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야, 너 기억 나냐?”
꽤나 취한 것 같은 J가 정하에게 물었다. 테이블엔 소주 3병과 안주 접시들이 놓여 있었다. 정하는 젓가락으로 닭발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는 J를 쳐다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너랑 친해지고 얼마 안 됐을 때였을 거야. 한 4년 전쯤? 그때 나 진영이랑 헤어지고, 엄청 울었었잖아.”
그 말에 정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어두웠던 표정이 편해졌다.
“기억 나지. 형 그때 형수님이 다시 받아주기 전까지 매일 술 마셨잖아.”
“맞아. 하, 내가 그때 술만 안 먹었어도 지금 가왕 자리 두 번은 해 먹었다.”
"아주 세상을 다 잃은 느낌이었지, 그때 형."
정하가 입꼬리를 올리며 소
리버브 모임 날이었다. 벌써 정하가 모임에 참여한지도 한 달이 되었다. 어색했던 첫 모임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리버브에 잘 녹아들었다. 이제는 매주 금요일이 자연스럽게 기다려졌다. 음악 작업과는 다른 이유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오늘도 재미있었습니다!”“다음 주 모임 때 뵐게요!”짧은 모임이 끝나도 아쉬운 마음이 거의 들지 않았다. 모임 이후에도 작업실에 가면 그녀를 만날 테니까. 리버브와 작업실, 작업실과 카페.. 요즘 그의 동선에는 항상 보라가 있었다. 보라가 자신의 삶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했다.“오늘 모임도 괜찮으셨나요?”이미 몇 명이 각자의 짐을 챙겨 블루문을 나간 뒤였다. 제이가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보라와 정하도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가방 정리를 하고 있었다.“재밌었어요.”보라가 웃으며 대답했다. 정하도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다행이네요.”몇 명이 더 나가고, 제이가 웃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양손에는 작은 꽃병이 들려 있었다.“피치님, 플랫님. 혹시 저번에 두 분이 드신 칵테일 기억나시나요?”“그럼요.”제이의 질문에 둘은 대답을 하면서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하는 제이의 양손에 들린 꽃병으로 고개를 돌렸다.“원래 개기월식 날에는 문플라워를 밖에 두면 금방 시들어서요. 괜찮으시다면 두 분께 선물로 드리고 싶은데, 어떠세요?”제이가 의미심장
“야, 너 기억 나냐?”꽤나 취한 것 같은 J가 정하에게 물었다. 테이블엔 소주 3병과 안주 접시들이 놓여 있었다. 정하는 젓가락으로 닭발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는 J를 쳐다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내가 너랑 친해지고 얼마 안 됐을 때였을 거야. 한 4년 전쯤? 그때 나 진영이랑 헤어지고, 엄청 울었었잖아.”그 말에 정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어두웠던 표정이 편해졌다.“기억 나지. 형 그때 형수님이 다시 받아주기 전까지 매일 술 마셨잖아.”“맞아. 하, 내가 그때 술만 안 먹었어도 지금 가왕 자리 두 번은 해 먹었다.”"아주 세상을 다 잃은 느낌이었지, 그때 형."정하가 입꼬리를 올리며 소주잔을 들이켰다. 단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위스키보다 도수가 낮은데 알코올의 향은 더욱 진하게 들어왔다. 표정이 저절로 찡그려졌다.“근데 넌 요즘 왜 그렇게 죽상이냐?”“내가?”“응. 누가 보면 나라 잃은 사람인 줄 알걸.”J의 물음에 정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오늘따라 소주가 썼다. 스무살 때 처음 소주를 먹을 때가 생각나는 맛이었다.“보라 때문에?”“꼭 그것만은 아니고.. 입시생 하나가 성대결절이래. 실력도 있고 열심히 하던 애였는데.”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정하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빈 소주잔을 만지작거렸다. 울먹이던 다솔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신
2020년 여름. 화장실에서 돌아온 보라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날도 여전히 자리엔 캔커피 하나와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벌써 열일곱 번째였다. 내용은 평범했지만 보라에겐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늘 같은 시각, 같은 메모장이 남겨져 있었다. 처음엔 그냥 넘기려고도 해봤으나, 2주가 넘는 기간동안 이어진 쪽지를 무시하기란 쉽지 않았다. 매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누군지 확신할 순 없었다. 다만 짐작은 갔다. 매일 저녁, 자취방으로 향할 때면 보폭을 맞춰 걷는 발소리가 있었으니까. 발자국 소리를 의식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두려움이 배로 늘어났다. 친한 남자 동기들에게 자취방 방향으로 같이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는 것도 한두번이었다. 