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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 보낼 땐 언제고 이혼하자니 난리야?
파견 보낼 땐 언제고 이혼하자니 난리야?
연나리

제1화

연나리
기태우에 의해 강진으로 파견된 지 3년째 되던 날, 온진아는 처음으로 이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그녀는 의사에게 들은 어머니의 상태를 덤덤하게 전했다.

혈액 감염으로 인한 위급 상황, 언제든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는 절박한 소식이었다.

온진아는 당장 부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소식을 들은 기태우는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차갑게 내뱉었다.

“네가 의사야?”

그 말인즉슨 돌아와 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비아냥이었다.

온진아인들 자신이 의사가 아니라는 걸 모를까. 당연히 의술로 엄마를 살릴 수 없겠지.

하지만 그분은 다름 아닌 그녀의 엄마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저 엄마의 곁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평소라면 기태우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고 단 한 번도 거스른 적 없던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용기를 냈다.

“엄마 곁을 지키고 싶어서 그래. 며칠만 휴가 좀 쓸게. 업무에는 지장 없도록 할게. 제발, 태우야.”

전화기 너머의 기태우가 잠시 침묵했다. 한 번도 ‘아니오’라고 말한 적 없던 아내의 뜻밖의 고집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윽고 다시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더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아직 죽은 건 아니잖아.”

그 잔인한 한마디에 온진아의 머릿속이 하얗게 굳었다. 이 남자의 모진 말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만큼은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하지만 기태우는 그녀의 분노를 비웃듯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주제 파악 좀 해. 네가 나한테 감히 이런 식으로 말할 자격 있어?”

지난 3년이 그랬듯 기태우는 그녀의 감정도, 생각도, 심지어 그녀라는 존재 자체에 한 치의 관심도 없었다.

부부라는 이름표만 달고 있을 뿐 정말이지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온진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결혼을 제안한 것도, 그녀가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겪었을 때 손을 내밀어준 것도 기태우였다. 심지어 그녀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입양을 제안한 것도 이 남자였는데...

가슴을 찌르는 통증에 온진아는 울컥 치미는 억울함을 삼키며 다시 매달렸다.

“태우야, 부탁이야 제발...”

“됐어, 그만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태우의 목소리가 그녀를 짓눌렀다. 인내심은 이미 바닥난 듯했다.

“내 성격 알지? 자꾸 반복하지 마라. 기천 그룹에서 사표 쓸 생각이거든 부성으로 돌아와.”

말을 마친 남자가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수화기 너머의 뚜 하는 소리에 온진아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강진으로 파견된 3년 동안 그녀는 단 하루도 휴가를 내지 않고 자신의 모든 정열과 시간을 오롯이 일에 쏟아부었다. 단순히 기천 그룹이 강진에서 입지를 다지게 한 것을 넘어 수많은 바이오 기술 특허와 혁신적인 신기술까지 개발해냈다.

부부의 정은 제쳐두더라도 최소한 자신이 일궈온 성과만큼은 참작해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착각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떠나주면 그만이다. 이제 미련 따위는 없었다.

온진아는 곧장 사내 시스템에 접속해 퇴사 사유를 기입하여 사직서를 제출했다. 모든 과정이 거침없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사직 절차를 마친 그녀는 곧바로 부성행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이른 아침 여섯 시, 온진아는 부성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달려간 병원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상세한 상태를 전해 들었다.

병명은 급성 백혈병,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고비를 넘겨 일시적으로 안정을 찾았으나 여전히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위중한 상태였다. 앞으로 장기간의 항암 치료와 골수 이식 등 험난한 과정이 예고되어 있었고 치료비만 해도 최소 4억 원은 필요했다.

병상에 누운 어머니의 파리하고 야윈 모습을 보자 온진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실 그녀는 구미란과 온형욱 부부의 친딸이 아니었다. 어릴 적 입양된 아이였지만 구미란은 지난 세월 동안 그녀를 친딸처럼 애지중지 키워왔다.

온진아의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늘 고생만 해왔다. 어린 시절에는 그녀를 키우느라, 나중에는 남편 온형욱의 도박 빚을 갚느라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이번에 걸린 병 역시 이웃이 쓰러진 어머니를 우연히 발견해 구급차를 불렀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생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결과가 닥쳤을 것이다.

무균실이라 오래 머물 수 없었던 온진아는 의사에게 주의사항을 전달받은 뒤, 서둘러 치료비 마련을 독촉받았다.

