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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Author: 귀차니즘
“어?”

신예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내, 내가 얘기 안 했었나? 내 동생이 농구하다가 다쳤거든. 그래서 병원에 데려다줬어.”

“너희 엄마 계시잖아.”

“엄, 엄마는 점심을 준비하셔야 하잖아.”

“너희 가족들은 네 남동생을 진짜 아낀다. 너 대학교 다니면서 한 번도 결석한 적 없잖아. 그런데 동생이 다쳤다는 이유로 수업도 보지 못하고 동생을 돌봐주러 가야 하다니.”

송지유가 툴툴거렸다.

신예린은 너무 켕겨서 마음이 불편했다.

만약 임정희가 신예린이 신민호를 저주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아마 칼을 들고 학교까지 찾아올지도 몰랐다.

“참, 어제 교수님도 휴가 내셨다던데.”

송지유는 그 순간 손을 움찔 떨었다.

“사실 어제 교수님 수업 있으셨거든. 그런데 다른 교수님께서 대신 수업을 하셨대. 그 교수님이 주 교수님에게 뭐 하러 가냐고 물으니까 주 교수님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을 처리하러 간다고 하셨대.”

“그래?”

신예린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 뭘까?”

신예린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송지유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내 생각엔 결혼하러 가신 거야.”

콜록콜록.

신예린은 갑자기 사레가 들렸고 송지유는 신예린의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뭘 그렇게 당황해하는 거야? 농담이야.”

전혀 재밌지 않은 농담이었다. 신예린은 식은땀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주 교수님께서 정말 결혼하셨다면?”

“말도 안 돼. 다른 교수님 말을 들어 보니 입사하실 때까지만 해도 미혼이었다고 하던데?”

어쩌면 어제 결혼한 걸 수도 있지 않은가?

“만약에 교수님이 정말로 결혼하셨다면?”

“나는 상관없어. 나는 그래도 이성적인 편이라서 말이야. 그냥 잘생기고 똑똑한 교수님을 보니까 부러운 거지. 하지만 다른 애들은 어떨지 모르겠어.”

송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에 들은 소문인데 우리 학교에서 이미 결혼한 교수님을 좋아한 학생이 있었대. 그런데 그 학생이 교수님의 아내를 납치해서 교수님과 이혼하라고 협박한 일이 있었대.”

신예린은 그 말을 듣고 덜컥 겁이 났다.

지금 이혼하면 안 되는 걸까?

송지유는 신예린을 힐끔 보았다.

“왜 무서워 해? 주 교수님이랑 결혼할 사람이 너일 리도 없는데.”

“내, 내가 언제 무서워했다고 그래?”

신예린은 인정하지 않았다.

“하하하.”

송지유는 신예린의 뺨을 꼬집었다.

“귀엽긴. 사실은 내가 꾸며낸 말이야.”

신예린은 송지유를 주먹으로 퍽퍽 쳤다.

두 사람이 장난을 치고 있는데 기숙사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 여학생은 두꺼운 앞머리와 커다란 안경으로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이목구비를 가렸고 온몸에서 우울한 기운을 내뿜었다.

신예린과 송지유는 시선을 주고받은 뒤 장난을 멈췄다.

“소윤아, 왔어?”

신예린이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정소윤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은 뒤 책을 펼쳤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송지유는 몰래 신예린을 쿡쿡 찌르면서 문 쪽을 바라보았고 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윤아, 나랑 지유는 수업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송지유는 신예린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간다.”

그들은 계단 쪽에 도착해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무섭다니까. 벌써 2년이 됐는데 아직도 저 모습엔 익숙해지지 못하겠어.”

송지유가 입을 열었다.

“나도.”

사실 그들의 기숙사는 4인실이었다. 서다연은 3학년 개강 때 중도 퇴실을 신청했고 정소윤은 그들과 같은 과 학생이었는데 성적이 매우 좋았다. 그러나 성격이 아주 음침한 데다가 늘 혼자 다녀서 2년 동안 함께 지냈어도 말을 섞은 적이 거의 없었다.

