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그날 밤 소욱은 오랜만에 깊고 편안한 잠을 잤다.아침이 밝자 그는 품 안에 안겨 잠든 여인을 바라보며 마음마저 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그럼 난 궁에 다녀오마.”그는 봉구안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응…”봉구안은 반쯤 잠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방을 나서려던 순간, 오백이 뜰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폐하, 문안 드립니다.”오백은 숨을 몰아쉬며 급히 인사했다.소욱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어디 있었느냐.”어젯밤 그는 오백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황후를 지켜야 할 자가 자리를 비운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오백은 숨을 가다듬고 솔직히 말했다.“마마의 명을 받고 모용가 사람을 추적했습니다. 이번엔 확실한 단서를 찾았습니다. 폐하, 모용가는 의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수상한 자를 붙잡은 뒤 봉구안의 명에 따라 즉시 심문하지 않고 잠시 지켜봤다. 예상대로 모용가 쪽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오백은 그 틈을 타 시골 장원에 갇혀 있던 모용선을 찾아냈다.그리고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폐하, 모용선은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뭔가 비밀을 알아낸 탓에 가족에게 감금되었다고 합니다.”“무슨 비밀이지?”소욱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오백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모용선이 말하길, 조상 사당 뒤편에서 수많은 독초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신하의 판단으로는 그 독초들이 모두 약쟁이 독을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일 가능성이 큽니다.”그때 문이 열렸다.봉구안이 단정한 옷차림으로 나왔다. 아직 머리는 올리지 못한 상태였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조사하러 가야겠다. 바로 조사하러...”오백은 급히 입을 열었다.“모용선에 따르면 모용가 조사는 매우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다고 합니다. 무작정 들어갔다간 경계심을 자극해 모든 흔적을 없애버릴 수도 있습니다.”그들은 이미 약쟁이단의 수법을 여러 번 겪었다. 그들은 증거를 지우는 데 거침이 없었다. 약쟁이의 은신처도 불태워 없앴던 자들이었다. 하물며 독초쯤이
태황태후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이, 관군이 이미 모용가의 조상 사당에 들이닥쳤다.뜰 안에 있던 모용가 사람들은 모두 제압당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불안과 당혹이 얽힌 시선들만 이리저리 오갈 뿐이었다.“무슨 일이냐? 어찌 관군이 우리 조상 사당에 들이닥친 것이냐!”그 시각, 염 신의와 약쟁이 사건을 맡은 태의들이 후원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직접 눈으로 독초를 조사하려는 것이었다.한참을 들여다본 끝에, 태의들은 서로 눈빛을 나누며 고개를 끄덕였다.“이곳에 자란 독초와 홍련초를 함께 쓰면, 약쟁이를 만드는 독을 충분히 제조할 수 있습니다.”현장에서 증거가 확보된 것이었다.모용가 사람들은 무더기로 체포되었고, 특히 사당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는 지위 높은 남자들은 따로 분리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그제야 태황태후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자신을 굳이 사당까지 오라 부른 이유는 바로 이곳을 수색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넌 정말이지… 나를 조금도 생각지 않는구나…”태황태후는 관군들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멈추거라! 모두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느냐!”“차라리 나도 같이 잡아가거라!”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원 몇 명이 앞으로 나섰다.“태황태후마마, 저희는 폐하의 명을 받아 마마를 체포하러 왔습니다. 약쟁이 사건 조사에 협조해주시지요.”태황태후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정말로 자신까지 잡아가려 한다니!그녀는 약쟁이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였다.……도성 외곽.한 시종이 다급히 방으로 뛰어들었다.“주인님, 모용가 조상 사당이 관군에게 들이닥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다고 합니다!”짧은 침묵이 흐른 뒤, 책상 앞에서 붓을 들고 글을 쓰고 있던 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진정하게.”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모습이었다.이미 일이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그는 아무것도 서두르지 않았다.감옥.모용가 사람들은 각각 따로 수감되어 심문을 받고 있었다.그러나 대다수는 뒷뜰에 독초가 심겨 있었다는 사실조
