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장 내관이 들어와 작은 함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나전함이 아니라, 단순한 목함이었다. 은하는 조심스럽게 열었다.안에는 연한 노란 들꽃을 말려 만든 작은 책갈피가 들어 있었다.은하가 숨을 멈췄다.“이건…”장 내관이 낮게 말했다.“대비마마께서 가져가신 꽃과 같은 종류라 하옵니다. 전하께서 화원에 남은 것을 말려두라 하셨다 들었소.”은하는 책갈피를 손끝으로 들었다. 들꽃은 작고 소박했다. 밟혀도 다시 고개를 든다던 그 꽃. 목함 안에는 쪽지도 있었다.글자는 짧았다.‘버티겠다 했으니, 내일도 버텨라.’이혁의 글씨였다. 힘 있고 절제된, 감정 하나 없는 듯한 글씨.그런데 은하는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이게 응원이야, 명령이야?”장 내관은 잠시 생각했다.“전하 방식으로는… 아마 둘 다일 것이오.”매화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은하는 책갈피를 오래 바라보았다. 백시윤의 비녀보다 훨씬 소박했다. 궁녀들의 매듭처럼 크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장 깊이 들어왔다.이혁은 다정한 말을 모른다. 위로하는 법도 모른다. 무언가를 주면서도 ‘힘내라’가 아니라 ‘버텨라’라고 쓴다. 그게 참 그 사람다워서, 은하는 한참 동안 책갈피를 내려놓지 못했다.그때 장 내관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그리고 아씨.”“네?”“전하께서 내일 아침부터 아씨의 문답 연습을 직접 확인하시겠다 하셨소.”은하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직접요?”“예.”“왜요?”장 내관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그건 나도 묻고 싶소.”매화는 거의 설렘과 공포가 섞인 얼굴로 은하를 보았다. 은하는 들꽃 책갈피를 든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폭군이 선물을 보냈다.폭군이 직접 연습을 봐주겠다고 했다.폭군이 자꾸 찾아온다.그리고 문제는 그게 이제 완전히 싫지만은 않다는 사실이었다.은하는 그날 밤 들꽃 책갈피를 베개맡에 두고도 한참 잠들지 못했다.‘버티겠다 했으니, 내일도 버텨라.’그 문장은 다정하지 않았다.예쁘지도 않았다.누가 봐도 위로라기보다 명령에 가까웠다.
또 이 타이밍.이혁이 회랑의 그림자에서 걸어 나왔다. 오늘은 정말 우연일까, 아니면 감시가 너무 성실한 걸까. 은하는 슬슬 후자 쪽에 마음이 기울었다.백시윤은 예를 갖췄다.“전하.”이혁은 그를 보지 않고 은하에게 시선을 두었다.“처소로 돌아가라.”은하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예, 전하.”이번에는 말대꾸하지 않았다. 장 내관이 있었다면 감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혁은 오히려 미간을 좁혔다. 왜 이렇게 순순히 듣는가. 평소라면 한마디쯤 했을 텐데. 그 침묵이 또 거슬렸다.은하가 매화와 함께 물러가려는 순간, 백시윤이 말했다.“윤 아씨.”은하가 멈췄다.“오늘 들꽃은 참으로 아씨를 닮았습니다.”부드러운 칭찬이었다. 공개적인, 그러나 선을 넘지 않는 말.은하는 답하려 했다. 그런데 이혁이 먼저 말했다.“밟혀도 고개를 든다 했지.”백시윤의 시선이 이혁에게 향했다.이혁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그 꽃은 누가 밟았는지 기억하지 못한다.”은하는 고개를 들었다.이혁의 눈은 백시윤을 향하고 있었다.“그러나 나는 기억한다.”회랑이 조용해졌다.그 말은 꽃 이야기가 아니었다.은하를 향한 말도, 백시윤을 향한 경고도 동시에 담겨 있었다.백시윤은 웃었다.“전하께서 기억하신다면, 누구도 함부로 밟지 못하겠군요.”“그걸 알면 조심해야겠지.”두 남자의 시선이 부딪혔다.은하는 그 사이에 서 있다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왜 내 주변 남자들은 말을 꽃으로 시작해서 칼로 끝내지?’그녀는 더 늦기 전에 고개를 숙였다.“전하, 공자님. 저는 정말 처소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래 서 있으면 또 소문이 나서요.”이혁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소문이 두렵다더니, 자주 만들고 다니는군.”“제가 만드는 게 아니라, 제가 움직이면 궁이 알아서 편집합니다.”“편집?”“아니, 각색이요.”백시윤이 낮게 웃었다.이혁은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은하는 그 기류를 눈치채고 얼른 물러났다. 매화가 빠르게 뒤따랐다. 두 사람이 멀어지자
