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희정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왜... 왜 내가 차씨 집안의 장녀인데, 아빠는 나를 깎아내리고 남을 감싸?”“강해인이야. 분명히 강해인이 그랬어. 아빠를 완전히 세뇌시킨 거야!”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희정은 안색마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서진은 아파트에서 희정 곁을 지키고 있었다. 가사도우미가 식탁 위에 반찬과 국을 차려 놓자, 서진은 희정의 손을 잡고 식탁 쪽으로 데려갔다.“지금 임신 중이잖아. 마음을 너무 몰아붙이면 몸에도 안 좋아. 아이를 낳기로 마음먹었으면 네 몸부터 챙겨야 해.”서진이 어떻게든 희정을 달래 보려고 했지만 희정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아빠가 나한테 정신질환이 있다고 한마디 하는 바람에 내가 짜 놓은 계획이 전부 망가졌어.”“유호가 아직도 나를 찾지 않는 것도, 아이의 정체를 확신하지 못해서 그런 거야. 너는 유호가 이 아이를 인정할 것 같아?”서진의 눈매가 가라앉았다.“희정아, 한유호가 너랑 잔 적 있어?”희정이 멈칫했다.“그게 무슨 말이야?”“한유호가 애초에 너랑 잔 적도 없는데, 네 배속 아이가 어떻게 한유호의 아이가 돼?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멍청하다고 생각해?”“유호가 술에 취했던 적이 한 번 있었어. 비서도 곁에 없었고. 그날 유호가 나를 임신시켰다고 말할 수 있어.”그 무렵 희정은 유호와 자주 만났다. 대부분은 주헌이 따라붙었지만, 주헌도 늘 곁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빈틈은 분명히 있었다.서진은 고개를 저었다.“남자는 마음에도 없는 여자 앞에서는 아무리 여자가 옷을 다 벗어도 반응하지 않아.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서진은 이를 악물었다가 말을 끝냈다.“너한테는 아예 관심이 없다는 뜻이야.”그 한마디에 희정은 완전히 폭발했다. 벌떡 일어난 그녀가 젓가락을 식탁 위로 내던졌다.“지금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해!”“사실을 말하는 거야. 지금 당장은 어찌어찌 속인다고 쳐. 아이가 태어나면?”“한유호가 친자 확인을 하자고 하면 그때는 어쩔 건데? 또 내가
차장섭은 한숨을 내쉬었다.희정에게 할 말은 이미 오래전에 다 했다. 하지만 희정은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억지로 잡아 온다 해도 또 도망칠 방법을 찾을 것이다.게다가 이미 집에 두 달이나 가둬 둔 셈이었다. 정말 평생 가둬 둘 수는 없을 것이다.아이도 유호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차장섭은 조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희정이 서진과 함께 있다면 당장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일단은 놔둬. 집사람 몸이 좋지 않아. 지금은 희정이에게 기운을 쏟을 여력이 없어.”차장섭은 공무로도 바빴고, 틈틈이 도수희 곁을 지켜야 했다. 아버지로서 희정에게 실망이 컸지만, 그렇다고 딸의 마음까지 마음대로 바꿀 방법은 없었다.희정은 아이를 낳겠다고 버티고 있고, 아이가 사생아도 아니라면 일단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서진은 차장섭도 어릴 때부터 봐 온 아이였고 희정에게 잘했다. 희정이 서진과 결혼한다면, 차장섭으로서도 아주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차장섭이 지시했다.“사람을 붙여서 희정이를 잘 지켜봐. 해인이 생활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비서가 물었다.“그럼 만약 희정 아가씨께서 계속 언론 앞에서 이상한 발언을 하신다면요?”차장섭은 잠시 침묵했다. 이번 일은 자기 딸이 잘못한 것이었다. 아버지로서 묵인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자신이 직접 나서야 했다.“온라인 실시간 검색어는 모두 내려. 기자회견을 열고 희정이 정신적으로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고 발표해.”“지난번 발언은 증세가 심해져서 나온 망언이었다고 해. 또 내 명의로 한유호 대표에 사과의 뜻을 담은 선물을 보내.”그 말은 사실상 대중에게 아이가 유호와 무관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다....차장섭이 개입하자 상황은 정말로 바뀌기 시작했다.기자회견은 다음 날 오전 8시에 열렸다.회견이 끝난 뒤 온라인은 다시 떠들썩해졌다.[차희정 씨한테 정신질환이 있었다고? 처음 듣는데?][그렇게 멀쩡해 보였는데 정신질환이라니 말이 돼? 그냥 위기관리용 해명 아니야?][근데 이상하지