신예린과 송지유는 정소윤과 함께 있는 것이 조금 두려웠다.

오늘은 병리학 수업이 있는 날인데 교수님께서 10분 정도 늦을 수 있다고 미리 공지를 해서 신예린은 참지 못하고 조금 전 캡처했던 화장대 사진을 주시우에게 보냈다.

[이 화장대 사도 돼요?]

주시우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수업 시간에 휴대전화 보고 있었던 거야?]

신예린은 억울했다.

주시우는 너무 교수님처럼 굴었다.

[저 수업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나한테 네 시간표가 있거든.]

신예린은 그가 보낸 메시지를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시우가 왜 그녀의 시간표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 수업을 빼먹는다면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교수님께서 아직 오지 않으셨어요.]

[그래. 네 마음에 드는 거면 다 좋아.]

신예린은 그것이 조금 전 화장대를 사도 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베란다에 식물 길러도 돼요?]

[그럼. 너는 그 집의 안주인이야. 네가 꾸미고 싶은 대로 꾸며도 돼.]

안주인이라는 말에 신예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곧이어 휴대전화가 진동했고 주시우가 200만 원을 입금했다는 알림이 떴다.

[???]

[사고 싶은 거 다 사.]

[아까 카드 주셨잖아요.]

[그걸 쓸 생각은 있고?]

비록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주시우는 신예린이 어떤 성격인지 대충 알고 있었다. 그는 신예린이 자신의 카드를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도 돈 있어요.]

[넌 아직 어리잖아. 돈은 어른이 내면 돼.]

신예린은 저도 모르게 볼을 부풀렸다.

주시우는 그를 애처럼 대했다.

그러나 그가 애처럼 생각하는 신예린은 지금 배 속에 그의 아이를 품고 있었다.

신예린은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바로 그때, 주시우에게서 또 메시지가 왔다.

[지금 너는 학업이랑 아이에게만 신경 쓰면 돼. 다른 건 걱정하지 마. 알겠지?]

신예린은 그 메시지를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주시우는 별 뜻 없이 한 말이겠지만 신예린은 자기도 모르게 그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자신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너무 다정하잖아!’

신예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한 뒤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요.]

그리고 돈도 받았다.

주시우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수업 열심히 들어.]

신예린은 경례하는 얼굴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 뒤로 주시우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고 신예린은 채팅 기록을 다시 한번 보았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자꾸만 뜨거워졌다.

“예린아, 왜 그래?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송지유는 이상함을 눈치채고 물었다.

신예린은 송지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신예린은 수업할 때만 가끔 주시우를 보게 되었고 그 외에는 거의 메시지로 연락했다.

두 사람이 가장 많이 나눈 대화 주제는 가구였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주시우가 물었다.

[퇴실 신청은 했어?]

신예린은 시간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해서 아직 신청하지 않았다.

[아직 못 했어요.]

[얼른 해. 다음 주면 입주할 수 있으니까.]

[네.]

[신청서 있어?]

[아뇨...]

[그러면 수업 끝나고 내 사무실로 와서 가져가.]

[네.]

주시우의 사무실에 가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지난번에는 그냥 죽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이번에는 교수님과 몰래 연애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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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닝포인트   제147화

