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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나쁜 남자를 발끈하게 만드는 법

Author: silver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05 12:05:08
다음 날.

어제 늦게 퇴근한 탓에 차준호는 병원에 들렀다 출근한다며 내게도 오후 2시까지 출근하라 지시했다.

덕분에 10억이라는 거금에 대한 고민과 최기범이 던진 ‘게임 인연’을 되짚느라 밤을 꼬박 설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기분 전환을 위해 크리스마스 때 입었던 분홍 원피스를 차려입고, 목걸이도 옷 밖으로 당당하게 꺼내 찬 채 회사에 도착했다.

어차피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위약금 문제를 고민하는 동안은 내 일에 집중하자는 계산이었다.

“허 실장님, 식사하셨어요?”

오후 1시. 내가 비서실을 지키면 허기찬 실장이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허기찬은 나를 보자마자 사색이 된 얼굴로 반갑게 속삭였다.

“반가워요, 신 비서! 그런데 대표님도, 강소희 씨도, 최기범 실장님도 벌써 다들 나오신 거 있지? 휴, 살얼음판이었는데 지원군이 와서 다행이야.”

“강소희 씨가 또요?”

“나도 몰라. 그나저나 신 비서, 오늘 유독 더 예쁘네.”

이 시각에 차준호가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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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에서 나온 우리는 호텔로 향하는 세단의 묵직한 정적 속에서 나란히 앉아 있었다.호텔 방을 하나만 잡았다니.머릿속이 복잡한 열기로 들끓었다. 그래서 그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볼 때마다 그 짙은 눈빛으로 자꾸 '어른' 운운했던 걸까.그럼 난 이제 차준호와 연인 사이가 되는 걸까. 설마, 그게 아니라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재벌가 대표 옆에 끼워 다니는 몸만 가까운 비서 사이?하지만 지금까지 그와 나 사이에 그런 은밀한 기류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둔해서 눈치를 못 채었던 건가한숨을 길게 내쉬며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쿄의 아찔하고 화려한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오늘 밤은 대체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대한민국 손꼽히는 거대 재벌의 후계자이자 CH컴퍼니의 수장인 차준호가 출장 경비 몇 푼이 아까워서 객실 하나만 예약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한 침대에서 손만 잡고 자자거나, 나를 소파로 내모는 유치한 그림을 그리는 상황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속내가 사정없이 얽혀 골치가 아파 오는데, 옆자리에 깊게 기대앉은 차준호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넌지시 물어왔다.“신하늘, 갑자기 왜?”낮에는 오타쿠의 성지에서 신나서 눈이 반짝였지만,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정중하고 완벽한 행보를 넘어서 갑자기 남자로 밀고 들어오니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는 건 당연했다.“대표님, 온갖 효율을 떠나서 다음부터는 꼭 허기찬 실장님과 오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서요.”먼저 단단히 철벽부터 쳐야 했다. 담담하게 털어놓는 내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자조가 묻어났다.가죽 시트 너머로 나를 가만히 건너다보던 차준호가 나른하고도 묵직한 실소를 흘렸다.“신하늘이 허 실장보다 게임 기획에 대해서 많이 알고, 무엇보다 미인이라 일본 바이어들의 경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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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항 문을 열고 들어서자 타국의 여름 열기와 함께 묵직한 오렌지빛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미리 전용 탑승 게이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짙은 검은색 명품 세단에 올라타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대한민국을 벗어나 도쿄에 발을 디뎠다는 실감이 피어올랐다.가죽 시트의 묵직한 향과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섞여 드는 차 안은 한없이 밀폐되어 있었다. 도쿄 외곽을 벗어나는 동안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은 어딘가 우리나라의 여름 시골길을 닮아 있었다. 낮게 깔린 지붕들, 나지막한 목조 건물, 너른 들판 너머 완만하게 뻗은 산 능선까지.그러나 도심 한복판에 접어들자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마천루가 빽빽하게 하늘을 가리고, 낯선 가타카나 네온사인들이 아찔하게 반짝였으며, 반대편으로 숨 가쁘게 달리는 도로 위의 차들이 어지러운 열기를 뿜어냈다.차준호는 내 옆자리에 깊숙이 기대앉은 채, 순간순간 짙고 아득한 눈빛으로 내 옆모습을 모조리 담아내고 있었다. 그 집요한 시선에 숨이 막혀, 나 역시 그의 안색을 살피는 척하며 가만히 눈길을 돌렸다.무심하게 접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 단단하고 매끈한 팔목 근처로 나도 모르게 시선이 자꾸만 떨어졌다.걱정과 의구심을 품은 채 뚫어져라 바라보다, 끝내 그가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신하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낮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이 밀폐된 차 안을 간지럽히며 울렸다. 뭐라 둘러댈까 찰나의 고민을 하다, 나는 조금 솔직한 속내를 에둘러 건넸다.“대표님 팔목에 주삿바늘 자국이 보여서요. 혹시 어디 아프셨던 건가 해서 그렇습니다.”그러자 차준호가 나른하게 입꼬리를 접어 올리며, 시트 위로 몸을 기울여 내 쪽으로 거리를 바짝 좁혀왔다. 그가 다가오는 순간, 특유의 고급스럽고 시원한 향수 향과 함께 은밀한 체온이 살끝에 소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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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338. [그대, 한여름 밤의 꿈 같아]

