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 주국공부.호위병이 다급히 내원으로 들어와 주국공에게 보고했다.“대인, 북연군이 북연 황제를 붙잡아 항복하러 왔습니다.”주국공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즉시 부하들을 이끌고 나간 주국공은, 땅바닥에 오장으로 묶여 굶주려 야위어버린 북연 황제와 그를 둘러싼 북연군들을 보았다. 북연군들은 갑옷과 무기를 내려놓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애처롭게 고개를 조아렸다.“제발, 먹을 것을 조금만 주십시오... 저희는 항복하겠습니다!”주국공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북연 황제를 힐끔 본 뒤 고개를 저었다.그토록 오만했던 북연 황제가 이토록 비참한 모습으로 잡히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과연 사람의 마음은 끝까지 알 수 없는 법이다.주국공은 단호하게 명령했다.“저들을 모두 잡아들여 수감하라!”“예!”그날 밤, 주국공은 직접 서신을 작성해 황제에게 급히 전하도록 했다.이때, 소욱과 봉구안은 황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그들이 지나가는 관도 곳곳에 백성들이 나와 군대를 환영하고 있었고, 평화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모습이었다.그날 밤, 그들은 근처 역관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봉구안은 오랜만에 목욕을 하며 오랜 전투의 피로를 씻어냈고, 기분도 한결 가벼워졌다.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니, 소욱이 책상에 앉아 무언가에 깊이 몰두한 모습이었다.그녀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토록 심각하십니까?”소욱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주국공이 서신을 보내왔다. 북연군 일부가 항복하면서 북연 황제를 잡아 그 진정성을 보여주려 했다 하는구나.”북연 황제의 성격상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지만, 예상보다 빠른 전개였다.봉구안은 놀라며 말했다.“그렇다면 이번에는 북연도 북연 황제의 생사에는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이 높겠군요.”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 무릎 위로 앉혔다.피곤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그건 북연
역관 내 다실.늙은 군의와 그의 제자는 다실로 안내되어 상석에 앉은 황제를 알현했다.소욱은 간단히 세수를 마친 상태로 편안한 옷차림이었지만, 여전히 황제의 위엄을 감출 수 없었다.검은 머리카락은 백옥으로 장식된 비단 끈으로 단정히 묶였으며, 강인하고 당당한 인상을 풍겼다.“군의라 하면서 대군을 따라 행군하지 않고, 왜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이냐?”황제의 날카로운 질문에, 늙은 군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폐하, 미천한 신은 위급한 상황에 임명된 사람일 뿐, 본래 군의는 아닙니다.”그의 말이 끝나자, 한 사람이 다실로 들어왔다. 바로 봉구안이었다.“폐하.”소욱은 그녀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지막하게 물었다.“좀 더 자지 않고 무얼 하러 나왔느냐?”봉구안은 그에게 가볍게 예를 표한 뒤, 조용히 자리에 앉으며 늙은 군의와 약동을 정식으로 소개했다.“이 일은 제가 부족했음을 탓해야 할 일입니다. 폐하, 당시 천지설산에서 제가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바로 이분들에게 도움을 받은 바 있습니다.”소욱의 얼굴에서 다소 날카로웠던 표정이 풀렸다. 그는 곧 명령을 내렸다.“그들이로구나. 앉을 자리를 마련하라.”늙은 군의는 황급히 몸을 숙이며 손사래를 쳤다.“그런 호의를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폐하. 미천한 몸으로 감히 자리를 청하지 못합니다.”하지만 옆에 있던 약동이 순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스승님, 앉으세요. 우리 한참 걸어왔잖아요. 신발도 다 해졌고요.”그는 어릴 적부터 스승을 따라 깊은 산에서 살았기에 세상 물정을 모른 채 자라왔다.황제가 얼마나 고귀한 사람인지, 신분의 높고 낮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본능대로 말하고 행동했다.늙은 군의는 약동의 무례를 바로잡으려 황제에게 사죄했다. 하지만 소욱은 그들을 꾸짖지 않았다.“격식을 차리지 마라. 내가 앉으라 했으니 편히 앉아라.”잠시 후, 역관의 하인이 다과를 가져왔다.늙은 군의는 봉구안을 보자 원래 황제에게 전하려 했던 말을 잠시 망설였다.소욱은 그의 마음을 이해한
봉구안은 소욱이 스승과 제자를 만난 이후 며칠 동안 무언가에 깊이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무거웠다.그가 약쟁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길을 따라 말을 타고 앞장서면서, 봉구안은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고 있는 것을 느꼈다.뒤돌아보니 소욱이었다.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고, 그의 어두운 눈빛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7월 초.승리의 기쁨 속에서 대군이 황성으로 귀환했다.황성의 거리는 인파로 가득 찼고, 백성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내며 대군의 승전을 축하했다.“황제 폐하 만세!”“황후마마께서는 정말 대단하셔!”부모들은 아이들을 번쩍 들어 올려, 이 역사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폐하께서 친히 출정하셔서 위기를 해결하고, 선성의 적군을 전부 사로잡으셨다지.”