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수술실. 환자는 마취를 받고 있었고, 수술팀은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나는 손을 씻고 수술 가운을 입었다. 강태혁이 내 옆에 섰다.
“긴장돼?”
“아뇨.”
“거짓말하지 마.”
“조금 됩니다.”
“좋아.”
나는 그를 돌아봤다.
“긴장된다고 하니까 좋아요?”
“긴장할 줄 안다는 건 네가 상황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강태혁은 마스크를 고쳐 썼다.
“대신 긴장 때문에 판단을 놓치지는 마.”
“네.”
“그리고 네가 생각한 대로 안 되면?”
“다시 평가하고, 필요한 정보를 확인한 뒤 대안을 제시하겠습니다.”
“좋아.”
그가 수술대 쪽으로 돌아섰다.
“시작하자.”
수술이 시작됐다. 수술 부위가 노출되고, 수술팀은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나는 강태혁의 지시에 맞춰 필요한 단계를 수행하면서 수술 소견을 확인했다.
초반에는 계획대로 진행됐다. 그러나 판막을 직접 확인하는 과정에서 예상과 다른 소견이 나타났다.
나는 시야를 다시 확인했다.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판막의 변형이 복잡했다. 수선 가능성을 판단하려면 추가적인 평가가 필요했다.
“교수님.”
“말해.”
“예상했던 소견과 차이가 있습니다. 판막의 변형이 더 복잡해 보여서 수선 가능성을 다시 평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강태혁이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네 생각은?”
나는 잠시 관찰한 내용을 정리했다.
“현재 소견만으로 수선 가능하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추가 평가 후 판단하되, 수선이 어렵다면 치환술로 전환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수선이 가능하다면?”
“가능한 범위와 예상되는 결과를 확인한 뒤 결정하겠습니다. 무리하게 수선을 고집하지 않겠습니다.”
강태혁은 몇 초간 수술 부위를 살폈다.
“좋아. 계속 확인해.”
나는 다시 집중했다. 수술실에서는 시간 감각이 사라진다. 몇 분이 한 시간처럼 길어지기도 하고, 한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기도 한다. 머릿속에는 오직 환자의 상태와 수술 단계만 남는다.
그때였다.
“잠깐.”
강태혁이 말했다. 나는 즉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수술 부위를 확인한 뒤 마취과에 환자의 상태를 물었다. 수치와 소견을 다시 확인하고, 팀원들에게 다음 단계를 지시했다. 예상하지 못한 변화가 생긴 상황이었다. 누구도 서두르면 안 됐다.
강태혁이 내게 물었다.
“한채이. 지금 뭐부터 확인해야 하지?”
나는 환자의 상태와 수술 소견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정리했다.
“환자의 혈역학적 상태를 먼저 확인하고, 현재 수술 소견과 변화의 원인을 평가해야 합니다. 추가 조작은 원인을 확인한 뒤 진행하겠습니다.”
“마취과.”
마취과에서 현재 상태를 전달했다. 강태혁은 상황을 종합한 뒤 다음 단계를 결정했다.
“좋아. 그럼 계획 수정한다.”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그 지시에 맞춰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예상했던 계획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상황이 바뀌면 판단도 바뀌어야 했다.
그게 수술이었다. 그게 강태혁이 내게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수술은 결국 끝까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건 계획이 틀어졌을 때 얼마나 빨리 상황을 이해하고, 환자에게 가장 안전한 방향을 찾느냐였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강태혁과 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가 다음 지시를 내리기 전에 내가 필요한 것을 확인했고,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그가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4년 동안 지독하게 시달리며 맞춰 온 호흡이었다.
수술은 계획을 조정해 가며 진행됐고, 마침내 마무리됐다.
“수술 종료.”
강태혁의 말이 떨어졌다. 나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수술실을 나서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해냈다.’
내 판단이 전부 정답이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모르는 부분을 인정했고, 상황을 다시 확인했고, 필요한 순간에는 계획을 수정했다. 적어도 오늘은 도망치지 않았다.
“한채이.”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강태혁이 서 있었다.
“네.”
“따라와.”
…아. 이제 시작이구나.
***
교수실 문이 닫혔다. 강태혁은 의자에 앉자마자 말했다.
“앉아.”
나는 앉았다.
“오늘 수술에서 네가 잘한 게 뭔지 알아?”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상과 다른 소견이 나왔을 때 무리하게 기존 계획을 고집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도 맞아.”
그는 차트를 펼쳤다.
“그런데 제일 잘한 건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한 거야.”
나는 그를 바라봤다.
“네가 오늘 수술에서 모든 걸 정확하게 판단한 건 아니야. 그건 당연해.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으니까.”
