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오늘은 웃어.”
호텔 키를 빼앗아 간 다음 날, 준혁이 서윤에게 건넨 첫 말이었다.
침대 위에는 검은 드레스와 구두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메이크업 실장 명함이 있었다.
“어제 일은 설명 안 해?”
“자선행사 끝나고.”
“귀걸이 주인도?”
“하은이가 주머니를 뒤진 것부터 가르쳐. 남의 물건에 손대는 버릇 들이면 안 돼.”
준혁은 다른 여자의 귀걸이를 가져온 일보다 그것을 찾아낸 아이의 행동을 문제 삼았다.
오늘은 강림그룹이 주최하는 아동의료재단 기금 만찬이었다.
언론 앞에서 아픈 아내를 돌보는 후계자 역할을 해야 했고, 그 옆에는 잘 웃는 서윤이 필요했다.
“표정 관리해. 기자들 와.”
“내 표정까지 당신 소유야?”
“가족 얼굴은 회사 자산이야.”
행사 직전 메이크업 실장은 서윤의 눈 밑을 가리고 입술에 색을 덧칠했다.
준혁은 거울 속 아내를 확인한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아파 보이지 않겠네.”
“안 아픈 게 아니라, 안 아파 보이게 만든 거잖아.”
“사람들은 보이는 걸 믿어.”
행사장 입구에서 준혁은 서윤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카메라가 사라지자 손도 떨어졌다.
그는 부부 인터뷰에서 아내의 건강을 가장 걱정한다고 말했고,
서윤에게 마이크가 넘어오자 대신 답했다.
“요즘 많이 안정됐습니다. 제가 곁에서 잘 돌보고 있어요.”
서윤은 카드가 정지된 채 하은의 해열제를 사러 다닌 밤을 떠올렸다.
그러나 준혁은 다음 질문을 받으며 헌신적인 남편의 얼굴을 완성했다.
본행사 전 VIP 대기실에 문세라가 들어왔다.
준혁은 대화하던 사람을 남겨두고 먼저 그녀에게 다가갔다.
“대표님, 늦으셨네요.”
“내 행사가 아닌데 시간을 맞출 이유가 있나요?”
세라는 준혁이 내민 손을 보지 않고 서윤에게 시선을 옮겼다.
서윤은 태블릿 알림에서 보았던 이름을 떠올렸다.
S등급 문세라, 최우선.
이름으로만 보았던 세라는 자신이 누구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한서윤 씨죠?”
“제 이름을 아시네요.”
“준혁 씨 아내인데 모르면 곤란하죠.”
세라는 준혁의 넥타이가 비뚤어진 것을 발견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매듭을 바로잡았다.
준혁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허락을 구하거나 놀랄 과정이 없었다.
곁에 있던 수행원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시선을 내렸다.
집에서는 서윤이 골라준 넥타이를 촌스럽다며 풀어버리던 남자가, 세라가 고친 모양은 그대로 두었다.
“남의 남편 넥타이를 자주 고쳐주시나 봐요.”
“틀어진 건 눈에 걸려서요.”
세라는 한 걸음 물러나 두 사람을 함께 보았다.
“부부가 참 잘 어울리세요.”
칭찬인데도 모욕처럼 들렸다. 세라는 서윤을 경쟁자로 확인하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남편의 아내를 앞에 두고도 경계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다.
본행사가 시작되자 전광판에 공개된 후원 기업 명단 맨 위에는 세라바이오가 올라 있었다.
강림그룹이 행사를 주최했지만 가장 많은 돈을 낸 사람은 문세라였다.
사회자가 기부액을 발표하자 가장 긴 박수는 세라의 자리로 향했다.
강태문은 자리에서 직접 일어나 그녀를 맞았고,
강림그룹 임원들은 준혁보다 먼저 세라에게 인사했다.
집 안에서는 사람의 숨통까지 쥐고 흔들던 준혁이 그녀 앞에서는 말의 순서를 골랐다.
서윤은 남편이 누구에게나 강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에게만 잔인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저 여자한테는 잘하네.”
“사업적으로 중요한 사람이야.”
“넥타이까지 고쳐주는 사업 관계?”
“괜히 경쟁하려 들지 마. 당신이 상대할 급이 아니니까.”
경매가 시작되자 준혁은 재단 홍보를 위해 그림 한 점에 번호표를 들었다.