“북방과 동방도 다시 방어 체제를 갖추었대. 이제 남제의 위세에 맞설 수 있는 나라는 없을 거야.”“그들이 감히 쳐들어오지 못할 테니, 우리가 그들에게 공격을 퍼부을 차례야! 내일 참전 신청을 하러 가야겠어.”“나도 참여하겠어! 폐하께서 몸소 나서셨으니, 우리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야지.”그때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물었다.“그런데 황후마마께서는 회임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네.”“계산해 보면 벌써 아기가 태어났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아이가 없어진 것 같군.”이 말을 들은 몇몇 사람들은 눈가가 붉어졌다.“남제를 지키기 위해 마마께서는 얼마나 큰 고통을 겪으신 걸까…”“하늘도 무정하셔서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 슬픔을 안기다니. 우리가 불평할 말이 뭐가 있겠나.”“회임한 몸으로 전장에 나섰는데, 우리 같은 남자들이 숨어 있던 건 정말 부끄럽지 않은가!”대군이 돌아온 뒤 자원병으로 지원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다.황궁에서는 대신들이 황제와 황후를 맞이하며 경의를 표했다.소욱은 손을 들어 말했다.“모두 몸을 일으키시오.”
사신들은 며칠 전부터 황성에 도착해 있었다. 모두 남제 황제가 소환하여 정전 배상 문제를 논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은 이미 전쟁을 지속할 수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남제가 정말 공격해 온다면, 그들의 국가는 멸망을 피할 수 없었다.작은 나라들뿐만 아니라, 대하 같은 대국조차도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대하 사신들은 장공주를 찾아가 양국 간의 조율을 부탁하고 싶어 했다.그러나 공주부의 문턱을 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사신들은 모여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하아…”“정말 남제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건가? 그들이 말하는 대로 영토를 할양할 셈인가?”“다른 선택지가 있겠는가? 우리에겐 별다른 방도가 없지 않은가?”“우리는 북연이 아닐세. 남제와 다시 전쟁을 벌일 만한 병력도 없어. 지금은 정전만이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네.”사신들은 모두 창백한 얼굴로, 마치 거대한 산을 짊어진 듯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모습이었다.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다면 애초에 전쟁에 개입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만 남았다.……달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밤이 깊어졌다.궁중의 연회가 끝난 뒤, 대신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봉부.봉 대인은 큰아들 집 앞을 지나가다 잠시 발길을 멈췄다.며느리가 봉 부인을 부축하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봉안진이 마차에서 내리자, 두 사람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봉 부인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구안이는 만나보았느냐? 어땠느냐? 다친 곳은 없더냐?”그녀는 낮에 대군이 개선할 때 직접 나가 보았지만, 사람들 틈에 가로막혀 가까이 가지 못하고 황후가 말을 타고 지나가는 모습만 멀리서 얼핏 보았다.황후의 아이가 무사하지 못했다는 소문을 들은 뒤로 그녀는 불안감에 저녁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봉안진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에게 좋은 말만 전했다.“황후께서는 무사히 돌아오셨고, 황제께서도 잘 돌보고 계십니다.”“그럼 아이는? 아이는 무사한 거냐
봉구안은 소욱에게 숨길 것이 없었다.그녀는 솔직히 대답했다.“몇 통의 편지입니다.”소욱은 별다른 말 없이 편지 한 통을 집어 들었다.봉투 위에는 ‘구안, 나의 사랑’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그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러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것은 단회욱이 쓴 편지인가?”그 순간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만추가 뭔가를 감지한 듯했지만,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었다.봉구안은 만추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물러가라.”“네, 마마.”내전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봉구안은 소욱의 손에서 편지를 가져가며 단호히 말했다.“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폐하께서 깊이 따지실 필요가 없습니다.”소욱은 그녀의 손목을 붙들며 말했다.“내가 보고 싶다.”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그 자가 쓴 편지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그리고 네가 그 자에게 무슨 답을 보냈는지 알고 싶다.”봉구안은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폐하…”소욱은 그녀의 말을 끊고, 복잡한 눈빛으로 되물었다.“안 되느냐? 