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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빌런을 좋아한 건가. 이런 망할.

Author: silver구슬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5-19 17:43:31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

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

-하늘아, 어디야?

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

“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

-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

“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네가 준 옷 지금 입었어. 고마워.”

하도 여기저기 옷 지적을 받아서 오늘은 차준호가 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겨우 골라 입었다. 변변찮은 게 없었는데 그나마 연말에 도국이 얻어준 것이 있어 다행이었다.

-예쁘겠네. 또 소속사에 굴러다니는 것 있으면 얻어다 줄게.

“그럼, 나야 고맙지.”

녀석과 통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병원에 이르러 통화를 종료하고는 정류장에 내렸다. 

휴대폰 화면에는 오후 2시 40분이 표시되어 심장 박동이 조금씩 빨라짐을 느꼈다.

20분 뒤엔 차준호와 또 어떤 일로 실랑이를 벌일까. 벌써 머리가 아파왔다.

병원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옷차림부터 점검했다. 비서는 회사의 얼굴이라는 차준호의 말이 망령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라색 코트와 흰색 투피스 치마 정장, 검은색 스타킹에 검정 플랫슈즈를 신은 모습을 병원 유리창에 비춰보았다.

친구가 연예인이니 이리 좋을 수가 없었다. 

소속사에 협찬된 옷 중에 입을 사람 없어 처분하는 것을 도국이 챙겨 준 덕분에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옷은 좋은데 얼굴이 문제였다. 수면 부족이라 눈 밑이 계속 짙어져만 갔다. 어제도 너무 심란해 잠을 잘 수 없었다. 

이 세상에 게임이 없었으면 어찌 살았을까 싶었다. 현실을 잊고 온라인상에서 거친 전투를 벌이니 겨우 숨을 쉰 것 같았다. 

어제의 차준호는 자신이 그동안 알던 말수 적고 젠틀하면서 쿨한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오늘은 또 얼마나 나를 혼란스럽게 하려나 생각하던 그때 카페가 눈에 띄었다. 그가 안 마시면 나라도 마시자 싶어 일단 카페로 향했다. 

습관대로 그곳에서 달콤한 바닐라 라떼 1잔을 테이크 아웃하게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오늘은 VIP 병동 복도가 한산했다. 창밖에 스산한 바람 소리가 가득한 곳으로 기자들이 밀려난 것처럼, 대신 내 마음도 벼랑 끝으로 몰린 기분이었다.

그나마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지만, 이제 차준호를 마주해야 하는 더 큰 난관이 남았다.

병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발걸음도 무뎌졌다. 

노크를 하는 주먹도 너무 꽉 쥐어서일까.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긴장감을 더했다.

똑똑.

땀이 밴 손바닥으로 문고리를 잡은 채 숨을 죽였다.

대답은 없었지만, 인기척이 느껴져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여전히 병상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기에, 테이블 위에 커피를 올려놓았다.

옆을 둘러보니 강소희는 다시 병실을 바꾼다고 일시적으로 자리를 하고 있었다.

매달린 링거 숫자도 줄었고, 의식은 돌아왔는지 등은 돌린 채 잠을 자는 듯 보였다.

차준호와 같이 있으려는 핑계아닌가. 욕이 치밀어 올랐지만, 서류부터 꺼내 들었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돌아가고픈 심정만 굴뚝같았다.

오전에 회사에서 작성한 3년간의 실적 보고서와 주요 사업 현황을 건넸다.

“대표님,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난 태블릿을 꺼내 PPT도 펼쳐 보이며 브리핑을 시작하려 하였다.

달콤한 커피 향이 병실을 채우는 순간, 고개를 든 차준호는 날 보며 고개를 저었다.

“무능한 비서군. 난 단 거 싫어해. 샷 추가해서 아메리카노로 바꿔와.”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내 귀를 파고들었다.

잠깐, 지금 난 귀를 의심했다. 3년간 아침마다 바닐라 라떼를 직접 건네주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

나 원 참.

내가 그렇게 차준호가 3년간 철벽처럼 닫아둔 속마음을 읽어내려 애쓴 세월이 무색하게 그는 완전히 낯선 타인이 되어 있었다.

‘가까운 사이 맞아? 비서가 상사 취향도 모르다니.’라는 조소 섞인 말과 함께, 커피를 사온 것까지 트집 잡는 상황에서 나는 입술을 깨물며 카페를 나섰다.

올해 운명의 장난은 어디까지 계속될까?

지난 3년간, 온 우주의 좋은 기운을 다 써버렸으니 뒷감당을 해야 하는 어두운 시기가 열린 듯 보였다.

대한종합병원 1층 로비에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나는 곧장 카페로 향했다.

뭘 하느라 늦었냐고 타박하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아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늘 바닐라 라떼를 마셔야 하루를 시작한다고 하던 사람은 어디 갔을까?

3년 전에는 단것을 싫어했나? 아니면 나와 함께 달콤한 것을 마시게 된 걸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본래 모습이 이랬던 건지.

결론은 그가 망할 인간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 괜히 커피를 줘서···.’

또 심부름을 나오기 싫었던 나는 우선 카페에서 제일 맛좋고 향좋은 아메리카노가 뭐냐고 물은 뒤 주문을 했다.

***

차진철 회장의 지시로 강진욱과 상담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은 고미주는 차진아를 곁에 두고 병원에 왔다.

재벌가의 안주인 역할 연기가 익숙하지 않은 그녀였기에 최근 어깨가 뻣뻣했다.

1층 로비 빈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혼잣말하듯 검색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병실을 왜 이리 자주 바꿔? 강소희는 그냥 다른 병원으로 쫓아내야겠어. 이런 젠장. 그런 며느리는 질색인데. ”

차준호는 항상 두렵고 어려운 존재였지만, 차진아를 위해서라도 그의 환심을 사야 한다는 생각에 고미주는 필사적이었다.

전전긍긍 이번 사건도 별일 아닌 해프닝으로 끝났으면 하면서 여론만 살폈다.

“엄마, 절대 그런 일은 안 일어나. 오빠는 그런 스타일 싫어해.”

“그래? 그럼 다행이고. 남자들은 이쁘면 다 넘어가잖아.”

차진아는 스마트폰 게임도 지루한지 몸을 일으켜 허리를 뒤틀며 병원 로비를 둘러보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오빠인데, 여자 보는 기준은 까다로울 거야. ······어? 엄마! 저기 봐!”

그때 차진아는 고미주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손가락으로 병원 로비 반대쪽을 가리켰다. 

고미주는 휴대폰으로 포털 사이트 기사를 검색하다 강진욱이 왔나 싶어 고개를 얼른 옆으로 돌렸다 

“왜?”

“아니, 비서 언니가 커피 전문점 또 가서.”

고미주는 다시 입을 한번 삐죽하고는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 대표가 길들이고 있나 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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