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
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
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릴 때마다, 등골을 타고 찌릿한 소름이 돋아났다.
이내 커다란 손이 가슴을 소유욕 가득하게 거머쥐었다. 그의 지문이 닿는 곳마다 마치 뜨거운 인장이 새겨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느릿하게 허리선을 타고 내려가 가장 연약한 여성의 안쪽 살결에 닿는 손길은 지독하게 집요했고, 그가 지긋이 힘을 줄 때마다 나는 속절없이 떨리는 숨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아······!”
지극히 완만하면서도 잔인할 만큼 정확한 자극이 예민한 곳을 문지를 때마다, 뇌리를 찌르는 전율에 척추가 미친 듯이 휘어졌다.
나보다 내 몸의 반응을 더 기민하게 읽어내는 남자답게, 차준호는 내가 어느 지점에서 이성을 놓고 무너지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윽고 거칠게 속을 파고드는 그의 단단하고 묵직한 남성의 존재감이 온몸의 신경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몸의 온도가 가파르게 치솟아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창밖은 서슬 퍼런 겨울이었으나, 서로의 알몸을 빈틈없이 밀착한 채 생생한 온기를 탐닉하는 이 침대 위만큼은 한여름 태양이 작열하는 오후보다 더 뜨거운 열기로 넘실거렸다.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정막한 방 안을 야릇하게 채워나갔다.
“신하늘, 오늘도 예쁘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베이스 음성에 결국 참지 못한 신음이 젖은 숨과 함께 터져 나왔다.
그 매혹적인 목소리에 취해, 나는 그의 단단한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매달렸다. 그의 어깨 근육이 요동칠 때마다 내 손톱 끝에는 그의 살결이 깊게 박혔다.
“대표님도······ 여전히 멋지시네요.”
그가 내 허리를 단단히 받쳐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자세가 깊어질수록 맞닿은 곳에서 시작된 일체감이 온몸을 사정없이 달구어냈다. 이 오만한 남자가 이토록 미치게 좋았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영혼을 저당 잡힌 듯 사로잡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는 완벽한 지배자이자 최고의 연인이었다.
본래 나는 S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자마자 CH-컴퍼니의 게임 개발자로 지원했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내게 배정된 부서는 비서실이었다.
내 성향과는 전혀 다른 업무였지만, 그의 곁에서 완벽한 비서로 남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버텨낸 시간이었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고결한 얼굴을 매일 마주하고, 그가 무심히 건네는 따뜻한 배려의 잔상을 쫓는 것만으로도 나는 매 순간 황홀경에 빠졌으니까. 고된 업무조차 그와 함께라면 달콤한 유희처럼 느껴졌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긴밀하게 2년의 세월을 공유하며 지내다가, 우리의 물리적 거리가 좁혀진 것은 정확히 작년 이맘때였다.
은은한 와인 향에 취해 충동적으로 밤을 보낸 것이 도화선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사귀자는 명확한 언약도 없이 시작된 관계였지만, 지난 1년간 비밀스럽게 탐닉했던 살 떨리는 시간 동안 나는 과분할 만큼 행복했다.
스물여섯. 아니, 며칠 뒤면 스물일곱이 되는 나이.
이성적인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늘 술을 멀리해 왔건만, 차준호가 붉은 입술을 적셨던 와인 때문이었을까. 강렬한 접촉 속에서 입술 사이로 번지는 달콤한 체리브랜디 향이 코끝을 스치자 머릿속이 아득하게 몽롱해졌다.
차준호는 내 인생의 첫 남자였고, 여전히 갈망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관계를 정의 내리지 못한 채 떠도는 이 애매함이 늘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취기가 돌아 그의 독특한 기운이 나를 온전히 지배하는 순간, 억눌러왔던 금단의 욕망이 기어코 빗장을 풀고 터져 나왔다. 머릿속의 제어 장치가 고장 난 것처럼 그의 숨결 하나하나에 반응했다.
그의 미래에도 내가 함께하기를. 그 욕심을 오늘 전하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의 몸을 조련하고 열기를 피워 올리며, 고백할 타이밍을 집요하게 엿보았다. 그의 뜨거운 피부가 닿을 때마다 등골을 타고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듯 찌릿한 떨림이 일었다.
오늘 역시, 어제와 다름없이 완벽한 밤이어야 했다.
*** 최고의 남자인 차준호와 침대 위에서 맞이한 절정은 더할 나위 없이 황홀했다.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갈 정도로 격렬했던 정사 뒤에 찾아온 나른함마저 달콤했다. 몸을 섞은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니, 이제는 서로의 마음까지 나누어도 되지 않을까.
“신하늘, 오늘 유난히 특별하게 구네?”