‘…칭찬하는 거 맞겠지?’
강태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부분을 인정하고, 필요한 정보를 확인하고, 근거를 가지고 대안을 제시했어. 그건 좋은 외과의가 갖춰야 할 태도야.”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 인간이. 지금 나를 칭찬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 제대로.
“…교수님.”
“왜.”
“오늘 어디 아프세요?”
“뭐?”
“아니, 평소 같으면 제가 놓친 부분 열 개쯤 말씀하셨을 텐데.”
“틀렸어. 네가 놓친 부분은 열두 개야.”
“…네?”
“그건 오후에 따로 정리해서 알려 줄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역시나. 사람이 갑자기 변할 리가 없지.
강태혁은 차트를 덮었다.
“그리고 한채이.”
“네.”
“너한테 중요한 수술을 맡기는 이유가 뭔지 알아?”
나는 잠시 생각했다.
“제가 잘해서요?”
“그것도 맞아.”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네가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인턴 때도 그랬다. 강태혁은 내게 최고의 서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4년을 버텼다.
물론 그 과정이 이렇게 개같을 줄은 몰랐지만.
“…그런 말은 처음 하시네요.”
“내가 언제 안 했어?”
“교수님은 칭찬할 때도 꼭 욕을 같이 하시잖아요.”
“네가 욕먹을 짓을 하니까.”
“아,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강태혁이 눈썹을 올렸다.
“갑자기 왜 이렇게 공손해?”
“칭찬받았으니까요.”
“그럼 이제부터 더 열심히 해야겠네.”
“…….”
“오후 수술 준비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교수님!”
강태혁이 웃었다. 아주 짧게.
“왜. 칭찬받았으면 기분 좋게 일해야지.”
“이게 칭찬의 대가라면 앞으로 칭찬은 사양하겠습니다!”
“늦었어.”
“뭐가요?”
“이미 잘한다고 인정했잖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인간. 정말로. 정말로 재수 없는데. 왜 방금 그 말이 조금 기분 좋았을까.
점심시간. 한채이는 구내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고 있었다.“한 선생님.”윤도윤이 손을 흔들었다.“여기 자리 있어요.”“아, 선생님. 안녕하세요.”채이는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 도윤은 그녀의 식판을 보고 웃었다.“오늘은 제대로 드시네요.”“어제 누가 밥 안 먹으면 혼난다고 협박해서요.”“누가요?”“제 인생 최대의 적이요.”도윤이 웃음을 터뜨렸다.“강 교수님?”“쉿. 병원 안에서 그 이름 함부로 말하면 나타나세요.”“하하. 무슨 게임 속 보스도 아니고.”“보스는 패턴이라도 있죠. 그분은 매번 새로워요.”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웃었다. 도윤은 오전 회의 이야기를 꺼냈다.“발표 잘하셨던데요. 특히 한계를 인정한 부분이 좋았어요. 학회에서 질문이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감사합니다. 그래도 아직 보완할 게 많아요.”“그건 누구나 그렇죠. 필요하면 제가 발표 연습도 봐 드릴게요. 다른 병원에서 비슷한 증례를 다룬 적이 있어서요.”“정말요? 그럼 자료 좀 여쭤봐도 될까요?”“물론이죠.”도윤은 휴대폰을 꺼내 관련 논문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때였다.“윤도윤 선생.”익숙하고 불길한 목소리. 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강태혁이었다. 그는 식판도 없이 두 사람의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도윤이 먼저 인사했다.“안녕하세요, 교수님. 식사하셨어요?”“아직.”“여기 앉으시겠어요?”도윤이 빈자리를 가리켰다. 태혁은 그 자리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채이를 봤다. 채이는 숟가락을 든 채 눈을 반짝였다.‘앉으세요. 제발 앉으세요. 지금 이 상황에서 교수님이 무슨 말을 할지 너무 궁금하니까요.’하지만 태혁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윤 선생, 오후 수술 준비 자료 확인했나?”“네. 방금 마쳤습니다.”“그럼 내 연구실로 가져와.”“지금요?”“지금.”도윤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알겠습니다. 채이 선생님, 아까 말씀드린 논문은 보내 드릴게요.”“네. 감사합니다.”도윤이 떠난 뒤, 채이는
흉부외과 회의실에는 교수들과 전임의들이 모여 있었다. 한채이는 스크린 앞에 서서 발표 자료를 넘겼다.“이번 증례에서 저희가 중점적으로 검토한 부분은 승모판막의 구조적 변화와 수술 전 영상에서 확인된 역류 양상의 불일치입니다.”첫 슬라이드부터 질문이 들어왔다.“영상에서 그렇게 판단했다면, 수술 중 예상과 다른 소견이 나왔을 때는 어떻게 대응할 생각이었습니까?”다른 과 교수의 질문이었다. 채이는 준비해 둔 답변을 꺼냈다.“우선 환자의 혈역학적 상태와 경식도 심초음파 소견을 재확인하고, 병변의 범위를 다시 평가하겠습니다. 수술 전 계획을 유지하는 것보다 실제 확인된 해부학적 소견과 환자 상태를 우선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그건 원론적인 답변이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으로 수술 방식을 바꾸겠다는 겁니까?”질문이 날카로워졌다. 채이는 잠깐 숨을 골랐다. 이 부분은 발표 자료에도 한계가 명시되어 있었다. 당시 수술 중 소견만으로 특정 방법의 우월성을 단정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해당 증례 하나만으로 특정 수술 방법이 더 우월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에는 판막의 실제 손상 범위와 봉합 후 역류 정도, 환자의 혈역학적 변화를 종합해 판단했습니다. 다만 제가 제시한 자료만으로는 그 기준을 정량적으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질문한 교수가 고개를 기울였다.