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
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
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
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
대신 눈앞의 신하늘은 뭔가 달랐다. 늘씬하고 굴곡진 실루엣이 가차 없이 드러나는 분홍색 니트 원피스. 가늘고 우아한 목선 위로 흘러내린 갈색 긴 머리와 단아한 화장, 그 아래 숨은 오밀조밀하고 고운 이목구비.
하지만 비주얼보다 차준호를 자극하는 것은 그녀의 반듯하고 오만한 태도였다.
신하늘의 표정은 비서임에도 감히 시선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조금 전 통화한 부친 CC그룹 차진철 회장마저 ‘신하늘이라면 이 혼란을 가장 완벽하게 정리할 테니 전적으로 맡겨두라’고 확언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를 보는 저 눈빛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단순히 상사를 대하는 비서의 그것이 아니었다. 지난 3년 동안, 자신은 신하늘과 도대체 어떤 밀도 높은 관계를 쌓아왔던 걸까.
그녀의 투명하고 맑은 갈색을 머금은 황금빛 눈동자가 마치 영혼 깊숙한 곳에 날카로운 메스를 꽂아 넣는 것처럼 시리게 파고들었다.
*** 내가 매일 아침 출근길에 습관처럼 들르던 병원 로비의 카페는 다행히 늦은 시각이지만 불을 밝히고 있었다.그곳에서 평소 차준호가 유난히 찾던 달콤한 바닐라 라떼를 한 잔 주문했다.
중환자실에서 막 나온 환자에게 카페인은 금지되었을 텐데.
그저 지독하게 예민해져 있을 그의 신경을 달래줄 향이라도 맡게 해주고 싶다는, 오랜 비서로서의—혹은 지워진 연인으로서의—쓸쓸한 배려였다.
VIP 병실의 육중한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려다, 짓눌린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잠시 내렸다.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위태롭게 흔들릴 때, 내 심장 역시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추락했었다.
게다가 강소희라는 화려한 여자와의 스캔들까지 터져 나의 자존심은 갈가리 찢긴 상태라 비참함이 극에 달했다.
하지만 발상을 뒤집어보면, 이건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와 3년 전 처음 만났던 공적인 관계로 강제 리셋된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의 고백했다가 차인 사건은 차준호의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었고, 회사를 도망치듯 그만둘 이유도 사라졌다.
대신, 다른 여자를 옆에 태우고 사고를 낸 그에 대한 미련한 마음만큼은 완벽히 정리해야 했다.
‘둘이 나 몰래 사귄 거였나? 어쩌면 둘이 사귀는 도중에 나랑 바람 피운 건가?’
어찌 되었든 차준호는 이제 내 인생에서 망할 나쁜 남자라는 것이 결론일 뿐이었다.
굳게 입술을 다물고 흩어진 감정의 파편을 가다듬은 뒤, 나는 단호하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선 병실 안을 훑자, 차준호는 병상에 길게 다리를 뻗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미동조차 없는 그의 실루엣은 마치 박물관에 전시된 고결한 조각상 같았다.
나는 조용히 걸어가 그의 손길이 쉽게 닿을 수 있는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온기가 서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전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활자 위로 길게 속눈썹을 드리운 그는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소속사 연예인들을 단숨에 학살할 만큼 압도적인 아우라를 풍기는 남자.
CH-컴퍼니 내에 사내 팬클럽이 존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 책장을 넘기던 그의 손끝이 멈추었다. 그리고 서서히 들려온 시선이, 내 얼굴과 드러난 몸매 라인을 꼼꼼하고 노골적으로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마치 손가락 끝으로 피부를 강하게 지분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어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센스 하고는.”
낮게 긁히는 목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멍하니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응시하다가, 날카로운 채찍에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차준호가 읽던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더니,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에 서린 빛이 잔인할 만큼 차가웠다.
“옷이 그게 뭐야?”
“······무슨 말씀이신지.”기자들을 상대하느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차려입은 옷이지만 그의 지적에 수치심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타이트한 원피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차준호는 난데없이 제 손등에 꽂혀 있던 링거 바늘을 가차 없이 뽑아 버렸다.
185cm가 넘는 몸에 체격까지 큰 그의 실루엣이 순간적으로 시야를 꽉 채우며 다가오자, 압도적인 위압감에 숨이 가빠졌다.
그가 내 코앞까지 걸어와 길게 팔짱을 끼더니,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덤덤하게 물었다.
“평소 난 어땠지?”