족보에 오르지 못한 인물들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바로 모용가 대노인의 일곱째 아들 모용욱이었다.혈통으로 따지면 그는 모용란의 일곱째 작은 아버지에 해당하였다.모용욱이라는 자는 세상과 인연을 끊은 채 숨어 지내며 살아왔고, 모용가의 잔칫날이건 매해 열리는 조상 제사건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오랜 세월이 흐르며 사람들조차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그러나 요근래 들어 그의 손길을 여러 차례 받았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때때로 보내온 은자가 있었고, 그것이 모두 모용욱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었다.그 말을 들은 모용가 사람들은 하나같이 갸우뚱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분이 있었던가…”“아, 그러고 보니 칠숙이라는 분이 계시긴 했지.”“장사하신다던데?”“화상을 입은 적 있다던 그 칠숙 말씀인가?”기억은 제각각 흐릿했고 누구 하나 확신을 갖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맏며느리 안씨는 솔직히 털어놓았다.“서방님이 세상을 떠난 뒤 칠숙께서 여러 차례 도움을 주신 것은 사실입니다.”“헌데 그분은 늘 하인을 시켜 은자를 보내셨고 제가 뵌 것도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관리가 물었다.“그 자의 생김새는 어떠하였소? 거처는 어디요?”“걸음이 불편하여 다리를 절었고, 얼굴은 다른 형제들과 닮은 편이었습니다.”“사는 곳은 저도 모릅니다. 혹시… 칠숙을 의심하시는 겁니까?”안씨의 눈이 크게 휘어졌다.그녀가 보기에 모용욱은 말수가 적고 마음씨 고운 사람이었다.그런 이가 악행을 저질렀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무엇보다 조상 사당에 들어갈 자격조차 없는 이가, 후원에 그리도 무시무시한 독초를 심을 수 있었단 말인가.하지만 관리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스스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여 남을 시켜 심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소.”안씨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자유각.봉구안은 탈을 벗어내며 얼굴을 드러냈다. 흩어진 머리칼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그녀의 뒤로 다가온 소욱이 조심스레 팔을
황성 동쪽 교외.약쟁이 무리의 본거지가 발각되어 관군의 손에 의해 철저히 봉쇄되었다.그곳에 몸 담고 있던 무리 또한 하나하나 사로잡혀 옥에 갇혔다.이어진 엄한 문초 끝에, 그들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약쟁이 무리는 수년간 약쟁이를 만들어 여기저기 팔아넘겨왔다고 했다.그 대상에는 반란을 꾀하던 천룡회는 물론, 동산국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문초하던 관리가 다시 물었다.“이 일에 설가가 어떤 연관이 있느냐. 설 대인을 죽인 것도 너희냐.”“예… 저희가 했습니다. 현비마마께서 두 번째로 잡혀가신 이후, 주인어른께서 직접 명을 내리셨습니다. 설가를 제거하라 하셨지요.”“그날 설 대인께서 댁을 나서자마자 손을 썼습니다.”“그가 너희를 고발하려 했던 것이냐.”문초자는 낮게 목소리를 눌렀다.“그렇습니다. 하지만… 설 대인께서 무언가를 알아내신다 하여도 주인어른께서 직접 엮일 일은 없었습니다.”“그분이 아신 건 기껏해야 홍련초와 관련된 일 정도였습니다.”“딸을 살리기 위해서였지요. 그래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으셨습니다.”“설 대인이 알던 건 무엇이더냐.” 관리의 어조가 더욱 날카로워졌다.잡힌 자는 낮게 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그해, 영비마마께서 현비마마를 제거하고자 하셨습니다.”“허나 궁 안의 약물은 태의원이 일일이 기록하여, 함부로 쓸 수 없었습니다.”“영비마마께선 귀가하시는 날을 틈타 독약을 구하려 하셨고, 어디서 들으셨는지 저희 주인어른께서 독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손을 내미셨습니다.”“주인어른께선 처음엔 약을 지어드렸지만, 영비마마께서 제멋대로 약창고에 들었다가 엉뚱한 약을 들고 나왔습니다.”“그 탓에 약쟁이의 독이 세상에 드러날까 주인어른께선 설 대인을 찾아가 경고하셨습니다.”“‘딸을 살리고 싶다면 입을 다물라’는 뜻이었지요. 대신 해독약을 주셨고, 홍련초를 심게 하여 해독제를 만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동시에 저희도 독을 더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지요.”“설 대인께서는 저희를 몰래 추적하신
궁 밖, 자유각.소욱은 드물게 여유를 낼 수 있는 날이었다.곧장 자유각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는 오늘만큼은 봉구안과 함께 저녁상을 나누고자 했다.헌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여러 권의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고개도 들지 않고 책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소욱이 조용히 다가서자, 그제야 봉구안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폐하,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소욱은 그녀의 말에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오는 게 싫은 것이냐?”그 말과 함께 그는 주저 없이 그녀를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직접 의자에 앉은 그는 그녀의 허리를 품에 안고, 손으로 봉구안의 배를 부드럽게 쓸며 아이에게 말하는 척 투정을 부렸다.