“그럼 아직 분석이 덜 됐다는 뜻 아닙니까?”채이는 입을 열려 했다. 그때 옆자리에서 강태혁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닙니다.”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태혁은 팔짱을 낀 채 말했다.“분석이 덜 된 부분과 자료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부분은 구분해야죠.”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한채이 선생은 이번 증례에서 확인된 사실과 추가 검토가 필요한 부분을 구분해서 설명했습니다. 근거가 부족한데도 결론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정확한 판단입니다.”채이는 눈을 깜빡였다.‘지금 나 편들어 준 거야? 그것도 교수님들 다 있는 데서?’태혁은 아
채이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도윤과의 저녁은 즐거웠다. 대화도 잘 통했고, 오랜만에 병원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도 했다. 도윤은 채이의 진로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 줬고, 성형외과로 가든 흉부외과에 남든 응원한다고 말했다.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자꾸만 다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문 앞에 서 있던 강태혁. 자신이 누구를 만나든 상관없다고 말하면서도, 어쩐지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 않던 얼굴. 채이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 진짜.” 휴대폰이 울렸다. [내일 6시 30분.] 채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교수님.] [왜.] [저 오늘 윤도윤 선생님이랑 밥 먹었는데요.] 답장은 없었다. 채이는 웃음을 참으며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교수님 생각보다 질투 많으신 것 같아요.] 이번에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채이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아, 또 무시하시네.’ 그녀가 이불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한채이.] 채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뒤,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내일은 발표 준비만 하자.] 채이는 눈을 깜빡였다. 이상한 말이었다. 발표 준비만 하자니. 그럼 오늘은 뭘 했다는 건데? 그녀는 천천히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렸다. [네, 교수님. 그런데 교수님.] [또 뭐.] [저한테 관심 있으시면 그냥 있다고 하셔도 돼요.] 이번에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채이는 휴대폰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웃었다. 물론 강태혁이 그런 말을 할 리 없었다. 그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오늘만큼은 조금 기대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신경 쓰는 이유가 단순히 제자라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채이는 재빨리 화면을 확인했다. [자.] 채이는 그대로 굳었다. “…뭐?” 다시 읽었다. [자.] 끝이었다. 채이는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인간이 진짜!” 휴대폰을 쥔 채 한참
채이는 병원 정문 앞에서 도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장소는 병원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 떨어진 식당이었다. 도윤은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연락했고, 채이는 휴대폰을 확인하며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한채이.”채이는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아니길.“…네, 교수님.”돌아보니 강태혁이 서 있었다. 그는 퇴근하려는 듯 정장 재킷을 걸친 채였다.“여기서 뭐 해?”“약속 기다리고 있는데요.”“알아.”“…아세요?”“아까 들었잖아.”아. 그랬지. 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윤 선생님 기다리고 있습니다.”태혁의 입매가 굳었다.“아직 안 왔어?”“네. 조금 늦으신대요.”“그래.”대화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태혁은 가지 않았다. 그는 휴대폰을 확인하는 척하면서 정문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채이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교수님.”“왜.”“퇴근 안 하세요?”“할 거야.”“그런데 왜 안 가세요?”“차가 안 와서.”채이는 병원 주차장을 바라봤다. 태혁의 차는 주차장에 있었다.“교수님 차 저기 있잖아요.”“알아.”“그런데 왜 차가 안 왔다고 하세요?”“한채이.”“네.”“너 오늘 정말 한가하구나.”채이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아, 진짜! 교수님!”태혁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웃어?”“아니, 너무 티 나시잖아요!”“뭐가.”“질투하는 거요!”“…….”“교수님, 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채이는 한 걸음 다가갔다.“저 성형외과로 가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이랑 밥 먹는 것도 싫으세요?”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채이는 그 침묵을 가만히 바라봤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한 소리 들었을 것이다. 미쳤냐, 헛소리하지 마라, 네가 지금 할 일이 뭐냐.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태혁은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이상할 만큼 진지했다. 채이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거뒀다.“…교수님?”그 순간 태혁이 입을 열었다.“네가 누구를 만나든 내가 뭐라고 할 자격은
