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솔로인 게 뭐 어때서? 뭐 보태준 거라도 있어? 왜 그렇게 참견이야!’허경빈은 속으로 툴툴거렸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짝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못내 부럽기는 했다. 그나마 같은 처지인 연위성에게 다가가 서로의 외로움이나 달래 볼 생각이었는데, 정작 그는 손범진의 사진을 몇 장 찍어 누군가와 한창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허경빈이 누구와 대화하느냐고 묻자 연위성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내 심리 상담사.”허경빈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도대체 상담을 받으러 다니는 건지, 친구를 사귀러 다니는 건지 묻고 싶었다. 상담이 끝난 뒤에도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넓은 세상에 홀로 남은 솔로는 자신뿐인 듯했다.게다가 요즘은 일이 끝난 뒤 함께 밥을 먹거나 술 한잔하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사람조차 찾기 어려웠다. 누구는 집에서 아이를 달래야 한다고 했고, 누구는 아내와 시간을 보내야 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심지어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방주헌마저 요즘 몸을 관리한다며 거절하기 일쑤였다. 나중에 임신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나.허경빈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결혼도 안 한 놈이 무슨 임신 준비야!*손범진의 한 달 잔치는 그리 성대하게 치러지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만큼은 더없이 따뜻하고 흥겨웠다. 환한 실내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축하의 말과 음식 향이 뒤섞여 잔칫날다운 온기를 자아냈다.손리정은 임신하기 전부터 졸업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가 바뀌고 봄이 오면 곧바로 논문 심사를 받을 수 있었으므로, 앞으로도 반년 남짓은 서은주와 학교에 함께 다닐 수 있었다.손리정의 어머니는 아이를 돌봐 주기 위해 경성에 남았다. 육지성도 따로 보모를 고용한 데다 손범진은 유난히 손이 적게 가는 순한 아기였다.그래서 서은주는 종종 감탄하듯 말했다.“어떤 애들은 부모 속 썩이려고 태어난다는데, 우리 범진이는 진짜 효도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아.”손리정도 제 아들이
하이석과 온유란이 도착했을 때도 연우진은 여전히 볼이 잔뜩 부어 있었다. 방 안을 가득 메운 웃음소리가 모두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았는지, 조그만 얼굴에는 좀처럼 서운한 기색이 가시지 않았다.온유란은 아이 곁으로 몸을 낮추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보송보송한 머리를 쓰다듬었다.“우리 우진이, 누가 괴롭혔어?”연우진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토라진 마음만큼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온유란이 웃으며 말랑한 볼을 살짝 꼬집자, 아이의 두 뺨이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육남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아들은 또래보다 유난히 조숙해 한번 마음이 상하면 좀처럼 달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온유란을 좋아해서, 그녀가 눈을 맞추고 방긋 웃어 주기만 하면 금세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정말이지, 육남혁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온유란은 곁에 있던 손범진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포대기 속에 폭 싸인 작은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두둑한 돈 봉투 하나를 아기 곁에 놓아 주었다.그때 뜻밖에도 하이석이 아이를 한번 안아 보고 싶다고 나섰다.그는 얼마 전부터 임산부와 신생아를 돌보는 법을 가르치는 강좌에 등록해 수업을 듣고 있었다. 육남혁의 추천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초보 아빠 교실에 등록한 동기이기도 했다. 가끔 만나면 그동안 무엇을 배웠는지, 어떤 방법이 유용했는지를 제법 진지하게 이야기하며 서로의 학습 성과와 경험을 나누곤 했다.마침 오늘은 하이석에게 배운 것을 직접 실습해 볼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아기를 품에 안고 그동안 익힌 솜씨를 시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그러나 수업 시간에 안아 본 것은 어디까지나 차갑고 가벼운 모형 아기뿐이었다. 따뜻한 체온과 옅은 젖내를 품은 진짜 아기를 처음 안아 보니, 팔에 전해지는 무게부터 보드라운 감촉까지 모든 것이 달랐다. 조그만 몸이 혹시라도 불편할까 봐 하이석의 움직임도 평