내가 보면 안 되는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봉구안의 시선이 서늘해졌다.“폐하께서 무슨 의도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소욱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는 그대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걸 알지만, 단회욱을 잊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봉구안은 진지한 표정으로 맞섰다.“폐하께서 제가 과거의 정을 잊지 못할까 의심하시는 겁니까?”소욱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그는 오늘 술을 많이 마셨고, 그 취기를 빌려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그 약동이 나를 단회욱으로 착각하지 않았느냐? 네가 혼수상태였을 때 부른 이름이 바로 그 사람이었겠지. 내 생각이 틀렸느냐?”“위기 속에서 진심이 드러난다는데, 아마 너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가장 절박한 순간 네가 떠올린 사람은 나도 아닌 단회욱이었다.”봉구안은 시선을 떨구며 주먹을 꽉 쥐었다.“결국 그것이었군요.”소욱이 오랜 시간 깊
다음 날 이른 아침, 소욱은 봉구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마도 그녀는 또 일찍 일어나 무술을 연습하러 갔을 것이다.그는 궁인을 부르지 않고 스스로 옷을 갈아입었다.그때 유사양이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폐하, 황후마마께서 아침 일찍 천옥에 가셨습니다.”소욱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천옥에 갔고?”천옥.봉구안과 담대연은 단 하나의 철문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담대연은 벽에 기대 앉아 있었고, 그의 뒷벽에는 ‘거미줄’이라 새겨진 글자가 어렴풋이 보였다.빛이 비칠 때마다, 그의 모습은 한층 더 쓸쓸해 보였다.담대연은 봉구안을 보자마자 가볍게 입을 열었다.“황후마마께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대체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봉구안의 눈빛은 날카로웠다.“동산국이 사신을 파견한 이유가 바로 너를 구하기 위해서다.”담대연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구하든 죽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이미 모든 것을 놓아버렸습니다.”“담대연, 남제에 남아 충성을 다할 생각은 없는가?”봉구안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담대연의 눈이 약간 흔들렸다.그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그러나 그녀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담대연은 다시 고개를 떨구며 비웃듯 말했다.“어찌 된 일입니까? 혹시 저를 죽이기엔 아깝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봉구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너의 재능을 알고 있으니 동산국으로 돌려보내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다.”“남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그러니 너의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남제에 충성하거나, 아니면 죽거나.”담대연은 요지부동이었다.“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법이니까요.”“죽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자. 담대 가문의 명예까지 상관없다는 것이냐?”봉구안의 한마디에, 담대연의 미간이 살짝 움직였다.“제 한 몸의 죽음으로 가문의 명예가 훼손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봉구안은 단념하지 않았다.“너
제국의 사신들이 남제에 도착해 역관에 머물렀다.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분노에 차 역관으로 몰려갔고, 그들 중 일부는 강호의 무인들이었다.그들은 사신들을 묶어 밖으로 끌어내고, 백성들은 썩은 채소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사신들은 반항할 수 없었고, 특히 대하 사신은 이 치욕을 견디지 못하며 외쳤다.“이게 무슨 짓인가! 나는 사신이다! 감히 나를 이렇게 대우하다니!”하지만 그의 외침에 돌아온 것은 백성들의 따귀뿐이었다.“너희들 때문에 남제가 거의 멸망할 뻔했어. 이런 데 오다니 간도 크구나!”분노를 쏟아낸 백성들은 결국 관군의 제압으로 흩어졌고, 구출된 사신들은 한결같이 상처투성이에 정신마저 혼미한 상태였다.그 무렵, 근처 주점 2층의 방에서는 동산국의 두 사신이 창밖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한 명은 안도하며 말했다.“원 장군, 우리가 역관에 묵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안 그랬으면 우리도 저꼴이 났을 겁니다. 이 남제 백성들,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군요.”원담은 차가운 표정을 유지한 채 단호히 말했다.“지금은 국사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다.”다른 사신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원 장군,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은 분명 국사를 구하는 것이지만, 남제 황제가 우리를 이렇게 방치하는 걸 보면 협상이 쉽게 이루어지리라 보이지 않습니다.”그러나 원담은 별다른 대답 없이 조용히 역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시각, 황궁에서는 장공주가 봉구안을 만나러 영화궁에 와 있었다.장공주는 봉구안에게 다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황후, 이건 제가 대하에서 떠날 때 몰래 가져온 보약입니다. 대하에는 훌륭한 부인과 의사들이 많으니...”하지만 곧 그녀는 자신의 말이 봉구안의 상처를 건드릴까 염려해 화제를 바꿨다.“우리 여자들은 스스로를 잘 돌봐야 하지 않겠어요?”봉구안은 냉정하게 대답했다.“공주마마,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장공주는 계속 설득하려 했지만, 봉구안은 대화를 돌리며 물었다.“대하 사신들이 공주마
