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
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
“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언제 CH에서는 공식 입장을 발표할 예정입니까?
“현재는 결정된 바가 없습니다.”
-차 대표님의 건강은 어느 상태입니까?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십니다. 단, 해리성 기억상실증(dissociative amnesia) 중에서 국소적(localized) 기억상실증이라는 의학적 소견이 내려졌습니다.”
-강소희 씨는 상태가 어떻습니까?
“그분 사안은 JW소속사 관계자분과 인터뷰 하시기 바랍니다.”
앵무새처럼 반복된 답변을 쏟아냈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컴컴한 밤이 되어서야 사위가 변화가 일었다.
VIP 환자 민원 탓에 기자들이 철수하자 복도가 비로소 조용해졌다.
난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야 AI에서 탈출하여 인간적인 탄식을 뱉어내었다.
병실 앞 복도가 이렇게까지 적막했던가. 이제 몸도 마음도 지쳐 한계였다.
차준호라면 이제 지긋지긋했다. 차준호와 강소희가 함께였던 그날 밤,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실의에 잠겨 있었다.
1월 1일 차준호가 사고 나던 순간에도 평범한 새해를 맞이했는데, 마치 몇 년이 흐른 것만 같다.
‘폭삭 늙어 버린 것 같아.’
그리 심란한 마음을 달래며 차준호는 지금 일어나 이 상황을 어찌 바라보고 있을까 생각하던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면서 고미주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제야 밖이 조용해졌군. 신 비서. 들어와. 차 대표랑 이야기 좀 해 봐.”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날 잊은 그 남자를 이제야 마주하게 된 것이다.
*** 나는 가슴속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을 억누르며 발걸음을 옮겼다.병실 문을 열자 가습기가 뿜어낸 습기가 차준호의 그동안의 부재를 메우듯 촉촉한 공기로 거듭나 있었다.
생화 향기가 코끝을 스쳤지만, 내 마음은 그윽한 꽃향기마저 집어삼킬 듯이 요동쳤다.
옆을 둘러보니 병실 안쪽 분리된 침상에 강소희가 누워 있었다. 언론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임시로 옆 병실이 빌때까지 준호의 거대한 VIP 병실에 함께 수용된 모양이었다.
강소희에게 매달린 링거 숫자도 줄었고, 의식은 돌아왔는지 등을 돌린 채 잠을 자고 있는 듯 보였다.
병실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그녀를 보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기에 바로 차준호를 노려 보았다.
검은 머리에 매끈한 피부. 공들여 잘 빚어 놓은 듯 완벽하게 조화로운 얼굴. 큰 키에 반듯한 자세까지.
잘난 외모의 그가 병상에 느긋하게 앉은 채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알고 있는 그 차준호가 맞았고, 늘 무심하게 독서하던 습관도 그대로였다.
주렁주렁 링거 호스가 두 개 달려 있기는 했지만, 그는 당장 일어나 출근할 수 있을 만큼 혈색이 좋았다.
의식을 잃을 만큼 사고를 당했다는 게 거짓말처럼 그의 몸은 상처 하나 없이 완벽했다.
진짜 기억을 잃은 건지. 그리고 정말 강소희와 연인 사이는 맞는지.
가슴속에 무성하게 늘어가는 질문들을 내뱉고 싶지만, 일단 입은 굳게 닫았다.
차준호가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는지 책에서 눈을 떼고 집요하게 나를 응시했다. 신기한 물건을 관찰하듯 호기심을 갖고 보는 모양새였다.
“······신하늘 씨? 내 비서였다고?”
차준호의 눈동자가 내 이름을 음미하듯 깜빡이자, 심장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관심은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네, 대표님을 3년간 옆에서 모신 신하늘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기억을 잃은 그에게 낯선 사람처럼 대해야 했다.
난 최근 3년 함께 있었던 시간도 남들보다는 길었고,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이지만 그건 이제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링거 호스를 거칠게 걷어내고 책을 덮는 그의 손길에는 근육의 긴장이 묻어났다.
그때 소파에서 고미주와 차진아가 코트를 차려입으며 인기척을 내었다.
“차 대표, 강 박사님이 안정을 취하라고 하셨으니 잘 쉬도록 해요.”
“오빠, 우린 이제 갈게요.”목소리가 개미 소리처럼 기어들어 가는 게 두 모녀는 어지간히도 차준호가 어려운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피곤하군요. 어서 나가주시죠.”