“엄마, 그 사람은 사촌 오빠와 절친한 친구잖아.”하채린은 아무래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그게 뭐가 문제니? 네가 어디가 부족해서 그래. 엄마가 벌써 사람을 시켜 네 드레스도 맞추고 있어. 네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남자라도 네 치맛자락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거야.”*그 시각, 허경빈은 집에서 하랑이를 품에 안고 여유롭게 털을 쓰다듬고 있었다.그는 요즘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예전만 해도 부모님은 아들의 연애나 결혼을 조금도 재촉하지 않았다. 아직 젊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육강민을 비롯한 가까운 친구들이 하나둘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에 이어 아이까지 낳자 허씨 부부도 차츰 마음이 급해졌다.허경빈은 벌써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아직 급할 거 없다니까요.”그러자 아버지가 억울하다는 듯 되물었다.“나도 예전에는 급할 것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방주헌도 그렇게 좋은 아가씨를 만났는데, 내 아들이 아직도 혼자라고? 나는 도저히 인정 못 해!”“아버지, 주헌이한테 너무하시잖아요.”허경빈이 멋쩍게 웃었다.“틀린 말도 아니잖아. 물론 내 눈에는 우리 경빈이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지. 잘생겼지, 성격 좋지, 게다가 이렇게 마음까지 따뜻하잖아. 너 같은 괜찮은 남자를 대체 어디서 또 찾겠니?”그의 아버지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칭찬을 이어 갔다.“경빈아, 너한테 부족한 건 딱 하나야. 네 매력을 제대로 보여 줄 기회가 없다는 거지. 며칠 뒤에 자선 경매가 열린다더구나. 가서 바람도 쐬고 사람들도 만나 봐. 운이 좋으면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만나서 내 며느리로 데려올 수도 있잖아.”그제야 허경빈은 아버지의 속셈을 알아차렸다.어쩐지 낯간지러울 만큼 칭찬을 늘어놓는다 했더니, 결국 이 말을 하려고 밑밥을 깔아 둔 것이었다.아버지는 아들이 거절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허경빈의 품에서 하랑이를 냉큼 데려가 다정하게 끌어안았다.“하랑아, 할아버지한테 오렴. 할아버지가 데리고 자 줄게.”허경빈은 기가 막혔
하채린은 뱃속의 아이가 결혼식 날 생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그날은 모든 일이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탓에 아무런 피임도 하지 못했다. 뒤늦게 피임약을 먹기는 했지만, 병원에서 위 세척을 받은 뒤에도 속이 뒤집힐 만큼 괴로웠고 집에 돌아와서는 몇 번이나 더 토했다.설마 그때 피임약까지 함께 토해 낸 것일까.생리가 늦어지고 나서야 하채린은 덜컥 겁이 났다. 임신 테스트기로는 제대로 확인되지 않자 결국 병원을 찾아 혈액 검사까지 받았다.그런데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정말로 그 끔찍한 아이를 임신한 것이다.머릿속이 온통 뒤엉킨 하채린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집으로 돌아오자 박윤희는 곧바로 딸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몇 번이나 다그쳐 물은 끝에야 하채린은 결국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엄마, 나 어떡해요? 이 일이 알려지면 경성에서 얼굴 들고 다니지도 못해요!”하채린은 눈물을 쏟으며 절망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차피 오빠도 나한테 관심 없잖아요. 차라리 죽어 버릴래요. 이 몹쓸 핏덩이까지 데리고 같이 죽어 버릴 거란 말이에요!”“채린아, 네 오빠가 외면해도 엄마가 있잖니.”박윤희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 딸을 품에 꼭 안고 달랬다.“지금으로서는 아이를 지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그러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그럼 전 정말 못 살아요!”“그렇다고 이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은 아니잖니?”그 말이 떨어진 뒤 모녀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이준이 두 사람을 찾아와 함께 자선 경매에 참석할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이번 경매에는 이 바닥 사람들이 대거 참석할 겁니다. 두 분도 미리 준비해 두세요.”하이준은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으면서도 결코 손을 놓고 지내지 않았다. 예전처럼 각종 행사에 빠짐없이 얼굴을 내밀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 갔다.그와 손을 잡아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한, 경성의 사교계에서 하이준이 완전히 고립될 일은 없었다.본래 이 세계는 그만큼