이 병은 결국 돈으로 버텨내야 하는 싸움이었다.

병원 벤치에 앉아 온진아는 지난 3년간의 통장 잔고를 계산해 보았다. 그간 근검절약하며 최소한의 생활비로 버티며 모은 돈이지만 박봉인 탓에 고작 6천만 원이 전부였다.

4억이라는 거금 앞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당장 이 거액을 구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병원 일을 서둘러 정리한 온진아는 택시를 잡아 채움 별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바로 기태우의 집이었다. 결혼식 날을 제외하면 그녀가 이곳에 발을 들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현관문을 열어준 가정부는 낯선 온진아의 얼굴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안으로 들어가 주인을 찾았다.

거실을 가로막은 비즈 발 너머로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낯선 여자의 웃음소리와 아이의 명랑한 목소리. 기태우가 입양했다던 아이 기하람이 분명했다.

아이라는 존재를 떠올리자 온진아의 마음 한구석이 몽글몽글하게 풀렸다.

친자식도 아니고 여태껏 줄곧 사진으로만 봐왔지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명의상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온진아는 자연스럽게 모성애가 차올랐다.

‘나중에 선물이라도 사다 줘야지.’

그런 따뜻한 생각을 하던 찰나, 거실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이어 가정부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왔는데 거실 소파에 앉은 세 사람이 한눈에 들어왔다.

기태우, 그리고 한눈에 봐도 귀티가 흐르는 세련된 여인과 그 옆의 기하람이었다.

3년 만에 마주한 기태우는 짙은 색 슈트에 같은 톤의 넥타이를 매치하고 있었다. 뒤로 정갈하게 넘긴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날카로운 눈썹과 별처럼 빛나는 눈매.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해졌고 온몸에선 범접할 수 없는 상위자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3년이라는 세월은 그를 한층 더 성숙하고 위압적인 남자로 만들어 놓은 듯했다.

하지만 그녀를 맞이하는 방식은 극도로 무심했다. 거실로 들어선 온진아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여전히 시선은 손에 든 휴대폰에 고정되었다. 쏟아지는 업무 알림을 기계적으로 처리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옆에 앉은 여인 또한 입을 떼지 않고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온진아를 훑어보았다. 낯선 기색이라곤 없는 걸 보니 아마도 그녀를 알아본 모양이다.

적막을 깬 건 그 옆에 앉아있던 기하람이었다.

“엄마, 저 아줌마 누구예요? 너무 뚱뚱하고 촌스러워요. 엄마 아빠 친구예요? 저한테는 평소에 수준 맞는 사람만 사귀라고 하더니 왜 저런 사람이랑 친구로 지내요?”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식 없는 진심이라서 그만큼 가장 잔인하게 비수를 꽂았다.

온진아는 당혹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난 3년, 강진에서 강행군을 이어가느라 끼니를 제때 챙겨 먹기는커녕 만성 과로에 시달렸다. 그 부작용으로 체중이 수십 킬로나 불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아이가 부른 ‘엄마’라는 호칭이었다.

‘저 여자가 엄마라면 나는? 난 뭐지?’

온진아가 입을 떼려는 찰나, 옆에 앉은 여자가 먼저 반응했다. 그녀는 기하람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람아, 아까도 말했잖아. 나는 엄마가 아니라 고모라고. 저 사람이 네 진짜 엄마야.”

그녀의 손가락이 온진아를 향했다.

그 순간, 아이는 질색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팔짱을 높이 끼고는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흥! 저 여자가 무슨 우리 엄마야! 난 저렇게 뚱뚱하고 못생긴 아줌마는 엄마로 인정 안 해! 당장 내쫓아버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 여자는 상황을 수습하긴커녕 오히려 온진아를 향해 도발하는 눈빛을 던졌다.

온진아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기태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유영아, 하람이 데리고 올라가 있어.”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 그녀는 단 한 번도 기태우에게 그런 따뜻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가슴 한구석이 쓰라리게 저며 왔다. 그제야 온진아는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기태우의 동생이자 기씨 가문의 수양딸 기유영이었다.

결혼식 당시 기유영은 참석하지 않았다. 하여 온진아도 그녀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과연 기태우의 동생답게 기유영에게서도 그와 닮은 서늘하고 거만한 기운이 풍겼다. 선뜻 다가설 수 없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다만 기이하게도 아이의 얼굴에서는 기태우보다 오히려 기유영의 흔적이 짙게 묻어났다.