“들었느냐, 너희 어미는 참 정이 없는 여자다.”“부디 보러 온 아비를 반가워해 줘야 할 텐데 말이다.”봉구안은 그 손을 떼어내며 어이없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싫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폐하께서 상주서를 다 보시지 못하실까 염려되어서입니다.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으시잖습니까.”그녀의 속뜻을 알게 된 소욱은 그녀의 손을 잡고, 가만히 입술을 가져가 살며시 입을 맞췄다.그의 눈빛에는 은근한 정과 깊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내 걱정은 할 줄도 아는구나.”그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책상 위 책들을 훑었다.“이번엔 또 뭘 보고 있느냐.”“궁에서 은육에게 부탁하여 가져오게 하였습니다.”“혹시라도 모용가 선조들에 대해 알아두면 약쟁이 사건에 도움이 될까 해서요.”소욱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몸을 살짝 기댔다.“그럴 필요 없다. 그냥 내게 물어보면 되지 않느냐.”봉구안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폐하께서… 알고 계십니까?”소욱은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모용가라면 나도 잘 아는 편이지.”그리고 그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모용가의 시조는 남산왕과 서왕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태조 황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공신이었다.”“하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서왕이 누군가에게 노려질 줄은 말이다.소욱은 곧바로 도성의 모든 성문을 봉쇄하도록 지시하고, 서왕의 행방을 찾기 위한 대대적인 수색을 명했다.아울러 도성 안에 방을 붙여 백성들에게 제보를 구하게 하였다.서왕부의 호위들 또한 사태 발생 직후 각지로 흩어져 수색과 감시를 병행했다.이튿날, 성 외곽에서 한 무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유화를 발견했다.유화는 서왕의 호위무사로, 전날 서왕이 꾀임에 빠져 마차에 올라탔을 때도 곁에 있었다.그가 정신을 차리자 곧 일행에게 상황을 설명했다.“마차가 중간쯤 갔을 때, 방향이 이상하단 걸 눈치채셨습니다. 제가 마차를 세우려 하자, 마부놈이 제게 발길질을 해 마차 밖으로 떨어졌지요.”“그때 왕비께서 뒤따라 오셨습니다. 마마께서는 놀랄 만큼 민첩하게 마차 위로 뛰어올랐고… 그다음은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마차가 서쪽으로 향한 것은 분명히 기억납니다.”이윽고 유화는 다급히 물었다.“전하께서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은 폐하께서 알고 계십니까? 구하러 가신 분은 있습니까?”……황궁, 어전.소욱의 얼굴은 짙게 드리워진 먹구름처럼 어두웠다.서왕을 납치한 자가 누구인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약쟁이 무리의 소행일 가능성이 가장 컸지만, 그들의 본거리는 이미 파괴되었고 대부분이 체포된 상황이었다.남은 잔당들이 있다 해도, 서왕 같은 인물을 일부러 노리고 데려갈 이유는 부족해 보였다.만약 도망이 목적이었다면, 오히려 짐이 되는 인물을 굳이 데려갈 리가 없었다.무언가, 납득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그날 밤, 자유각.소욱은 발걸음을 옮겨 봉구안이 있는 자유각을 찾았다.하루가 멀다 하고 가까운 인물들이 위험에 처하는 이 시국에, 그의 마음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었다.“구안아, 오늘 밤은 나와 함께 궁으로 돌아가자.”“이렇게 궁 밖에 두는 건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하지만 봉구안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 눈빛이 깊어졌고,
완부옥은 지금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자만했던 탓에 전부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서왕은 그저 이름만 걸친 지아비일 뿐, 생사 여부는 그녀와 무관한 일이었다.허나 그를 구하겠답시고 나섰다가 결국 본인까지 덩달아 갇혀버린 셈이었다.“정말이지, 손해도 이런 손해가 또 있을까.”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지금 가장 급한 일은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완부옥은 숨을 죽이고 목소리를 낮추어 서왕에게 말했다.“제가 폐하보다 먼저 깨어났습니다.”“이놈의 곳은 온통 함정투성이인데다, 한밤중이면 어딘가에서 귀신 울음소리 같은 것까지 들려옵니다.”“도망치려면 단번에 노려야 합니다.”“그러니 우선 생각해보세요. 대체 어떤 자가 폐하를 납치했겠습니까? 목적을 알아야 그것을 역이용할 수 있습니다.”서왕은 긴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딱히 떠오르는 자가 없다.”그는 평소 온화하고 무던한 성격이었기에 원한을 살 일이 별로 없었다.완부옥은 그런 그를 보며 속이 터졌다.“정말 생각 안 나십니까?”“어찌 되었건 노린 건 폐하였고, 전 구하러 따라왔다가 덤으로 잡힌 겁니다!”서왕은 머리를 부여잡았다.“미안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이 안 되는구나…”완부옥은 이를 갈았다.“그럼 지금 움직일 수는 있습니까? 무기는 있습니까?”서왕은 한숨을 내쉬었다.“전신에 기운이 없구나”“게다가 발엔 쇠사슬까지 채워져 있지. 무기라니, 입궐할 때 무기를 지니는 건 금지 아닌가.”완부옥은 말문이 막혀 한동안 침묵했다.서왕이 조심스레 물었다.“그쪽은 어떠한가. 몸을 움직일 수는 있겠느냐?”“내가 움직일 수 있었으면 진작 나갔다!”완부옥은 못마땅하다는 듯 쏘아붙였다.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혹시 약쟁이 무리의 짓이 아닐까요?”최근 조정에서 집중적으로 수사 중인 사건이었고, 서왕이 맡았던 설가 조사도 결국 그 사건과 맞닿아 있었다.서왕은 반박하지 않고 침묵에 잠겼다.그때였다.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바깥에서조차 한 줄기