계속 부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스토킹을 당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경찰에 신고를 해봤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확실한 피해를 당한 게 아니라면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내용뿐이었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적도 있다. 그 때문에 다니던 아르바이트도 그만뒀다. 하지만 그것 역시 소용이 없었다. 결국 보라는 대외활동도, 학업도 포기했다. 바로 다음 학기 휴학계를 내고 본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본가로 돌아온 자신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님의 반대도 무릅쓰고 진학한 학교였다. 보라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심한 상실감과 공포가 몰려왔다. 그렇게 은둔 생활을 반 년여간 했다. 그랬던 그녀가 가사를 쓰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가끔 연락만 주고받던 학교 선배가 주선해 준 ‘J 컴퍼니’와의 미팅 덕분이었다. 그렇게 보라는 처음 가사를 써봤다. 그녀의 첫 작품이 바로 J의 정규 2집 타이틀곡 ‘가을이 지면’이었다. - “안녕하세요, 보라 씨.” 보라는 요즘 카페에 들어오기 전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정하가 신경 쓰였다. 꼭 자신에게 건넬 인사를 몇 번이나 연습하는 것처럼 보였다. 같은 학교, 같은 동네. 우연이라기엔 겹
오후 4시. 아직 블루문이 오픈하지 않은 시각. 젊은 남자 바텐더가 한 손엔 장갑을 끼고 얼음 집게로 커다란 얼음을 꺼냈다. 이후 그는 능숙하게 아이스픽을 집어 들고 모서리를 깎아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투박했던 얼음은 완벽한 구형의 스피어 아이스로 변해있었다. “루루, 벌써 다 끝낸 거야? 이제 나보다 능숙한걸” 제이의 말에 루루가 조용히 웃었다. 순백의 고양이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이제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가 손짓으로 무언가를 묻자 제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완성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 제이는 반쯤 다듬어진 얼음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표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제이가 무심코 진열장 쪽 거울을 힐끗 바라보았다. “급하게 만들면 꼭 어딘가 금이 가더라.” - “저번에 말했듯이 이번 앨범 컨셉은 ‘불완전’으로 잡아봤어. 다들 뭐 생각해 온 거 있어?” J가 서랍장 한구석에서 파일 하나를 꺼내오며 정하와 보라에게 물었다. 이내 가사지 하나하나를 펼쳐놓기 시작했다. “‘불완전’이면 결핍인 거잖아. 그럼 앨범의 전체적인 트랙은 이별로 잡는 게 낫겠지?” “그렇다고 모두 그런 식으로 가면 저번 앨범 컨셉이랑 겹쳐요. 오히려 ‘첫사랑’이나 ‘짝사랑’ 같은 주제를 섞는 것도 좋아 보여요.” “아, 안 그래도 이번에 가사 미리 받아놓은 것 중에 괜찮은 거 있더라. 잠깐만.” J가 파일철을 이리저리 들춰보곤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도화’라는 제목이 큼지막하게 쓰여있었다.
셰이커에진 30ml, 블루큐라소 15ml, 엘더플라워 시럽 20ml, 레몬즙 10ml. 라벤더 시럽 5ml, 얼음을 넣고 가볍게 흔든다.미리 칠링해 둔 마티니 글라스에 탄산수 50ml를 천천히 부어 층이 퍼지게 만든다.월진분(月塵粉)을 소량 넣어준다문 플라워로 마무리 “‘문위스퍼’입니다. 조용한 감정을 깨우는 칵테일이죠. 어쩌면 조금 시끄러워질지도 모르겠네요.”크레센도 : 설렘의 울림 “달의 속삭임이라.. 무슨 뜻이죠?” “글쎄요, 받아들이기 나름이죠. 사랑 혹은 저주일수도요.” 칵테일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마치 꽃이 보랏빛과 푸른색이 오묘하게 섞인 바다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사랑 또는 저주라는 말이 이해가 될 정도였다. 원래 그런 건 이 칵테일만큼이나 매혹적이니 말이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신사 숙녀 여러분.” 잔을 건네주곤 사장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특히 정하를 향해 작게 입 모양을 움직이더니 진열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 같기도, 주문을 외우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예쁘네요.” 정하가 블루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블루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정하는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칵테일을 말한 건지, 눈앞의 여자를 말한 건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아, 아니. 칵테일이요!” “아, 물론 블루님도 엄청 아름다우시고요..” 고장난 듯 횡설수설하는 정하를 보고 블루가 웃음을 터트렸다. “변명 안 하셔도 돼요. 그리고 저, 보라요. 본명 류보라예요.” “아..” 정하가 홀린 듯 감탄했다. 보라는 그런 정하가 재밌고, 좋은 사람 같았다. “일단 마실까요? 문위스퍼.” 보라가 먼저 잔을 들고 정하를 보며 눈짓했다. 한 모금 들이키니 향긋한 꽃향과 허브향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목 끝이 은은하게 뜨거워졌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더운 어른의 맛이었다. “맛있네요.” “그래요?” 정하도 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순간이었다. 둘은 낯선 기분을 느꼈다. 세상에 단둘만 남은