세라가 입찰하자 가격은 곧 준혁이 정한 선을 넘어갔다.
그는 번호표를 내려놓았고, 세라는 한 번 더 가격을 올려 그림을 낙찰받았다.
이어 그림을 보지도 않은 채 재단에 다시 기증했다.
“갖고 싶어서 산 게 아니었나요?”
“갖는 것보다 필요할 때 쓰는 게 편한 것도 있어요.”
세라의 시선이 잠시 준혁에게 닿았다가 돌아왔다.
준혁은 아내에게 생활비 몇 만 원도 설명하게 만들면서,
세라가 수억 원을 쓰는 동안에는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준혁이 전화를 받고 자리를 비우자 세라는 혼자 남은 서윤 옆에 섰다.
“어제 호텔에서 나온 귀걸이, 대표님 것은 아니죠?”
“내 건 더 비싸요.”
“다른 여자들까지 알고 있어요?”
“준혁 씨가 비밀이라고 믿는 것들은 대개 비밀이 아니에요.”
“남의 가정을 이렇게 만들고도 아무렇지 않아요?”
“당신 가정은 당신 남편한테 물어요.”
“내가 비켜주면 되겠네요.”
세라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비키면 곤란해요.”
“왜요?”
“당신이 없어지면 준혁 씨가 집도, 아이도, 체면도 전부 들고 내 쪽으로 올 테니까.”
“그 사람이 대표님을 선택한다는데도 싫어요?”
“선택받는 것과 책임지는 건 다르죠.”
준혁이 두 사람을 향해 돌아오고 있었다.
세라는 그를 바라보며 잔을 들어 보였다.
“그 사람은 당신이 계속 책임져요.”
“뭐라고요?”
“나는 필요할 때만 부르면 되니까.”
준혁이 곁에 도착하자 세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서윤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이혼은 하지 마세요. 난 남편까진 필요 없거든요.”
[이번에는 정말 이혼할게.]문세라에게 보낸 송금 메모를 본 서윤은 준혁의 방문을 열었다.그는 침대에 누운 채 여자 5명이 모인 단체방을 보고 있었다.서윤이 들어와도 화면을 감추지 않았고, 오히려 휴대전화를 세워 여자들이 올린 사진을 넘겼다.거실 소파에 벗은 채 누워 있던 사진, 서윤의 잠옷을 입고 술잔을 든 사진,바닥에 뒤집어놓은 가족사진을 발로 누른 사진까지 남아 있었다.“이혼한다고 세라한테 약속했어?”“내 계좌까지 뒤졌냐?”“대답해.”“씨발, 남편 폰도 뒤져, 태블릿도 뒤져, 통장까지 뒤져. 네가 아내야, 압수수색 나온 형사야?”“이혼할 거냐고.”준혁은 단체방에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돼지년이 또 발작 중. 잠깐만.]곧바로 웃는 이모티콘이 여러 개 올라왔다.“그걸 저 여자들한테 왜 말해?”“웃기잖아. 갈 데도 없는 년이 이혼할까 봐 겁먹은 척하는 게.”“나는 진짜로 할 거야.”“뭘?”“이혼.”준혁은 침대에서 일어나 서윤 앞에 섰다.“해봐. 친정집에 얹혀살면서 98kg짜리 몸으로 애 하나 끌고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정신과 다니지, 먹고 토하지, 돈도 못 벌지. 판사 앞에 세워놓으면 네가 엄마로 보일 것 같아?관리 안 되는 환자로 보이지.”“당신은 여자 5명이랑 집에서 벗고 있었어.”“성인끼리 합의하고 논 게 범죄야? 네가 못 해주는 걸 쟤들이 해준 거지.”“딸이 사는 집이었어.”“또 애 팔아먹네. 하은이는 못 봤잖아.네가 눈 가려놓고 이제 와서 애가 평생 상처받은 것처럼 지랄하는 게 더 역겨워.”서윤은 단체방 화면을 빼앗아 여자들의 이름을 확인했다.윤채린, 오유진, 최라희, 배지아.그리고 문세라가 아닌 낯선 이름 1개.“이 여자들은 다 누구야?”“봐놓고 뭘 물어?”“세라는 왜 없어?”“세라는 이런 싸구려 파티 안 와.”“그럼 어제 온 5명 말고도 또 있다는 거야?”준혁은 대답 대신 서윤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빼앗았다.“여자가 몇 명인지 세는 짓부터 존나 없어 보여.네 몸으로 남편 성욕 하나