    신예린의 얼굴은 순식간에 삶은 새우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주시우의 눈가에는 장난스러운 흥미가 스쳤다.“네가 정말 원한다면... 내가 네 소원을 들어줄 수도 있어.”“아,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신예린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저... 저 먼저 샤워하러 갈게요!”토끼처럼 냅다 달아나듯 자취를 감춰 버린 신예린의 뒷모습을 보며 주시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같이 씻자고? 들어보니 그럴듯한데? 물도 아끼고 말이야.’하지만 주시우는 금세 고개를 저었다.‘아니지. 예린이가 진심으로 좋다고 해야 가능하지.’주시우는 서재에서 읽다 만 책을 들고나왔지만 정작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거실에 앉아 있어도 귓가로 들려오는 건 샤워실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뿐이었다.머릿속에는 조금 전에 품에 안겼던 신예린의 붉어진 얼굴과 희미하게 젖은 눈빛만이 자꾸만 맴돌았다.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열기가 차올랐고 주시우는 관자놀이를 눌러 가라앉히려 애썼다.욕망이라는 게 한 번 열리면 되돌리기 어려웠고 주시우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한편, 욕실 거울 앞의 신예린도 마음이 복잡하게 요동쳤다.거울에 비친 얼굴은 하얗게 빛나면서도 붉은 기운이 번졌고 눈동자마저 물빛처럼 출렁였다.손으로 볼을 감싸 보니 손끝에 닿는 열기가 그대로 전해졌고 설레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버렸다.밤이 깊어지자 신예린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바로 옆에 주시우가 누워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늘 밤 일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되며 심장이 쿵쾅거려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탁상 등이 켜졌다.순간 번진 부드러운 불빛에 신예린은 반사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고 시야에 들어온 건 바로 주시우의 얼굴이었다.주시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잠이 안 와?”‘역시 알고 있었구나.’신예린은 반쯤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는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네.”“왜 잠이 안 오는지 말해 줄래?

  • 터닝포인트   제146화

    거실은 은은한 노란 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신예린은 아직도 카펫 위에 힘없이 누운 채 방금 주시우와 나눈 키스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잠시 후, 부엌에서 주시우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그는 손에 물 한 잔을 들고 신예린 앞으로 다가왔다.조명 아래 비친 신예린의 얼굴은 투명한 옥처럼 빛났고 작은 코와 촉촉하게 빛나는 입술 주변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건 분명 주시우의 흔적이었다.평소라면 언제나 차분하고 절제된 모습이었지만 방금은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다.주시우는 신예린을 여러 번 안아 버렸고 혹시 겁을 주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뒤늦게 밀려왔다.주시우는 신예린한테 잔을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물 좀 마셔.”그 한마디에 신예린은 비로소 정신이 돌아왔다.신예린은 입안이 바싹 말라 있었고 볼에 닿는 열기도 여전히 뜨겁게 남아 있었다.신예린은 잔을 받아 들어 조심스럽게 몇 모금 삼켰다.긴 속눈썹이 눈 밑에 그림자를 드리우자 주시우의 목젖이 미묘하게 흔들렸다.바로 그때 신예린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려 주시우를 바라봤다.주시우의 붉어진 뺨과 까만 눈동자에는 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아까... 누가 자기 키스 못 한다고 했죠?”그 말에 주춤한 주시우는 어색하게 기침을 흘렸다.“음... 아마 본능이었던 것 같네.”‘본능이라니... 교수님이 말한 본능이 결국 날 이렇게 정신없이 흔들어 놓았잖아...’잔을 다 비우자 주시우는 신예린의 앞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먼저 샤워할래?”신예린은 눈길을 피하며 작게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신예린은 갑작스러운 관계의 변화가 아직은 익숙하지 않았다.특히 조금 전까지 그토록 뜨겁게 입맞춤을 나눴다는 사실이 자꾸만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평소의 주시우는 마치 욕망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절제된 수도승 같은 느낌이었는데 조금 전처럼 붉어진 눈가로 자신을 삼킬 듯 바라보던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평소의 주시우랑 차이가 너무 커서 신예린의 심장은 아직도

