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 남자가, 진짜······!’
내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차준호는 지금 이 굴지의 거물들 앞에서 나를 당황시켜 기어이 망신을 주려는 걸까, 아니면 나를 시험하려는 걸까.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쳐 귓가가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시선이 칼날처럼 박혀드는 와중에도, 나는 악착같이 프로 비서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쓰며 입술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결정하시는 방향대로 회사가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홍보실을 비롯한 각 부서에 즉각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당사의 중장기적 이미지에 미칠 파장과 주가 리스크를 고려하셔야 합니다.”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건너편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주원형이 나를 기민하게 응시했고, 강소희 역시 이 기묘한 상황이 꽤나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괸 채 눈을
관계가 시작되기 전, 강소희의 옷을 벗기던 주원형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흉흉하게 말을 뱉었다.“너의 그 가벼운 입방정 때문에 오늘 아침 날아간 주가가 얼마인지 감이나 잡아?”결국 또 돈.강소희는 속으로 냉소했다.이 바닥에서 구른 지 10년이 넘어가니, 어느새 자신은 배우가 아니라 그저 움직이는 매물에 불과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JW의 든든한 자금줄이었던 자신은 도국에게 서서히 밀려났고, 최근 이렇다 할 흥행작도 없으니 당연한 취급이었다.주원형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몸을 탐하려 들자, 강소희는 천천히 단추를 풀며 감정 없는 밀랍 인형처럼 인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머, 대표님. 제가 인터뷰에서 누구라고 정확히 밝힌 것도 아니잖아요? 차준호가 아닐 수도 있다는 여지가 있으니까 CH 주가는 건재한 거 아니겠어요?”“······제발 그 입 좀 조심해.”기다리지 못했는지 슬슬 옷자락을 난폭하게 헤집는 주원형의 손길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강소희 역시 이미 각오한 바였기에, 오히려 그의 목덜미를 유연하게 끌어안으며 귓가에 대고 달콤한 교태를 부렸다.“도국이 스캔들 터졌을 때 대표님 톡톡히 이득 보셨잖아요. 이번에 하락장 온 김에 재투자하셔서 다시 메우면 되죠, 안 그래요?”돈, 그리고 돈.그가 목숨보다 사랑하는 돈 이야기를 미끼로 던지면 개처럼 누그러질 것을 알았다.과연 주원형은 그 파렴치한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거칠게 짓누르던 손길의 악력을 은근히 늦췄다. 고압적이던 방 안의 공기가 기묘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ldqu
·주말의 잔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잔인하리만치 무심한 월요일 아침이 찾아왔다.청바지에 투박한 롱패딩. 지극히 평범하고 대수롭지 않은 차림으로 출근길에 올랐다.버스를 타고 회사로 가는 동안 거리 곳곳 거대한 빌딩 전광판마다 걸려 있는 강소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와 마음이 절로 심란해졌다.지난 토요일, 차준호와 최기범이 불쑥 집으로 찾아왔던 기억.그리고 그들이 떠난 뒤 멍하니 지켜보았던 강소희의 인터뷰 프로그램이 자꾸만 뇌리를 스쳤다.텔레비전 속에서 생글생글 웃던 강소희의 집요한 눈빛은 마치 차준호의 서늘한 뒷모습만을 좇고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 내 코가 석 자지.’실소 가벼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오만하고 도도한 남자가 내 비좁은 집에 드나들며 수제비나 얻어먹을 위인은 아니지 않은가.조만간 이 나라 경제계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설 차준호였다. 그의 곁에는 그에 걸맞은 정치계 뒷배를 둔 대단한 여자가 서게 될 터.그러니 나와는 애초에 상관이 없어야 했고, 앞으로도 상관없을 일이었다.문제는 마음이었다. 머리로는 명확히 아는 사실이 가슴에는 통 닿지 않았다.신호등을 기다리며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어제 내내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던 사진 한 장.우리 세 사람이 어색하게 모여 찍은 사진이 갤러리 한구석에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화면 속 차준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며, 그가 남긴 잔인한 말들을 하나하나 곱씹었다.늘 끝내야 한다고, 이 관계는 가짜일 뿐이라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노래를 불렀건만, 막상 그의 기습적인 선언으로 마침표를 마주하니 이별은 생각보다 훨씬