그는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에도 흐트러짐 없는 몸짓으로 느긋하게 로브를 걸치며 입을 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나 역시 침대 시트 사이에 흩어진 속옷을 챙겨 입은 뒤 분홍색 니트 원피스를 걸쳤다. 등 뒤로 손을 뻗던 그때, 그가 다가와 지퍼의 고리를 잡아 천천히 올려주었다. 차가운 금속이 여열이 남은 살결을 훑으며 올라갈 때마다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이런 사소한 순간마다 그는 지독하게 다정했다. 이 다정함에 취해 준비한 책을 건네며 고백하려던 찰나였다.
차준호가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한 채, 낮고 서늘하게 속삭였다.
“신하늘, 참고로 나한테 고백 따위는 하지 마. 난 연애 안 해.”
순간 귀를 의심했다.
척추를 타고 차가운 한기가 오소소 돋아나며 뜨거웠던 몸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의 얼굴은, 남의 불행을 구경하듯 지나치게 태연하고 덤덤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손끝이 잘게 떨려와, 애꿎은 원피스 자락만 바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
“대표님이 저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으신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봐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지만,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보여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무너져 내리는 자존심을 간신히 붙잡으며 억지로 무표정을 가장했다. 걸을 때마다 타이트한 치맛단이 연신 말려 올라가 허벅지를 노골적으로 지분거렸다.
사실 그가 선물해 준 이 원피스는 몸매 라인이 지나치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옷이라, 오늘 하루 종일 굶다시피 한 상태였다.
긴장감과 허기, 그리고 배신감이 뒤섞여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바닥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을 쥔 CC그룹의 후계자이자 CH-컴퍼니의 수장. 185cm가 넘는 압도적인 실루엣과 서른한 살의 농익은 남자.
그는 마치 신이 공들여 빚어낸 조각상처럼 수려하고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가장 잔인한 성정을 숨긴 남자였다.
지난 3년간 그를 보필하며, 그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이 스위트룸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나는 내가 특별한 줄 알았다.
‘비서의 품격이 나의 얼굴’이라며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조율해 주던 그의 손길이 사랑인 줄 알았다.
그때, 미니바 쪽으로 걸어가던 차준호가 잔인할 정도로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내뱉었다.
“친절과 호감을 혼동하면 안 되지. 신하늘, 순진하네?”
내 머리는 그저 장식품에 불과했던 걸까.
남녀 사이의 그 얄팍한 역학 관계에 이토록 무지했다니.
걷잡을 수 없는 자괴감이 가슴을 짓눌렀고, 조금 전까지 그와 맞닿아 뜨겁게 달아올랐던 내 몸은 이제 얼음장보다 더 차갑게 식어버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작가[silver구슬]입니다. 이 소설은 전 종로 및 광역수사대 이회림(드라마 시그널, 더킹, 보이스, 영화 선물, 사냥의 시간 등 다수의 시나리오 자문 경험)형사님의 범죄 법률 자문과,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송X(본 작가의 소설 닥치고 내게로 와, 아기를 품은 앙큼한 그녀, 언더커버 스캔들 등 자문)의사 선생님의 의학 자문을 받아 소설에 내실을 기했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나쁜 남자 차준호에게 애증을 느끼는 신하늘의 눈으로 독자님들께 통쾌하고 처절한 사랑에 대한 섬세한 서사를 선보이고자 합니다. 매력있는 등장인물의 각자의 사랑 이야기가 얽혀서 펼쳐 나가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매일 한국시간 1시 5분/ 13시 5분에 글을 예약걸었습니다. 참고해주세요.)