“대표님께서는 유능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질문의 의도는 그게 아니잖아?”원래 그는 이렇게 오만하고 거친 성정의 남자였던가. 이것이 그의 가식 없는 본성이라면, 그동안 나를 안아줄 때 보여주었던 그 달콤한 모습은 전부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면이었을까.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난 오기가 생겼다.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가슴을 펴고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저를 특별 대우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이 원피스도 대표님께서 취향이라며 선물해 주신 겁니다.”
“설마.”차준호의 미간이 아주 우아하게 구겨졌다. 도대체 그는 지금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서 이토록 날을 세우는 걸까.
기억을 잃으면서 인간성까지 날려버린 것 같았다.
“대표님, 제게 왜 이러시는 거죠?”
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쏘아붙이자, 차준호의 짙은 눈초리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이내 그의 입술 사이로 조소 섞인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신 비서가 거짓말을 하니까 그렇지. 전혀 내 취향도 아닌데.”
가슴 깊은 곳을 정통으로 찔린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주먹을 꽉 쥔 손톱이 연약한 손바닥 살을 파고들어 저릿한 고통을 안겼다.
다른 여자와 밀회를 즐기다 사경을 헤매고, 그 지저분한 뒷수습을 하느라 며칠 밤낮을 고생한 나였다. 그런데 고작 돌아오는 것이 이런 모욕이라니.
“지독하게 무례하시네요.”
“좀 마음이 안 드네.”온몸을 불태우며 밤을 나누었던 그 황홀한 추억들이, 그의 말 한마디에 하찮은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파왔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들끓었다.
하지만 나는 허리를 더 꼿꼿이 세웠다. 감정을 완벽히 지워낸 로봇처럼, 가장 차갑고 서늘한 어조로 받아쳤다.
“대표님이야말로 착각하지 마세요. 앞으로 저를 피곤하게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차준호는 내 처절한 도발을 비웃듯, 수려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맹수 같은 시선을 던졌다.
“꼭 내가 신 비서를 쫓아다녔다는 말로 들리네?”
그가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의 뜨겁고 짙은 체취가 코끝을 스치고 오만한 숨결이 목덜미를 스쳐 가자, 본능적인 전율이 등골을 타고 사정없이 흘러내렸다.
그렇다고 이대로 꼬리를 내리고 도망칠 내가 아니었다. 끓어 오르는 속내를 고요하게 숨긴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표님은 절 원하셨지만, 제가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그 충격으로 비참한 기억만 쏙 지우셨나 보군요?”
간밤의 새벽, 뼈마디를 파고드는 서늘한 오한과 함께 온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몸살 기운이 나를 덮쳤다.지칠 대로 지쳐버린 몸도 문제였지만, 차준호를 둘러싼 가혹한 운명의 무게에 알게 모르게 짓눌려 온 극심한 스트레스가 결국 몸을 부러뜨린 까닭이었다.차준호는 잠결에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심상치 않은 열감을 느끼고는 나를 황급히 병원으로 데려왔다.CC그룹이 소유하고 직접 운영하는 대한종합병원이었기에 환자의 개인정보는 철통같이 보안이 유지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이 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조명을 받는 인물이 된 탓에, 나는 졸지에 병원 전체의 시선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나는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담당 간호사의 손을 붙잡고 내 임신 사실만큼은 절대 의료진 외에 함구해 달라고 몇 번이고 사정했다. 특히, 차준호에게는 입을 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임신 초기라 함부로 소염제나 약을 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병원으로 달려오는 것 외엔 대안이 없기도 했었다.극도의 피로로 탈진한 몸에 차가운 영양주사가 들어가기 시작하자, 가라앉았던 기력이 조금씩 맴돌기 시작했다.간밤 사이에 한층 더 핼쑥해진 내 얼굴을 내려다보는 차준호의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신하늘은 건강해야지. 좋은 세상, 오래 보려면.”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는 아련함과 짙은 우려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차준호는 차가운 내 손을 제 손으로 따스하게 감싸 쥐며 제 체온을 어떻게든 밀어 넣으려 애썼다.자신의 속은 잿더미처럼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으면서도, 내가 조금만 아파도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굴며 태산 같은 걱정을 안겨주는 이 남자가 참으로 야속하고도 애달팠다.그때, 정적을 깨고 응급실 커튼이 젖혀지며 뜻밖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
