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무슨 그런 거짓말을.
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
“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
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
이걸 그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내게 주었다고 말하려다 그건 삼켜버렸다. 이제와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렇게 계속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을 건 아니다 싶었다.
“됐습니다. 대표님 여자관계가 꽤 복잡해 보이니 다 의미 없는 과거가 되었을 뿐입니다.”
동문서답하듯 내뱉은 말이지만, 차준호의 마음을 후벼 파는 칼날이 되길 바랐다.
마음은 몰라도 몸은 가까웠지만 새드 엔딩이 된 관계였다.
어찌 보면 지금도 거부당한 상태이기에 기억 잃은 남자와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일단 하나는 확실해. 난 매너 있는 남자였을 테니까 순진한 신 비서는 착각한 걸 거야.”
아, 이런.
갑자기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맞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와 똑같이 일관성 있게 상황은 흘러가고 있었다.
“내 비서라면 옷이라도 제대로 입혀줬을 테고, 부려 먹으려면 시시각각 호텔로 불러 가까이 지내지 않았겠어?”
“······.” “어차피 난 백화점과 호텔도 소유하고 있으니 말이야.”그의 말에 명치가 조여들었다. 진실이 녹아든 칼날이 내 심장을 파고드는 듯했다.
차준호의 이런 진심도 모른 채 그를 특별하게 여겼던 내 모습이 안타까워 동정심이 일었다.
“뭐 할 말 있어?”
크리스마스 밤에도 그는 속으로 얼마나 나를 비웃었을까.
그 순간 강소희의 링거 줄이 투투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숨소리마저 내 심장을 할퀴는 것 같았다.
“······드릴 말씀 당연히 많습니다. 어차피 크리스마스 이후로 사적으로는 대표님과 끝내려 했습니다. 기억이 있든 없든 다른 여자가 있는 남자는 제 인생에 필요 없습니다.”
바보 같았던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고, 날 잊어버려 기억도 못 하는 그를 향한 응징이었다.
착각의 대가가 이다지도 가혹할 줄이야. 남자의 마음을 몰랐던 나는 심장이 찢기는 고통을 겪었다.
그는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이며 나를 응시했다.
“신 비서, 당돌하네. 그런데 기억이 없으니 뭘 말해도 감흥이 없네. 더 있어?”
여기서 끝내고 병실을 벗어나야 했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강소희를 가리켰다.
“저는 연말부터 이 시각까지 허기찬 비서 실장님 몫까지 일했으니 보너스는 제대로 챙겨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저 여자나 제대로 책임감 있게 거두세요.”
이게 잘 내려진 결론이었다.
혹시 크리스마스이브에 잘 되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차준호 옆에는 강소희가 있으니 더는 잘 지낼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 온 동네방네를 넘어 전 세계 방방곡곡 차준호는 강소희의 남자라고 소문이 난 상태이니 그와의 미래는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그는 천천히 병상으로 올라가더니 풋- 하고 가볍게 웃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강소희는 다른 남자의 여자일 텐데 무슨.”
병실 문을 잡고 나가려다 나는 멈칫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차준호는 세상 재미있다는 듯 책을 집어 들고 읽으며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나가면서 너스콜이나 해. 그리고 내일 회사 상황 정리해서 3시까지 병실로 와. 보너스 줄 테니까 공사(公私) 구분은 해야지?”
그는 지금 아무 일 없다는 듯 내게 그리 지시를 내렸다.
*** 다음 날 오후.도국은 JW엔터테인먼트 대표실에서 불어 닥칠 폭풍을 예감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제대 후 주어진 휴식 시간이 끝났기에 주원형이 얼마나 살인적인 일거리를 챙겨 놨을까 벌써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정신없이 달려온 신인 걸그룹 ‘플로럴스피릿’ 멤버 4명이 우르르 올라탔다.
금세 자리는 찼고 그녀들에게서 풍기는 냄새에 잠시 욱- 하고 하마터면 두 손으로 입을 막을 뻔했다.
코가 예민한 그였기에 욕지기가 올라왔지만, 꾹 참고 얼굴에 가면을 쓴 채로 미소만 지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을 알아보고 90도로 허리를 굽혀댔다.
“어머! DG 선배님. 안녕하세요.”