월요일 밤이 깊어 갈수록, 대한민국 언론과 정치권은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거대한 폭풍 속으로 완전히 파묻혀 갔다.[속보! L그룹 회장실 전격 압수수색······ 총선 단 2일 전, 정재계 매머드급 파장][이왕춘 회장 돌연 쓰러져······ 실권 쥐었던 거물의 행방에 검찰 총력전][L그룹 파문의 진실은? 자택까지 수사관 급파, L그룹은 이아준 회장 대리의 비상 체제 가동]TV 앵커들의 격앙된 목소리와 포털 사이트를 도배하는 광풍 속에서도, 이아준은 냉철하게 중심을 잡았다.쏟아지는 언론의 문의를 차단하고 임원진을 긴급 소집하며 L그룹 내부를 견고하게 다잡고 나서야 VIP 휴게실로 돌아온 그였다.도국은 미리 와서 기다렸다가 이아준이 등장하자 어깨를 다독였다.“수고했다.”“어휴, 진짜 정신없네. 할아버지가 대체 어디서 무슨 죄라도 지으신 건가?”“글쎄.”도국은 지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하는 이아준을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달콤한 음료나 술 대신 얼음처럼 차갑고 시원한 생수병을 건넸다.아무리 여야가 운명을 걸고 사생결단을 벌이는 정쟁의 계절이라지만, 총선을 불과 이틀 앞둔 시점에 이토록 무자비한 칼날이 정면으로 들어올 줄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바로 그때, 도국의 슈트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나지막하게 진동을 울렸다.화면에 찍힌 이름을 확인한 도국의 눈매가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평소라면 결코 이 시간에 올 리 없는 연락이었다. 그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누르며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자, 짧은 정적 끝에 익숙하면서도
문 앞에 서서 차준호를 떠올린 나는 다시 거울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그곳에 비친 내 모습은 조만간 대한민국 정치인이 되어 거대한 권력을 포상받는 선택받은 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남편을 살리려는 비정한 마녀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과연 무엇이 정답일까. 인생에서 오답을 낸다면 그 대가는 신에게서 받는 벌이 될까.그 오만하고 완벽한 남자가 화마로 얼룩진 몸을 회복시키느라 병원 신세를 진 차진아의 일상을 다시 훼손해 생명을 연장하는 상황을 견딜 리가 없었다.수술 후유증이 차진아에게 발생한다면 지독한 낙인이자 저주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난 이미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빨리 이 지옥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두 주먹을 꽉 쥐던 그때였다.-그래도 전 대표님의 이식 수술을 권하고 싶습니다.강진욱의 냉혹한 설명이 내 폐부를 짓눌렀다.이를 어쩌나. 다시 스트레스를 받아서일까. 아랫배가 살살 아파 오기 시작했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말을 이었다.“저 역시 대표님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박사님, 신에게 의지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네요.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전화를 끊고 거울 속의 또 다른 나와 마주했다.그리고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 플랜 B로 넘어가야 할 시점이 온 것 같았다.***그 시각, 잠실 L그룹 본사 세미나실 옆 VIP 대기실.회장 대리라는 무거운 직함을 짊어지고 임원진과 전 본사 직원이 운집한 대형 행사를 무사히 치러 낸 이아준은 무대 뒤로 걸어 나오자마자 긴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오늘따라 이왕춘은 왜 부재중인 것인지. 마냥 기뻐야 하지만, 어깨 위를 짓눌러 오는 수천 개의 시선이 안겨 준 중압감
월요일 아침, 서울 성수동 스튜디오.잡지 화보와 글로벌 명품 브랜드 협찬이 동시에 진행되는 스튜디오는 수많은 취재진과 스태프들이 내뿜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메이크업을 마친 세나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 나타난 도국을 보는 순간, 그 모습이 너무 근사해 숨이 막혀 왔다.“세나야, 왔어?”그래도 오랜만의 재회가 어색하면 어쩌나 안절부절못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자신을 편하게 대하는 그의 눈빛에 세나의 가슴속 깊은 곳은 다른 의미로 속이 타들어 갔다.‘한때 키스도 나누고, 계약일지언정 몸과 마음을 다 건네며 연인으로 지냈던 사이인데······.’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도 아깝지 않은 남자였다. 그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었지만, 차갑게 선을 그으며 관계의 종말을 선언한 것 역시 도국이었다.“오빠. 더 근사해지셨네요.”“세나 너도 일본에서 인기가 대단하다며.”인기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민망했던 어젯밤 공항의 해프닝이 떠올라 화제를 돌렸다.“전 아직 멀었어요. 어제 김포공항에 도착했는데 설마 제 팬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신하늘 후보님 지지자들인 거 있죠?”그 말에 도국이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풋, 하고 낮고 감미로운 탄성을 흘렸다.“녀석의 인기는 지금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르고 있지.”신하늘의 이름만으로도 눈부시게 풀어지는 그 미소에 세나의 가슴 한구석이 짓뭉개지듯 아려 왔다. 자신을 떠올릴 때도 저런 눈빛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도국이 신하늘을 향해 품은 감정은 단순한 짝사랑은 아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음에도 괴로워하기는커녕,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그 시각, 고요하다 못해 침묵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한남동 자택의 거실.