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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완벽한 타인의 숨결

Author: silver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9 13:24:11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

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

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

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

대신 눈앞의 신하늘은 뭔가 달랐다. 늘씬하고 굴곡진 실루엣이 가차 없이 드러나는 분홍색 니트 원피스. 가늘고 우아한 목선 위로 흘러내린 갈색 긴 머리와 단아한 화장, 그 아래 숨은 오밀조밀하고 고운 이목구비. 

하지만 비주얼보다 차준호를 자극하는 것은 그녀의 반듯하고 오만한 태도였다.

신하늘의 표정은 비서임에도 감히 시선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조금 전 통화한 부친 CC그룹 차진철 회장마저 ‘신하늘이라면 이 혼란을 가장 완벽하게 정리할 테니 전적으로 맡겨두라’고 확언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를 보는 저 눈빛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단순히 상사를 대하는 비서의 그것이 아니었다. 지난 3년 동안, 자신은 신하늘과 도대체 어떤 밀도 높은 관계를 쌓아왔던 걸까. 

그녀의 투명하고 맑은 갈색을 머금은 황금빛 눈동자가 마치 영혼 깊숙한 곳에 날카로운 메스를 꽂아 넣는 것처럼 시리게 파고들었다.

***

내가 매일 아침 출근길에 습관처럼 들르던 병원 로비의 카페는 다행히 늦은 시각이지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곳에서 평소 차준호가 유난히 찾던 달콤한 바닐라 라떼를 한 잔 주문했다.

중환자실에서 막 나온 환자에게 카페인은 금지되었을 텐데.

 그저 지독하게 예민해져 있을 그의 신경을 달래줄 향이라도 맡게 해주고 싶다는, 오랜 비서로서의—혹은 지워진 연인으로서의—쓸쓸한 배려였다.

VIP 병실의 육중한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려다, 짓눌린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잠시 내렸다.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위태롭게 흔들릴 때, 내 심장 역시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추락했었다. 

게다가 강소희라는 화려한 여자와의 스캔들까지 터져 나의 자존심은 갈가리 찢긴 상태라 비참함이 극에 달했다.

하지만 발상을 뒤집어보면, 이건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와 3년 전 처음 만났던 공적인 관계로 강제 리셋된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의 고백했다가 차인 사건은 차준호의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었고, 회사를 도망치듯 그만둘 이유도 사라졌다. 

대신, 다른 여자를 옆에 태우고 사고를 낸 그에 대한 미련한 마음만큼은 완벽히 정리해야 했다.

‘둘이 나 몰래 사귄 거였나? 어쩌면 둘이 사귀는 도중에 나랑 바람 피운 건가?’

어찌 되었든 차준호는 이제 내 인생에서 망할 나쁜 남자라는 것이 결론일 뿐이었다.

굳게 입술을 다물고 흩어진 감정의 파편을 가다듬은 뒤, 나는 단호하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선 병실 안을 훑자, 차준호는 병상에 길게 다리를 뻗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미동조차 없는 그의 실루엣은 마치 박물관에 전시된 고결한 조각상 같았다.

나는 조용히 걸어가 그의 손길이 쉽게 닿을 수 있는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온기가 서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전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활자 위로 길게 속눈썹을 드리운 그는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소속사 연예인들을 단숨에 학살할 만큼 압도적인 아우라를 풍기는 남자. 

CH-컴퍼니 내에 사내 팬클럽이 존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 책장을 넘기던 그의 손끝이 멈추었다. 그리고 서서히 들려온 시선이, 내 얼굴과 드러난 몸매 라인을 꼼꼼하고 노골적으로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마치 손가락 끝으로 피부를 강하게 지분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어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센스 하고는.”

낮게 긁히는 목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멍하니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응시하다가, 날카로운 채찍에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차준호가 읽던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더니,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에 서린 빛이 잔인할 만큼 차가웠다.

“옷이 그게 뭐야?”

“······무슨 말씀이신지.”

기자들을 상대하느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차려입은 옷이지만 그의 지적에 수치심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타이트한 원피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차준호는 난데없이 제 손등에 꽂혀 있던 링거 바늘을 가차 없이 뽑아 버렸다.

185cm가 넘는 몸에 체격까지 큰 그의 실루엣이 순간적으로 시야를 꽉 채우며 다가오자, 압도적인 위압감에 숨이 가빠졌다.

그가 내 코앞까지 걸어와 길게 팔짱을 끼더니,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덤덤하게 물었다.

“평소 난 어땠지?”

“대표님께서는 유능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질문의 의도는 그게 아니잖아?”

원래 그는 이렇게 오만하고 거친 성정의 남자였던가. 이것이 그의 가식 없는 본성이라면, 그동안 나를 안아줄 때 보여주었던 그 달콤한 모습은 전부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면이었을까.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난 오기가 생겼다.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가슴을 펴고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저를 특별 대우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이 원피스도 대표님께서 취향이라며 선물해 주신 겁니다.”

“설마.”

차준호의 미간이 아주 우아하게 구겨졌다. 도대체 그는 지금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서 이토록 날을 세우는 걸까. 

기억을 잃으면서 인간성까지 날려버린 것 같았다.

“대표님, 제게 왜 이러시는 거죠?”

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쏘아붙이자, 차준호의 짙은 눈초리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이내 그의 입술 사이로 조소 섞인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신 비서가 거짓말을 하니까 그렇지. 전혀 내 취향도 아닌데.”

가슴 깊은 곳을 정통으로 찔린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주먹을 꽉 쥔 손톱이 연약한 손바닥 살을 파고들어 저릿한 고통을 안겼다.

다른 여자와 밀회를 즐기다 사경을 헤매고, 그 지저분한 뒷수습을 하느라 며칠 밤낮을 고생한 나였다. 그런데 고작 돌아오는 것이 이런 모욕이라니.

“지독하게 무례하시네요.”

“좀 마음이 안 드네.”

온몸을 불태우며 밤을 나누었던 그 황홀한 추억들이, 그의 말 한마디에 하찮은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파왔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들끓었다.

하지만 나는 허리를 더 꼿꼿이 세웠다. 감정을 완벽히 지워낸 로봇처럼, 가장 차갑고 서늘한 어조로 받아쳤다.

“대표님이야말로 착각하지 마세요. 앞으로 저를 피곤하게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차준호는 내 처절한 도발을 비웃듯, 수려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맹수 같은 시선을 던졌다.

“꼭 내가 신 비서를 쫓아다녔다는 말로 들리네?”

그가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의 뜨겁고 짙은 체취가 코끝을 스치고 오만한 숨결이 목덜미를 스쳐 가자, 본능적인 전율이 등골을 타고 사정없이 흘러내렸다. 

그렇다고 이대로 꼬리를 내리고 도망칠 내가 아니었다. 끓어 오르는 속내를 고요하게 숨긴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표님은 절 원하셨지만, 제가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그 충격으로 비참한 기억만 쏙 지우셨나 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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