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 날 아침, 은하는 처소 앞에 늘어난 감시 인원을 보고 그대로 멈췄다.문 양옆에 궁녀 둘, 회랑 끝에 별감 둘, 그리고 조금 떨어진 기둥 옆에 누가 봐도 아닌 척 서 있는 무사 하나. 어제보다 확실히 많았다. 심지어 매화가 물을 가지러 나가려 해도 한 명이 따라붙었다.은하는 잠시 그 광경을 보다가, 매화를 불렀다.“매화야.”“예, 아씨.”“나 지금 간택 후보야, 아니면 VIP 죄수야?”매화는 매우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전하께서 아씨의 안전을 염려하시어…”“안전이라는 이름의 감시구나.”“그리 말씀하시면 너무 정확하옵니다.”은하는 피식 웃었다.어제까지는 감시라는 말이 위협처럼 들렸는데, 오늘은 묘하게 우습기도 했다. 이혁이 직접 말했다. 백시윤의 선물도 말도 받지 말라고. 감시를 늘리겠다고. 대놓고 통제였다. 그런데 정작 그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묻자,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내가 온 것이 불만이냐.’그 질문도 자꾸 생각났다.은하는 머리를 흔들었다.“정신 차리자. 저 사람 폭군이다.”매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전하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응.”“아씨께서는 전하가 무서우시다 하시면서도, 어째 점점 편히 말씀하시는 듯하옵니다.”은하의 손이 멈췄다.“내가?”“예.”“아니야. 안 편해. 전혀 안 편해.”“그러시옵니까.”매화의 표정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아주 약간 묻어 있었다. 은하는 억울해서 뭐라 하려다 포기했다. 사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혁은 무서웠다. 그러나 처음처럼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칼끝 같던 남자에게서, 가끔 삐딱하고 서툰 인간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그게 문제였다.폭군은 계속 폭군으로 보여야 안전하다.귀여워 보이면 망한다.은하는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다짐했다.“절대 휘말리지 말자.”“무엇에 말이옵니까?”“전하 얼굴.”매화가 손에 든 빗을 떨어뜨릴 뻔했다.“아씨!”“농담이야.”“농담도 심장이 떨어지는 농담이옵니다.”“나도 알아. 근데 그 얼
이혁은 그날 밤, 침전에 돌아가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왕의 침전은 넓고 고요했다. 불필요한 향도, 시끄러운 장식도, 누군가의 웃음소리도 없었다. 그가 원한 고요였다. 이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만든 벽이었고, 아무도 함부로 넘어오지 못하게 쌓아 올린 밤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 그 고요가 오늘은 성가셨다.‘자꾸 신경 쓰이잖아요.’이혁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 말은 가벼웠다. 윤설화, 아니 강은하라는 이름을 가진 것 같은 그 기이한 여자는 늘 그랬듯 말끝에 웃음을 묻혔다. 그런데 그 웃음 아래에 이상한 진심이 얇게 깔려 있었다. 너무 얇아서 잡으려 하면 사라질 것 같고, 무시하려 하면 오히려 손끝에 남는 진심. 그 여자도 자신을 신경 쓴다.그 생각을 하자 이혁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쓸데없는 말이다.”아무도 없는 침전 안에서 혼잣말이 낮게 떨어졌다. 그는 곧장 그 생각을 베어내려 했다. 윤설화는 미끼다. 정체가 불분명한 여자이고, 백가가 건드린 판에 갑자기 끼어든 변수다. 그 여자를 살려두는 것은 필요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아니다.그런데도 이상하게, 백시윤의 나전함을 들었을 때 손끝에 남았던 불쾌감이 사라지지 않았다.그자가 그녀에게 비녀를 보냈다.그녀는 돌려보내려 했다.그러면서도 말했다. 정보는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맞는 말이다. 궁에서 살아남으려면 모든 말을 들어야 한다. 독이 든 말도, 향이 묻은 말도, 칼보다 부드러운 말도. 자신도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런데 왜 그 말이 거슬렸을까.이혁은 침상 곁에 놓인 탁자 위를 보았다.그곳에는 백시윤이 보낸 나전함이 있었다. 직접 돌려보내겠다고 가져왔으면서도, 아직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밤이 깊었기 때문이고, 내일 공식적으로 돌려보내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그런데 그보다 더 솔직한 이유가 있었다.그 함을 백시윤에게 돌려주는 순간, 그가 어떤 표정으로 웃을지 떠올랐기 때문이다.분명히 웃을 것이다.저 다정하고 매끄러운 얼굴로.‘전하께서