소욱과 장공주는 점점 더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장공주는 봉구안 앞에서 소욱을 이렇게 깎아내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림을 그렸다는 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건가? 기억도 나지 않았다!그런데도 장공주는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오라버니들과 밖에 나갔을 때, 다른 사람들 옷은 멀쩡했는데 유독 폐하만 항상 엉덩이 부분이 찢어져 있었어요.”“겨울에는 꽃무늬 속옷이 드러나서 혼날까 봐 뒷걸음질로 걸어 다녔지요. 좀 더 크고 나서는 작은 궁녀들과 노는 걸 좋아하더군요…”“터무니없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누님! 제가 언제 그런 적이 있었단 말입니까!” 소욱은 강하게 부정하며 곧바로 진한길을 불러 장공주를 영화궁에서 강제로 끌어내라고 지시했다.그러나 장공주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끌려가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작은 궁녀들이 폐하와 놀아주지 않으니까 땅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썼었습니다! 황후마마, 폐하께서 뒹굴기를 얼마나 잘 하셨는지 보셨습니까!”소욱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 입을 당장 막아라!”남녀 간의 예의를 생각한 진한길은 어찌할 줄 몰라 하다 결국 그녀를 기절시키는 수를 썼다.장공주는 기절하면서도 눈을 부라리며 넘어갔다.전각 안으로 돌아온 소욱은 봉구안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는 봉구안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웃음을 참으려 애쓰는 듯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봉구안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폐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들을수록 흥미롭군요.”소욱은 장공주의 말에 격분해 있었다.그는 그녀 옆에 앉아 기분 나쁜 듯 말했다.“누님의 헛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거라! 그저 질투심에 날 헐뜯는 것일 뿐이니.”봉구안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합니다. 어린 시절 작은 궁녀들과 놀겠다고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썼다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되지 않습니다.”소욱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내가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지 않느냐. 오히려 누님이 잘생긴 호위병을 보고 집요하게 따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
소욱은 봉구안의 생각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방금 전까진 분명 모용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태조 황제 묘까지 들먹이는 것일까?그래도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해 주었다.“태조께서는 동릉에 묻혔다.”도굴을 막기 위해 태조의 능은 총 열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각각의 무덤엔 무거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허나 그 열세 곳 모두가 가짜였다.진짜 묘는 오직 역대 황제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봉구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능을… 잠시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소욱의 눈썹이 즉시 찌푸려졌다.“안 된다.”태조 황제는 이미 서세를 마친 성조였다.그분의 안식을 함부로 깨뜨릴 순 없었다.봉구안도 그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일은 약쟁이 사건의 진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그녀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진정 불로장생을 원한 사람은 모용길이 아니라 태조 황제였을 수도 있습니다.”소욱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구안아, 지금 네 말은… 너무 황당하구나.”“설마 이 모든 약쟁이 사건의 배후가 태조 황제라는 것이냐?”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동방세가 그린 그 인물은 모용길과 닮았을 뿐, 자신들의 소씨 가문과는 단 한 점도 닮은 데가 없었다.