차준호의 주치의인 강진욱 박사의 문자라면 분명 급한 일일 터였다.“뭐야? 이 시각에.”나는 옆에 차준호가 밀착해 있었음에도 망설임 없이 화면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 너머로 얇은 진동음이 거실의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차준호의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졌다.“강 박사님이어서요.”내 대답에 차준호의 눈빛이 순간 서늘하게 식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낮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또 무슨 수작을 부린 건가.”“전혀요. 수작은 통화 끝나는 거 보고 부려보려고요.”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그를 향해 거의 애원하듯 간절한 눈빛을 보낸 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박사님, 늦은 시각에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신하늘 씨, 방금 뇌사자 장기이식센터 응급 콜을 받고 병원에 출근했다가 차 대표 생각이 나서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스피커 너머로 들려온 단어에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뇌사자 장기이식이요?”하긴,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전혀 예상치 못했던 단어에 손끝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강 박사의 차분한 설명이 이어졌다.[오늘 장기 이식팀 의료진들과 비상 회의를 하다 보니, 차 대표처럼 대기 등록조차 거부하는 환자들의 골든타임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오늘 당장 차 대표에게 해드릴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제발 대기 명단이라도 올려놓으시길 권유드립니다.]공여받는 절차와 차준호의 건강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대기 순위는 높게 매겨질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이 한밤중에 주치의가 응급 출근길에 직접 전화를 걸어올 정도로 긴박하고도 진심 어린 제안이었다. 오죽하면 이 새벽에
밤 12시를 훌쩍 넘긴 시각.시끌벅적했던 선거사무실을 뒤로하고 세종동 집으로 돌아와서야, 우리는 비로소 치열했던 금요일을 마감하고 토요일의 고요를 맞이하게 되었다.드디어 선거 직전의 마지막 주말.다른 후보들이 밤을 잊은 채 야시장과 편의점을 전전하며 사력을 다하고 있을 텐데.하지만 나와 차준호가 머무는 밤은 정적에 가까울 만큼 조용했다.나의 체력과 그의 위태로운 몸 상태를 고려해, 현장 유세 대신 SNS로 지지자들과 소통하며 온라인에서의 활동만 나직하게 이어 나갔다.나를 위해 자발적으로 밈을 제작하고 챌린지를 이어가는 이들과 나의 선거 공약을 깊이 있게 분석해 준 인플루언서들의 글을 찾아다니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성의를 다했다.나와 차준호는 거실 한가운데 놓인 오래된 소파에 서로의 몸을 깊숙이 끌어안은 채, 그가 배송받은 다과를 펼치며 소소한 담소를 주고받았다.빛바랜 벽지, 조금은 꺼진 소파 스펀지, 보풀이 듬성듬성 일어난 무릎 담요, 그리고 오래된 텔레비전.명색이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신혼부부의 신접살림이라고 하기엔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고즈넉하고 적막한 공간이었다.“평소엔 텔레비전 따위 보지도 않는데, 신하늘을 만나고부터는 밤낮으로 뉴스만 보게 되는군.”차준호는 특유의 능글맞은 어조로 굴며 텔레비전 채널을 뉴스 화면에 고정하더니, 예쁘게 깎인 과일을 내 입가에 내밀었다. 화면 속 세상은 거실의 정적과 달리 온통 뜨거운 열기로 요동치고 있었다.뉴스 채널마다 온통 ‘신하늘 밈’을 다루느라 여념이 없었고, 실시간 숏폼과 SNS 동영상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속도로 전 세계를 향해 퍼져 나가고 있었다.“저도 마찬가지예요. 평생 볼 뉴스를 올해 다 몰아서 보는 기분이에요.”난
