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예상하시는 하객은 몇 분 정도일까요?” 호텔 지배인이 물었다.“아직 정확히 정해지지는 않았어요. 명단이 확정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연락드릴게요.”집으로 돌아온 한주미는 다시 한번 초대 명단을 꼼꼼히 확인하다가 서은주를 바라봤다.“네 외할아버지 말고, 이번에도 외삼촌과 외숙모는 두 분 다 안 오시는 거니?”“외삼촌은 못 오시고 외숙모만 오실 거예요. 외할아버지는 아마 한 사람을 더 데려오실 것 같고요.”“누구를?”한주미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눈을 빛냈다. 순간 강학용이 황혼의 반려라도 새로 만난 줄 알았다.하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전혀 아니었다. 강학용이 얼마 전 어린 제자를 새로 들였다는 것이었다. 타고난 재능이 워낙 뛰어나 자신의 의술을 계승할 재목이라며, 어딜 가든 곁에 데리고 다닐 만큼 귀하게 여긴다고 했다.이번 팔순 잔치에 데려오는 것도 어린 제자에게 견문을 넓혀 주려는 뜻이 컸다. 물론 그토록 뛰어난 제자를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강학용이 제자를 들이겠다고 했을 때 강정한은 처음부터 탐탁지 않아 했다. 아이가 아직 너무 어린 데다, 연로한 할아버지가 제자를 가르치느라 몸을 상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하지만 강학용의 고집을 누가 꺾을 수 있겠는가. 그는 대뜸 역정을 냈다.“이 녀석아, 이제 좀 컸다고 제법이구나. 내가 제자 하나 들이는 것까지 네 허락을 받아야 해? 아예 네가 내 집안 어른 노릇까지 하려는 게냐!”그 말을 들은 강정한은 더는 반대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한주미가 웃으며 말했다.“그분은 정말 노익장이시네. 연세가 그만큼 드셨는데도 제자를 새로 들이시다니. 송씨 집안 쪽은 송윤재 부부도 돌아오기로 한 것 같으니, 당일에는 허씨 집안과 같은 테이블로 배정해야겠구나.”*육씨 집안에서 송윤재 부부의 이야기가 오가던 그때, 송윤재는 이미 남몰래 경성으로 돌아온 뒤였다.아내와 딸은 며칠 뒤에야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가 먼저 돌아왔다는 사실은 친동생인 송지아조차 모르고
박명숙의 팔순 잔치에 초대받는 이들은 대부분 육씨 집안과 각별한 가까운 친척이나 오랜 벗들이었다. 그런 만큼 육강민 부부가 직접 초대장을 들고 송씨 집안을 찾아오자, 송현근은 뜻밖의 환대에 적잖이 놀랐다.“사람을 보내셔도 됐을 텐데, 두 분이 직접 와 주시다니요.”송현근이 웃으며 말하자 육강민도 평소의 냉랭한 기색을 누그러뜨린 채 예의를 갖춰 답했다.“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두 분께서도 그날 꼭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합니다.”“저희 부부, 반드시 참석하겠습니다.”육강민은 사교계에서도 강단 있고 냉정하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토록 부드럽고 공손하게 나오는 데에는 아무래도 송지아와 허경빈의 관계를 염두에 둔 배려가 컸을 터였다.육강민이 이만큼 성의를 보이자 허경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직접 요리해 대접하겠다며 호기롭게 나섰다.육강민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정말 요리하려는 거 맞아? 나한테 독 먹이려는 건 아니고?”“날 뭘로 보는 거야? 요즘 내 별명이 ‘허 셰프’라고.”*육강민과 서은주가 라비엘 레지던스로 향하던 날, 운전은 육지성이 맡았다. 아빠가 된 뒤로 육지성은 전보다 훨씬 악착같이 일했다. 이제는 분유값을 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어깨에 묵직하게 얹혀 있었기 때문이다.처음 방문하는 곳이라 출입 등록이 필요했다. 차를 세운 육지성은 등록을 하러 내렸다가 단지 입구 주변에 길게 늘어선 차량 몇 대를 유심히 살폈다.다시 차에 오른 그가 육강민을 돌아보며 말했다.“대표님, 단지 입구에 잠복해 있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누구를 기다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요.”그 말에 서은주가 대답했다.“여기 유명 연예인도 많이 산다고 들었어요.”“그럼 연예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인가 보네요. 요즘 기자들도 참 부지런합니다.”육지성이 혀를 내두르며 차를 출발시켰다.허경빈의 집에 도착했을 때, 주방에서는 벌써 뜨거운 열기와 고소한 음식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허경빈은 이마에 땀이 맺히도록 요리에 열중했고, 송
