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
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
-하늘아, 어디야?
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
“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
-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
“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네가 준 옷 지금 입었어. 고마워.”
하도 여기저기 옷 지적을 받아서 오늘은 차준호가 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겨우 골라 입었다. 변변찮은 게 없었는데 그나마 연말에 도국이 얻어준 것이 있어 다행이었다.
-예쁘겠네. 또 소속사에 굴러다니는 것 있으면 얻어다 줄게.
“그럼, 나야 고맙지.”
녀석과 통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병원에 이르러 통화를 종료하고는 정류장에 내렸다.
휴대폰 화면에는 오후 2시 40분이 표시되어 심장 박동이 조금씩 빨라짐을 느꼈다.
20분 뒤엔 차준호와 또 어떤 일로 실랑이를 벌일까. 벌써 머리가 아파왔다.
병원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옷차림부터 점검했다. 비서는 회사의 얼굴이라는 차준호의 말이 망령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라색 코트와 흰색 투피스 치마 정장, 검은색 스타킹에 검정 플랫슈즈를 신은 모습을 병원 유리창에 비춰보았다.
친구가 연예인이니 이리 좋을 수가 없었다.
소속사에 협찬된 옷 중에 입을 사람 없어 처분하는 것을 도국이 챙겨 준 덕분에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옷은 좋은데 얼굴이 문제였다. 수면 부족이라 눈 밑이 계속 짙어져만 갔다. 어제도 너무 심란해 잠을 잘 수 없었다.
이 세상에 게임이 없었으면 어찌 살았을까 싶었다. 현실을 잊고 온라인상에서 거친 전투를 벌이니 겨우 숨을 쉰 것 같았다.
어제의 차준호는 자신이 그동안 알던 말수 적고 젠틀하면서 쿨한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오늘은 또 얼마나 나를 혼란스럽게 하려나 생각하던 그때 카페가 눈에 띄었다. 그가 안 마시면 나라도 마시자 싶어 일단 카페로 향했다.
습관대로 그곳에서 달콤한 바닐라 라떼 1잔을 테이크 아웃하게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오늘은 VIP 병동 복도가 한산했다. 창밖에 스산한 바람 소리가 가득한 곳으로 기자들이 밀려난 것처럼, 대신 내 마음도 벼랑 끝으로 몰린 기분이었다.
그나마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지만, 이제 차준호를 마주해야 하는 더 큰 난관이 남았다.
병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발걸음도 무뎌졌다.
노크를 하는 주먹도 너무 꽉 쥐어서일까.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긴장감을 더했다.
똑똑.
땀이 밴 손바닥으로 문고리를 잡은 채 숨을 죽였다.
대답은 없었지만, 인기척이 느껴져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여전히 병상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기에, 테이블 위에 커피를 올려놓았다.
옆을 둘러보니 강소희는 다시 병실을 바꾼다고 일시적으로 자리를 하고 있었다.
매달린 링거 숫자도 줄었고, 의식은 돌아왔는지 등은 돌린 채 잠을 자는 듯 보였다.
차준호와 같이 있으려는 핑계아닌가. 욕이 치밀어 올랐지만, 서류부터 꺼내 들었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돌아가고픈 심정만 굴뚝같았다.
오전에 회사에서 작성한 3년간의 실적 보고서와 주요 사업 현황을 건넸다.
“대표님,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난 태블릿을 꺼내 PPT도 펼쳐 보이며 브리핑을 시작하려 하였다.
달콤한 커피 향이 병실을 채우는 순간, 고개를 든 차준호는 날 보며 고개를 저었다.
“무능한 비서군. 난 단 거 싫어해. 샷 추가해서 아메리카노로 바꿔와.”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내 귀를 파고들었다.
잠깐, 지금 난 귀를 의심했다. 3년간 아침마다 바닐라 라떼를 직접 건네주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 나 원 참.내가 그렇게 차준호가 3년간 철벽처럼 닫아둔 속마음을 읽어내려 애쓴 세월이 무색하게 그는 완전히 낯선 타인이 되어 있었다.
‘가까운 사이 맞아? 비서가 상사 취향도 모르다니.’라는 조소 섞인 말과 함께, 커피를 사온 것까지 트집 잡는 상황에서 나는 입술을 깨물며 카페를 나섰다.
올해 운명의 장난은 어디까지 계속될까?
지난 3년간, 온 우주의 좋은 기운을 다 써버렸으니 뒷감당을 해야 하는 어두운 시기가 열린 듯 보였다.
대한종합병원 1층 로비에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나는 곧장 카페로 향했다.
뭘 하느라 늦었냐고 타박하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아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늘 바닐라 라떼를 마셔야 하루를 시작한다고 하던 사람은 어디 갔을까?
3년 전에는 단것을 싫어했나? 아니면 나와 함께 달콤한 것을 마시게 된 걸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본래 모습이 이랬던 건지.