은하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이건 정말 위험했다. 웃으면 안 된다. 지금 웃으면 이혁이 진짜로 화낼 수도 있다. 그런데 너무 명백했다.이 남자는 자신이 질투라는 단어를 꺼냈다는 사실에 스스로 당황하고 있었다.은하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럼 안 묻겠습니다.”이혁은 그녀를 보았다.“대신 하나만 말씀드릴게요.”“하지 말라 했다.”“전하께서 정말 질투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그렇게 불편해하실 필요도 없습니다.”방 안이 조용해졌다.은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그리고 저는 아직 공자님 편도 아니고, 전하 편도 아닙니다.”이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내 간택장에 올라와 있으면서 내 편이 아니라?”“살아남는 편입니다.”그 대답은 빠르고 선명했다.“지금은요.”그 말에 이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은.’아까 다과 자리에서 했던 ‘아직은’이라는 말처럼, 이번에도 그 말이 귀에 남았다. 마치 앞으로 달라질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기는 것처럼. 이혁은 그 여지가 왜 신경 쓰이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나전함을 집어 들었다.“이건 내가 돌려보내겠다.”“직접요?”“문제 있느냐.”“아니요. 받는 분이 좀 무서울 것 같아서요.”“그래야지.”은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이혁은 그 웃음을 보았다.이번에는 묻지 않았다.그 웃음이 무기인지, 습관인지, 진심인지.다만 이상하게도, 백시윤에게 보낸 웃음은 아니어서 마음에 들었다.이혁이 문가로 향하다가 멈췄다.“윤설화.”“예, 전하.”“내일부터 네 처소 앞 감시를 늘린다.”은하의 얼굴이 굳었다.“왜요?”“네가 자꾸 선물을 받고, 서찰을 받고, 사람을 끌어들이니.”“제가 끌어들인 게 아니라 알아서 오는 건데요. 전하도 포함해서.”매화는 거의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이혁은 돌아보았다.“내가 온 것이 불만이냐.”은하는 답하려다 멈췄다.그 질문은 이상했다. 불만이냐고 묻는 목소리가, 정말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은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그날 저녁, 은하의 처소에는 뜻밖의 선물이 도착했다. 작은 나전함 하나였다. 보낸 이는 적혀 있지 않았다. 매화가 긴장한 얼굴로 함을 열자, 안에는 고운 비녀 하나와 짧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말은 칼보다 깊게 남습니다. 내일은 그 칼끝을 조심하시길.’은하는 쪽지를 보자마자 백시윤을 떠올렸다. 향은 없었다. 그러나 글씨의 선이 그와 닮아 있었다. 부드럽고 단정하며, 끝이 날카로운 글씨.매화가 낮게 물었다.“아씨, 또 그 공자님이옵니까?”“아마도.”“어찌하시렵니까?”은하는 비녀를 보았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너무 노골적이었다. 지금 자신과 백시윤 사이에 선물이 오갔다는 사실이 들키면, 이혁은 물론 다른 규수들에게도 공격당할 수 있었다.“돌려보내야지.”“그리하시는 것이…”매화가 말끝을 흐린 순간,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무엇을 돌려보낸다는 것이냐.”은하는 그대로 굳었다.또.또 이 타이밍.문이 열리고 이혁이 들어섰다. 이번엔 장 내관도 따라오지 못했는지, 뒤늦게 회랑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이혁의 시선은 은하의 손에 들린 나전함으로 향했다.“그것은 무엇이냐.”은하는 웃었다.“전하.”“말하라.”“요즘 너무 자주 오시는 것 아닙니까?”매화가 숨을 삼켰다.이혁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감시라 했다.”“네. 업무상.”“그렇다.”은하는 나전함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이혁을 보았다.“그런데 전하.”“무엇이냐.”“업무상치고는 타이밍이 너무 좋으십니다.”이혁의 눈빛이 굳었다.은하는 이 상황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덧붙였다.“혹시 제 처소 앞에 알림 설정이라도 해두셨어요?”“알림?”“아니요. 그러니까…”은하는 한숨을 쉬고 나전함을 내밀었다.“누군가 보낸 선물입니다. 받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이혁은 함을 열어 비녀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쪽지에 닿았다. 글씨를 보는 순간,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백시윤.”은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역시 알아보네.’이혁은