봉구안도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라 단정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이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모용길이 연막을 치고 모용욱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뒤, 모용가 전체를 끌어들인 것만 봐도… 그 자는 모용가의 존망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그렇다면 그 자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한 건, 다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폐하, 이백 년 전의 일은 저희가 직접 본 게 아닙니다.”“하지만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황제께서는 남산왕, 서왕, 그리고 모용길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남산왕은 태조의 명을 따라 세세손손 봉맥을 지켜왔고, 서왕가는 동부를
봉구안은 이전에 모용가의 선조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태조 황제가 천하를 개척할 당시,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군량과 보급을 아낌없이 헌납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지만 불과 세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향년, 마흔.그런데 지금 동방세가 그려낸 배후 인물의 얼굴이 그 모용길과 너무도 흡사했다.소욱 역시 그림을 비교해보았다.한 손엔 방금 받은 초상화, 다른 한 손엔 책에 실린 옛 그림이 들려있었다.똑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십중팔구 정도 닮은 듯했다!그는 봉구안과 눈을 마주쳤다.“얼굴이 닮은 거겠지. 아니면 모용가 어딘가에 숨어 있던 서자일지도 몰라.”소욱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그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강호를 누비며 별의별 기이한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충북에는 삼백 살 넘은 노인이 있다 들었습니다.”“신무파 장문도 이백십칠 년을 살았다죠.”“남제가 건국된 지 이제 겨우 이백 년 남짓입니다.”“만일 정말 불로장생이 가능하다면, 모용길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게다가, 그녀를 더욱 확신에 가까운 의심으로 이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었다.“폐하, 서왕께선 납치 당시에 그들이 피를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피를 마시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요.”“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서왕 말로는, 그 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던데... 횡설수설하는 미치광이였다고.”봉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들을 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오히려 모용길이 이번 일의 진짜 배후라 생각합니다.”“모용가의 조상사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독초를 재배하려면 내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지요.”“그리고 모용욱의 검거도 너무 순조로웠습니다.”“모든 것이… 너무 ‘그럴듯’했어요.”“어쩌면, 모든 건 모용길이 준
봉구안은 소욱이 자신을 다시 궁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자신이 서여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욱은 조심스레 사과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문득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소욱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봉구안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 동작엔 위로와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번 일은 폐하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를 의심하신 건 제가 드린 믿음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담대연은 말재주가 뛰어납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흔들릴 만합니다.”그녀는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제 마음속에서 가족이 있는 곳이, 진짜 ‘집’입니다.”“폐하께서는 저의 지아비이십니다. 혈육은 아니지만, 저의 여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이지요.”“서여국이 아무리 좋아도, 폐하만큼 소중하진 않습니다.”소욱의 손끝이 떨렸다.“너… 그 말이 진심이냐?”그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내가 정말 네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봉구안은 오히려 되물었다.“폐하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그러자 소욱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사부랑 사모, 그리고 봉장미, 게다가… 네 뱃속에 있는 이 녀석.”“세상 사람들 다 그러더라. 자식은 어미의 인생 그 자체라고… 지금도 내 순위가 그리 높진 않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내 자리는 더 밀려나겠지.”봉구안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그녀는 진지하게 설명했다.“사부님과 사모님은 저에게 산처럼 큰 은혜를 주신 분들이지만, 그분들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혈육’일 뿐입니다.”“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요.”“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폐하를 마음에 두었기에 생긴 아이인데, 어떻게 그 아버지를 제쳐둘 수 있겠습니까?”“폐하야말로 제가 앞으로 비바람을 함께할 사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유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