수심이 깊게 패인 차진철 회장의 곁에 서서 텔레비전 화면을 주시하던 고미주는, 김포공항에 도착한 신하늘과 차준호의 모습이 붉은 헤드라인과 함께 송출되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아 턱 숨을 집어삼켰다.화면 속 신하늘과 차준호의 얼굴은 당장 영양제라도 맞고 쉬어야 할 만큼 위태로워 보였지만, 언론은 그저 두 사람이 여느 평범한 부부처럼 세종동 자택으로 향하고 있다는 속보만을 연이어 띄워 보낼 뿐이었다.“고 여사, 진아야. 밤이 늦었으니 그만 들어가서 쉬어.”차진철의 낮고 퍼석한 목소리가 거실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고미주는 쭈뼛거리며 그를 향해 조심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실상 이 집의 문턱을 다시 넘어섰을 때, 그녀를 맞이한 고용인들의 태도는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자신을 향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모님, 오셨습니까." 하고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차진아를 향해서도 "진아 아가씨, 피곤하실 테니 옷부터 편하게 갈아입으세요."라며 세심하게 챙겨주는 모습에 당황스러움마저 들 정도였다.슬그머니 둘러본 집 안 곳곳에는 자신과 차진아가 황급히 떠나며 남겨둔 흔적들이 손때 하나 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진아 방도 그대로고······ 제 물건들도 전부 예전 모습 그대로 놔두셨네요.”“당연한 것을 가지고.”차진철은 무심한 척 툭 던지듯 중얼거렸지만, 텔레비전 화면에서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핏기 없는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고미주는 불안한 눈빛으로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속에서 신하늘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던 차준호가, 아주 찰나의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일요일 깊은 밤.하네다 공항을 출발해 마침내 김포 공항에 도착한 세나는 들뜨고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발걸음마저 경쾌하게 흩트렸다.이번 기습 입국은 전적으로 대세 중의 대세인 도국과의 화보 촬영 때문이었다.아무래도 도국이 신하늘 편에 서서 기특하게 일해 준 자신을 위해 잡은 스케줄이 아닐까 지레 짐작하기도 했다.“언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작은 기내용 캐리어를 끌며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세나가 옆에 있는 새로 배정된 매니저에게 인사를 건넸다. 입국 수속을 끝내고 잠시 한숨을 돌리고 있자, 청점퍼 차림에 숏컷 머리를 한 20대 후반의 매니저 김연정이 세나에게 미소로 응답햇다.“나야말로 잘 부탁해. 대세 여가수 세나의 담당 매니저라니, 영광이야.”두 사람은 기분 좋게 웃음을 주고받았고, 경호원 두 명의 호위를 받으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과 가볍게 손인사를 하며 대화는 이어졌다.“나 사실 그동안 JW엔터테인먼트에서 코디 담당으로 일했었거든. 대우는 좋지 않았어도 연예인 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이 바닥을 도저히 떠날 수가 없더라고.”JW라는 단어에 놀란 세나는 순간 마른침을 삼켰다.“언니, 그럼 오늘 저랑 촬영하는 도국 오빠, 그때도 보셨겠네요?”김연정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잔잔한 탄성을 내뱉더니 활짝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완벽한 남자지. 빈틈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얼굴에, 능력도 인성도 진짜 최고야. 나도 팬클럽 ‘댄저러스’ 가입했거든.”세나는 밀려드는 뿌듯함에 베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나는 살짝 상기된 볼을 감싸 쥐며 수줍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저도
차준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내 앞접시에 노릇한 해물전을 놓아주며,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냉정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좋은 식사 시간이잖아? 이런 대화는 그만.”다시 테이블 위로 묵직한 정적이 가라앉았고, 차진철 회장의 눈가에는 억누르지 못한 원망과 애통함이 그렁그렁 차올랐다.상대의 영혼을 단번에 베어내는 얼음 칼날 같은 서늘함이었다. 지켜보는 내 어깨가 절로 굳어질 만큼 완벽한 거절이었다.차가운 차준호의 반응에 차진아는 당황한 듯 떨리는 눈동자로 말을 덧붙였다.“예전에 저한테 피부 이식도 해주었잖아요. 전 그저 그때의 은혜를 보답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때 차준호가 시선을 들어 차진아를 똑바로 응시했다.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차진아에게 닿는 순간,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나중에 아버지에게나 효도해. 그게 네가 할 보답이야.”단칼에 대화를 끊어낸 그는 미련조차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방금 전의 냉정함은 흔적도 없이 지워내고, 오직 자신의 궤도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행성이 나라는 듯 지독하고도 뜨거운 갈망만이 서린 눈길이었다.“우리 어서 먹고 해안가 산책이나 다시 하러 갈까?”나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차진철의 초조함과 고미주의 당혹감이 기묘하게 뒤섞인 카페의 공기를 읽어냈다.창밖으로는 일요일의 평화로움을 닮은 파도가 여전히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고, 내 마음 역시 정해진 운명을 향해 다시금 위태로운 항해를 시작했다.***대한민국의 시선이 서울 세종동으로 쏠려 있어야 할 일요일 저녁.확성기 너머로 고함을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