“군필 축하드려요!” “실물 정말 멋지세요! 저 선배님 팬클럽 「댄져러스」 멤버예요.” “영화에 CF도 계속 나와 그런지 공백기 없으신 것 같았어요!”자신이 군대 간 이후 결성된 그룹이라 누군지 멤버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 도국이었다.
워낙 소속사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어서 이름을 불러 줄 수 없는 상황에 민망하기만 했다.
제 유료 팬클럽 「댄져러스」 회원도 십 수만 명에 어지간한 JW소속사 여자들은 다 가입된 것으로 알았다.
그냥 영혼 없이 웃으며 소속사에서 신인은 제대로 밀어주니 인사치레부터 해주었다.
“너희가 요즘 대세잖아. 군대에서는 나 같은 놈보다 걸그룹이 하늘의 별이더라.”
그러자 그녀들은 까르르 웃으며 손뼉을 쳐댔다.
프라이빗 엘리베이터를 탈 정도면 슈퍼스타이거나 주원형과 특별한 관계일 텐데.
“어머! 선배님, 감사합니다!”
“그래도 대세 걸그룹은 ‘에스텔라’에요. 어제 저희는 또 2위 했거든요.” “더 분발해서 소속사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선배님! 영화도 솔로 앨범도 올해 대박 나세요!”그녀들은 도국에게 재잘재잘 떠들다가, 엘리베이터 주변을 살피고는 ‘아차!’ 하며 움찔거렸다.
역시나 엘리베이터를 잘 못 탔다고 큰일 났다면서 얼른 18층을 눌렀다.
그럼 그렇지. 이 프라이빗 엘리베이터는 아무나 못 타는데.
와글와글 어수선한 여자애들이 그렇게 휩쓸고 지나가자 도국이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으며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진한 화장품 냄새와 향수는 질색인 그였기에 걸그룹 멤버들이 가까이 오면 너무 스트레스였다.
그나저나 ‘에스텔라’라면 CH에 소속된 걸그룹일 텐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20층에 도착하자 휴대폰을 들었다. 대표실로 향하기 전 신하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별일 없나.’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빨리 받기를 바라며 통화 연결음에 집중했다.
대한민국 선거일은 국민들에게 단순한 투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국가의 명운이 좌우되는 거대한 이벤트이자, 격동하는 대한민국 정치의 맥박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날일 터.특히 이번 선거는 세종동을 중심으로 한 ‘신하늘 신드롬’으로 인해 전 세계 외신의 이목까지 집중된 상태였다.평소 적막과 알코올 냄새만 가득하던 대형 병원 로비는 이제 거대한 광장으로 변모해 있었다.“오늘 신하늘 후보랑 차준호 대표가 들어왔다던데, 진짜야?”“차 대표가 선거운동 내내 아내 외조한다고 무리하더니 결국 탈진해서 실려 왔대요. 그 서슬 퍼런 기운은 어디 가고 아내 옆에선 영락없는 사랑꾼이던데.”사람들의 대화는 개표 방송의 요동치는 숫자만큼이나 뜨거웠다. 누군가는 혀를 차며 차준호의 헌신을 ‘세기의 외조’라 칭송했고, 누군가는 신하늘을 향해 경탄과 축복의 덕담을 보냈다.“처음엔 그냥 운 좋은 신데렐라인 줄 알았지. 근데 저 여자, 다 죽어가던 세종동 민심 뒤집어놓는 거 보니까 보통 내기가 아니더라고.”“그러니까 사람들이 투표했겠죠. 새로운 세상에 거는 기대가 오죽 크겠어요?”각 지역구별로 형형색색의 그래프가 오르내리며 전국이 들썩이던 순간, 장내를 일순간 정지시키는 날카로운 긴급 속보음이 로비를 찢어발겼다.[특보: 김희주 후보 검찰 자진 출두, 모든 과오 인정한다고 밝혀.][김희주 의원,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 및 신하늘 후보를 향한 갑질·폭행 모두 시인]화면 속 김희주는 이전의 서슬 퍼런 여장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초라하고 수척해진 모습으로 포토라인에 섰다.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속에 그녀가 힘겹게 마이크를 잡았다.
