 작가의 소설 닥치고 내게로 와, 아기를 품은 앙큼한 그녀, 언더커버 스캔들 등 자문)의사 선생님의 의학 자문을 받아 소설에 내실을 기했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나쁜 남자 차준호에게 애증을 느끼는 신하늘의 눈으로 독자님들께 통쾌하고 처절한 사랑에 대한 섬세한 서사를 선보이고자 합니다. 매력있는 등장인물의 각자의 사랑 이야기가 얽혀서 펼쳐 나가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매일 한국시간 1시 5분/ 13시 5분에 글을 예약걸었습니다. 참고해주세요.)
봉사를 천천히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잠깐 숨을 돌리고 나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 버렸다.그런데 차준호가 회사에 급한 일이 터졌다며 연락을 해오는 바람에, 허겁지겁 택시를 타고 CH-컴퍼니로 달려온 참이었다.하루 종일 어르신들 봉사활동을 하느라 몸에 육개장과 김치 냄새가 뱄을까 봐, 이아준이 선물로 준 정갈한 셔츠에 슬랙스를 급하게 입고 나왔다.평소 차준호가 선물해 주던 화려한 원피스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격식 없는 차림은 아니었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도착해 보니 대표실 테이블 위에는 최고급 초밥과 신선한 과일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마치 나와 느긋하게 식사나 같이하자는 듯 말이다.“대표님? 급한 일이 뭔가요?”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묻자, 차준호는 일단 테이블에 앉으라며 턱짓을 하더니 대표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모니터 화면을 띄웠다.오늘 회사에 대형 사고라도 일어난 걸까. 혹시 도국이가 봉사하러 와서 나랑 스캔들라도 터진 건가 싶어 긴장한 채 화면을 주시했다. 하지만 모니터 안에는 뜻밖에도 세나의 연습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신하늘,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하루 종일 어르신들께 음식을 대접하느라 어제부터 육개장과 김치 냄새에 치여 사실 입맛은 싹 달아난 상태였다. 하지만 은은한 단초물의 향과 함께 윤기가 흐르는 초밥을 보니, 평소 해산물을 좋아하는 나는 그제야 허기를 느끼기 시작했다.“아, 네.”차준호는 세나와 하루빨리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며 현재 상황을 함께 점검하자는 명목으로 식사를 권했다.대체 이게 무슨 주말 긴급 업무인가 싶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집에서 혼자 밥을 차려 먹기도 귀찮았던 터라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신하늘,
차준호는 신하늘에게 모든 신경이 쏠려 있어 옆에서 터져 나오는 허기찬의 푸념 따위는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빠르게 사업 확장이나 해야 하는데 한가하게 여자 꽁무늬나 따라다닐 때인가.어쩌자고 이런 이례적인 행보를 이어가는 건지, 스스로에게도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대표님? 자꾸 저 혼잣말하게 하시면 그냥 집에 가서 쉴겁니다!”“여름부터 집에서 영원히 쉬게 해줘?”“아이고, 협박도 참 일관성 있게 하시네요.”허기찬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준호는 팔짱을 낀 채, 저 멀리 천막 아래에서 웃고 있는 신하늘을 빤히 바라보며 나직하게 물었다.“신 비서 옆에 있는 저 둘은 알아봤어?”허기찬은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준비해 온 보고서를 읊었다.“JW엔터 소속의 도국, 그리고 L-DS 사장 이아준입니다. 셋 다 여기 라온초등학교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더군요.”차준호의 짙은 시선은 여전히 천막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신하늘에게 고스란히 가닿아 있었다.“참, L그룹과 JW엔터 측에서는 철저하게 어린 시절 정보는 막아 놓은 상태고요.”“그래도 점심 배식 봉사는 종종 하나 보지?”허기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신 비서의 부모님이 처음 시작하신 일인데, 한 달에 한 번씩, 벌써 7년째 끊이지 않고 이어서 하고 있다고 합니다.”그 말에 차준호는 고개를 살짝 빼고 천막 아래에서 하얀 김을 내뿜으며 끓기 시작한 커다란 들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기특하네, 다들.”그도 신하늘을 격려하고 기부라도 좀 해주