결론은 그가 망할 인간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 괜히 커피를 줘서···.’
또 심부름을 나오기 싫었던 나는 우선 카페에서 제일 맛좋고 향좋은 아메리카노가 뭐냐고 물은 뒤 주문을 했다.
*** 차진철 회장의 지시로 강진욱과 상담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은 고미주는 차진아를 곁에 두고 병원에 왔다.재벌가의 안주인 역할 연기가 익숙하지 않은 그녀였기에 최근 어깨가 뻣뻣했다.
1층 로비 빈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혼잣말하듯 검색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병실을 왜 이리 자주 바꿔? 강소희는 그냥 다른 병원으로 쫓아내야겠어. 이런 젠장. 그런 며느리는 질색인데. ”
차준호는 항상 두렵고 어려운 존재였지만, 차진아를 위해서라도 그의 환심을 사야 한다는 생각에 고미주는 필사적이었다.
전전긍긍 이번 사건도 별일 아닌 해프닝으로 끝났으면 하면서 여론만 살폈다.
“엄마, 절대 그런 일은 안 일어나. 오빠는 그런 스타일 싫어해.”
“그래? 그럼 다행이고. 남자들은 이쁘면 다 넘어가잖아.”차진아는 스마트폰 게임도 지루한지 몸을 일으켜 허리를 뒤틀며 병원 로비를 둘러보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오빠인데, 여자 보는 기준은 까다로울 거야. ······어? 엄마! 저기 봐!”
그때 차진아는 고미주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손가락으로 병원 로비 반대쪽을 가리켰다.
고미주는 휴대폰으로 포털 사이트 기사를 검색하다 강진욱이 왔나 싶어 고개를 얼른 옆으로 돌렸다
“왜?”
“아니, 비서 언니가 커피 전문점 또 가서.”고미주는 다시 입을 한번 삐죽하고는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 대표가 길들이고 있나 보지 뭐.”
같은 시각, 달리는 차 안.인터넷상에는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온갖 억측이 연일 쏟아지고 있었다. 연초부터 계속되는 JW 관련 소음 탓에 대중은 서서히 피로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CH의 주가가 승승장구하는 것과 정반대로, JW는 걷잡을 수 없이 출렁거리며 시장의 불안감을 자극했다.오늘 예정된 예능 방송 스케줄을 소화하러 가던 도국은, 차 안에서 이아준과 통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바쁘게 화면을 두드리며 폭락한 JW의 주식을 무서운 기세로 쓸어 담고 있었다.- 우리 도국이 전문 투자자 다 됐네? JW에 무슨 일이 터져도 금방 회복될 거야. 네가 버티고 있는데 뭔 걱정이냐?사실 대외적인 리스크라고 해봐야 강소희가 헛소리를 하고 다닌 것 정도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주가가 이토록 기이하게 영향을 받는 이유를 도국 역시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었다.“아준아, 주식 판은 점쟁이도 모르는 법이야.”그나마 최근 뜬금없는 스캔들이 터져 주가가 이상 과열되었을 때, 타이밍 좋게 일부를 처분해 막대한 시세 차익을 거둔 도국이었다.- 사실 장기적으로 보면 CH가 더 건재해. 조만간 그쪽에 대형 호재가 터질 거야. 그러니까 너무 JW에만 올인하지 마.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아준의 충고에, 도국의 단단한 입매가 일순간 차갑게 굳어버렸다. 안 그래도 최근 신하늘이 제게 주식 계좌 관리를 전적으로 위탁했는데, 그 계좌 안에서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CH-컴퍼니가 더 우량주이기는 한데······.”도국은 화면에 띄워진 신하늘의 주식 계좌 상세 내역을 다시금 매섭게 들여다보며 천천히 말을 아꼈다.화면 속, [수증 동의 대기] 탭 아래로 신하늘의 이름 앞으로 배정된
차진철 회장은 2월 달력이 넘어가자마자 CC그룹의 임원단 회의를 긴급 소집했다.정신없이 회의를 끝내고 회장실로 돌아와 무거운 의자에 깊숙이 앉아 있어도, 가슴을 짓누르는 갑갑한 잡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동안 고미주로 인해 차준호가 쓰러진 게 아닌지 골머리를 앓느라, 허송세월만 덧없이 보낸 꼴이었다.결국 고미주를 내보내고 난 저택은 텅 빈 고요함만이 맴돌았다.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술독에 빠져 살던 시절이 있었다. 고미주와 가까워진 것도 딱 그 무렵이었기에, 차진철은 그때의 방종했던 자신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자신을 느닷없이 떠났던 고미주가 3년 전 갑자기 나타나, 차진아가 아프니 제발 도와달라며 눈물로 매달렸을 때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 모든 사정을 차준호에게 털어놓자마자,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가 호텔로 가버렸었다.차진철은 고미주와 차진아에게는 평생의 죄인이었고, 차준호에게는 더없이 못난 아버지였다. 텅 빈 거실 주방에서 홀로 식사할 때마다, 녀석의 빈자리가 뼈아프게 실감 나곤 했다.집안 분위기가 이토록 흉흉해진 것도 벌써 3년째였다. 그 무뚝뚝하던 녀석이 올해 들어 뜬금없이 연예인과 열애설이 터지질 않나, 교통사고에 이어 식사 도중 발작 증세까지 보이니 말이다.이 모든 비극이 전부 제 업보 같아, 요즘 들어 빳빳하게 당겨오는 목덜미를 짚어내는 날이 부쩍 늘었다.“회장님, 약은 드셨습니까.”“그래. 날 이리 챙겨주는 사람은 선우현 실장밖에 없군. 그나저나 우리 준호 건강도 걱정이고.”선우현은 차진철의 깊은 고뇌를 이미 꿰뚫고 있었다는 듯,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약과 물을 대령했다.오랫동안 곁을 지키며 알아서 제 도리를 다해내는 선우현이야말로, 이 무거운 속내를 유일하게 털어놓