해인 자신도 곧 엄마가 될 사람이기 때문일까? 해인의 감정은 이전보다 예민해져 있었다. 그리고 도수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친어머니가 얼마나 억울하고 막막했을지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그래서 그분이 거의 집착처럼 나를 되찾고 싶어 했던 이유가...’해인은 반년 전, 주여진이 세상을 떠나기 전 며칠을 떠올렸다.주여진은 해인의 손을 붙잡고 신신당부했다. 언젠가 자신마저 없게 되면 친부모를 찾아가라고 했다. 피로 이어진 인연은 가장 끊기 어려운 것이라고도 했다. 정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움을 받을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그때 해인은 마음속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원하지도 않았다.그래서 차장섭과 도수희에게 계속 거리를 두었다. 그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았다.해인은 오래 침묵한 끝에 입을 열었다.“정말 넉 달밖에 안 남으셨나요?”차장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의사가 그랬다. 맞는 신장을 찾지 못하면 넉 달 정도라고.”해인이 물었다.“조직 검사를 받은 사람은 누구예요?”차장섭이 대답했다.“의사는 직계가족이 맞을 확률이 크다고 했어. 하지만 네 엄마의 두 오빠는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어. 조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은 신장 이식 대기 명단에만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야.”해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돈과 이익 때문에 친동생의 갓난아이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도수희에게 잘해 줄 리 없었다.그런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조직 검사를 기대한다니. 가능할 리 없었다.해인의 얼굴에는 깊은 생각이 스쳤다.그녀는 테이블 위의 공증 서류를 다시 차장섭에게 밀어주었다.“이건 가져가세요. 저는 필요 없습니다.”차장섭의 미간이 좁아졌다.“해인아... 이건 아빠가, 아니 내가 너에게 해 주는 보상이다. 내 마음이야. 꼭 받아 줬으면 한다.”해인은 고개를 저었다. 대가 없이 받는 큰돈은 부담이었다. 더구나 차장섭의 말이 사실이라면, 차장섭과 도수희 역시 어느 면에서는 피해자였다.그래서 이 두 사람
장인의 눈으로 보아도, 한유호라는 사위는 흠을 찾기가 어려웠다. 유호는 생각이 깊고, 매사 해인을 먼저 살폈다.식당 음식은 해인의 입맛에 맞는 듯했다. 해인은 꽤 맛있게 먹었다. 반면 차장섭은 음식이 입으로 넘어가지 않았다.유호가 희정의 뱃속 아이와 자신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한 뒤, 차장섭의 해인에 대한 죄책감은 더 거세게 밀려왔다.그는 비서를 안으로 불렀다.서류 가방을 들고 들어온 비서가 그 안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냈다.차장섭은 그 서류를 해인 앞으로 밀어 놓았다.해인이 눈썹을 찌푸렸다. 노란 봉투에 싸인 서류를 바라보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이게 뭐예요?”차장섭이 말했다.“열어 보거라.”해인은 천천히 봉투를 풀었다.문서를 확인한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공증 서류였다.차장섭은 자신의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을 공증해 두었다. 전부 해인에게 넘긴다는 내용이었다.해인의 미간이 더 깊게 좁아졌다.“무슨 뜻이에요?”차장섭이 말했다.“내가 가진 모든 재산이 여기 들어 있다. 많지는 않다. 하지만 내 마음이고, 너에게 진 빚을 갚고 싶은 뜻이기도 해.” “네가 받아야 할 몫이기도 하지. 거절하지 말고 사인하거라.”해인이 물었다.“전부요? 차희정 씨는요?”이 일을 준비하기 전까지만 해도 차장섭은 희정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 있었다.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는 일이 마음에 걸렸다.하지만 희정이 저지른 일을 알고 난 지금, 그 미안함은 사라졌다.차장섭은 해인에게 진 빚이 있고 희정도 해인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그 아이에게 남겨 줄 건 없다. 해인아, 내가 이걸 주는 건 돈으로 너를 붙잡으려는 게 아니다. 내 진심을 보여 주고 싶었다.”“나와 네 엄마는 단 하루도 너를 키워 주지 못했다.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그때 우리에게도 사정이 있었단다. 네 엄마가 일부러 너를 버린 게 아니야. 억지로 빼앗긴 거야.”“난 이걸로 단지 한 번의 설명할 기회를 얻고 싶을 뿐이다.”차장섭은 그해 자신과 도수희가