사진 선택 링크가 닫히기 전에 서윤은가족사진과 준혁·세라의 비공개 사진을 휴대전화에 저장했다.파일 정보와 촬영 시각도 따로 캡처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는 몰랐지만,다시 없던 일이 되게 둘 생각은 없었다.준혁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재킷도 벗지 않고 물었다.“스튜디오에서 연락 왔어. 비공개 사진 봤어?”“가족사진 고르다가 봤어.”“직원이 실수한 거야. 지웠으니까 당신도 삭제해.”“왜? 가족사진이랑 같은 폴더에 있어서?”“회사 이미지에 문제 생기면 당신도 편할 것 없어.”준혁은 휴대전화를 내놓으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 하은이 방문을 열었다.“엄마 또 혼나?”준혁은 손을 거두고 아이를 향해 웃었다.“엄마가 남의 파일을 잘못 받아서 그래.”남의 파일이라는 말은 정확했다. 가족사진 속 서윤은 허리도, 팔도, 피로도 지워진 사람이었다.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은 원본은 세라를 바라보는 준혁의 얼굴뿐이었다.준혁이 샤워하러 들어가자 서윤은 사진을 결혼 전 사용하던 이메일 계정으로 전송했다.제목에는 날짜만 적고 본문에는 확인한 사실만 남겼다.[오후 3시 18분. 가족사진과 같은 스튜디오에서 강준혁·문세라 비공개 촬영 확인. 원본 폴더명과 파일 정보 첨부.]메일을 보낸 뒤에는 광고 자료를 보관하던 이동식 저장장치에도 같은 파일을 복사했다.계정이 지워지고 휴대전화를 빼앗겨도 한곳에는 남아 있어야 했다.서윤은 빈 문서를 열어 지금까지의 일을 날짜순으로 적었다.낯선 립스틱, 모르는 여자들의 전화, 요일별 일정, 호텔 키와 귀걸이, 문세라의 이름, 같은 스튜디오의 사진.기억 속에서 뒤엉켰던 일들이 문장으로 옮겨지자 하나의 방향을 가리켰다.호텔.서윤은 가족 태블릿을 켰다.오전에 가족사진 링크를 확인한 준혁의 개인 메일 계정이 로그아웃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받은 편지함에는 재무팀이 전달한 법인카드 정산 파일이 있었다.이틀 전 호텔 이름으로 검색하자 같은 날짜의 결제 건이 연달아 나타났다.정산 파일에는 호텔이 발행한 거래명세서도 첨부돼
“팔을 더 붙여. 지금 상태로는 보정할 게 너무 많잖아.”사진작가가 자세를 지시하기도 전에 준혁이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내 몸인데 왜 당신이 방향을 정해?”“강림그룹 가족 화보야. 개인 사진 아니야.”자선행사 다음 날, 서윤은 하은과 함께 기업 홍보용 촬영장에 서 있었다.강림그룹 창립기념 특집 기사에 실릴 가족사진이었다.촬영 콘셉트는 ‘아픈 아내를 지키는 후계자와 단란한 가족’이었다.서윤이 어떤 치료를 받고 있는지, 생활비 카드가 왜 막혔는지,하은의 약을 누가 샀는지는 기사에 들어가지 않았다.스타일리스트는 서윤에게 허리를 조이는 원피스를 입히고 재킷 뒤쪽을 집게로 잡아당겼다.정면에서는 몸에 맞는 옷처럼 보였지만 등을 돌리면 천이 벌어졌다.“엄마 옷 아파 보여.”“옷은 안 아파.”“엄마가 아파 보여.”준혁이 아이의 말을 잘랐다.“사진 찍을 때는 웃어야 착한 딸이지.”“엄마도 웃어야 착해?”“엄마는 더 잘 웃어야 해.”촬영이 시작되자 준혁은 서윤의 어깨를 감싸고 하은을 가운데 세웠다.사진작가는 하은에게 흰 꽃다발을 안기고 세 사람이 손을 잡은 채 웃어달라고 주문했다.“아빠는 집에서는 엄마 손 안 잡잖아.”스태프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준혁은 아이의 손을 감싸 쥐며 카메라 쪽으로 돌렸다.