송지아는 그저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면 수많은 사람의 관심이 쏟아질 것 같아 조심스러웠을 뿐이었다.하지만 그녀가 이유를 설명하기도 전에 허경빈이 먼저 말했다.“공개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네 뒤에 숨은 남자로 살면 되지.”그는 금세 기분을 풀고 능청스럽게 덧붙였다.“나처럼 훌륭한 남자 친구는 남들에게 보여 주지 말고 꼭꼭 숨겨 두는 게 맞아.”그러더니 혼자 상상의 나래까지 펼치기 시작했다.“차라리 우리 나중에 비밀 결혼부터 하고, 아이까지 낳은 뒤에 한꺼번에 공개하는 건 어때?”“뭐?”“소설에 그런 장면 자주 나오잖아. 네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몰래 찍혀서 세상에 공개되는 거야.”허경빈은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냈다.“사람들이 깜짝 놀라겠지. 애가 어떻게 허경빈을 그대로 줄여 놓은 것처럼 생겼냐고.”송지아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났다.이 남자는 대체 어떻게 매번 남들은 생각지도 못할 기묘한 상상을 떠올리는 걸까.“그동안 소설을 꽤 많이 읽었나 봐?”“아니. 요즘 이런 내용의 광고가 많이 나오잖아. 심장을 뜯어내고, 간도 떼어 주고, 신장까지 빼앗기는 그런 내용 말이야.”송지아는 굳이 대꾸하지 않고 미소를 머금은 채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 영화 한 편을 보았다.그 뒤에는 차를 몰고 경성 외곽으로 나가 선선한 밤바람을 맞으며 별을 구경했다.송지아는 외출할 때면 늘 운전기사와 경호원을 대동했다. 사립 탐정은 혹시라도 들킬까 봐 함부로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게다가 외곽은 가로등도 많지 않아 주변이 어두웠다.카메라에는 송지아가 어떤 남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 희미하게 찍혔을 뿐, 남자의 얼굴은 선명하게 담기지 않았다.다만 키와 얼굴 윤곽만 보아도 제법 잘생긴 남자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어깨는 넓고 다리는 길었다. 몸의 균형과 자세도 훌륭했다.사립 탐정은 속으로 감탄했다.하긴, 돈 많은 여자에게 붙어사는 제비라면 얼굴과 몸매 정도는 당연히 뛰어나야겠지.역시 돈이 좋았다
하필 송지아 역시 그의 유혹에 약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허경빈의 초대를 받아들였다.허경빈은 방주헌처럼 섬세하고 화려한 미남은 아니었다. 하지만 활짝 웃을 때면 눈이 부실 만큼 환했다. 타고난 듯한 소년미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겼다.흔히 여인의 미모가 사람을 망친다고 말하지만 잘생긴 남자도 사람을 홀리는 건 마찬가지였다.송지아는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에는 집에서 식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송씨 부부는 별다른 말 없이 너무 늦지 않게 귀가하라고만 당부했다.통화가 끝나자 송현근은 서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딸자식은 키워 봐야 소용없다더니, 그 말이 딱 맞군.”그의 아내는 기가 막힌 듯 남편을 바라보았다.“지아가 연애하지 않을 때는 틈만 나면 맞선을 보라고 재촉하더니, 막상 남자 친구가 생기니까 또 못마땅한 표정이네요. 대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요.”“나는 그냥 우리 지아가 허페파 그 녀석에게 완전히 휘둘리는 것 같아서 그래.”“그게 무슨 말이에요?”“겉으로 보기에는 허페파가 지아를 쫓아다니는 것 같지. 그런데 그 녀석이 뭘 해 달라고 하면 지아는 거의 거절한 적이 없어.”“둘이 알아서 잘 만나고 있는데 당신이 왜 그렇게 일일이 간섭해요?”“둘이라니? 무슨 부부처럼 말하네. 두 사람은 이제 막 연애하는 사이야. 많아야 젊은 연인 정도라고!”송현근은 표현을 정확히 써야 한다며 아내에게 진지하게 지적했다.그 모습이 우스워 그의 아내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라비엘 레지던스 밖에서 잠복하던 사립 탐정은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오늘은 아무래도 송지아가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다.그렇게 포기하려던 순간, 뜻밖에도 송씨 집안의 차량이 모습을 드러냈다.송지아는 주거 단지 근처 꽃집에 들러 라넌큘러스 한 다발까지 샀다. 풍성한 꽃다발을 품에 안은 얼굴은 무척이나 기분 좋아 보였다.주말 이틀 동안 연달아 이곳을 방문하다니.아무래도 그녀가 숨겨 둔 젊은 남자가 상당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허경빈은 송