역시 시장이라 사생활 보호를 철저히 챙겼다.차장섭은 이미 룸 안에 앉아 있었다.해인이 들어오자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은 해인의 얼굴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배로 내려갔다.“고생이 많구나.”차장섭의 눈에는 격한 감정이 일렁였다. 하고 싶은 말이 수없이 많아 보였다.하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한마디뿐이었다.“어서 앉거라.”차장섭은 지나칠 만큼 다정하게 메뉴판을 내밀었다.“네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 아직 주문을 못 했다.”해인은 자리에 앉았지만 메뉴판을 받지 않았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그녀가 담담히 말했다.“저는 가리는 음식 별로 없어요.”차장섭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결국 유호가 손을 뻗어 메뉴판을 받았다.“본인이 안 가려도, 뱃속 아기는 가리잖아.”유호는 메뉴판을 훑고 서빙 직원에게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마지막에는 따로 당부도 했다.“참, 제 아내는 파를 못 먹습니다. 고명에서도 빼 주세요.”서빙 직원은 적어 둔 뒤 메뉴판을 들고 나갔다.그제야 차장섭의 시선이 유호에게 향했다.유호는 해인의 취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들어온 뒤부터 해인에게서 거의 눈을 떼지 않았다.테이블이나 의자 옆을 지날 때도 일부러 손으로 사이를 막아 주었다. 해인의 부른 배가 혹시라도 시야가 가려진 틈에 부딪칠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이런 남자가 바람을 피웠다고?’차장섭은 이 일에 다른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몇 분 뒤 서빙 직원이 차 주전자를 들고 들어와서 세 사람에게 따르려 했다.해인의 잔에 따르려고 하자 유호가 손으로 막았다.“지금은 늦은 시간이라 제 아내는 차를 마시면 밤에 잠을 잘 못 잡니다. 따뜻한 물로 바꿔 주세요.”룸 안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차장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최근 뉴스 말이다. 내가 희정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그 아이가 함부로 말을 했다.”실제로 이틀 동안 인터넷은 이 일로 들끓었다. KH그룹의 주가까지 영향을 받았다.오늘은 월요일이라 기자들이 KH그
해인은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누구세요?”차장섭은 세상 풍파를 겪을 만큼 겪은 사람이었다.그런데도 해인의 목소리를 듣자 이상하게 긴장했다.[해인아, 나다. 아빠다.]해인의 미간이 곧바로 좁혀졌다.‘아빠’라는 호칭을 듣자 목소리는 차갑게 식었다.“죄송하지만, 제 아빠는 10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전화 잘못 거신 것 같네요.”말을 끝낸 해인이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전화 너머의 차장섭이 급히 말했다.[해인아, 네가 나를 원망하는 거 알아. 나도 변명할 생각 없어. 아버지로서 하루도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그런데 네 엄마 몸이 많이 안 좋다. 의사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 네 엄마가 너를 한 번만 보고 싶어 한다.]그 말을 들은 해인의 손이 멈췄다.“많이 아프신가요?”당당한 시장이었지만, 차장섭은 해인 앞에서 한없이 낮아져 있었다. 목소리는 바닥까지 내려앉았다.[그래. 맞는 신장을 찾지 못하면 길어야 넉 달이라고 했다. 해인아, 네가 우리를 미워해도 좋다. 그래도 내가 부탁하마.][네 엄마가 후회만 안고 떠나게 하지는 말아 다오. 