  • 터닝포인트   제145화

    그러자 주시우가 가볍게 웃었다.“내가 왜 널 속이겠어. 원한다면 증명해 줄까?”신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어떻게... 증명해요?”“예린이가 조금 전에 나한테 한 것처럼 말이야.”그 순간 신예린의 뇌리에는 방금 장면이 스쳤고 얼굴이 곧장 붉게 달아올랐다.주시우의 눈빛은 점점 깊어졌다.“예린이가 날 좋아해서 키스했다면 내가 예린한테 하는 키스는 똑같은 마음 때문이겠지.”주시우의 굵직한 목소리가 귀에 파고드는 순간, 신예린은 마치 몸이 둥실 뜨는 듯 어지러웠다.“증명해 줄까?”‘세상에... 누가 키스를 이런 식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신예린은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붉혔다.“네.”하지만 신예린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거의 들리지 않는 정도였다.“뭐라고?”주시우가 몸을 조금 더 가까이 기울이자 얼굴이 바로 신예린의 앞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반쯤 그림자에 잠긴 주시우의 옆모습은 몹시 점잖았고 길게 드리운 속눈썹과 날렵한 콧날, 단정한 입술 선은 숨이 막히도록 매혹적이었다.신예린은 알 수 없는 용기가 솟구쳤고 그 순간 살짝 고개를 들어 주시우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졌고 이건 곧장 말이 필요 없는 대답이었다.공간을 가득 메운 공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고 뜨겁고 조용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에 퍼졌다.주시우는 눈빛이 불길처럼 이글거렸고 신예린을 끌어안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은 순간, 전류가 튀듯 강렬한 불꽃이 스쳤다.“내 키스는 좀 서툴지도 몰라.”주시우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고 신예린은 볼이 활활 달아올랐다.“만약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말해. 우리 둘 다 배우는 거에는 자신 있잖아. 잘 안되면 몇 번이고 연습하면 되지.”그 한마디에 신예린은 온몸이 전율하며 숨조차 가빠왔고 수치스러움과 설렘이 뒤섞여 머릿속이 하얘졌다.“그럼... 시작할까?”키스하면서도 먼저 허락을 구하는 주시우의 태도에 신예린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하지만 다가오는 주시우의 얼굴이 눈앞에 닿

  • 터닝포인트   제144화

    주시우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통화를 끊어 버렸다.신예린의 등줄기가 순간적으로 서늘해졌다.주시우의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단박에 알아챌 것이다.이건 사실상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아니나다를까 전화를 끊긴 채 멍하니 휴대폰만 바라보던 여도준은 머리가 하얘졌다.‘방금... 주시우 교수님의 목소리를 들은 게 맞아?’하지만 주시우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신예린을 개의치 않고 휴대폰을 무음으로 돌려놓았다.앞으로의 시간을 어떤 방해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무심히 옆에 내려놓고 시선을 다시 신예린에게로 맞췄다.신예린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여전히 조금 전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멘탈이 흔들리고 있었다.“아직 대답 안 했잖아.”주시우의 손끝이 신예린의 손목을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였고 그의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귓가에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왜 날 몰래 키스한 거야? 날 좋아해서 그래?”신예린의 얼굴은 금세 달아올라 불길처럼 붉게 타올랐고 도무지 주시우와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는 아주 작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주시우의 눈빛은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며 빛을 품었고 그동안 마음속을 짓누르던 온갖 망설임과 걱정이 모두 사라졌다.나이가 많든 세대 차이가 있든 그 순간 이제는 아무 상관 없었다.주시우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앞에 있는 신예린이 자신을 똑같이 좋아한다는 사실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했다.신예린이 입술을 대던 그 찰나부터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예린이를 절대 놓쳐서는 안 돼.’목울대를 울리며 주시우는 쉬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신기하네. 나도 그래.”늘 그렇듯 담담한 어투였지만 주시우의 그 한마디는 신예린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신예린은 숨이 멎을 듯 가슴이 요동치며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그러자 조명 때문에 빛을 띤 주시우의 눈동자가 깊이 흔들렸다.“나도 널 좋아한다고.”신예린은 머