“쓸데없는 말 하면 촬영 다시 해야 해.”“그래도 아빠는 집에서 엄마 손 안 잡잖아.”준혁은 카메라 불빛이 들어오자 곧바로 웃었다.아내를 아끼는 남편처럼 몸을 기울이다가 촬영이 멈추면 손을 떼고 모니터 앞으로 갔다.“이 컷은 안 돼. 팔이 너무 크게 나왔어.”“원래 내 팔이야.”“원래대로 내보내자는 사람이 어디 있어.”“나는 있는데.”준혁은 사진작가에게 다음 컷을 지시했다.하은은 웃으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입을 다물었고,서윤은 아이가 더 지치기 전에 끝내려고 카메라가 원하는 표정을 만들었다.두 시간 뒤 보정팀이 1차 시안을 띄웠다.서윤의 허리는 줄었고 팔과 어깨도 다른 사람의 비율로 바뀌었다.눈 밑의 피로와 출산 뒤 남
“오늘은 웃어.”호텔 키를 빼앗아 간 다음 날, 준혁이 서윤에게 건넨 첫 말이었다.침대 위에는 검은 드레스와 구두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메이크업 실장 명함이 있었다.“어제 일은 설명 안 해?”“자선행사 끝나고.”“귀걸이 주인도?”“하은이가 주머니를 뒤진 것부터 가르쳐. 남의 물건에 손대는 버릇 들이면 안 돼.”준혁은 다른 여자의 귀걸이를 가져온 일보다 그것을 찾아낸 아이의 행동을 문제 삼았다.오늘은 강림그룹이 주최하는 아동의료재단 기금 만찬이었다.언론 앞에서 아픈 아내를 돌보는 후계자 역할을 해야 했고, 그 옆에는 잘 웃는 서윤이 필요했다.“표정 관리해. 기자들 와.”“내 표정까지 당신 소유야?”“가족 얼굴은 회사 자산이야.”행사 직전 메이크업 실장은 서윤의 눈 밑을 가리고 입술에 색을 덧칠했다.준혁은 거울 속 아내를 확인한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이 정도면 아파 보이지 않겠네.”“안 아픈 게 아니라, 안 아파 보이게 만든 거잖아.”“사람들은 보이는 걸 믿어.”행사장 입구에서 준혁은 서윤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카메라가 사라지자 손도 떨어졌다.그는 부부 인터뷰에서 아내의 건강을 가장 걱정한다고 말했고,서윤에게 마이크가 넘어오자 대신 답했다.“요즘 많이 안정됐습니다. 제가 곁에서 잘 돌보고 있어요.”서윤은 카드가 정지된 채 하은의 해열제를 사러 다닌 밤을 떠올렸다.그러나 준혁은 다음 질문을 받으며 헌신적인 남편의 얼굴을 완성했다.본행사 전 VIP 대기실에 문세라가 들어왔다.준혁은 대화하던 사람을 남겨두고 먼저 그녀에게 다가갔다.“대표님, 늦으셨네요.”“내 행사가 아닌데 시간을 맞출 이유가 있나요?”세라는 준혁이 내민 손을 보지 않고 서윤에게 시선을 옮겼다.서윤은 태블릿 알림에서 보았던 이름을 떠올렸다.S등급 문세라, 최우선.이름으로만 보았던 세라는 자신이 누구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한서윤 씨죠?”“제 이름을 아시네요.”“준혁 씨 아내인데 모르면 곤란하죠
서윤은 서랍에 남아 있던 현금으로 하은의 해열제를 샀고,아이의 열이 내릴 때까지 밤을 새웠다.아침이 되자 준혁은 카드 정지에 관해서도,하은의 상태에 관해서도 묻지 않은 채 식탁에 앉았다.자신이 막아놓은 카드로 아이의 약조차 사지 못했다는 사실도 궁금해하지 않았다.하은은 우유를 마시다가 아빠의 넥타이 쪽으로 코를 가져갔다.“아빠, 오늘은 꽃 냄새 나.”준혁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회사에서 묻은 거야.”“어제는 달콤한 냄새였는데.”“접대 다니다 보면 별 냄새가 다 묻어.”“그럼 접대하는 사람들이 아빠한테 붙어 있어?”하은은 날짜보다 냄새를 먼저 기억했다.어떤 날에는 꽃 냄새가 났고,어떤 날에는 사탕처럼 달콤한 향이 났으며,또 어떤 날에는 엄마에게서 한 번도 맡지 못한 향이 따라왔다.