차준호의 말투에서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흘러나오자, 고미주도 몸을 움찔하더니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그··· 그래요. 몸조리 잘하도록 해요.”
“······안녕히 계세요.”두 모녀는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차준호와 데면데면한 인사를 나누고 병실을 나가고자 몸을 돌렸다.
그런데 고미주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눈에 힘을 주며 말을 건넸다.
“신 비서, 기자들은 이제 안 올 거야. 보너스는 차 대표에게 받아.”
수고했다는 소리를 참 엄하게도 하네. 이 와중에 돈 이야기를 꺼내 다니,
어지간히 그때 용돈을 안 받은 게 거슬렸던 모양 같았다.
“네, 조심해 가십시오.”
그리 말하며 목례를 고미주에게 하자 갑자기 차진아가 쪼르르 다가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살갑게 굴어댔다.
“비서 언니, 혹시 금수저야? 이거 다 명품이죠?”
“그럼 회사 대표 비서가 입장 발표하는데 후줄근하게 입어야겠어?”차준호가 준 것 중에 평범한 것은 하나 없었다. 전부 명품은 물론이거니와 심미안이 뛰어나 디자인도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비서는 대표의 얼굴이니 차림새는 완벽해야 한다는 말은 차준호가 내게 종종 했던 말이었다.
두 모녀로 인해 머쓱해진 나는 이 옷을 선물로 준 차준호를 쳐다보았다.
눈빛이 교차하는 순간, 전류가 흐르듯 손끝이 저려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입은 원피스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입은 것인데 그가 알 턱이 없다고 생각하니 더 가슴이 갑갑해졌다.
그때, 차준호는 천천히 내 머리에서 발까지 훑어 내렸다. 꼭 손으로 쓸어내리는 것 같아 심장이 간질거렸다.
잠시 뒤, 어수선하게 두 모녀가 나가자, 병실 안에는 이제 나와 차준호 둘만 남게 되었다.
병실에는 적요함만 가득했다.
물론 이곳엔 나와 차준호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가 있는 반대쪽에 병실을 옮긴다고 잠시 이곳에 머물고 있는 강소희도 의식을 잃고 누워있었다.
어서 회복하라고 인사하고 사라져야 하나, 제대로 회사 일에 대해 본격적으로 안내해줘야 하나.
3년 기억을 못 한다고 하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그저 말문이 막혀왔다.
그때 차준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신하늘 씨, 비서니까 커피 좀 사 와.”
이 시각에 웬 커피?
그는 원래 아침에만 커피를 마셨기에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지시지만 발걸음은 저절로 움직였다.
3년 전에는 밤에 커피 마시던 사람이었나?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일단 카페로 서둘러 향했다.
사고가 아니라, 명백한 범죄였다.게다가 수사기관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결정적 증거’라는 표현을 끌어썼다면, 그건 혐의를 입증할 완벽한 확증이라는 뜻이었다.도국과 이아준은 그 시절 ‘하늘 보육원’을 덮쳤던 참상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 처참한 화염 이후, 신하늘의 삶이 얼마나 지옥 같은 진창 속으로 내던져졌는지 누구보다 아프게 알고 있었다.김희주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소름 끼치는 범죄자였다. 그러니 주원형의 한방은 꽤 강력한 무기가 된 셈이었다.옆에 서 있던 이아준 역시 온몸을 미세하게 떨며 도국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김희주, 그 여자는 악마야. 그냥 둬서는 안 돼.도국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신하늘이 지금 어떤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얽히고설킨 타래를 풀 열쇠가 김희주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해졌다.“하늘이와 연관된 것이라면 그 어떤 정보라도 주십시오. 저도 JW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지금은 주원형이라도 김희주를 들쑤셔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 나도 모든 걸 걸었으니까. 관련 정보는 파일 보내줄게.주원형이 얼마나 악독한 인간인데. 강소희를 위해 감히 국회의원과 맞서려 하다니. 사랑이라는 감정이 냉혈한마저 얼마나 무모하게 만드는지 도국은 새삼 놀라게 되었다.전화를 끊은 뒤에도 수화기 너머로 전해진 충격이 여운처럼 남아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도국은 차오르는 한숨을 겨우 눌러 담으며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그때, 이아준이 도국의 어깨를 두드리며 잠시 입을 달싹였다.“국아, 하늘이는 너와 나를 걱정시킬 위인이 아니야. 분명