제일 놀란 건 물론 나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다 함께 셀카를 찍자는 뜻인가?“진짜요?”“너 갑자기 왜 이래? 역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맞구나?”천하의 차준호가 사적인 기록을 남기겠다니, 최기범 역시 진심으로 경악한 눈치였다.“내 머리가 정상은 아니잖아. 오늘을 또 잊어버릴까 봐.”대꾸하는 차준호의 눈동자에 평소와 다른 망설임이 아주 잠깐 스쳤다.당연히 끝을 앞둔 사람과 사진이 웬 말이냐고 밀어내야 마땅한데, 이상하게 내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 나갔다.“사진 찍으면, 저한테도 보내주세요.”오늘이 정말 그와의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였을까.나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난 3년간의 추억이 연기처럼 손가락 사이로 허무하게 새어나가 버리자, 무의식중에 아쉬움이 덜컥 삐져나온 모양이었다.“그래.”차준호 역시 내 반응이 의외였는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팔을 길게 뻗었다. 그 짧은 찰나에 우리 세 사람은 하나의 좁은 프레임 안에 갇혔다.“그럼 나도 보내줘.”“알았어.”셋이 한데 모여 찰칵.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역사적인 순간이 휴대전화 속에 박제되었다.이별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밤이라 생각하며 그들을 배웅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거실 한구석, 켜져 있던 텔레비전 화면에 강소희가 등장했다.***[역시 여배우는 극한 직업이에요. 저도 관리하느라 늘 다이어트를 달고 살거든요. 드레스 실루엣에 무조건 몸을 맞춰야 하니까요.]강소희의 조목조목한 발언에 진행자는 ‘천상의 몸매
“거실에서 먹죠.”텔레비전을 계속 보고 있던 그들을 위해 난 만든 음식들을 소파 테이블로 옮겼다.냉장고에 있던 감자와 달걀, 밀가루를 털어 서둘러 수제비를 끓여 냈다. 곁들일 반찬이라곤 파김치와 배추김치뿐인 조촐한 상을 차린 뒤 두 사람에게 수저를 건넸다.얼떨결에 음식을 내어 오자, 차준호와 최기범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신하늘, 재주꾼이네.”“오, 국물 맛도 좋습니다. 다시 봤습니다, 신 과장.”어떻게 그 짧은 새 음식을 뚝딱 완성했냐는 듯, 두 남자가 신기한 눈으로 테이블을 들여다보았다.그동안 날 어떻게 봤길래. 연신 이 둘은 감탄만 자아냈다.차준호의 대저택에서 보았던 화려한 식탁에 비하면 턱없이 초라해 민망했지만, 이게 내 최선이었다.“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최기범은 입에 잘 맞는지 국자로 수제비를 연신 냄비에서 대접에 덜어갔다. 차준호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대로 수제비를 즐기는 듯 보였다.평소 이들이 즐길 만한 부류의 음식은 아니었지만, 깨끗이 비워 주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김치도 제대로네.”“이웃 어르신께 얻은 거예요.”차준호가 파김치를 집어 먹는 모습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3년을 그리 가까이 지내면서도 이런 소박한 음식을 삼키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아픈 날 걱정해 주고, 보일러까지 고쳐주는 남자.하지만 몸은 가까이하면서 마음은 단 한 자락도 내어주지 않고, 과분한 물건을 안겨 주면서 정작 좁혀질 여지는 냉정히 거부하는 잔인한 사람.무엇이 진짜 차준호일까.그렇게 평범한 식사가 이
따뜻하게 데워진 거실 바닥과 공간을 채운 훈훈한 열기.보일러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말끔히 수리된 데다 차준호가 기름까지 채워준 덕분인지, 문을 열자마자 포근한 온기가 나를 맞이했다.그리고 기가 막히게도 내 뒤를 이어 좁은 거실로 밀고 들어오는 두 남자가 있었다.“신하늘, 집이 따뜻한지 확인만 하고 갈 거야.”“차준호, 이 시각에 부하 여직원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니. 참 대단한 오너십이군.”사사건건 으르렁거리는 최기범의 꼴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본인 역시 대체 왜 남의 집 거실까지 자연스럽게 들어온단 말인가.정말이지 도통 낫지 않는 두통이 더 심각하게 도질 지경이었다. 날 위해 보일러를 고쳐준 차준호와, 우연히 퇴근길에 들렀다는 최기범.둘 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불청객임이 확실했다.“자, 보셨죠? 집이 아주 절절 끓을 정도로 따뜻하니까 확인하셨으면 이만 돌아가 주세요.”밤이 깊었으니 어서 가라고 현관문 쪽으로 손짓을 건네며 축객령을 내렸다.“신하늘, 보일러까지 손수 고쳐준 사람에게 차 한 잔 대접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분명 작동 여부만 확인하고 쿨하게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최기범이 등장하자마자 차준호의 태도는 변덕스러운 여름날 날씨처럼 변화무쌍하게 뒤바뀌고 있었다.