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충격이 지나간 자리에 정적은 없었다.
비명과 경보음, 깨진 유리 위를 밟는 발소리가 한꺼번에 뒤엉켰다. 요트 바닥은 이미 눈에 띄게 기울고 있었다.
윤해원은 왼쪽 옆구리를 눌렀다. 손바닥에 피가 묻었지만 깊이를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오 선장님, 조난 신호부터 보내세요. 엔진 차단하고 방수문 닫으세요.”
“기관실 쪽 전원이 나갔습니다.”
“비상 전원은요?”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침수가 빠릅니다.”
기관장이 계단 아래에서 소리쳤다.
“우현 선저가 찢어졌습니다! 펌프로 못 따라갑니다!”
해원은 벽에 붙은 승선 명부를 뜯어 들었다. 행사 인원과 승무원 명단에 손가락을 대며 갑판으로 올라간 사람을 하나씩 체크했다. 아래 라운지에 1명이 남아 있다는 말을 듣자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허리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젊은 직원이 넘어져 있었다. 의자 다리에 발목이 끼인 상태였다. 해원은 깨진 유리 사이로 손을 넣어 금속 걸쇠를 풀었다. 그 순간 선체가 또 기울며 몸이 벽에 부딪혔다. 왼쪽 옆구리에서 뜨거운 것이 다시 흘렀다.
“저 두고 가세요.”
직원이 울먹였다.
“그 말은 구조하는 사람이 결정해요.”
해원은 그의 팔을 어깨에 걸고 계단까지 끌어냈다. 마지막 방수문이 닫히자 아래쪽에서 무거운 충격음이 연달아 울렸다. 30초만 늦었어도 둘 다 빠져나오기 어려웠다.
갑판에 도착한 해원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명부를 처음부터 다시 훑었다. 한 사람이라도 빠뜨리면 그 이름이 그대로 실종자가 된다.
승객 몇 명이 출입문으로 몰렸다. 해원은 테이블 위에 올라 손뼉을 세게 쳤다.
“지금 뛰면 넘어집니다! 직원 안내에 따라 한 줄로 움직이세요. 구명조끼부터 입습니다!”
공포에 질린 눈들이 그녀에게 모였다.
해원은 가장 가까운 승무원에게 손가락으로 사람을 나눠 지시했다.
“걷기 어려운 분과 머리 다친 분부터 왼쪽 라운지. 움직일 수 있는 분은 갑판으로. 인원 세면서 올려 보내요.”
서로 밀치던 사람들이 부상자를 중심으로 갈라섰다.
해원은 쓰러진 투자자의 이마를 압박 지혈한 뒤, 깨진 잔에 손을 베인 여성에게 냅킨을 감아 주었다. 도혁은 보이지 않았다.
갑판으로 올라가자 차가운 빗물이 얼굴을 때렸다.
도혁은 선미 쪽에서 서린에게 담요를 둘러 주고 있었다. 서린은 다친 곳 하나 없어 보였지만 그의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도혁아, 나 물 무서워.”
“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해원은 그 말을 들었지만 지나쳤다.
“구명뗏목 2개 전개하세요. 비상보트 엔진 확인하고요.”
승무원이 갑판 수납장을 열려다 당황했다. 커다란 홍보 패널이 문 앞을 막고 있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패널을 치웠지만, 안에는 구명조끼가 절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머지는 어디 있죠?”
“행사 사진에 지저분하게 나온다고 대표실에서 아래 창고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아래 창고는 지금 침수 구역이잖아요.”
승무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홍보팀 직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대표님이 오늘만 창고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점검표에는 원래 위치에 있는 걸로 표시하라고도…….”
해원은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은 책임자를 찾는 것보다 남은 장비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 먼저였다.
해원은 이를 악물었다.
“있는 것부터 아이, 부상자, 수영 못 하는 사람 순서로 입혀요. 두 명씩 버디 확인하고.”
그녀는 자신의 조끼를 찾지 않았다. 앞에서 울고 있는 노년의 여성에게 먼저 끈을 채웠다.
선체가 다시 크게 기울었다.
갑판 아래에서 검은 물이 솟구쳤다. 비상뗏목 하나가 파도에 얻어맞아 난간과 부딪혔다. 해원이 직접 줄을 잡아 방향을 돌렸다.