  • 터닝포인트   제143화

    신예린의 입술에 닿았던 부드러움이 사라지자 주시우의 눈매가 스르르 좁혀졌다.신예린은 놀란 새처럼 허겁지겁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곧 따뜻하면서도 강한 주시우의 손길이 신예린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고 주시우는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방심한 신예린은 힘없이 중심을 잃고 넓은 가슴팍으로 고스란히 안겨 버렸다.한 손으로 주시우의 가슴을 짚자 얇은 옷 너머로도 뜨겁게 전해지는 체온이 고스란히 손끝에 스며들었다.그 순간 신예린은 심장이 제멋대로 빨리 뛰었고 숨이 가빠졌다.주시우는 여전히 손목을 놓지 않은 채 그윽한 눈빛으로 신예린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순간, 신예린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어떻게 변명해야 하지? 방금 몰래 키스하려던 걸 들킨 건가... 날 내쫓으면 어쩌지...’신예린은 입술이 바짝 말랐고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교수님...”그러나 말끝을 이어 가기도 전에 주시우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귀가에 와닿았고 묘하게 울리는 울림은 신예린의 귓불을 간질이며 온몸을 달아오르게 했다.“날... 좋아해?”신예린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주시우의 숨결이 바로 앞에서 스쳐 오고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휘몰아쳤다.‘좋아하냐고요? 당연하죠. 너무 좋아한다고요!’좋아하는 감정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신예린의 마음속에서 넘쳐흘렀다.주시우의 시선이 불길처럼 타오르는 가운데 신예린은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입술을 열어 고백을 내뱉으려는 찰나,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순식간에 달아오른 분위기는 바로 깨져 버렸고 은근하게 고여 있던 아늑한 느낌은 산산이 흩어졌다.신예린은 당황한 표정으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전화를 받아야 할 것 같아요.”신예린이 살짝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집으려 했으나 주시우의 손아귀는 여전히 놓아주지 않았다.주시우의 눈빛은 신예린에게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신예린은 어쩔 수 없이 몸을 기울여 손을 뻗어서 핸드폰을 확인했고 화

  • 터닝포인트   제142화

    신예린은 밥을 먹다 말고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주시우의 창백한 피부에 희미한 홍기가 번지더니 마치 유백색 옥에 빛이 스며든 듯 은은한 광택이 돌았다.신예린은 몇 번이고 주시우의 얼굴을 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물었다.“교수님, 괜찮으세요?”주시우는 겉으로는 침착했지만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도저히 믿기지 않았기에 신예린은 무심코 손을 뻗어 주시우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그러나 닿기도 전에 주시우의 뜨거운 손바닥이 곧장 신예린의 손목을 붙잡았다.신예린은 손끝이 덜컥 떨렸고 주시우 역시 버티기 힘들었다.신예린의 손목은 여름날 얼음 조각처럼 차가워 주시우의 뜨거운 손바닥을 식혀 주었고 그래서 더 놓기가 아쉬웠다. 그러나 혹시라도 지난번처럼 이성을 잃을지 두려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주시우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낮게 말했다.“아마 잠시 후에 설거지를 좀 부탁해야 할 것 같아. 머리가 좀 어지러워.”“머리가 어지러워요?”신예린의 눈빛이 잔뜩 긴장으로 흔들렸다.“그냥... 취한 것 같아.”‘단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신예린은 믿기지 않아 눈을 크게 떴고 주시우는 신예린의 표정을 읽고는 차분히 덧붙였다.“난 술에 굉장히 약해. 조금만 마셔도 바로 취해. 그때도... 겨우 한 모금이었어.”갑작스레 그날 밤 이야기가 언급되자 신예린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단 한 모금으로 그렇게 격렬할 수 있다니... 앞으로 교수님한테 술을 조금 더 권하면...’엉뚱한 생각이 머리에 스쳤으나 신예린은 금세 고개를 흔들며 진정을 되찾았다.‘안 돼. 그런 비겁한 방법을 어떻게 떠올릴 수가 있어.’식사를 마친 뒤, 신예린은 서둘러 설거지를 마쳤다.부엌을 정리하고 나와 보니 거실은 고요했고 소파 위에 주시우가 누워 있었다.따뜻한 불빛 아래 드리운 긴 그림자 속에서 주시우의 몸은 한 겹 붉은 기운에 싸여 있었고 붉게 물든 입술은 마치 활짝 핀 꽃처럼 눈부시게 빛났다.‘잠자는 미남이라는게... 딱 이 모습이구나.’신예린은 저도 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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