기태우의 말에 기유영은 순순히 하람이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기태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온진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다.

바로 그 순간, 온진아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사직 신청이 최종 승인되었다는 시스템 알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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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견 보낼 땐 언제고 이혼하자니 난리야?   제30화

    가장 먼저 반응한 건 기유영이었다. 술을 따르던 손끝이 멈칫하더니 얼굴에는 불쾌함과 분노가 서렸다. 아까 온진아를 보긴 했지만, 평소보다 예쁘긴 해도 감히 자신에게 견줄 급은 아니었다.하지만 자신의 주의를 끌어야 할 남자들이 온진아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한유건에 이어 우원빈까지, 다들 자신만 바라봐야 마땅한 사람들인데 말이다.한유건은 여전히 덤덤한 표정을 지을 뿐 속내를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반면 기태우는 흥미롭다는 듯 우원빈을 쳐다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우원빈은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웠고 차선재의 질문이 지나치다고 느꼈는지 욕설을 내뱉었다.“X발! 미쳤냐?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차선재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자신은 이 상황에서 그에게 아무런 악의도 없으며 그저 온진아만을 대상으로 할 뿐이라고 시위하듯이 말이다. 그녀는 차선재에게 마음껏 놀려도 되는 존재이니 뭘 시도해도 괜찮다고 여겼다. 어차피 재미 삼아 하는 일이고 어떤 결과가 따르든 책임질 필요는 없었으니까.우원빈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기태우 곁으로 다가가 술잔을 들었다.“저놈 말은 신경 쓰지 마. 원래 주둥이가 가벼운 놈이잖아.”기태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 손질한 과일을 기유영에게 먼저 건네고 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그 여자가 나한테 무슨 타격을 주겠어.”“그렇지...”우원빈은 씁쓸하게 술을 들이켰다.“내가 예전에 잃어버린 여동생 이야기한 적 있지?”“응, 그건 왜?”어디 알고만 있을까? 기태우는 그동안 우원빈을 위해 잃어버린 여동생의 행방을 대신 조사해주고 있었다.우원빈은 답답한 듯 말을 이어갔다.“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방금 온진아를 보는데 순간 그 애 생각이 나서.”기태우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잔을 부딪쳐 왔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너 요즘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럴 거야. 걔일 리가 없잖아.”결혼하기 전, 기태우는 사람을 시켜 철저히 조사했었다. 온진아를 선택한 건 평범한

  • 파견 보낼 땐 언제고 이혼하자니 난리야?   제29화

    “진아야, 그래서 올해는 태우한테 무슨 선물 준비했어?”차선재가 판을 깔며 비아냥댔다.“마침 다들 모였으니까 여기서 꺼내 봐. 괜히 태우한테 따로 줘서 우리가 나중에 전해 듣게 하지 말고. 너무 번거롭잖아.”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유영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온진아는 정색하며 반박했다.“분명히 말하는데 나 오늘 여기 기태우 보러 온 거 아니야. 너희들이 있는 줄 알았으면 애초에 발도 안 들였어.”“그걸 믿으라고?”차선재가 콧방귀를 뀌었다.“선재야.”그때 기태우가 제지하고 나섰다. 인내심이 바닥난 듯 더는 이 소란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가자. 시작할 시간 됐어.”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기유영을 껴안고 걸음을 옮겼다. 우원빈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도 그 뒤를 따랐다.그들 일행이라면 치가 떨리는 온진아였다. 게다가 우원빈은 과거에 자신을 괴롭혔던 주동자 중 한 명이었기에 그녀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뭘 봐?”우원빈은 대답 대신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영락없는 호박색 눈빛,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우연한 일이 어디 있겠나 싶어서였다.세상에 호박색 눈동자가 한둘인가? 길 가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기 동생이라고 착각할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전에 기태우에게 들었을 때 온진아는 부모님도 계시고 어릴 때부터 부성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었다.우원빈은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굴고 있다고 생각했다.이럴 바엔 차라리 기유영에게나 더 잘하는 게 낫지.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눈앞에서 자란 아이였으니까. 얌전하고 사랑스러운 기유영은 꼬맹이 때부터 그들을 오빠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녔다. 사실 따지고 보면 친동생과 다를 바 없었다.우원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온진아를 한 번 더 훑어보고는 대답 없이 자리를 떴다.온진아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역시 기태우와 어울리는 놈들답게 하나같이 제대로 된 인간이 없었다.유일하게 한유건만이 자신을 괴롭힌 적은 없는 듯했지만, 그 역시 매일 기

