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그 시각, 대한종합병원 VIP 병실 안.
고요한 병실 안에는 고급스러운 원목 쟁반 위로 서걱서걱 사과를 깎는 소리만 정적을 깨고 있었다. 고미주와 차진아는 벽면에 걸린 대형 텔레비전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오순도순 과일을 깎아 먹는 중이었다.
“허기찬이 아주 싹싹하네. 과일 바구니까지 챙겨 오고 말이야.”
고미주가 사과 한 조각을 내밀자, 차진아는 사과를 입에 넣으며 시선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옮겼다.
“전부 준호 오빠가 잘해주니까 나한테까지 콩고물이 튄 거지.”
그 말에 고미주는 손에 쥐고 있던 과도를 멈칫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오호!’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오르내렸다.
“하긴······ 알고 보면 차
그 시각, 대한종합병원 VIP 병실 안.고요한 병실 안에는 고급스러운 원목 쟁반 위로 서걱서걱 사과를 깎는 소리만 정적을 깨고 있었다. 고미주와 차진아는 벽면에 걸린 대형 텔레비전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오순도순 과일을 깎아 먹는 중이었다.“허기찬이 아주 싹싹하네. 과일 바구니까지 챙겨 오고 말이야.”고미주가 사과 한 조각을 내밀자, 차진아는 사과를 입에 넣으며 시선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옮겼다.“전부 준호 오빠가 잘해주니까 나한테까지 콩고물이 튄 거지.”그 말에 고미주는 손에 쥐고 있던 과도를 멈칫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오호!’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오르내렸다.“하긴······ 알고 보면 차 대표가 아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 같지는 않더라. 물론 무섭기는 하지만.”차진아도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겨울 한남동에서 참혹하게 고미주와 차진아를 경멸하듯 바라본 첫인상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맞아, 오빠는 존재 자체로 사람을 압도하는 무서움이 있어. 나 저기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단한 남자들 중 아무나 하나 잘 꼬셔서 빨리 결혼이나 할까? 우리 엄마 더 이상 고생 안 시키게.”그 순간, 고미주가 과도를 내려놓고 차진아의 어깨를 팍! 소리가 나게 때렸다.“엄마! 나 환자야!”“아주 못 하는 소리가 없어! 공부해서 대학 가야지!”차진아가 아픈 척 어깨를 둥글게 말며 고개를 휙 돌리자, 텔레비전 뉴스 화면 속에서는 마침 L그룹의 새로운 황태자로 부상하고 있는 L-DS전자 이아준 사장이 화려한
나간다는 말을 마친 차준호의 서늘한 눈빛이 휠체어에 앉아 있던 차진아의 얼굴에 물끄러미 닿았다. 그리고 그대로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차진아는 죄가 없는데, 자신은 왜 이리 인생에 자꾸 후회를 남기는 일을 하려는 건가.부친인 차진철의 안절부절못하는 시선은 여전히 차준호에게만 머물러 있었다.어지간히도 자신이 가는 것이 싫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병실을 나온 차진아가 그래도 아버지라고 찾아왔는데, 차준호 자신이 있으면 불편하지 않겠는가.그래도 자신은 한남동에서 나왔지만, 앞으로 고미주와 차진아는 병원에서 나가게 되면 얼어붙은 동토 아래로 온기를 주고받아야 했다.차진아는 그래도 두 주먹을 꽉 쥐고 꽤 용기를 쥐어짠 모습으로 자신에게 인사를 건넸다.“오빠,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안녕히 가세요’가 아니라 다녀오라니.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차준호의 입매가 천천히 열렸다.“아버지, 체스는 내일 저녁에 같이 둬요.”그때 차진철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크게 심호흡도 경쾌하게 이어 나갔다.“그래, 어서 일 보고 와라. 내일 여유롭게 두자. 허허!”이것이면 된 것이지. 차준호는 그렇게 말하고 발걸음을 돌리다, 차진아를 바라보았다.“너 갖고 싶은 거 있어?”차진아는 병원에만 가만히 있느라 필요할 게 뭐가 있을까 찰나의 순간 행복한 고민을 하는 듯 눈이 반짝거렸다.예상치 못한 차준호의 물음에 한껏 미소를 얼굴에 지은 채 침을 꼴깍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 캐릭터 파우치요.”