준혁이 접대라고 부른 밤마다 아이는 아빠의 옷을 다시 확인했다.“엄마한테는 맨날 같은 냄새 나.”“엄마는 집에만 있으니까.”준혁은 집에만 있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빼놓았다.서윤이 복직을 말할 때마다 아이를 버릴 셈이냐고 막았고,이제는 밖에 나가지 않는 삶을 능력 부족처럼 사용했다.“하은아, 밥 먹자.”서윤이 화제를 돌리자 준혁이 끼어들었다.“애가 묻는데 왜 말을 막아?”“아이 앞에서 또 나를 깎아내리니까.”“사실을 말한 거야. 당신은 사실만 들으면 공격받았다고 생각하잖아.”하은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내가 냄새 말해서 싸워?”“아니야. 하은이 때문 아니야.”서윤이 답했지만 준혁은 곧바로 다른 설명을 붙였다.“엄마가 요즘 예민해서 그래. 하은이가 조심하면 돼.”“아이한테 왜 그런 말을 해?”“당신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 멀쩡하다고 거짓말해?”“내 상태를 아이한테 책임지게 하지 마.”“엄마가 화낼 것 같으면 아빠한테 말해. 괜히 옆에 있다가 놀라지 말고.”그는 안전수칙을 알려주듯 서윤을 위험한 사람으로 정리했다.밤마다 하은의 열을 확인하고 밥을 먹이며 유치원 준비물을 챙기는 사람은 서윤이었지만,준혁의 문장 속에서 그녀
“이혼시키지도 않는다잖아.”현관문이 닫힌 뒤에도 박옥자의 마지막 말은 집 안에 남았다.서윤은 체중계가 놓였던 자리를 한동안 바라보다 식탁에 노트를 펼쳤다.더는 준혁과 같은 집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결심과 출구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보증금.이사비.하은의 유치원비.변호사 상담료와 병원비.한 달 생활비.서윤은 아는 숫자를 적고, 모르는 숫자 옆에는 물음표를 붙였다.결혼 전에는 광고 문구 하나로 수백만 원짜리 계약을 따냈지만 지금 자기 이름으로 들어오는 돈은 없었다.서윤이 쓰는 것은 준혁 명의의 본카드에 딸린 가족카드였다.카드 앞면에는 서윤의 이름이 찍혀 있었지만,이용 한도와 정지 권한은 본회원인 준혁에게 있었다.서랍 깊숙이 넣어둔 통장을 꺼냈다.마지막 거래는 하은이 태어난 해에 멈춰 있었고,잔액은 작은 원룸 보증금에도 턱없이 모자랐다.은행 앱에서는 소득 확인이 되지 않아 대출이 어렵다는 안내가 떴다.보증금이 낮은 집은 하은의 유치원과 병원에서 멀었고, 가까운 집은 월세만으로 생활비가 무너졌다.결혼 전 입던 옷과 가방을 전부 팔아도 보증금에는 닿지 못했다.그마저 준혁과 옥자가 집 안 물건을 수시로 확인해 몰래 처분하기 어려웠다.숫자를 확인할수록 이혼은 결심이 아니라 가격표처럼 보였다.남편을 떠나는 데도 돈이 필요했고, 아이를 데리고 안전하게 살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엄마, 이거 뭐 써?”잠에서 깬 하은이 식탁으로 와 노트를 들여다봤다.“이사 갈 때 필요한 거.”“우리 이사 가?”“엄마가 알아보는 중이야.”“아빠 없는 집으로?”여섯 살 아이는 설명하지 않은 말까지 알아들었다.“엄마는 하은이랑 안전하게 살 집을 찾고 싶어.”“아빠가 찾아오면?”서윤은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통장 잔액을 본 뒤에는 약속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다.“엄마 돈 없으면 나 못 데려가?”“엄마가 꼭 방법을 찾을게.”오후가 되자 서윤은 이혼 전문 변호사의 전화 상담을 예약하고 소액의 상담료를 결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