지하궁은 온통 어둠뿐이었다.완부옥과 서왕은 감금되어 있던 방을 빠져나왔으나, 사방이 캄캄하여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었고, 출구를 찾는 것조차 막막하였다.서로 떨어질까 염려된 완부옥은 명령조로 말했다.“제 옷소매를 붙잡아요. 바짝 따라와요.”“알겠다.” 서왕은 그녀의 뒤를 따르는 수행자처럼 움직였다.그가 조심스레 속삭였다.“조심하거라. 혹시 저들이…”“쉿. 소리 들리십니까?”완부옥이 숨을 죽이며 물었다.그 순간, 어둠 속에서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둘은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인 채, 벽에 몸을 바짝 붙여 섰다.다행히도 어둠이 그들의 몸을 감추었고, 다가오던 자는 그들을 발견치 못한 채 멀어져갔다.발소리가 사라지자, 완부옥은 서왕의 귀가에 바싹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벽을 더듬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출구가 보일 겁니다.”서왕이 대답하였다.“네가 앞장서거라. 나는 네 옷자락을 붙잡으마.”“……”‘참, 한 손가락도 까딱 안 하려 드는군.’예전 소환과 함께 위기에 빠졌을 때는 달랐다.그저 조금 투정만 부리면, 소환은 그녀를 안고서 척척 길을 찾아주곤 했다.‘하… 또 소환이 그리운 하루네.’완부옥은 ‘짐짝’ 하나를 등에 지고서 벽을 더듬으며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한 걸음마다 온몸이 긴장되었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적들의 기척에 늘 귀를 곤두세워야 했다.지나치게 어두운 환경에 눈이 점점 아파왔고, 이윽고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걸음을 멈췄다.서왕은 그녀가 지친 줄 알고 말했다.“내가 앞장서마. 넌 내 옷자락을 붙잡거라.”완부옥은 비웃듯 말했다.“이제야 남자였던 게 기억난 겁니까?”“……”그녀의 말은 확실히 가시가 있었다.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모든 위기는 결국 그녀가 그를 구하려다 엮인 결과였다.명색만 아내인 그녀가 이토록 의리를 지닌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다.그리하여 둘은 번갈아가며 벽을 더듬었고,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게 돌고 돌다가 결국, 처음 그 시체가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
봉구안의 한마디가, 마침내 모용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었다.그는 쇠창살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고 싶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이놈이! 감히 태조 폐하를 저주하다니!”“태조 황제 폐하께서 이 강산을 개척하지 않으셨다면, 너희 같은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오늘날을 누리겠느냐!”“특히 너! 소가의 자식! 네놈이 정말 태조께서 살아계시길 바란다면 당장 본좌를 풀어라!”소욱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태조 황제께선 지금 어디 계시느냐.”모용길은 그를 믿지 않았다.“당장 날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소욱은 억눌린 분노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태조께서 정말 살아계신다면, 그것은 분명 기쁜 일이겠지.”“하지만… 그 전에 말해보거라.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반드시 밝혀야겠다.”모용길은 한참이나 소욱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망설임 끝에 마침내, 한 곳의 지명을 내뱉었다.“육지산.”그곳은 황성 내부에 있는 산이었다.소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현장으로 향했다.봉구안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모용길이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 또는 산속에 기관 장치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도 소욱을 따라나섰다.한 시진이 지나, 일행은 육지산에 도착했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구름이 몰려들어 햇빛을 가리며, 마치 용이 잠든 연못을 둘러싼 기운처럼 음침한 기색이 피어올랐다.거센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가렸다.소욱의 옷자락은 세차게 펄럭였고, 그는 고개를 들어 육지산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산에 오른다. 태조를 찾아라!”“예!”그는 봉구안이 회임 중인 것을 고려해, 줄곧 옆에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까 봐서였다.그러나 봉구안은 전혀 허약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날쌘 걸음으로 병사들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병사들이 한 구덩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폐하!