“싫어, 안 해. 귀찮아.” J의 정식 제안을 듣기도 전에 정하는 J가 전화를 받자마자 거절 의사부터 밝혔다. 그러나 정하의 그런 반응을 예상한 건지, 전혀 당황하지 않은 J였다. “이번에 블루도 앨범에 참여하기로 했는데?” 순간 ‘블루’라는 이름이 정하의 귓가에 꽂혔다. 볼멘소리를 하려던 기색을 감추고 잠자코 J의 말을 들었다. “너 블루 한 번도 본 적 없다며. 심지어 너 블루가 쓴 가사라면 네가 평소에 극혐하는 아이돌 노래라도 다 찾아 듣잖아.” ‘블루’ 두 글자에 정하의 마음이 뛰기 시작했다. 귀찮기만 했던 J의 프로듀싱 제안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런 정하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J가 먼저 승부수를 던졌다. “싫으면 말고. 너 말고도 나랑 작업하고 싶다는 프로듀서 널렸다. 끊어~” “잠깐, 잠깐만 형! 할게, 나 할게!” 몇 마디의 대화가 더 오가고, 만족한 J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정하는 홈 화면이 떠 있는 휴대전화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현실이 맞나 싶어 볼을 꼬집어 보았다. “아야” 아팠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정하는 허벅지까지 꼬집었다. 역시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새로운 바람이 부는 느낌이었다. 마치 미니멀한 어쿠스틱 트랙 같던 일상에 처음으로 시티팝이 스며든 기분이었다. - 작업 첫날. 애당초 약속된 시작 시간은 늦은 저녁이었다. 오후 8시 20분. 평소였다면 정해진 시간에 딱 맞춰왔을 정하가 한참이나 먼저 도착했다. 그런 그를 보며 J는 ‘역시 블루의 효과는 대단하구나’라며 감탄했다. “블루 씨는?” “아직 40분이나 남았다, 임마.” 블루를 기다리는 시간은 설렜고, 초조했다. 작업실 소파에 앉아있는 내내 정하는 다리를 떨기도 했고 손톱을 물어뜯기도 했다. 그런 정하를 보며 오히려 J가 더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가만히 좀 있어, 새끼야. 원래 점잖은 놈이 왜 이렇게 난리야.”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어, 왔니, 블루야!” 작업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J가 그녀를 향해
“쌤, 내일 수업 없죠?” “네. 확실히 학교 시험 기간이라 그런가, 토요일 수업이 다 캔슬이네요.” “좋겠다, 그럼 정하 쌤 내일 쉬겠네.” 부러움이 섞인 원장선생님의 말에 정하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인사를 하는 정하의 목소리는 씩씩했다. 작은 배낭을 멘 그가 학원을 나왔다. 학원 문 위쪽엔 ‘리버브 음악학원’이라는 글자가 쓰여있었다. 열댓 발자국을 걸으니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그제서야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 “안녕하세요 사장님” 정하가 익숙한 듯 바 안쪽 끄트머
6월의 어느 목요일 밤. 70 lux(룩스, 조명의 단위) 정도의 아주 어둡지 않은 조명이 번지는 곳. 바 안쪽엔 턴테이블 두 개와 그 위에서 돌아가는 LP가 보였다. 스피커를 통해 빈티지한 질감의 클래식이 잔잔하게 공간을 물들였다. 낮게 깔리는 첼로 선율 위로 피아노 음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중간중간 노이즈가 들리기도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공간 특유의 결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잘 다려진 흰색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은 남성. 그의 흰 머리카락은 헤어스프레이로 잘 고정되어 있었다. “문 룰러바이 (Moon Lullaby –
“안녕하세요, 우정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짧은 자기소개 후 박수가 이어졌다. 정하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하 씨, 우리는 여기서 본명 안 써요.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잔 의미에서? 그러니까 우리 플랫님 이름은 잊어줄게요? 콜?” “아, 네!” 낯선 분위기 속 누군가 정하에게 설명했다. “그럼, 우리 이름도 알아야겠죠? 전 디스토션이에요.” “저는 4분의 4박자.” “피아노맨입니다.” 모두가 웃으며 본인의 닉네임을 소개했다. 디스토션, 4분의 4박자, 피아노맨.. 각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