손끝에 와닿는 절인 배추의 서늘하고 축축한 감촉에 순간 내 손길이 굳은 듯 딱 멈춰 섰다.모든 선자리를 단칼에 거절했다는 차준호.그 소식이 왜 이토록 가슴 밑바닥을 무겁게 흔들어 놓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자신에게 닿는 세상의 모든 호의와 타협을 당연하게 거부해 버리는 남자의 오만한 기개는 역시 그와 어울린다고 여겨졌다.매일 저녁 9시 뉴스만 틀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차진철 회장이나 이왕춘 회장 같은 재벌가의 거두들인데.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차준호나 이아준 역시 그 엄숙하고 냉혹한 권력의 자리에 앉아 누군가의 인생을 손쉽게 휘두르고 있을 터였다.현재 느껴지는 이 신분의 격차는 앞으로 세월이 흘러도 메워질 수 없는 아득한 절벽이었다.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서늘한 상실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세종동을 떠나게 되면······ 당연히 아준이나 도국이와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겠지.’어쩌면 지금부터라도 내가 먼저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법을 배워야 하는지도 몰랐다. 친구라는 다정한 이름표를 달고 있어도, 결국 우리가 서 있는 바닥의 높이는 완전히 달랐으니까.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주방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어둠이 짙게 깔린 마당 구석, 오래전 불타버린 보육원 건물 터에 위태롭게 얹혀 있는 이 낡고 작은 집이 내 초라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낮 동안 차마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담벼락의 붉은 낙서들과, 대문 철판 위에 거칠게 칠해진 빨간 페인트 자국들이 환영처럼 뇌리를 스쳤다.“당장 이곳을 떠나야 하는 행정명령이 내려진 것도 아닌데, 회사 몇 년만 더 바짝 다니면 이 지긋지긋한 빚도 다 갚을지 모르고.”나는 짐짓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가슴속을 짓누르던 답답한 공기를 한꺼번에 내뱉었다.
금요일 밤, 어두운 세단 차 안.시트 깊숙이 몸을 묻은 강소희가 살짝 거친 숨을 내쉬며 주원형을 살며시 밀어냈다.“대표님, 메이크업 무너져요. 너무 짓뭉개지 마세요.”주원형이 낮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강소희의 턱끝을 감싸 쥐었다.“고맙다고 먼저 키스한 건 너잖아. 사람 흥분시켜 놓고 무슨.”입을 삐죽인 강소희는 이내 두 팔을 넓게 벌려 주원형의 목을 꽉 껴안았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치마를 위로 말아 올리며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애교라는 것을 부리고 있었다.“대표님, 나 백 감독님 새로 들어가는 로코 영화 주인공 하고 싶어요. 그것 좀 꼭 따주세요, 네?”이제 내년이면 30살이라 로코는 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찍어 두고 싶은 그녀였다. 10년째 주원형을 이렇게 길들여온 그녀였기에 오늘도 그리 칭얼거려 보았다.강소희의 애교 섞인 떼쓰기에 주원형이 쯧, 소리를 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너 진짜 사람 너무 굴리네. 아주 지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들지.”강소희는 주원형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가며, 그의 목덜미에 야릇하게 입을 맞추었다.“대신 흥행도 제대로 내줄게요. 나 연기력 대단한 거 대표님이 제일 잘 알잖아요?”주원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예능 나가.”그 말에 강소희는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대신 딱 두 군데만 나갈 거예요. 나는 T 프로그램이 좋아요. D 방송국은 패스. 거기 PD들은 너무 공격적이라 기분이 별로거든요.” “알았어. 