“고 여사님, 진아 양.”나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긴 의자로 다가가 조용히 몸을 붙였다.그때 눈시울을 붉히던 고미주 여사가 먼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참, 신 비서······ 고생 많았지? 우리 차 대표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오늘 수술받을 수 있게 데리고 와줘서, 참으로 큰 은혜를 입었어.”내가 한 게 대체 뭐가 있다고.밖으로 쏘다니며 야망을 위해 선거에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저지른 일들의 뒷수습을 아픈 몸으로 해준 건 언제나 차준호였는데.당당하게 두 사람을 위로하러 갔다가 나는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묻어버렸다.그가 제 생명이 깎여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내 앞길에 레드카펫을 깔아주며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여준 것을 떠올리니, 가슴 깊이 참아왔던 감정이 끝내 폭주하고야 말았다.눈물을 더는 억누를 수 없어 후두둑 메마른 얼굴을 적실 뿐이었다.그래도 세상일 참 알 수 없다고.지난 1월 1일, 강소희를 향해 그렇게 날 선 반응을 보이고, 나에 대해서도 마뜩잖게 보았던 이 사람들이 지금은 제일 의지가 되는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사람 인연은 참 얄궂고, 앞으로 맞이할 운명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나약한 인간의 숙명으로 여겨졌다.***그 시각, 이아준은 도국과 함께 정신없이 잠실을 벗어나 막 대한종합병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신하늘 후보님이 차준호 대표님께 이식을 감행하시려다, 현재는 차진철 회장님이 대신 수술대에 누워 계신다고 합니다.]김정규가 선우현과 정보를 주고받자마자 전해 온 메시지였다.이아준은 한강 주
차준호, 내 남자의 생사가 걸린 수술실의 붉은 등은 비정할 만큼 선명한 빛을 토해내며 벌써 한 시간째 복도를 물들이고 있었다.폐쇄적인 병원의 적막 속에서 그 붉은 빛은 마치 누군가의 쏟아진 혈흔처럼 내 망막에 눌어붙었다.손바닥에는 식은땀이 차올랐고, 이유 없는 메스꺼움이 명치끝을 비틀어댔다. 기분 나쁜 축축함과 울렁거림이 가시지 않았다.아직 갈아입지 못한 선거용 점퍼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조차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내 신경을 긁어댔다.인간이 절대자에게 무릎을 꿇고 의지하는 순간은 수없이 많겠지만, 나는 항상 그 신이라는 존재에게 외면만 당해온 처지였다.축복보다는 저주에 익숙했고, 온기보다는 서늘함에 길들여진 삶이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보이지 않는 신이 아니라, 사투를 벌이고 있을 차준호에게 빌고 또 빌었다.‘대표님, 제발······.’조심스레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맞잡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었다.따가운 햇살이 가득할 때는 그의 넓은 그늘에 머물며 안식하고 싶었고, 비바람이 몰아치면 그가 막아주는 튼튼한 우산 속에서 비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보호받고 싶었다.눈물이 나고 슬픔이 넘쳐흐를 때는, 오만하리만큼 단단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직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그 특별한 위로에 젖고 싶은데.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그 어떤 풍파에도 꺾이지 않을 것 같던 그 무소불위의 남자가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다. 그러니 절대자를 믿지 않던 오만한 생(生)이 고작 붉은 등 하나에 명줄을 잡힌 채 바닥까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차준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영혼을 저당 잡힌 채 사로잡혀 있었다.