또다.왜 백시윤이 나타나면 이혁의 공기가 달라질까. 단순히 정치적 경계일까. 아니면, 어젯밤 그 이상한 질문의 연장선일까.왜 그자에게 웃었지.은하는 급히 생각을 끊었다.대비마마가 백시윤에게 앉으라 권했다. 백시윤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고, 은하는 다시 차를 따르게 되었다. 이번에는 백시윤의 잔이었다.그가 잔을 받으며 낮게 말했다.“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으셨군요.”은하는 미소를 유지했다.“덕분이라고 해야 하나요?”“조금은요.”“그럼 조금만 감사하겠습니다.”백시윤이 웃었다.이혁은 그 대화를 들었다.정확히는 듣고 싶지 않았지만 들렸다. 백시윤이 웃고, 윤설화가 받아치고, 둘 사이에 묘한 익숙함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불쾌했다. 아주 사소한데, 신경이 거슬렸다.백시윤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윤 아씨의 말솜씨는 차보다 향이 깊습니다.”규수들 사이에서 낮은 탄성이 흘렀다. 노골적인 칭찬이었다. 품위 있고, 아름답고, 공개적인.은하는 속으로 생각했다.‘저 사람 또 시작이네.’그녀는 답을 하려 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이혁이 찻잔을 내려놓았다.“차 자리에서 말향을 논하는군.”모두가 조용해졌다.백시윤은 부드럽게 웃었다.“윤 아씨의 답이 그만큼 인상 깊었기 때문입니다.”“그대는 인상 깊은 것이 많아 보이는군.”“아름답고 뛰어난 것을 알아보는 눈은 있는 편입니다.”그 말은 은하를 향한 칭찬이면서, 동시에 이혁을 향한 도발이었다.은하는 찻주전자를 든 채 속으로 외쳤다.‘두 분, 제발 제 앞에서 기싸움 하지 마세요. 찻물 무거워요.’대비마마는 그 광경을 아주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마치 오래 조용했던 궁에 갑자기 재밌는 극이 오른 것처럼.은하는 결국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마마.”대비마마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말하거라.”“차가 식기 전에 다과를 드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너무 평범한 말이었다. 그러나 타이밍이 절묘했다. 팽팽해진 공기를 부드럽게 끊었다. 대비마마가 웃으며 다식을 집어 들
물론 이혁은 들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아주 미세하게 눈썹을 움직였다. 마치 들은 사람처럼. 대비마마가 웃으며 말했다.“마침 잘 오셨습니다. 윤설화가 차를 따르고 있었지요.”이혁의 시선이 은하에게 고정되었다.“그렇습니까.”대비마마가 일부러인지 아닌지 덧붙였다.“주상께도 한 잔 올리게 하겠습니다.”은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마마. 왜 그러세요.’하지만 얼굴에는 미소를 띠어야 했다. 그녀는 천천히 이혁 앞으로 다가갔다. 모든 규수들의 시선이 따라왔다. 어제 찻잔을 들고 넘어질 뻔했던 그 여자. 오늘은 왕에게 직접 차를 올린다.이혁은 자리에 앉아 은하를 내려다보았다.은하는 찻잔을 들었다.“전하, 차 올리옵니다.”목소리는 다행히 흔들리지 않았다. 손끝은 조금 아슬아슬했지만, 찻물은 넘치지 않았다. 이혁은 찻잔을 받으며 그녀의 손끝을 보았다.어제보다 덜 떨었다.이상하게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그가 낮게 말했다.“오늘은 춤추지 않는군.”다과 자리가 얼어붙었다.규수들은 이혁의 말뜻을 몰라 서로 눈치를 보았다. 대비마마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은하는 하마터면 찻주전자를 떨어뜨릴 뻔했다.‘전하, 여기서 그 얘기를 왜 하세요.’은하는 최대한 얌전하게 웃었다.“마마 앞이라 자제하였사옵니다.”대비마마가 이번에는 대놓고 웃었다.이혁의 입가도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굳었다. 문제는 이미 늦었다는 점이었다.이번에는 규수들도 봤다.상궁들도 봤다.매화는 뒤에서 거의 기절할 얼굴이 되었다.전하께서 또 웃으려 하셨다.이번에는 다과 자리 한복판에서. 은하는 속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끝났다. 이 소문은 못 막아.’이혁 역시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표정이 더 차가워졌다. 그러나 이미 대비마마가 즐겁다는 듯 말했다.“주상, 요 며칠 윤설화 덕에 궁이 덜 적막합니다.”“궁이 지나치게 소란스러워지는 듯합니다.”“소란도 때로는 생기가 되지요.”대비마마의 말에 이혁은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