그럼 도국이랑 같이 예능 한 번 나가.”도국의 이름이 나오자 강소희의 얼굴에 금세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어머, 그건 너무 좋아요!”대세 아이돌 도국이니 저번에 키스신도 찍었고 화제성도 좋고 도국과 친해져서 나쁠 것 같지 않은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놀라긴 놀랐다.지금 이건 명백히 위험한 기류였다. 차준호는 그저 친절하고 매혹적인 상사일 뿐인데, 그 손끝이 닿았던 팔뚝의 감촉과 피부로 느껴지던 열기가 잔상처럼 남아 뇌리를 어지럽혔다.“신하늘이 지금 왜 당황하고 있을까.”“어쩌다 그렇게 되었네요. 어쨌든 저 여학생이 오늘 축제의 주인공 같아요. 대표님, 제가 만나보고 올까요?”나는 태연한 척 새침하게 말을 내뱉으며 얼른 차준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하지만 차준호는 무심하게도 무대 위 여학생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턱을 괸 채 고개를 슬쩍 돌려, 오직 내 얼굴만을 짙은 시선으로 빤히 담아낼 뿐이었다.“좋네.”좋기는 뭐가 좋다는 건지. 도대체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속을 알 수 없게 굴까.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듯 세차게 뛰어 도저히 그와 눈을 맞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차준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뚫어져라 무대 위 여학생에게만 눈길을 고정했다. 마침 전광판에 그녀의 이름이 '세나'라고 떠오르는 것을 확인하곤, 얼른 휴대폰을 꺼내 메모해 두었다.무대에서 내려오면 바로 스카우트하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차준호에게 말을 건네려 했지만, 여전히 그 깊고 고요한 눈동자는 오직 나만을 향해 있었다.“대표님, 사람 헷갈리게 자꾸 그러지 마세요.”나도 모르게 참지 못하고 불쑥 속내를 털어놓고 말았다.그러자 차준호의 매끄러운 입꼬리가 호를 그리며, 선이 고운 얼굴 위로 환하고 매혹적인 미소가 번졌다.“아, 이제 알았다.”대체 뭘 알았다는 건지.나는 화끈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볼을 숨기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한계였다. 더 이 남자의 유려한 시선 안
5월 초, 녹음이 싱그러운 계절.목요일 오후 5시. 지성과 청춘의 열기가 가득한 우리나라 굴지의 명문대, S대학교 축제 현장.캠퍼스는 학생들의 활기찬 웃음소리와 경쾌한 음악 소리로 가득 차 있었고, 나 역시 처음으로 차준호가 직접 운전하는 세단 조수석에 올라 이곳에 도착했다.오늘 축제를 위해 그가 준비해 준 옷은 깔끔한 카라가 달린 흰색 반팔 티셔츠와 핏이 딱 잘 맞는 청바지, 그리고 넓은 캠퍼스를 편하게 걸을 수 있는 단정한 슬립온이었다.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오늘도 회사와 차준호의 이미지에 맞게 입어야 하는 날인 걸까. 가볍게 생각하면 근사한 캐주얼 한 벌이 생겨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그가 안겨준 이 모든 것들은 또 가격표가 가공할 만한 액수일 텐데 은근한 부담으로 다가왔다.옆을 보니 차준호 역시 나와 커플룩처럼 카라가 있는 흰색 폴로 긴팔 셔츠에 청바지를 맞춰 입고 있었다. 탄탄하게 다져진 어깨 라인과 훤칠한 이목구비가 받쳐주니 청량하고 감각적인 대학생의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하긴, 그도 20대 후반의 청춘이었다. 짙고 차가웠던 눈빛에 부드러운 봄 햇살이 머물자 주변 풍경마저 숨이 죽을 만큼 눈부셨다.푸른 관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캠퍼스 한복판, 청춘들의 환호와 즐거운 웃음소리에 둘러싸이자 나도 모르게 기분이 들떠 연신 입꼬리가 올라갔다.“신하늘, 예쁘네. 그런데 기분이 그렇게 좋아?”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이제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직진형 칭찬에 제법 면역이 생겼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축제잖아요. 신날 수밖에 없죠.”“그동안 많이 즐겨봤을 거 아니야.”“매년 축제 기간만 되면 과외하고 알바 뛰느라 단 한 번도 참여하거나 친구들과 놀아본 적이 없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