다음 날 오후. 국제학회 발표 준비는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채이는 수술이 끝난 뒤 의국에서 자료를 수정하고 있었다. 태혁은 외래와 회진을 마치고 나서야 합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후 네 시쯤, 의국 문이 열렸다.“한 선생님?”채이가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낯선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었다.“…아.”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윤 선생님.”윤도윤. 심장혈관흉부외과에서 전임의 과정을 밟고 있는 의사로, 얼마 전 다른 병원에서 한국대학교병원으로 옮겨 왔다. 채이보다 몇 살 위였고, 인상이 부드러워 전공의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오랜만이네요. 요즘 바쁘시죠?”“네. 윤 선생님도요.”도윤은 채이의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바라봤다.“학회 준비하세요?”“네. 다음 달에 국제학회 발표가 있어서요.”“아, 그 증례요? 강 교수님이 한 선생님 발표시킨다고 말씀하셨는데.”채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직 부족한 게 많아서요.”“그래도 강 교수님이 맡기셨다는 건 기대하신다는 뜻이겠죠.”“…그런가요?”“그럼요. 강 교수님이 아무한테나 중요한 발표를 맡기시는 분은 아니잖아요.”채이는 피식 웃었다.“그건 맞아요. 대신 아무한테나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시기도 하죠.”도윤이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한 선생님은 강 교수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하세요?”“그럼요.”“대단하시네. 저는 아직도 교수님 앞에만 가면 긴장하는데.”“저도 긴장은 해요.”채이는 진지하게 말했다.“다만 긴장한다고 입이 다물어지진 않더라고요.”도윤은 크게 웃었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도윤이 말했다.“그런데 혹시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채이는 고개를 들었다.“네?”“제가 새로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병원 근처를 잘 모르거든요. 전에 한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식당이 괜찮았던 것 같아서요.”“아, 네. 거기 맛있어요.”“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가실래요? 제가 살게요.”채이는 잠시 망설였다.
오후 8시 17분. 한국대학교병원 흉부외과 교수실.“다시.”“…교수님.”“다시 하라고.”한채이는 마이크도 없는 손에 쥐어진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다봤다.“저 방금 세 번째 했거든요?”“그래서?”“사람이 세 번이나 발표했으면 칭찬 한 번쯤 해 주실 수 있잖아요.”강태혁은 노트북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세 번 다 별로였어.”“와.”채이는 허탈하게 웃었다.“교수님, 혹시 제가 발표를 잘하면 칭찬해 주실 생각은 있으세요?”“있어.”“언제요?”“잘하면.”저 인간은 정말 말로 사람을 죽이는 데 재능이 있었다.국제학회 발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은 지 나흘째. 채이는 진료와 수술, 회진을 소화하면서 발표 자료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강태혁은 퇴근 직전 그녀를 교수실로 불러 발표 연습을 시켰다.처음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태혁이 짚어 주는 부분은 대부분 정확했고, 자신이 놓친 논리적 허점도 분명히 있었다. 문제는 이 남자가 피드백을 하는 방식이었다.“첫 슬라이드부터 다시 봐. 네가 왜 이 환자를 선택했는지 설명이 부족해.”“선정 이유는 뒤쪽에 있습니다.”“청중이 뒤까지 들어 줄 거라고 생각해?”“…….”“첫 30초 안에 관심을 끌어야지. 네가 지금 발표하는 건 환자 기록 낭독회가 아니야.”채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게 더 열받았다. 틀린 말이면 반박이라도 하지.“그리고 이 부분.”태혁이 화면을 가리켰다.“네 판단의 근거가 뭐야?”“수술 전 영상과 수술 중 확인한 소견을 종합했을 때….”“그건 결과고. 당시 네가 어떤 근거로 판단했는지 설명하라고.”채이는 잠시 생각했다.“위험 요소를 먼저 배제했고, 그다음에 가능한 접근법을 비교했습니다.”“그걸 청중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네.”“다시.”채이는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이 인간이 오늘만큼은 인간적으로 굴기를.“교수님.”“말해.”“저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 거 아시죠?”“알아.”“내일도 수술이 있는 거 아시죠?”“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