대비마마가 꽃과 글귀를 하나씩 살폈다. 화려한 답들이 이어졌다. 매화의 절개, 작약의 풍요, 난초의 고고함. 모두 훌륭했지만, 조금 예상 가능했다.마지막으로 은하의 작은 들꽃이 올라왔다.대비마마는 꽃을 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윤설화는 이 꽃을 골랐느냐.”“예, 마마.”“궁중 화원에는 귀한 꽃이 많은데, 어찌 이런 들꽃을 골랐느냐.”규수들 사이에서 낮은 웃음이 흘렀다. 누군가는 은하가 꽃의 격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은하는 조용히 답했다.“귀한 꽃은 이미 많은 분들이 골라주셨으니, 저는 살아남는 꽃을 골랐사옵니다.”대비마마의 눈빛이 움직였다.“살아남는 꽃?”“예. 이 꽃은 누가 돌봐주지 않아도 피고, 바람이 불면 숙였다가도 다시 고개를 듭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오래 버티는 힘이 있사옵니다.”어제 문답에서 말한 ‘버티는 힘’과 이어지는 답이었다.대비마마는 글귀를 보았다.“밟혀도 다시 고개를 든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대는 참으로 버티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구나.”은하는 잠시 눈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버티지 못하면, 시작도 못 하니까요.”가벼운 대답이 아니었다.그 순간 이혁은 은하의 옆얼굴을 보았다.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아니, 웃고는 있었지만 아주 작았다. 무대용 미소도, 궁중식 미소도 아니었다. 어딘가 멀리서 혼자 걸어온 사람이 잠깐 뒤돌아보는 듯한 얼굴.이혁은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백시윤 역시 은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달랐다. 그는 감탄하고 있었다. 혹은 계산하고 있었다. 저 여자의 말, 저 여자의 시선, 저 여자가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가질 가치가 있다.백시윤은 미소를 감추었다.대비마마가 은하에게 말했다.“그 들꽃은 내 처소에 두겠다.”규수들의 얼굴이 굳었다.대비마마의 처소에 둔다. 그것은 단순히 꽃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은하의 답을 기억하겠다는 표시이자, 다른 후보들 앞에서 은하를 한 번 더 드러내는 말이었다
그녀는 곧장 머리 장식 한쪽에 매듭을 달았다. 소박한 매듭은 화려한 비녀들 사이에서 조금 어색했지만, 이상하게 은하에게 잘 어울렸다.궁녀 둘은 거의 숨을 멈춘 듯 바라보았다.“아씨, 정말 달아주시는 것이옵니까?”“응. 내 첫 공식 굿즈잖아.”“굿… 무엇이옵니까?”“응원템.”두 궁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은하가 웃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듯했다. 그들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매화는 문을 닫고 조용히 말했다.“아씨, 방금 그 아이들 평생 아씨 편이 될지도 모르옵니다.”은하는 머리의 매듭을 손끝으로 만졌다.“그럼 좋지.”“궁에서 편이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일이옵니다.”“알아.”은하는 창밖을 보았다.“그래도 혼자보단 낫잖아.”그 말에 매화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날 오전, 간택 후보들은 궁중 화원으로 불려갔다. 이번 과제는 공식 심사는 아니었지만, 규수들이 각자 꽃을 골라 짧은 글귀를 붙이는 자리였다. 대비마마가 여인들의 취향과 문장을 보겠다는 명목이었다.은하는 화원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조금 밝아졌다. 궁 안에서 처음으로 숨이 트이는 공간이었다. 매화꽃, 작약, 난초, 국화, 이름 모를 들꽃까지. 향낭 사건 이후 향에는 신중해졌지만, 꽃은 그래도 조금 반가웠다.규수들은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꽃을 고르기 시작했다. 청순한 규수는 백매를, 화려한 규수는 붉은 작약을 학식 있는 규수는 난초를 골랐다. 모두 자신의 이미지를 잘 알고 있었다.은하는 꽃들을 천천히 보았다.“아씨께서는 무엇을 고르시겠사옵니까?”매화가 물었다.은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가장 구석에 핀 작은 노란 들꽃 앞에 멈췄다. 다른 꽃들에 비해 화려하지도 않았고, 궁중 화원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평범했다. 그러나 바람이 불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올라왔다.“이거.”매화가 놀랐다.“그 꽃을요?”“응.”“작약이나 매화가 더 눈에 띄지 않사옵니까?”“눈에 띄는 건 이미 충분히 하고 있어.”은하는 들