“한 명씩! 뛰지 말고 앉아서 이동하세요!”
첫 번째 뗏목이 내려갔다. 두 번째 뗏목에도 승객들이 몰렸다. 남은 사람을 세던 승무원이 수납장 안쪽까지 뒤진 뒤 굳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의 손에는 노란색 구명조끼 하나만 들려 있었다.
“상무님.”
거센 빗소리 사이로 목소리가 떨렸다.
“남은 건 이게 마지막입니다.”
압수수색은 9시간 동안 이어졌다.수사관들은 차도혁의 법인 휴대전화와 노트북, 기술관리실 서버, 사고 대응회의 녹취를 확보했다.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사고 직후 만들어진 ‘공식 설명’이었다.[윤해원 상무가 장비 점검을 위해 자발적으로 잔류][차도혁 대표는 승객 전원 탑승 후 마지막으로 이탈][한서린 디렉터는 공황 상태로 당시 기억 없음]초안 작성 시각은 구조대가 윤해원을 발견하기 4시간 전이었다. 그때 태성해운은 해원이 살아 있는지조차 몰랐다.그런데도 문서에는 이미 그녀가 스스로 남았다고 적혀 있었다.도혁은 조사실에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보트가 뒤집힐까 봐 그런 겁니다. 더 많은 생명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수사관이 부력 분석표를 밀어 놓았다.“정원 11명, 당시 탑승자도 11명입니다. 피의자가 내리고 피해자가 타면 정원은 그대로고 허용중량도 넘지 않습니다.”“파도가 심했습니다. 숫자대로 되는 상황이 아니었어요.”“그러면 피의자가 내리면 됐겠네요.”도혁의 입이 닫혔다. 녹음기는 계속 돌아갔고, 수사관은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지 않았다.“피해자가 그렇게 요구했죠. ‘그럼 네가 남아.’ 왜 거절했습니까?”“저는 회사 대표였습니다. 사고 수습을 해야 했습니다.”“보트 안에서 무슨 수습을 했습니까?”도혁은 시선을 돌렸다.수사기관은 단순한 구조 우선순위와 적극적인 위해 행위를 구분했다. 누군가를 먼저 태운 것만으로 곧바로 범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보트에 매달린 사람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고, 구조줄도 던지지 않은 행동은 달랐다.현장 재현에서는 도혁이 내려 자리를 바꾸는 경우와 구조줄을 쓰는 경우 모두 검토됐다. 어느 방법도 무위험은 아니었지만, 해원의 손가락을 떼어 바다에
차도혁의 엄지가 윤해원의 검지를 눌렀다.대형 스크린에 손가락이 하나씩 펴지는 장면이 확대됐다. 영상은 정상 속도였다. 그런데도 움직임은 하나도 놓치지 않을 만큼 또렷했다.―도혁아, 지금 뭐 하는 거야?―해원아, 놓아.기자회견장 뒤편에서 누군가 낮게 욕설을 삼켰다.보트의 승무원이 해원을 잡으려 하자 도혁이 팔로 막았다.―제가 잡겠습니다!―다 같이 움직이면 뒤집혀요! 자리 지켜요!앞서 공개된 재현 결과와 달리, 도혁은 구조하려는 승무원까지 막았다.화면 속 해원이 마지막 힘으로 말했다.―이러면 나 죽어.도혁의 손이 멈춘 듯 보였다.그는 분명 들었다.그럼에도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차례로 떼어냈다.―미안해.해원의 몸이 바다로 떨어졌다.카메라는 기울어진 요트의 선미에서 보트를 비추고 있었다. 검은 물 위로 떠오른 해원이 멀리서 팔을 흔들었다.―줄이라도 던져!누군가 뒤를 돌아봤고, 승무원이 구조줄을 잡으려 했다. 도혁은 엔진 쪽을 가리키며 계속 이동하라고 지시했다.그때 서린의 목소리가 들렸다.―도혁아, 그냥 가.엔진이 굉음을 냈다.해원은 화면 밖으로 밀려났다.영상이 종료됐다. 객석 한쪽에서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맨 뒤에 앉아 있던 갑판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혁이 팔을 막았던 바로 그 승무원이었다. 그는 카메라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좌석 사이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줄을 던지려고 했습니다. 대표님이 움직이면 보트가 뒤집힌다고 해서… 그 말을 믿은 게 아니라, 제가 밀치고 나가면 진짜 사고가 날까 봐 멈췄습니다.”그의 눈이 붉어졌다.“윤 상무님, 죄송합니다.”해원은