“신 과장, 그러고 보니 아까 초밥 먹은 게 그새 다 소화됐는지 입이 좀 궁금하긴 하군요.”최기범마저 거들고 나서다니.하, 한밤중에 다들 왜 저러나 싶었다.머리 한구석에서는 당장 두 남자를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머리로는 뭘 대접하나 고민하는 모순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세나는 입술을 말아 물며 머릿속에는 신하늘을 떠올렸다.차준호가 풍기는 그 느낌은 영락 없이 좋아하는 여자를 감싸는 분위기였는데.그렇게 몸만 즐기고 결혼은 다른 여자랑 한다고? 잠시 검색해 보니 이미 차준호를 올해 안으로 결혼시킨다는 뉘앙스로 기사가 도배되어 있었다.심지어 올해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총선도 다가오는 봄이기에 이미 정치 뉴스는 선거 이야기로 도배가 되었다.‘어쩌지······.’차준호의 정략결혼 소식을 도국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야 하나 세나는 이 짧은 시간에 수백 번도 더 고민했다.하지만 결국 당분간은 함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괜히 그 사실을 전했다가 도국의 마음만 사납게 들쑤셔질까 봐 두려웠던 탓이다.그와 딱 50일만 사귀기로 약속했던 기한은 다가오는 봄이 되면 끝이 난다. 한시적인 연애라는 걸 알기에 하루하루 감질나게 흘러가는 시간들이 아깝고 또 아까웠다.마치 모래시계의 얇은 목을 지나 거침없이 떨어지는 모래알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기분이었다.가뜩이나 모자란 시간인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혹시 몰라. 오빠가 내게 완전히 푹 빠져버리면······.’50일이 아니라 100일 1년으로 기한이 연장될지도.세나는 씁쓸하게 퍼지는 불안을 감추려 입술을 더욱 질끈 깨물었다.비록 지금 도국의 품에서 부서져 사라질 덧없는 별빛에 불과할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는 그 누구보다 찬란하게 타오르고 싶다고.그리고 꼭 신하늘과 차준호가 잘 되기를 바라며 뭐라도 다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 결국, 나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야근을 잘 마무리 되었다.밀린 업무를 모두 끝내고 나니 시간은 이미 밤 12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에서 젓가락을 떨어뜨렸지만, 맞은편 최기범의 얼굴 역시 차갑게 굳어 있었다.차준호 같은 남자의 정략결혼이야 재벌가에선 당연한 수순 아닌가. 그런데 나와 최기범은 왜 이렇게 흔들리는 걸까.일단 슬그머니 고개를 숙인 나는 젓가락 끝으로 초밥을 툭툭 치며 수화기 너머로 새어 나오는 강소희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그게 무슨 소리야?”- 기사가 떴어! CC그룹이 정치권이랑 혼인으로 손잡는다고!지역, 학벌, 파벌
세나는 도국의 문자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듯 가슴이 벅찼다.마음을 전부 쏟아내고 싶었지만, 도국이 질려할까 봐 차마 감정을 담은 글은 쓰지 못하고 생각을 멈췄다. 그런데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세나야, 지금 차에서 내려. 보고 싶으니까.]세나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끝이 정해진 관계라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국이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해 주고 있었다.너무 행복하고 짜릿해서 멤버들에게 들킬까 봐 급히 창밖으로 시선을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거실 통유리 앞에 선 나는 창밖을 응시했다. 손님방에서 샤워를 마치고 로브를 걸친 채 차준호를 기다리는 동안, 눈꺼풀이 무겁게 감겨왔다. 피로가 밀려와 시야가 흐려졌지만,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불과 한 달 전. 이곳에서 나는 그와의 천국을 꿈꾸었지만, 그는 내게 지옥을 안겨주었다. 오직 나만이 간직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창밖을 응시했다. 기억을 잃은 그에게는 퇴원 후 낯설어진 공간일 테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곳은 그와 처음을
차준호는 망설임 없이 과거 대화 이력을 검색했다.일반 직원들과 주고받은 로그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원체 텍스트 소통을 귀찮아하고, 비서를 통한 대면 보고만을 고집하던 인간이었으니까.그러나 신하늘과의 대화창은 완전히 달랐다. 스크롤을 올릴수록 업무적인 딱딱함 이면에 숨겨진 묘한 감정의 파고와 은밀하고도 의미심장한 기류들이 그의 눈길을 집요하게 사로잡았다.남자의 직감이 거세게 경고음을 울려댔다. 오늘은 차가운 모니터 화면 따위가 아니라, 그녀의 얼굴을 직접 보고 날것의 이야기를 들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