다음 날 아침, 은하는 처소 앞에 늘어난 감시 인원을 보고 그대로 멈췄다.문 양옆에 궁녀 둘, 회랑 끝에 별감 둘, 그리고 조금 떨어진 기둥 옆에 누가 봐도 아닌 척 서 있는 무사 하나. 어제보다 확실히 많았다. 심지어 매화가 물을 가지러 나가려 해도 한 명이 따라붙었다.은하는 잠시 그 광경을 보다가, 매화를 불렀다.“매화야.”“예, 아씨.”“나 지금 간택 후보야, 아니면 VIP 죄수야?”매화는 매우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전하께서 아씨의 안전을 염려하시어…”“안전이라는 이름의 감시구나.”“그리 말씀하시면 너무 정확하옵니다.”은하는 피식 웃었다.어제까지는 감시라는 말이 위협처럼 들렸는데, 오늘은 묘하게 우습기도 했다. 이혁이 직접 말했다. 백시윤의 선물도 말도 받지 말라고. 감시를 늘리겠다고. 대놓고 통제였다. 그런데 정작 그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묻자,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내가 온 것이 불만이냐.’그 질문도 자꾸 생각났다.은하는 머리를 흔들었다.“정신 차리자. 저 사람 폭군이다.”매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전하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응.”“아씨께서는 전하가 무서우시다 하시면서도, 어째 점점 편히 말씀하시는 듯하옵니다.”은하의 손이 멈췄다.“내가?”“예.”“아니야. 안 편해. 전혀 안 편해.”“그러시옵니까.”매화의 표정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아주 약간 묻어 있었다. 은하는 억울해서 뭐라 하려다 포기했다. 사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혁은 무서웠다. 그러나 처음처럼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칼끝 같던 남자에게서, 가끔 삐딱하고 서툰 인간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그게 문제였다.폭군은 계속 폭군으로 보여야 안전하다.귀여워 보이면 망한다.은하는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다짐했다.“절대 휘말리지 말자.”“무엇에 말이옵니까?”“전하 얼굴.”매화가 손에 든 빗을 떨어뜨릴 뻔했다.“아씨!”“농담이야.”“농담도 심장이 떨어지는 농담이옵니다.”“나도 알아. 근데 그 얼
이혁은 그날 밤, 침전에 돌아가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왕의 침전은 넓고 고요했다. 불필요한 향도, 시끄러운 장식도, 누군가의 웃음소리도 없었다. 그가 원한 고요였다. 이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만든 벽이었고, 아무도 함부로 넘어오지 못하게 쌓아 올린 밤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 그 고요가 오늘은 성가셨다.‘자꾸 신경 쓰이잖아요.’이혁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 말은 가벼웠다. 윤설화, 아니 강은하라는 이름을 가진 것 같은 그 기이한 여자는 늘 그랬듯 말끝에 웃음을 묻혔다. 그런데 그 웃음 아래에 이상한 진심이 얇게 깔려 있었다. 너무 얇아서 잡으려 하면 사라질 것 같고, 무시하려 하면 오히려 손끝에 남는 진심. 그 여자도 자신을 신경 쓴다.그 생각을 하자 이혁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쓸데없는 말이다.”아무도 없는 침전 안에서 혼잣말이 낮게 떨어졌다. 그는 곧장 그 생각을 베어내려 했다. 윤설화는 미끼다. 정체가 불분명한 여자이고, 백가가 건드린 판에 갑자기 끼어든 변수다. 그 여자를 살려두는 것은 필요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아니다.그런데도 이상하게, 백시윤의 나전함을 들었을 때 손끝에 남았던 불쾌감이 사라지지 않았다.그자가 그녀에게 비녀를 보냈다.그녀는 돌려보내려 했다.그러면서도 말했다. 정보는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맞는 말이다. 궁에서 살아남으려면 모든 말을 들어야 한다. 독이 든 말도, 향이 묻은 말도, 칼보다 부드러운 말도. 자신도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런데 왜 그 말이 거슬렸을까.이혁은 침상 곁에 놓인 탁자 위를 보았다.그곳에는 백시윤이 보낸 나전함이 있었다. 직접 돌려보내겠다고 가져왔으면서도, 아직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밤이 깊었기 때문이고, 내일 공식적으로 돌려보내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그런데 그보다 더 솔직한 이유가 있었다.그 함을 백시윤에게 돌려주는 순간, 그가 어떤 표정으로 웃을지 떠올랐기 때문이다.분명히 웃을 것이다.저 다정하고 매끄러운 얼굴로.‘전하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