영상은 요트가 암초에 부딪힌 직후부터 시작됐다.화면 속 윤해원은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한 손으로 누른 채 승객들을 움직였다.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고, 구명조끼를 채우고, 마지막까지 인원을 셌다.기자회견장에 있던 누구도 질문하지 않았다.온라인 생중계 댓글만 빠르게 올라갔다.[안전 책임 회피했다더니 구조 지휘한 사람 해원이잖아][자기 조끼도 안 입고 양보했네][태성해운 발표랑 완전히 다른데?]첫 번째 뗏목이 내려갔다. 화면 한쪽에 차도혁과 한서린이 나타났다. 도혁은 내내 서린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객석 뒤편에 앉은 노년의 투자자가 입을 틀어막았다. 영상 속 해원이 가장 먼저 구명조끼를 채워 준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옆에서 조용히 손을 잡았다.“저때 윤 상무가 자기 조끼를 저한테 줬습니다.”그가 주변 기자에게 들릴 만큼 낮게 말했다.화면에는 해원이 침수 구역에서 끌어낸 직원도 잡혔다. 그 직원은 목발을 짚고 기자회견장에 와 있었다. 태성해운 발표대로라면 ‘현장 통제에 실패한 안전 책임자’였지만, 실제 영상 속 해원은 다른 사람을 세느라 자기 몫을 계속 뒤로 미뤘다.도혁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장면을 보며 처음으로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계산했다. 당시에는 해원이 알아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믿었다고 수없이 되뇌었다. 그러나 화면은 그 믿음이 사실이 아니라 변명임을 보여 줬다. 그는 피 묻은 셔츠도, 들리지 않는 왼팔도 봤다. 보고도 서린의 조끼를 조였다.영상은 그가 해원의 상처를 보고도 시선을 돌린 순간까지 남겼다.마지막 구명조끼를 든 승무원이 다가왔다.도혁이 그것을 받아 서린에게 입혔다.음성이 선명해졌다.―나도 다쳤어.화면 속 해원이 말했다.―알아.도혁이 대답했다.
기자회견장에는 예정 인원의 2배가 몰렸다.방송사 중계차가 본사 앞 도로를 채웠고, 생중계 대기자는 시작 전부터 10만 명을 넘었다.윤해원은 대기실 거울 앞에서 옆구리 보호대를 다시 조였다. 셔츠 아래로 감췄지만 움직일 때마다 재킷 한쪽이 미세하게 들렸다.법무팀은 영상 공개 범위를 두고 끝까지 갈렸다. 손을 떼는 장면은 수사 증거이고, 충격적이라 해원에게 2차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반대로 앞부분만 공개하면 도혁이 ‘구조 과정의 불가피한 사고’라고 다시 왜곡할 가능성이 컸다.해원은 같은 보트의 생존자들에게 먼저 연락했다. 일반 승객의 얼굴과 동의받지 못한 음성은 가리기로 했다. 자신을 잡으려 했던 승무원은 짧게 답했다.[상무님이 괜찮으시다면 공개해 주세요. 그날 제가 끝까지 잡지 못한 걸 매일 후회합니다.]해원은 그 문장을 읽고 한동안 답을 쓰지 못했다. 보트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사람들까지 도혁과 같은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공포 속에서도 손을 뻗은 사람과, 그 손을 막은 사람은 분명히 구분돼야 했다.“장면 순서는 손대지 않습니다.”그녀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동의받지 못한 얼굴과 음성만 가리세요. 원본은 감정서와 함께 수사기관에 제출됐다고 명시하고요.”강재욱이 낮은 의자를 가져왔다.“앉아서 하셔도 됩니다.”“제가 쓰러지면 받아 주세요.”“그럴 생각으로 여기 있는 건 아닙니다.”무뚝뚝한 대답에 해원이 아주 작게 웃었다.오전 10시 정각, 그녀가 단상에 섰다.카메라 플래시가 한꺼번에 터졌다. 질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기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사적 감정으로 대출을 회수한 것 아닙니까?”“태성해운 인수를 추진합니까?”“사고 당시 안전 책임자였다는 주장은 사실입니까?”