“나 대한민국 국회의원이야!”용산경찰서 취조실 안, 김희주의 날카로운 고성이 차가운 시멘트 벽에 부딪혀 요란하게 튀어 올랐다.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를 해대던 그녀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듯 형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은 형사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건조했다.“그러게 말입니다. 그리 바쁘신 분이 왜 고용인을 폭행하셨습니까.”“합의! 합의하면 될 거 아니야!”그때, 곁을 지키던 변호사가 조용히 손을 올려 김희주의 어깨를 눌렀다. 경솔한 언행을 자제하라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그 의미를 모를 리 없음에도 김희주는 터져 나오는 분노와 경련을 주체하지 못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결국 또 경찰 조사를 받다니. 문밖에서 플래시를 터뜨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을 기자들의 얼굴이 환각처럼 떠올랐다.제풀에 성질을 못 이겨 일을 그르친 제 고약한 성격이 원망스러웠다. 스스로 땅을 치고 후회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형사는 그녀의 히스테리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무미건조하게 받아쳤다.“신하늘 씨,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곁에 있던 변호사가 얼른 끼어들며 말을 가로챘다.“그건 의뢰인께서 새벽 조사 때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안에 대해서 저희 의뢰인은 아는 바가 전혀 없으십니다.”그러자 형사는 변호사가 아닌 김희주를 향해 서늘한 눈길을 흘렸다.“그건 강남경찰서에서 하신 말씀이겠지요. 저희는 용산경찰서입니다. 참 여기저기 사고를 치고 다니시니, 이렇게 여러 범죄 혐의로 번갈아 조사를 받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내가 도의적인 책임감으로 이렇게 직접 나와 준 거잖아! 변호사만 보낼 수도 있는데! 좀 쉽게 쉽게 갑시
차준호에게 이 저택은 언제나 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오늘도 저택에는 늘 무거운 정적만이 맴돌았다. 깊은 침묵이 밀려들자, 마치 적진 한가운데로 발을 내딛는 장수의 심정으로 비장하게 발을 디뎠다.1층 다이닝 룸 근처에 있던 고용인 두 명이 차준호를 발견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아, 대표님.”“오셨습니까. 차라도 준비해 드릴까요?”차준호는 대답 대신 1층 내부를 천천히 훑었다. 평소라면 거실에 머물며 신문을 보거나 뉴스를 틀어놓았을 터였다.“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회장님께서는 2층 서재에 계십니다.”집 안을 둘러보는 차준호의 눈매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위화감이 공기 중에 감돌고 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아직 명확히 짚어낼 수 없었지만, 본능적인 경계심이 솟구쳤다.“요즘 아버지는 식사를 잘하십니까?”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두 고용인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시선을 교차했다. 짧은 침묵 속에 말을 아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평소와 다름없으십니다.”“차는 서재로 올려 보낼까요?”차준호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뒤돌아섰다.***도대체 이 찜찜한 기분의 정체는 뭘까. 무언가 결정적인 한 끗을 놓치고 있다는 조바심이 차준호를 짓눌렀다.1층 공간을 재차 훑고 손님방 문을 슬쩍 들여다본 뒤,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2층에 다다르자 서재 너머로 앵커의 긴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뉴스에서는 차준호, 신하늘, 김희주, 그리고
어느덧 시간은 정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강남경찰서에서 새벽녘에 잠실로 돌아온 이아준과 도국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이아준의 눈꺼풀은 무겁게 내리앉았고 몸은 솜뭉치처럼 둔하게 가라앉았다. 겨우 소파에 누워 몇십 분 남짓 쪽잠을 청했던 이아준은 샤워를 마친 뒤 수트를 갈아입으며 타이를 매만졌다.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에는 지독한 피로와 그늘이 짙게 배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육체보다 그를 더 괴롭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을지도 모를 신하늘의 잔상이었다.그런 이아준을 묵묵히 바라보던 도국이 어느새 손님방에서 나와 텀블러에 쉐이크를 타서 무심한 듯 건넸다.“빈속으로 출근하지 말고.”단백질 음료가 담긴 텀블러를 받아 든 이아준의 입가에 희미하고 쓸쓸한 미소가 스쳤다.