사립 탐정은 망설이지 않고 의뢰를 받아들였다.그러나 송지아의 일상은 너무나 단순했다. 오히려 지켜보는 사람이 따분함을 느낄 정도로 특별한 일이 없었다.그러던 중 사립 탐정의 눈길을 사로잡는 일이 벌어졌다.전통 가옥을 나온 송지아가 곧장 대형 쇼핑몰 안에 있는 육아용품 매장으로 들어간 것이다.그녀가 고른 물건은 전부 갓난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이었다.하지만 송씨 집안에는 어린아이가 없었다.설마 송지아가 임신이라도 한 건가?아무리 그래도 아직 너무 젊지 않은가.그러나 부유층 자제들의 사생활은 본래 복잡하고 문란했다. 툭하면 혼외자가 나타나는 일도 그리 드물지 않았다.육씨 집안 둘째의 딸도 태어난 뒤에야 집으로 데려온 것 아니었던가?사립 탐정은 송지아가 육아용품을 고르고 계산하는 모습을 빠짐없이 사진으로 남겼다. 드디어 엄청난 특종을 잡았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그러나 기쁨도 잠시, 방심한 사이 송씨 집안의 차를 놓치고 말았다.결국 그는 라비엘 레지던스로 돌아가 다시 잠복하기로 했다.*같은 시각, 송지아는 선물을 들고 육씨 집안을 방문했다.지난번 모임이 끝난 뒤 서은주가 두 차례나 만나자고 연락했지만, 송지아는 일이 너무 바빠 모두 거절해야 했다. 마침 오늘은 시간이 난 덕분에 일부러 육씨 집안을 찾아온 것이다.박명숙은 송지아를 가까이 불러 찬찬히 살펴보더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찌나 좋은 말을 많이 하던지, 송지아는 쑥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얼마 뒤에 내 생일잔치를 열기로 했단다. 시간 괜찮으면 경빈이와 함께 오렴.”박명숙이 다정하게 초대했다.“네, 꼭 올게요.”송지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송지아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육민찬도 곧장 달려왔다. 그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민정이는 같이 안 왔어요?”그 말을 들은 육수린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하게 구겨졌다.“오빠는 이제 민정이 언니밖에 안 보여? 나는 안 보여?”금방이라도 눈물을 글썽일 듯 가련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안쓰러웠다.“너랑 민정이는 다
전통 가옥 안.송씨 집안 어른들은 한동안 허경빈을 화제로 삼아 송지아를 놀렸다.웃음이 잦아들고 나서야 송씨 할아버지가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설씨 집안에서 인맥을 동원해 설도윤을 밖으로 빼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이냐?”요즘 송지아는 남자 친구조차 제대로 만나지 못할 만큼 바빴다. 그러니 설도윤이 어떻게 지내는지까지 관심을 둘 여유는 없었다.송현근이 못마땅한 듯 코웃음을 쳤다.“설도윤은 허페파에게 한 차례 두들겨 맞고 저한테도 맞았습니다. 설씨 집안에서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구속집행정지를 신청했어요. 전에는 타지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다쳤던 부위를 수술해야 한다며 경성의 한 병원으로 옮겼다고 합니다.”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설씨 집안 회사도 요즘 사정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누군가 작정하고 손을 쓴 것 같더군요.”“그 집안이 얌전히만 있는다면 나도 끝까지 몰아붙일 생각은 없어.”궁지에 몰린 적은 끝까지 쫓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막다른 길에 내몰린 사람은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 그래서 송씨 집안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상대를 완전히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았다.물론 상대가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 나선다면 이야기가 달랐다.송만기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외할아버지는 설씨 집안 이야기를 더 이어 가고 싶지 않은 듯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지아야, 네 어머니 말로는 요즘 네가 일에만 매달려서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올 때도 있다더구나.”“경성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처리할 일이 많아요.”송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도 정식으로 사귀기로 했으면 상대를 너무 소홀히 대해서는 안 돼. 시간을 내서 데이트도 하고, 늘 그쪽만 애태우며 따라다니게 하지 말아야지. 연애는 두 사람이 함께 가꾸는 거란다.”송씨 할아버지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여자아이는 남자가 달래 주고 아껴 주기를 바라기 마련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한쪽만 노력하고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네, 알아요…”나이가 든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