봉구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는 황실의 혈족을 해한 죄이다.”모용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었다.“허, 무지한 계집이구나. 헛소리도 정도껏 하거라.”“폐하께서 절 죽이고 싶으시다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그 얼굴에는 오히려 당당함이 어려 있었다.그러나 봉구안의 시선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네가 해한 이는 바로 태조 황제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그 말에 소욱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모용길이… 태조의 측근들을?그녀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모용길의 웃음은 사라졌고, 시선은 무겁게 봉구안에게 꽂혔다.봉구안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소욱이 언젠가 말했던 ‘옥비석의 재앙’.남제가 건국된 직후, 태조 황제를 지키던 측근들이 하나둘 기이하게 목숨을 잃어갔다.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옥비석의 반작용 때문이라 여겼지만… 봉구안은 단정했다.“그 죽음들은 전부 너 모용길이 꾸민 짓이 아니더냐.”그 말이 떨어지자, 모용길의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은 날카롭게 울렸다.그녀는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내 짐작이 맞다면, 그 시절의 태조는 이미 병세가 깊었던 상태였을 거야.”“너는 불로장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술을 익혔고, 그 실험 대상으로 태조 곁에 있던 이들의 피를 썼지.”“다만 수많은 이들의 피를 말려 죽였는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거야.”“그러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옛 서왕, 지금의 서왕의 부친이셨던 거지.”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피만이 태조의 몸에 반응을 보였을 거야. 그렇게 태조께서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됐고, 넌 그때부터 계속해서 약쟁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진짜 목적은 태조를 살리는 거였지. 그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그게 너의 최종 목표였을 거야.”모용길은 냉소 섞인 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 노도사는 봉구안이 데려온 가짜 도사였다.사실 그는 타국의 평범한 백성일 뿐이지만, 실제로 삼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이번 계책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쓰였다.약쟁이 사건의 진짜 배후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그 자의 진짜 목적은 불로장생.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단번에 끝을 내야 했다.하지만 마음 한켠엔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소욱이 조용히 말했다.“약이 식겠다. 먼저 약부터 마시거라.”……밤이 깊은 시각, 궁 밖에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노도사를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소욱과 봉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을 교환했다.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폐하, 은이와 그 일행이 도사를 납치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천옥으로 이송 중입니다!”소욱은 심장이 요동쳤다.진실을…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그는 봉구안과 함께 곧장 천옥으로 향했다.반 시진쯤 지나, 천옥.두 사람은 마침내 그 사내와 마주했다.노도사를 납치했던 자이자, 어쩌면 약쟁이단의 진짜 주모자일지도 모를 인물이었다.봉구안은 호위복으로 변장한 채 소욱 옆에 서 있었다.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에, 그녀는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다.감옥 안의 남자는 매우 늙어 보였다.눈은 푸르스름하게 흐려졌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확실히 동방세가 그려낸 인물과 유사했다.그는 소욱을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절 잡기 위해, 아주 큰 판을 짰다던데 과연 사실이었군요.”소욱은 감방 너머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네 정체가 무엇이냐.”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모용길입니다.”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직접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정말로… 이 남자가 그 전설의 모용길이란 말인가.이백 년을 살아온 그 인물이 맞다고?모용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
소욱은 봉구안의 생각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방금 전까진 분명 모용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태조 황제 묘까지 들먹이는 것일까?그래도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해 주었다.“태조께서는 동릉에 묻혔다.”도굴을 막기 위해 태조의 능은 총 열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각각의 무덤엔 무거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허나 그 열세 곳 모두가 가짜였다.진짜 묘는 오직 역대 황제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봉구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능을… 잠시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소욱의 눈썹이 즉시 찌푸려졌다.“안 된다.”태조 황제는 이미 서세를 마친 성조였다.그분의 안식을 함부로 깨뜨릴 순 없었다.봉구안도 그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일은 약쟁이 사건의 진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그녀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진정 불로장생을 원한 사람은 모용길이 아니라 태조 황제였을 수도 있습니다.”소욱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구안아, 지금 네 말은… 너무 황당하구나.”