“더 자지 뭐 하러 나와.”“너 가는 거 보고. 자도 돼. 이거라도 마셔.”“사실 아무것도 안 넘어가는데. 네가 준 거니까 먹고 가야겠다.”이아준이 쉐이크를 한 모금 삼키고 다시 정수기로 걸어가 차가운 물을 컵에 가득 채워 벌컥벌컥 마셨다.차가운 수분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지만,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답답한 열기와 타들어 가는 애타함은 전혀 식지 않았다.“김희주가 아니라는 게 확실해지니까 일이 더 복잡하고 기괴해진 느낌이야.”“그러게. 김희주라면 잃을 게 많아서 겁만 주겠지 싶었는데······.”도국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이아준은 들고 있던 컵을 조용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차라리 김희주라는 명확한 적이
강남경찰서 복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일촉즉발의 기류로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평소라면 한밤중의 소란스러운 취객이나 잡상인이 들끓던 평범한 형사과 복도였지만, 오늘 밤만큼은 달랐다.차준호를 필두로 이아준과 도국까지,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내로라하는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여든 까닭에 경찰서 전체에는 숨조차 편히 쉬기 힘든 중압감이 무겁게 짓눌려 있었다.그리고 평화로웠던 신하늘의 일상을 짓밟고 권력의 탐욕에 눈이 어두워진 김희주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걸어오자, 분위기는 더욱 흉흉해져갔다.김희주의 뒤로는 사복 차림의 정장 사내들이 빽빽하게 장벽을 치며 호위하고 있었다.그녀는 피의자나 조사 대상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오만할 정도로 당당한 표정이라 기가 찼다. 그때 김희주의 뒤에 바짝 붙어 있는 대형 로펌 변호사를 힐끔 흘겨본 허기찬이 차준호에게 낮게 읊조렸다.“호화 변호인단을 대동하고 나타났군요. 대표님, 도발을 한번 해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허기찬의 말을 들은 차준호는 격앙된 마음부터 가라앉혔다. 이럴 때 먼저 흥분하는 쪽이 패배하는 법이었다. 차준호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묵직하게 한마디를 뱉어냈다.“김 의원님, 선을 너무 많이 넘으신 것 같습니다만.”그러자 김희주는 비틀린 입꼬리를 올려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다들 두고 봐.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다니,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갈 거니까.”“비참이라니요! 자업자득입니다. 본인이 판 무덤에 본인이 빠진 겁니다!”이를 악물고 던진 이아준의 차가운 일침에 이어, 옆에 서 있던 도국이 핏발 선 눈으로 김희주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하늘이에게 티끌 하나라도 상처가 더 생긴다면, 당신 앞날도 결코 편치 못할 겁니다
일본 한 특급 호텔의 숙소에 도착해서도 계속 모두는 신하늘의 이야기로 열기를 돋우었다.그 기사를 보고도 세나와 나나는 놀랐지만, 하나와 두나는 늘 그렇듯 평소처럼 비아냥거리는 반응만 보였다.“신 비서님은 좋겠어. 연예인 이상으로 주목이나 받고.”“우리 대표님도 그리 아껴주고, 도국 오빠나 L-DS 사장님까지 떠받들어 주다니 어우 부러워. 이거 다 쇼야! 쇼!”도국이란 이름에서 피어오르는 아련함이 세나의 폐부를 찔렀다.신하늘과 차준호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틈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걸. 매번 깨닫는 자신이었다.역시 지금 보니 도국은 여전히 신하늘에게는 전부를 다 건 남자라는 것 같아서 마음은 절망을 헤맸다.그때 옆에 있던 나나가 호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세나에게 건네주었다. 물방울이 페트병 밖에서 구슬처럼 굴렀다.“언니들, 너무 잔인하네요. 사람이 사라졌는데 부럽다니. 신 비서님은 능력 있고 처신도 잘하니 그만큼 대접받고 있는 거예요.”나나가 퉁명스럽게 굴자, 하나는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끈했다.“딱 보면 모르겠어? 연예인 중에 가끔 잠적했다가 동정심 받고 돌아오는 사람 종종 있잖아!”“신 비서님은 여우야. 잘 봐. 차준호 대표님 마음도 거머쥐고, 김희주도 지옥으로 보내고, 국회의원 선거 안 나가도 욕 안 먹고! 너무 대단한 시나리오잖아?”알고 보면 그렇기는 한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정말 신하늘을 하나와 두나처럼 꼴보기 싫어 누군가 해코지를 한 거라면?생수가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 위장에 찬 기운이 서리는 기분이 들었다. 세나는 입가에 묻은 물방울을 닦으며 말했다.“그런데, 언니들이라면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