태성 프런티어가 묶인 다음 날, 포털 첫 화면에 윤해원의 이름이 걸렸다.[파혼한 재벌 상속녀의 500억 복수][사랑이 끝나자 채권 회수…기업 사냥 논란][세이프오션, 태성해운 인수 노리나]기사에는 익명의 ‘금융권 관계자’가 등장했다. 윤해원이 약혼 기간에는 부실을 묵인하다 파혼 직후 돌변했고, 사적인 감정으로 독립 리스크위원회를 움직였다는 내용이었다.태성해운이 흘린 자료였다.홍보대행사는 같은 문장을 조금씩 바꾼 게시물을 여러 커뮤니티에 뿌렸다. ‘약혼녀의 질투’, ‘첫사랑 때문에 벌어진 삼각관계’, ‘500억으로 남자를 응징한 상속녀’ 같은 자극적인 표현이 계약 조항과 안전보고서를 밀어냈다. 해원의 구조 경력까지 특혜로 포장됐고, 병원에서 찍힌 뒷모습 사진에는 ‘멀쩡히 걸어 다닌다’는 설명이 붙었다.사고 생존자 한 명이 해원을 두둔하는 글을 올리자 신원이 공개됐다. 태성해운과 돈을 받고 증언한다는 악성 댓글이 달렸고, 결국 그는 게시물을 삭제했다.해원은 그가 보낸 사과 문자를 읽었다.[상무님이 제 아내를 먼저 태워 주셨는데 끝까지 말하지 못해 죄송합니다.]해원은 바로 답했다.[가족부터 지키세요. 증언은 수사기관에서만 하셔도 충분합니다.]해원은 생존자의 신원을 더 노출하지 않기로 했다. 영상도 증언보다 봉인 기록과 감정 결과를 먼저 내놓을 생각이었다.과거 해원과 도혁이 주고받은 문자 일부도 공개됐다. 결혼식 일정과 가족 문제로 다툰 대화만 교묘하게 잘려 있었다.[내가 더는 당신 방식에 맞추지 않을 거야.]해원이 8개월 전 보낸 문장은 마치 오래전부터 회사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 증거처럼 사용됐다.세이프오션 고객센터에는 항의 전화가 쏟아졌다. 주가는 장중 6% 넘게 떨어졌고, 구조사업 입찰의 공정성까지 의심하는 기사도 나왔다.
상환 기한 14일 동안 태성해운은 가능한 모든 곳에 손을 벌렸다.주거래은행에는 만기 전 대출을 요청했고, 사모펀드에는 지분을 담보로 긴급자금을 제안했다. 차도혁은 해외 투자자에게 크루즈 사업 지분을 절반까지 넘기겠다고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사고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어렵습니다.”태성해운이 안전위험을 숨긴 사실이 금융권에 퍼진 뒤였다. 세이프오션캐피탈의 500억만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금융기관도 대출 약정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주거래은행은 허위자료 제출이 사실로 확정되면 220억 단기대출을 즉ㅁ시 회수할 수 있다고 통지했다. 선박리스 회사는 2척의 용선료를 선납하라고 요구했고, 신용평가사는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바꿨다. 한 계약의 위반이 확인되자 다른 채권자들도 동시에 움직였다.도혁은 세이프오션만 설득하면 연쇄 반응을 멈출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미 문제는 두 회사 사이를 벗어났다. 금융기관들은 태성해운의 돈보다 보고서를 믿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서린은 매일 전화를 걸어 자신이 기사에 노출되지 않게 해 달라고 재촉했다. 도혁은 받지 않았다. 그녀를 지키겠다고 해원을 남겨 둔 남자는 회사가 흔들리자 가장 먼저 그 여자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상환 기한 마지막 날 오후 4시.태성해운이 마련한 현금은 173억뿐이었다.차성호 회장은 본사 18층 집무실에서 재무담당 임원의 보고서를 집어 던졌다.“선박 하나 팔면 되잖아!”“정상 가격으로 매각하려면 최소 3개월은 걸립니다. 지금 급매로 내놓으면 채권단이 담보가치 하락으로 추가 조치를 할 수 있습니다.”“그럼 세이프오션에 무릎을 꿇어!”도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협상 요청을 3번 보냈습니다. 해원은 만나지도 않습니다.”“네가 무슨 짓을 했는데 만나 주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