“설마 이 모든 약쟁이 사건의 배후가 태조 황제라는 것이냐?”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동방세가 그린 그 인물은 모용길과 닮았을 뿐, 자신들의 소씨 가문과는 단 한 점도 닮은 데가 없었다.봉구안도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라 단정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이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모용길이 연막을 치고 모용욱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뒤, 모용가 전체를 끌어들인 것만 봐도… 그 자는 모용가의 존망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그렇다면 그 자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한 건, 다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폐하, 이백 년 전의 일은 저희가 직접 본 게 아닙니다.”“하지만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황제께서는 남산왕, 서왕, 그리고 모용길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남산왕은 태조의 명을 따라 세세손손 봉맥을 지켜왔고, 서왕가는 동부를
봉구안은 이전에 모용가의 선조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태조 황제가 천하를 개척할 당시,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군량과 보급을 아낌없이 헌납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지만 불과 세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향년, 마흔.그런데 지금 동방세가 그려낸 배후 인물의 얼굴이 그 모용길과 너무도 흡사했다.소욱 역시 그림을 비교해보았다.한 손엔 방금 받은 초상화, 다른 한 손엔 책에 실린 옛 그림이 들려있었다.똑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십중팔구 정도 닮은 듯했다!그는 봉구안과 눈을 마주쳤다.“얼굴이 닮은 거겠지. 아니면 모용가 어딘가에 숨어 있던 서자일지도 몰라.”소욱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그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강호를 누비며 별의별 기이한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충북에는 삼백 살 넘은 노인이 있다 들었습니다.”“신무파 장문도 이백십칠 년을 살았다죠.”“남제가 건국된 지 이제 겨우 이백 년 남짓입니다.”“만일 정말 불로장생이 가능하다면, 모용길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게다가, 그녀를 더욱 확신에 가까운 의심으로 이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었다.“폐하, 서왕께선 납치 당시에 그들이 피를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피를 마시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요.”“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서왕 말로는, 그 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던데... 횡설수설하는 미치광이였다고.”봉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들을 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오히려 모용길이 이번 일의 진짜 배후라 생각합니다.”“모용가의 조상사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독초를 재배하려면 내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지요.”“그리고 모용욱의 검거도 너무 순조로웠습니다.”“모든 것이… 너무 ‘그럴듯’했어요.”“어쩌면, 모든 건 모용길이 준
봉구안은 소욱이 자신을 다시 궁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자신이 서여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욱은 조심스레 사과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문득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소욱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봉구안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 동작엔 위로와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번 일은 폐하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를 의심하신 건 제가 드린 믿음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담대연은 말재주가 뛰어납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흔들릴 만합니다.”그녀는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제 마음속에서 가족이 있는 곳이, 진짜 ‘집’입니다.”“폐하께서는 저의 지아비이십니다. 혈육은 아니지만, 저의 여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이지요.”“서여국이 아무리 좋아도, 폐하만큼 소중하진 않습니다.”소욱의 손끝이 떨렸다.“너… 그 말이 진심이냐?”그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내가 정말 네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봉구안은 오히려 되물었다.“폐하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그러자 소욱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사부랑 사모, 그리고 봉장미, 게다가… 네 뱃속에 있는 이 녀석.”“세상 사람들 다 그러더라. 자식은 어미의 인생 그 자체라고… 지금도 내 순위가 그리 높진 않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내 자리는 더 밀려나겠지.”봉구안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그녀는 진지하게 설명했다.“사부님과 사모님은 저에게 산처럼 큰 은혜를 주신 분들이지만, 그분들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혈육’일 뿐입니다.”“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요.”“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폐하를 마음에 두었기에 생긴 아이인데, 어떻게 그 아버지를 제쳐둘 수 있겠습니까?”“폐하야말로 제가 앞으로 비바람을 함께할 사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유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