허경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날 그는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하랑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온유란은 하랑이를 허경빈에게 맡기고도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했다. 낯선 집에서 혹여 서러운 일을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그 우려는 고작 하루 만에 말끔히 사라졌다.이튿날, 허경빈의 SNS에 동영상 하나가 올라왔다. 영상 속 그는 고양이 장난감을 흔들며 하랑이와 한창 놀아 주고 있었다.“자, 하랑아. 아빠한테 와.”그 목소리가 어찌나 다정한지 전날 못마땅해하던 사람과 동일인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그뿐만이 아니었다. 허경빈은 하랑이를 위해 온갖 간식과 옷까지 잔뜩 마련해 두었다.잠시 맡아 기르는 고양이가 아니라 제 자식이라도 된 듯 애지중지하고 있었다.*아이 이야기가 나온다면 손리정과 육지성의 아들을 빼놓을 수 없었다.아이의 이름을 정할 때마다 육민찬이 했던 말이 손리정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손오공이라고 해!”그날 이후 ‘손오공’이라는 이름은 머릿속을 맴돌며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생각했는지, 손리정은 하마터면 정말 아들의 이름을 손오공이라 지을 뻔했다.결국 아이의 이름은 손리정의 부모님이 정했다.손범진.육지성은 좋은 이름이라며 만족했지만 손리정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름을 바꿔야 한다며 한바탕 고집을 부리던 중, 아이의 황달 수치가 갑자기 높아졌다.아이는 곧바로 병원에 입원해 며칠 동안 광선 치료를 받아야 했다.손리정은 아직 산후조리 중이었다. 부모님은 딸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병원까지 오가야 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병원에 입원한 아이는 육지성이 도맡아 보살피게 되었다.하지만 초보 아빠에게 아이를 온전히 맡겨 두자니 손리정은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서은주에게 곁에서 함께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아이가 퇴원하는 날에도 서은주는 육지성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마침 온유란도 임신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같은 병원에 와 있었
윤나송은 밀크티를 홀짝이며 속으로 감탄했다.역시 제 돈 들이지 않고 얻어 마시는 밀크티가 한층 더 달고 맛있었다.“연위성 씨, 저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물어보세요.”윤나송은 알면 알수록 묘한 사람이었다.심리 상담사라는 직업 때문에 연위성은 처음부터 그녀를 어느 정도 경계하고 있었다.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과거가 적지 않았지만, 심리 상담을 받다 보면 언젠가는 그 기억들을 마주해야 할 터였다. 그러니 긴장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그런데 윤나송은 온화하고 다정하면서도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 적당한 거리를 지킬 줄 알았다. 말 한마디, 질문 하나에도 배려가 묻어 있어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연위성은 자신이 어느새 긴장을 풀고 한결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그때 윤나송이 돌연 목소리를 낮췄다. 방 안에는 두 사람뿐인데도 누군가에게 들킬까 조심하는 사람처럼 은밀한 태도였다.“연위성 씨와 하이석 씨 아내분… 예전에 사귀던 사이였어요?”그녀가 이런 일에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던 연위성은 잠시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도 온유란 씨는 하이석 씨와 더 잘 어울리더라고요.”윤나송은 그의 굳어진 표정을 보지 못한 듯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예전에는 육강민 씨와 서은주 씨 부부를 좋아했어요.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면 카리스마 넘치는 재벌 남주와 사랑스러운 아내 같은 분위기가 있잖아요. 요즘에는 하이석 씨 부부도 좋아요.”연위성은 할 말을 잃었다.어째서 이곳에 와서까지 하이석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연위성이 심리 상담을 받기로 했다는 소식에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랐다.윤나송이 무슨 방법으로 그를 설득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상담을 시작한 뒤 연위성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겉으로 억지로 꾸며 낸 변화가 아니었다. 오래도록 메말라 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