금요일 밤.퇴근 시간이지만 CH-컴퍼니 사무실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조금 전 저녁 먹으러 나간 김에 세종동 선거 유세를 보고 온 직원들은 삼각김밥과 샌드위치만 사들고 회사로 들어와도 배가 부른 표정이었다.“한 과장님! 봤어요? 한국 정치판이 이렇게 힙할 일인가요?”나정아는 도무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게임 성공 분석 기사를 내기 위해 자료를 받으러 온 한은숙에게 바람처럼 달려갔다.“나 과장, 봤지. 대표님께서 외조하는 모습도 내가 사진 찍었잖아. 내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날 거야.”이번 3월에 파격적으로 승진을 한 나정아와 한은숙은 그저 회사에 요즘 모였다 하면 신하늘과 차준호 이야기뿐이라 그저 입꼬리가 사정없이 올라가고만 있었다.“두 분 4월 1일 혼인신고도 정말 충격받았잖아요. 이거 하나씩 드세요. 세종동 붕어빵 이것까지 요즘 유명해졌더라고요.”한규련 대리가 오면서 모두에게 붕어빵 하나씩 돌리고 있었다.“하도 유세를 안 하니까 우리 신 과장님이 유세를 한다고 공지를 하면 잡상인들도 미리 판을 벌린다면서요?”나정아는 휴대전화를 띄워 실시간 SNS 핫트렌드 창에서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김강무나 다른 CH-컴퍼니 직원들도 너도나도 릴스 영상을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우리 회사가 선거 운동 마케팅 대행사로 업종 변경해야 하는 거 아니야? 주가는 천장을 뚫었어요. 하하!”그때 지나가던 최기범도 훈훈하게 웃으며 붕어빵 봉지를 흔들었다.“이거, 차준호가 나 퇴사했는데도 불러들인 이유가 있었군요. 모두 일을 안 하고 이러고 있으니 말입니다.”“최 실장님, 오신 김에 숏폼 챌린지나 참여하고 가세요. 신 과장님
선거는 이제 고작 5일밖에 남지 않았다.해거름이 뉘엿뉘엿 내리는 저녁, 차준호는 신하늘의 유세 현장에 지원을 나오게 되었다.세종동 편도 8차선 도로의 거대한 사거리 한가운데에 위치한 회차로.신하늘은 거기서 거대한 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유세 차량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도로를 둘러싼 인도와 갓길, 그리고 구석구석까지 꾸역꾸역 몰려든 수천 명의 인파가 자신의 여자를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차준호는 그 무수한 눈동자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유세차 위에서 환하게 빛나는 이 근사한 풍경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그리고 귓가를 울리는 시끄러운 유세 소음과 환호성 속에서도, 귀와 입으로는 차진철과의 통화를 무던하게 이어 나갔다.“아예 제주도에서 살 작정이세요?”― 이놈 봐라. 애비 없다고 신났구만? 어디 선거 운동 나왔나 보군.차준호는 저 멀리 유세단 위에 서 있는 신하늘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단상 위에서 연설을 다듬던 그녀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신을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청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어쩌다 보니 자신마저 꼭 연예인이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아버지가 그렇게 바라시던 ‘정치인 며느리’인데, 안 보고 싶으세요?”이미 혼인신고까지 마친 사이인데, 명색이 시아버지가 수고한다, 기특하다 한마디쯤 해 줄 법도 하건만. 차준호는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차진철에게 퉁명스러운 말을 툭 던져 보았다.그러자 휴대전화 너머에서 차진철이 큼큼하며 헛기침을 뱉어냈다.― 텔레비전만 틀면 나오는데 뭘 또 봐. 내가 안 나타나는 게 도와주는 거지.차준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나지막이 말을 덧붙였다.“텔레비전이 문제가 아
단 하루가 채 되지 않았는데.그 짧은 시간 동안 온라인 세상에서 벌어진 일은 가히 폭발이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시작은 도국의 개인 SNS 계정에 기습적으로 올라온 15초짜리 릴스 영상이었다.노을이 사그라드는 잠실벌 초고층 레지던스를 배경으로, 소매를 접어 올린 루즈핏 흰 셔츠 차림의 도국과 단정한 검은 슈트를 입은 이아준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었다.본래 선거 유세 곡 역시 도국의 대표 히트곡에 가사만 바꾼 형태였기에 대중에게는 더없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감각적이고 중독성 강한 비트 위로 도국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절제된 춤선이 얹어졌다.거기에 대한민국 최고 재벌가 수장인 이아준이 자기도 모르게 터뜨린 환한 웃음과 엉성하지만 힙한 몸짓이 더해진 순간, 알고리즘은 미친 듯이 폭주하기 시작했다.[#SkyBlue_Challenge][#Quiet_Is_The_New_Loud][#DG_Challenge][#이게선거냐축제지][#VoteWithVibe][#시끄러운건딱질색이라][#세종동_클래스]처음에는 도국의 글로벌 팬덤 '댄저러스'가 즉각 반응했다. 언어를 불문하고 댓글 창이 실시간으로 터져 나갔다.[이 미친 비트 뭐야? DG잖아!][옆에 있는 남자 L그룹 차기 회장 맞아? 둘이 케미 미쳤다! 저 사람도 연예인인 줄!][노래 가사가 바뀐 거 같은데? 설마 이거 선거 운동 곡이라고?]이유를 알 수 없는 흥겨움은 순식간에 국경을 넘었다. 진실이 밝혀지자 대중의 반응은 그야말로 도파민의 폭발이었다.그리고 '스카이 블루' 신하늘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일파만파 퍼졌다.중국 활동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간 에스텔라는 휴대폰을 부여잡고 웃느라 정신이 없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