생사를 앞둔 일 앞에서는, 미움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지 않겠니?]‘넉 달’이라는 말을 듣자 해인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그녀는 줄곧 도수희를 원망하면서 자신을 버린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도수희가 찾아와도 말을 섞지 않았고,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았다.그런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왜 있는 걸까? 친엄마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가슴 한쪽에 돌덩이가 들어앉은 듯 답답했다.해인은 전에는 도수희의 병이 동정을 얻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차장섭이 도수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거짓말을 해 가며 자신을 만나려 들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해인의 마음속 응어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생각해 볼게요.”[천천히 생각해도 된다. 그런데 오늘 나랑 밥 한
해인은 늘 기억하고 있었다. 최수나의 죽음에는 왕단영과 천하솜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그 빚은 언젠가 반드시 제대로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분위기가 지나치게 어색해지자, 왕단영은 얼른 말을 이어 갔다.“해인아, 지금 임신 중이고 곁에 의지할 사람도 없잖아.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해. 우리도 한집안 식구인데,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왕단영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아, 맞다. 우리 한 대표는 아직도 너 보러 안 왔니? 듣자 하니 오늘 회사 온라인 회의에는 참석했다던데.”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이
병원에서 태상은 깁스를 한 뒤, 창백한 안색으로 병상에 누워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정형외과 의사는 병원에 도착한 시간이 너무 늦어서 치료의 골든 타임을 놓쳤다고 했다. 앞으로 회복이 어떻게 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고도 했다.지안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하룻밤 사이에 아버지는 구속됐고, 집안에는 감당하기 힘든 빚이 생겼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빚을 갚기 위해 팔아야 할 가능성이 컸다.게다가 오빠의 손까지 골절됐다. 외과 의사인 태상이 손을 다쳤다는 건, 의사로서의 앞날이 벌써 절반 이상 무너진 것과 다르지 않았다.지안
해인은 의료진이 지나가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러면서 핸드폰에 담아 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 화면을 조용히 꺼 두었다.해인은 예철진이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예철진은 끝까지 악랄했다. 죽기 직전까지도 누군가를 함께 끌고 가려고 했다.하지만 해인은 예철진이 죽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팔아넘길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까지 진심으로 모질 리 없었다.의료진은 예철진에게 진정제를 놓았다.예철진은 침대 위에 누운 채 잠잠해졌다.하지만 피범벅이 된 두
해인은 태상을 데리고 정형외과 의사에게 갔다.의사가 태상의 손을 검사하는 동안, 해인은 옆에 선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동자는 흐릿했고, 마음은 눈앞의 남자에게 전혀 가 있지 않은 듯했다.태상의 시선은 줄곧 해인의 창백한 얼굴에 머물렀다.며칠 보지 못했을 뿐인데, 해인은 훨씬 말라 보였다. 듣기로는 며칠 전에는 몸살까지 앓았다고 했다. 지금의 해인은 작은 바람에도 쓰러질 것처럼 약해 보였다.태상은 입술을 움직이면서, 몇 번이나 해인에게 무슨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해인이 자신과 말을 섞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