화요일 오후.대한종합병원 VIP 병실 안. 창가 너머로 떨어지는 정갈한 햇살 아래, 차준호는 한쪽 손을 수트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허기찬과 통화를 이어 나갔다.-아, 대표님······ 갑자기 오셔서 응급 수술 들어가신 어머니 병원비까지 전부 미리 정산해 주셨다면서요.“어차피 아버지도 누워 계셔서 겸사겸사 들른 거야.”차준호는 특유의 시니컬하면서도 낮게 가라앉은 저음으로 덤덤하게 말을 받았다.-감사합니다,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고 보답하겠습니다.수화기 너머로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울먹이는 허기찬의 숨소리가 어지럽게 흘러들었다.차준호는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도 특유의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실력으로 S대에 입학하고, CC그룹 장학생을 거쳐 S대 로펌 과정까지 마친 허기찬을 유독 아꼈다. 머리가 좋은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유능함 뒤에 숨겨진 우직함과 치열함에 대한 남다른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나한테 은혜는 무슨. 허 실장 어머니한테 효도나 잘해. 후회 남기지 말고.”-네, 대표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참, 다음 주 일본 출장은 신 비서랑 가셔야겠습니다.“급한 거 아니야. 7월 말에 갈 일 또 있으니까 미루면 돼.”-아, 그런 거였나요? 하하, 저는 신 비서한테 출장 준비하라고 했는데 다시 이야기해 줘야겠네요.그 말에 차준호는 피식 코웃음을 흘렸다. 참 허기찬답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냥 둬, 신하늘하고 7월에 갈 거야. 허 실장은
세나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모니터 화면 제일 상단에 뜬 닉네임과 아이디를 거듭 확인했지만,진짜 도국이었다.대한민국 최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톱아이돌이자, 지난 5년간 숨 막히는 집안 환경 속에서 세나를 버티게 해 준 단 하나의 우상. 그 도국이 직접 비밀 쪽지를 보내온 것이었다.“역시 오빠는 다정해······.”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혼잣말이 잘게 떨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그대로 뚫고 나올 것처럼 무섭게 요동치기 시작했다.손끝이 떨려 키보드 자판 위에 손가락을 얹어놓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숨을 몇 번이고 깊게 내쉬며 백스페이스와 자판을 번갈아 누른 끝에, 가까스로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네, 오빠! 저 아마 그곳에서 데뷔하게 될 것 같아요! 거기 비서님이 축제 때 절 캐스팅해 주셨거든요!]전송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알림음과 함께 도국의 답장이 도착했다.[비서님이 유능하시네.]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도국의 다정한 다독임에 세나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몽글몽글하게 피어올랐다. 단순한 팬 서비스를 넘어, 연예계 선배로서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듯한 어조에 머릿속이 어지러울 정도로 들떠 왔다.세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오랫동안 가슴 깊이 간직해 두었던 아껴둔 옛 기억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메시지를 써 내려갔다.[저······ 혹시 예전에 오빠께서 저보고 연예인 된다고 공부 접지 말고, 대학 가서 연예인 되면 제 소망 하나 꼭 들어주신다고 하셨는데······ 기억하세요?]메시지를 보낸 직후,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생수병을 하나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편하게 통화할 수 있도록, 그리고 남의 사적인 영역을 엿듣는 묘한 거북함을 피하려 통유리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차준호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거나, 나처럼 친밀한 이성이 있을 수 있는 법이었다. 지금은 토요일 저녁이었고, 아무리 일에 미친 경영자라 한들 사적인 여유를 누릴 권리는 충분했다.그 뒤로도 인터폰 너머의 대화는 낮은 저음으로 이어졌지만, 나는 일부러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25층 대표실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야경은 아득했고, 발밑의 도시 불빛들은 당장이라도 삼켜질 듯 까마득한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의 말 한마디, 미세한 눈짓 하나에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생수 뚜껑을 열었다. 차가운 수분이 입안을 적시고 목덜미를 따라 시원하게 넘어갈 때쯤, 흐릿했던 정신이 비로소 팽팽하게 곤두섰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수화기 너머 여자의 절박한 질문을 서늘하게 잘라내는 차준호의 음성이 귓가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난 누구하고도 연애 안 해. 현재도, 미래도.”단단하고 여지없는 선언이었다. 분명 나를 향한 대답이 아니었음에도, 순간 가슴 밑바닥이 덜컥 내려앉으며 심장이 유난히 기묘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현재도, 미래도 연애는 하지 않는다니.물을 다시 마셔도 달아오르는 열기까지 가라앉히지는 못했다.***차준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조금 전의 날 선 한기는 온데간데없다는 듯,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세나의 영상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신하늘이 인재를 잘 뽑았어.”인터폰 너머의 여자가 남긴 잔상과 차준호의 차가운 단언을 머릿속에서 털어내
봉사를 천천히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잠깐 숨을 돌리고 나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 버렸다.그런데 차준호가 회사에 급한 일이 터졌다며 연락을 해오는 바람에, 허겁지겁 택시를 타고 CH-컴퍼니로 달려온 참이었다.하루 종일 어르신들 봉사활동을 하느라 몸에 육개장과 김치 냄새가 뱄을까 봐, 이아준이 선물로 준 정갈한 셔츠에 슬랙스를 급하게 입고 나왔다.평소 차준호가 선물해 주던 화려한 원피스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격식 없는 차림은 아니었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도착해 보니 대표실 테이블 위에는 최고급 초밥과 신선한 과일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마치 나와 느긋하게 식사나 같이하자는 듯 말이다.“대표님? 급한 일이 뭔가요?”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묻자, 차준호는 일단 테이블에 앉으라며 턱짓을 하더니 대표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모니터 화면을 띄웠다.오늘 회사에 대형 사고라도 일어난 걸까. 혹시 도국이가 봉사하러 와서 나랑 스캔들라도 터진 건가 싶어 긴장한 채 화면을 주시했다. 하지만 모니터 안에는 뜻밖에도 세나의 연습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신하늘,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하루 종일 어르신들께 음식을 대접하느라 어제부터 육개장과 김치 냄새에 치여 사실 입맛은 싹 달아난 상태였다. 하지만 은은한 단초물의 향과 함께 윤기가 흐르는 초밥을 보니, 평소 해산물을 좋아하는 나는 그제야 허기를 느끼기 시작했다.“아, 네.”차준호는 세나와 하루빨리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며 현재 상황을 함께 점검하자는 명목으로 식사를 권했다.대체 이게 무슨 주말 긴급 업무인가 싶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집에서 혼자 밥을 차려 먹기도 귀찮았던 터라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신하늘,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