대체 차준호는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저, 15% 조직 적합성(HLA) 일치하는 공여자가 바로 저예요. 대표님, 제발 수술받으세요. 또 좋은 날 오겠죠.”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 사이에 15%의 조직 적합성이 나왔다는 건 의학적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수치였다. 이건 분명 우리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유일한 줄기였다.“신 비서, 아이를 가졌는데 그럼 안 되지!”“어머나, 내가 못 살아. 그럼 안 돼!”차진철 회장과 고미주가 가슴을 치며 내게 달려들어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나 역시 알고 있었다. 지난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몸이 심하게 쇠약해져 있었고, 뱃속의 아이마저 유산의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차준호는 대체 어떻게 이 모든 진실을 다 파악하고 있었던 걸까.“대표님, 이 고비를 넘겨야 미래도 있는 거예요!”절규에 가까운 나의 고백이 터져 나온 순간, 차준호를 둘러싸고 있던 병원 전체에 비현실적인 정적이 사정없이 감돌았다.그때 차준호는 만사 귀찮다는 듯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입가에 어설프게 내걸며 낮게 대답을 건넸다.“신하늘, 나 비정한 사람 만들 거야? 아이 벌써 포기하면 안 되지. 나 말고 그동안 과로한 신하늘이 좀 입원해야겠네. 어차피 선거는 이길 테니까.”이 남자는 죽어가는 이 순간마저 지독할 만큼 든든하게나를 지키려고 했다.“어떻게 할까요, 회장님.”강진욱 박사는 덤덤한 표정으로 차진철 회장을 바라보았다.“회장님, 도와주세요!”나 역시 광기 어린 눈으로 강진욱 박사의 어깨너머 우뚝 서 있는 차진철 회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차진철 회장은 형
3년 전, 그를 처음 보았던 순간.세상에 이토록 아름답고 견고한 사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난 두 눈을 의심했었다.평범한 인간의 굴레를 벗어던진 채, 중세 시대 거대하고 웅장하게 지어 올려진 성(城) 같이 철벽처럼 느껴진 남자였다.물론 손꼽히는 명문 재벌가의 후계자이자 거대 기업의 대표라는 배경이 그를 더욱 대하기 어렵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이아준이나 도국처럼 완벽한 미남들을 매일 보고 자라 심미안이 남다르다고 자부하던 나조차, 차준호라는 사내가 가진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체격도, 혈색도, 타고난 건강미마저 넘쳐나던 그 압도적인 사내가 힘없이 고개를 떨군 채 쓰러져 있었다.이런 위태로운 모습을 그동안 몇 번이고 지켜봐 왔지만, 오늘도 나는 인생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공포 속에서 그를 병원으로 끌고 와야 했다.“대표님······ 제발, 눈 좀 떠 보세요. 제발요!”불과 조금 전, 출구조사 발표 직후 나는 이젠 다 되었다는 안도감으로 그에게 수술받을 것을 종용했었다.라온초등학교 운동장 위, 가슴 벅찬 당선의 환희가 불꽃처럼 터져 나오던 그 순간, 그에게 빈틈이 생겼을까 싶어 슬그머니 파고들었었다.이렇게 가슴 뜨거운 순간을, 오래 살다 보면 자주 만날 수 있을 텐데. 그와 함께 더 많이 웃고, 그 삶의 행복을 온전히 만끽하고 싶어서, 참아왔던 애원을 다시 한번 그에게 쏟아부었었다.하지만 그는 꼿꼿하게 서서 늘 그렇듯 나의 절박함을 가볍게 거절했다. 자꾸 쓸데없는 수를 쓰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냉정한 말만 내뱉으며.그리고 그 아슬아슬한 실랑이가 이어지던 바로 그 순간, 그가 거목이 베어지듯 무너져 내렸다.허기찬과 선우현이 사력을 다해 뒷수습을
JW소속사 프라이빗 주원형의 펜트하우스 거실.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스크린에서는 자막들이 쉴 새 없이 교차하며 잔인한 숫자의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속보] 현재 개표율 10% 돌파, 세종동 신하늘 후보 1위 우세![개표 결과] 신하늘, 압도적인 표 차이로 일찌감치 선두 유지! 서울의 중심 세종동 지각변동![정가 분석] 김희주 사퇴 효과 무색, XX당의 몰락과 신진 세력의 약진!강소희는 홀린 듯 화면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화면 속, 승리의 영광을 입은 신하늘의 곁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차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어린 시절 처음 본 순간부터 송두리째 영혼을 빼앗긴 압도적인 존재. 차준호는 강소희의 첫사랑이었고,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단 하나의 사람이었다.하지만 결국 자신은 그의 삶에 단 한 줄의 각주조차 될 수 없었다. 그 잔인한 진실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녀의 목구멍을 사정없이 긁어내렸다.수술을 거부한 채 저 몸으로 대체 얼마나 버티려는 걸까. 그녀의 마음속에 늘 뜨겁게 자리했던 차준호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빛을 독점했던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연모를 품는 것조차 과분해 숨을 죽여야 했던 어린 날의 자신이 비참하게 일렁였다.“지금 생각해 보니, 신 비서와 난 악연이었던 것 같아요.”강소희가 고해성사하듯 낮은 목소리를 뱉어내자, 주원형은 말없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의 다정한 위로조차 닿지 않을 만큼 강소희의 세계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난 세종동 서쪽 마을 판자촌 출신이었거든요. 할머니 손에 맡겨져 그곳을 전전하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하마터면 ‘하늘 보육원’이라는 곳으로 갈 뻔했죠. 그러다 운 좋게 해외로 입양된 거고요.”“··&midd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