차준호는 신하늘에게 잘 먹었냐고 말을 하려다 그냥 멈추었다.도국에게 비호를 받고 그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것도 모를 터.차준호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마치 안갯속에 잠긴 미로처럼 느껴졌다.익숙한 것들마저 낯설게 느껴져 그의 판단을 주저하게 만들었다.“허 실장, 내가 지금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아.”지금도 제 관자놀이를 누르며 차준호는 미간을 좁혔다.허기찬은 입을 한번 삐죽거리더니 설마- 하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그리고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는 듯 노트북에 있는 다른 영상을 클릭하면서 잘 들여다보게 각도를 맞춰 주었다.“어휴, 대표님.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는 호수처럼 고요해 보이시네요. 저 같으면 드러누웠을 것 같은데요. 이건 시작도 아닙니다. 각오하세요. 몸도 멘탈도 관리를 잘하셔야 합니다.”말은 단호하게 했지만, 허기찬의 눈빛엔 차준호가 충격을 받을까 걱정이 스쳤다.뭘 시작도 안 했다니.차준호의 어깨는 마치 세상의 무게를 혼자 짊어진 듯 축 늘어졌다.당장이라도 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입술을 깨물며 그 욕망을 땅속 깊이 묻어버렸다.“우리 회사 CCTV 몇 대 더 설치해.”그때 허기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메모를 했다.“네, 알겠습니다. 참 이건 다른 회사 영상입니다.”차준호는 다른 화면으로 시선을 보낸 다음 허기찬의 설명을 들었다.어지간히도 하나에게 실망스러운지 허기찬은 입을 삐죽거렸다.“여기는 JW 소속사라고 하네요. 하나 그것이 참 엉큼한 애였더라고요. 요즘 그곳도 드나든다고 하네요.”차준호는 팔짱을 낀 채 입술을 비틀었다.
붕어빵과 바닐라 라떼라니.최기범의 뜻밖의 센스에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며 봉투 안에서 따스한 붕어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달콤하고 고소한 향기가 텅 빈 위장을 자극하자,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며 한 입 베어 물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내가 통화를 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고 편히 전화를 나누라며 세심하게 배려해 주고 간 그의 뒷모습에 새삼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때, 수화기 건너편에서 도국이 빠르게 말을 이어 붙였다.- 하늘아, 제대로 챙겨 먹고 일해.역시 오랜 친구는 달랐다. 먹을 것을 눈앞에 두고 침을 삼키던 찰나였는데, 녀석의 천리안은 거의 수준급이었다.“알았어. 고마워.”혼자 산 지 오래되다 보니 끼니를 대충 때우는 게 어느새 나쁜 습관으로 굳어졌다. 게다가 비서실에서 일할 때는 늘 흐트러짐 없는 옷 태만 신경 쓰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식사에는 소홀하곤 했었다.내가 직장 생활이 힘들어서 살이 빠진 건 아닐까 염려하며, 친구들은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양손 가득 먹을 것부터 사 들고 오곤 했었는데.-이따 저녁에 뭐 좀 배달 시켜 줄까?멀리서도 이리저리 신경을 써주는 다정함이 그리 감사할 수가 없었다.“와, 우리 도국이가 애인인 사람은 참 좋겠다. 진짜 매일이 행복할 것 같아.”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진심이었다.하지만 아차 싶은 순간 이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고, 내 몸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친구 사이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건드린 것 같았다.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도국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수화기 너머에선 한참 동안 서늘한 침묵만이 돌아왔다.나는 잠