  • 파견 보낼 땐 언제고 이혼하자니 난리야?   제28화

    “네가 여긴 웬일이야?”차선재가 가장 먼저 다가와 온진아의 앞길을 떡하니 가로막았다.온진아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를 돌아가려 했다. 바로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에서 날카로운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오늘은 남편 생일입니다. 생일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온진아는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알람을 껐다. 예전에 워낙 바쁘게 살다 보니 기태우의 생일을 놓칠까 봐 설정해 두었던 반복 알람이었다. 올해 돌아온 뒤로는 온통 정신없는 나날들이라 아예 존재조차 잊고 있었는데 하필 이런 최악의 타이밍에 울릴 줄이야.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근처에 있던 차선재 일행은 그 메시지 내용을 똑똑히 듣고 말았다.차선재는 낄낄거리며 온진아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녀가 이 자리에 나타난 이유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날 선 조롱을 내뱉었다.“아하, 태우 생일이라 일부러 찾아온 거야? 근데 어쩌나, 한걸음 늦었네. 방금 봤잖아, 태우 곁에는 이미 축하해 줄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거. 유영이는 너보다 예쁘고 우아하고 피아노까지 잘 치는데. 넌 도대체 가진 게 뭐야?”차선재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휘어졌다.“매년 네가 직접 만든 그 조잡한 선물들? 아니면 닭살 돋아서 읽기조차 힘든 그 연애편지들 말이야? 솔직히 말해줄까? 태우 그거 받을 때마다 질색했어. 매번 우리한테 다 처리하라고 던져줬다고.”순간 온진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차선재를 빤히 쳐다보았다.기태우를 사랑했던 지난날, 그의 생일 선물만큼은 온진아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였다. 정성이 담기지 않은 기성품보다는 마음을 담는 게 낫겠다 싶어 해마다 손수 무언가를 만들었다.기태우가 자신의 마음을 다 받아주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선물들이 쓰레기처럼 버려져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자신의 순수한 마음이 담긴 글귀들이 수많은 사람의 비웃음 속에 읽혔을 거라 생각하니 온진아는 분노로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었다.“너희는 예의라는 걸 몰라?

  • 파견 보낼 땐 언제고 이혼하자니 난리야?   제27화

    유다미가 온진아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어때? 괜찮지?”“응, 생각보다 좋네.”“그럼 앞으로 자주 오자. 넌 그동안 스스로를 너무 옥죄며 살았어. 온통 남을 위해서만 살았잖아.”온진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친구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중, 유다미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쪽 업계 사람들이 늘 그렇듯 의뢰인의 급한 연락일 터였다. 그녀는 온진아가 충분히 편안해진 것을 확인한 뒤, 잠깐 전화를 받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혼자 남은 온진아는 조금 더 무대와 가깝고 주위에 영향을 주지 않는 아늑한 자리로 옮겨 앉았다.어느새 무대 위 연주자가 바뀌어 있었다. 거리가 좀 멀어 얼굴이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늘씬한 몸매에 기품이 느껴지는 상당한 미인이었다.그녀가 등장하자마자 객석 곳곳에서 감탄사와 함께 셔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압도적인 미모와 우아한 분위기에 모두가 넋을 잃은 듯했다.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 여자는 천천히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미녀의 고혹적인 선율이 현장을 순식간에 뜨겁게 달궜다.그런데 그때, 여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금 연주한 곡은 특별한 사람을 위해 연주한 것이라며, 그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멘트를 덧붙였다.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대체 그 행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저런 미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지 궁금해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하지만 온진아의 심장은 차갑게 내려앉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기유영이라는 걸 알아차렸으니까. 그렇다면 그 주인공은 당연히 기태우일 터였다.예상대로 다음 순간 무대 위로 검은색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기태우가 올라갔다. 훤칠한 키에 날카로운 이목구비,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는 무대 위 하얀 드레스의 기유영과 묘한 대비를 이루며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완벽한 선남선녀의 모습을 연출했다.기태우가 나타나자 객석은 야유나 의문 따위 온데간데없고 환호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이 너무 잘 어울린