    나는 차준호의 이름을 한참을 들여다 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가 즉시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내가 미쳤지. 물론 궁금한 것 투성이기는 하지만, 지금 연락해서 대체 뭐라 말한단 말인가.왜 입사 전부터 초콜릿을 나만 사줬냐고, 왜 나에게만 취향 따져가며 좋은 옷을 입혔냐고, 다정하게 군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물은 들, 달라질 게 무엇이겠는가.복잡하게 일렁이는 파문을 외면한 채, 은행 문을 나서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택시 승강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찌는 듯한 날씨 탓인지, 아니면 차준호라는 남자의 이름 세 글자가 온몸의 혈관을 흔들어놓은 탓인지, 옷 속 피부 구석구석으로 덥습하고 끈적한 열기가 은밀하게 고여들었다.오늘만큼은 버스에 시달리는 대신, 나를 가득 채운 이 아찔한 열기를 식혀줄 근사한 호사를 스스로에게 선물하고 싶었다.“손님, 어디로 모실까요?”“성남 헤븐즈 힐 추모공원이요.”부모님이 계신 곳. 그 안식처로 어서 달아나 자랑하고 싶었다.열심히 잘 살았다고. 이제부터 차곡차곡 모으는 돈이 전부 진짜 ‘내 돈’이 된다니.늘 내 영혼과 몸을 짓눌러온 빚이라는 서글픈 굴레에서 벗어나 마침내 내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는 가슴 벅찬 감격이 밀려왔다.게다가 차준호라는 남자와의 만남은 내 인생에 커다란 변곡점이 되었기에 이 흔들림 역시도 부모님께 알리고 싶어졌다. 이토록 감정이 묘한 날에는 부모님을 뵙는 것만이 어지러운 마음을 잠재울 유일한 해답 같았다.***늘 주머니 사정이 팍팍해 부모님을 찾아뵐 때마다 서글픈 국화 두 송이만 딸랑 사 들곤 했는데, 오늘은 알록달록 어여쁜 국화 한 다발을 품 가득 묵직하게 안았다.찌는 듯한 7월의 폭염 속에서 추모관 계단을 올라가는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337. [이미 나는 그 남자 손바닥 위였어]

    내가 세종동에 산다는 사실이 그토록 거창한 비밀이라도 되는 걸까.좋은 옷을 입고 세종동의 주상복합 단지에 산다고 잘 사는 줄 오해를 한 건지, 아니면 서쪽 동네에 살면서 제법 용됐다고 여긴 건지 알 길이 없었다.복잡한 마음에 차진철의 눈치를 살피던 체스 승부는 결국 1 대 1 무승부라는 아쉬우면서도 훈훈한 결과로 끝이 났다.차진철이 떠나고 난 뒤, 대표실에는 오롯이 나와 차준호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은은한 우디 향이 밀폐된 공기 사이로 아찔하게 감돌았다. 우리는 커다란 대리석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조용히 서류를 들여다보았다.나는 각 부서에서 올라온 신규 사업 제안서들을 하나씩 검토하며 서머리 노트를 작성했고, 차준호는 가볍게 분류된 결재 서류에 묵묵히 서명을 해나갔다.서류를 읽던 나는 슬쩍 눈길을 올려 서류를 집중하고 있는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깎아지른 듯 단정한 턱선과 깃이 잘 세워진 셔츠 차림의 남자는, 여직원들이 왜 그토록 그를 신처럼 동경하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치명적이었다. 대한민국 손꼽히는 성골 재벌가라면서도 내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은밀하게 대해주니 자꾸 바라보게 되는 수밖에.‘하지만······ 선을 지켜야 해.’화장실에서 들었던 여직원들의 대화와, 얼마 전 찾아왔던 화려한 상대 강소희의 모습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게다가 그의 아버지 차진철 회장을 직접 직면하고 나니, 그가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는 현실이 뼈아프게 와닿았다.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북 치고 장구 치고 해봤자, 우리는 그저 대표와 비서 사이일 뿐이었다. 연애 경험이라고는 전무한 내가, TV 속 연예인을 동경하듯 차준호라는 독보적인 사람에게 잠시 마음을 뺏겼던 거라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9. 빌런을 좋아한 건가. 이런 망할.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8. 내가 미쳤지.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7. 완벽한 타인의 숨결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6. 천하의 나쁜 남자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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