회사에 출근한 뒤, 나는 기묘할 정도로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오전 내내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고 흔한 메신저 하나 오지 않아, 오롯이 내게 주어진 업무에만 순수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그리고, 메신저 이름에 불이 계속 꺼져 있는 차준호 덕분이기도 했다.어차피 그와 내가 머무는 층수부터가 달랐고, 일개 과장급인 내가 회사의 최고 머리인 대표와 사적으로 마주칠 일 따위는 없었으니 자연스레 거리감이 생겼다.차라리 잘된 일이었다.그렇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는 미련 따윈 정말 단 1도 없었다. 더 정이 들면 나만 힘들어질 뿐이고, 그가 아무리 잘해준다 한들 결국엔 잔인한 희망 고문이 될 터였다.‘언젠가 흐지부지되겠지.’시간의 힘을 믿어보기로 하며 묵묵히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회사에 점심시간을 알리는 시각이 되었다.***회사 생활의 꿀맛 같은 점심시간.일단 무료로 제공해 주는 카페테리아지만, 매일 두유만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회사 1층 편의점이나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며 휴대전화를 챙겨 일어났다.혹시나 하고 기사나 검색할까 하며 화면을 켜자마자 단연 눈에 띄는 핫이슈는 역시나 강소희와 차준호의 이야기였다. 인터넷 여론은 이미 두 사람이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그래도 아무런 근거도 없이 강소희가 방송에서 그런 뉘앙스로 말하진 않았을 텐데.’여론의 반박 기사에도 불구하고 차준호의 이름은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었다. 이제는 어느 정계 인사의 딸과 정략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자극적인 추측성 기사들까지 우후죽순 쏟아지는 상태였다.가슴 한구석이 쿡쿡 찌르듯 아려왔다. 차준호에 대한 생각을 끊어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것 자체
관계가 시작되기 전, 강소희의 옷을 벗기던 주원형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흉흉하게 말을 뱉었다.“너의 그 가벼운 입방정 때문에 오늘 아침 날아간 주가가 얼마인지 감이나 잡아?”결국 또 돈.강소희는 속으로 냉소했다.이 바닥에서 구른 지 10년이 넘어가니, 어느새 자신은 배우가 아니라 그저 움직이는 매물에 불과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JW의 든든한 자금줄이었던 자신은 도국에게 서서히 밀려났고, 최근 이렇다 할 흥행작도 없으니 당연한 취급이었다.주원형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몸을 탐하려 들자, 강소희는 천천히 단추를 풀며 감정 없는 밀랍 인형처럼 인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머, 대표님. 제가 인터뷰에서 누구라고 정확히 밝힌 것도 아니잖아요? 차준호가 아닐 수도 있다는 여지가 있으니까 CH 주가는 건재한 거 아니겠어요?”“······제발 그 입 좀 조심해.”기다리지 못했는지 슬슬 옷자락을 난폭하게 헤집는 주원형의 손길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강소희 역시 이미 각오한 바였기에, 오히려 그의 목덜미를 유연하게 끌어안으며 귓가에 대고 달콤한 교태를 부렸다.“도국이 스캔들 터졌을 때 대표님 톡톡히 이득 보셨잖아요. 이번에 하락장 온 김에 재투자하셔서 다시 메우면 되죠, 안 그래요?”돈, 그리고 돈.그가 목숨보다 사랑하는 돈 이야기를 미끼로 던지면 개처럼 누그러질 것을 알았다.과연 주원형은 그 파렴치한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거칠게 짓누르던 손길의 악력을 은근히 늦췄다. 고압적이던 방 안의 공기가 기묘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ldqu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
월요일 늦은 밤.주원형은 그 시각 급하게 대표실로 강소희와 김훈을 불렀다.오랜만에 대작 영화에 강소희가 여자 주인공이 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강소희는 무조건 싫다고 발버둥치는 중이었기에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최근 다른 영화 시상식 참여 때문에 다이어트 중인 강소희는 얼굴이 까칠해진 상태였다. 요즘 매사에 시큰둥한 강소희의 행동이 맘에 안 드는 주원형은 입을 다물고 김훈에게 눈짓만 보냈다.어렵사리 발로 뛰어다니다 드디어 건수를 물어온 김훈은
하얀 입김을 뿜어내면서도 내 앞에 다가선 최기범은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민이 아주 많아 보이는데. 슬슬 내가 필요해진 거 아닙니까?” “날이 추워요. 실장님, 어서 돌아가세요.”나는 손사래를 치려 했지만, 최기범은 그저 사람 좋게 환하게 웃으며 가로등을 등지고 흉물스러운 내 대문을 물끄러미 살폈다. 붉은 래커 칠이 가득한 대문을 바라보는 그의 안경 너머 눈빛에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났다.“여기 CCTV도 없네, 민원 넣어서 달아주겠습니다. 그나저나 이거 서쪽 동네 재개발 조합 사람들이 압력 넣은 건가 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