  • 파견 보낼 땐 언제고 이혼하자니 난리야?   제26화

    온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줬어.”“그래서 그 자식은 뭐래?”온진아는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다른 일로 정신이 없어서 합의서만 내려놓고 바로 나왔어. 근데 걔 성격상 분명 먼저 변호사한테 보여주고 득실을 따져볼걸?”이 업계에서 오래 일한 유다미는 그런 부류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합의서를 변호사에게 맡기는 건 그들에겐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그들의 유일한 목적이니까.“맘대로 하라지. 그런 놈들을 상대할 방법은 나한테도 많으니까. 내가 없는 동안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바로 연락해.”“알았어.”온진아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걔도 나랑 이혼하고 싶어 할 테니까. 그래야 기유영이랑 떳떳하게 지낼 수 있잖아.”유다미가 분통을 터뜨렸다.“야, 그런 인간쓰레기한테는 시간 낭비하지 마. 가장 좋은 방법은 엮이지 않는 거야.”“알아.”이혼 이야기가 나오자 두 사람 모두 기분이 다운됐다. 이에 유다미가 곧장 제안을 건넸다.“내일 기분 전환할 겸 나랑 좋은 데 가자.”“어디?”“가보면 알아.”다음 날 아침, 온진아가 눈을 뜨기 무섭게 유다미의 ‘대작전’이 시작되었다. 화장부터 의상까지 몇 시간을 공들인 끝에 거울 앞에 선 온진아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멍하니 넋을 놓았다.거울 속에는 분명 본인의 얼굴이건만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본래 피부가 하얀 편이었던 그녀에게 유다미가 골라준 하늘색 드레스는 신의 한 수였다. 화사한 색감과 하얀 피부가 어우러져 마치 눈처럼 맑고 고운 느낌을 자아냈다. 거기에 정성스럽게 다듬은 머리와 꼼꼼한 메이크업까지 더해지니 뚱뚱하다는 단점은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복스럽고 매끄러운 느낌의 고전적인 동양미인 자태가 오롯이 살아났다.“우리 진아 진짜 예쁘네.”유다미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한편 온진아는 말없이 거울만 바라봤다.“왜? 마음에 안 들어?”유다미가 또다시 질문을 건넸다.“아니, 좋아.”온진아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멍하니 중얼

  • 파견 보낼 땐 언제고 이혼하자니 난리야?   제25화

    구미란이 물었다.“그럼 태우는 그런 대단한 사람을 어떻게 안 거야?”기태우는 당연히 모른다. 알았다고 해도 온진아에게 소개해주었을 리가 없고. 순간 온진아는 어머니께 모든 진실을 털어놓을까 고민했지만, 어머니의 애틋한 눈빛과 야윈 뺨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잘 모르겠어요. 아마 일하다 알게 됐겠죠.”온진아는 어머니께 물을 권해드렸다.“엄마는 지금 몸 회복하는 게 최우선이에요.”구미란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투병 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딸의 말이라면 끔뻑 죽는 그녀였다.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구미란은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서 쉬라며 온진아를 다독였다. 모처럼 맞은 주말이니 잠도 좀 자고 푹 쉬어야 한다면서 말이다. 앞으로는 별일 없으면 병원에 너무 자주 오지 말라고,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으니 걱정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니 또또 외에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집에 유다미가 와 있었다.“뭐야? 이번 주는 일이 바빠서 못 온다며!”온진아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원래는 그랬지.”유다미도 막 도착했는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근데 다음 달부터 한 달 내내 출장이 잡혔거든. 중간에 도통 시간이 안 날 것 같더라고. 너 혼자 놔두려니 영 마음이 안 놓여서 짬 내서 얼굴이라도 보러 왔어.”“무슨 걱정을 해. 나 스물네 살이야, 어린애도 아니고.”온진아가 웃으며 대꾸했다.“나이 먹는 거랑 속 깊은 건 별개지. 스물넷이 뭐, 아직 한참 어린 나이구먼. 나한테는 여전히 애기야, 애기.”유다미는 그렇게 말하며 캐리어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온진아에게 건넸다.“뭐야 이건?”그녀는 정교하게 포장된 상자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열어봐. 너 주려고 산 선물이야.”“선물?”온진아는 놀란 듯 되물었다.“응,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상자를 열자 명품 브랜드의 가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고에서 본 적이 있는 제품,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고급스럽고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디자인이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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