어전.“폐하, 서왕 전하와 왕비마마께서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서왕 전하께서 지금 궁문 밖에 대기 중이며, 아뢸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이 말을 들은 소욱은 지체 없이 명하였다.“어서 들라.”얼마 지나지 않아, 서왕은 발걸음을 옮겨 어전으로 들어섰다.그는 문턱을 넘자마자 곧장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신, 폐하를 뵙나이다!”소욱은 그 기색을 살피고, 정신이 온전한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무사하다니 다행이로구나.”헌데, 서왕의 안색은 심상치 않았다.“폐하, 신이 납치당한 이유는… 그들이 신의 피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신의 부친께서 돌아가시던 때가 떠올랐습니다.”소욱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그는 눈빛을 가라앉히고 그를 바라보았다.“너의 피를 왜 필요로 한단 말이냐? 그자들이 정말 피를 취하였느냐?”서왕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취하지는 못하였사오나, 그들의 목적이 분명 피에 있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신 그 사건 역시, 이번 일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소욱의 미간이 좁게 모아졌다.그는 전대의 왕부, 곧 서왕의 아버지에 관한 억울한 일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 일로 선황은 오랫동안 후회하며 침식을 잊고 괴로워했었다.그래서 소욱 또한, 이후 누구에 대해 반역 운운하는 소문이 돌 때마다 쉽게 믿지 않았다.선왕이 저지른 실책을 그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허나 지금 와서 다시금 드러나는 의혹은 그 죽음이 단순한 누명이나 정치적 숙청이 아닌, 무언가 깊은 연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소욱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자세히 말해 보아라.”……황성 서쪽.봉구안의 행차가 한적한 관로에 이르렀을 때, 한 일행이 그녀를 막아세웠다.오백이 곧장 검을 뽑아 방어 태세를 취했으나, 막아선 이들이 익숙한 인물임을 곧 알아보았다.바로 자재각을 지키던 소욱의 친위 호위병들이었다.그들은 마차를 둘러싸며 호위 진형을 갖추었다.“마마, 저희는 폐하의 명을 받아 마마를 궁으로 모
소욱은 한참을 고심한 끝에, 어느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천명을 믿지는 않았으나, 담대연이 말한 ‘인성’은 부정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언제나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과거 그녀가 이미 단회욱을 마음에서 지웠음에도, 그를 구하기 위해 주저 없이 죽음을 택했던 일은 지금도 눈에 선했다.서여국은 외환보다 내우가 깊은 나라였다.아무리 소주와 정국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안으로는 여전히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이번에 봉구안이 직접 서여국에 가게 되면, 그 혼란 속에서 국주로 추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그녀의 성정상 그 책임을 외면하진 못할 터였다.결국엔 남제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소욱의 가슴을 옥죄었다.담대연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천하통일. 그러나 그보다 무서운 건, 그 길목에서 아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진한길.”“신, 여기 있습니다!”“황후를 몰래 다시 데려오거라. 사람을 붙여, 은밀히.”진한길은 순간 의아함을 품었다.폐하께서 왜 이리도 갈팡질팡하시는 걸까………한편, 황성 서쪽 교외.담대연이 도착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하궁의 비밀 통로를 찾아냈다.그가 손을 쓰자 거대한 암석이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진 지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담대연은 호위들에게 엄중히 이르렀다.“이곳은 함정과 기계장치가 많습니다. 제 발을 따라오십시오. 절대 멋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명심하겠습니다!”……지하궁 내.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서왕과 완부옥은 이미 허기와 피로로 맥을 잃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그 인물은 이전에 죽은 자의 시체를 발견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시체를 끌고 나갈 뿐이었다. 마치 이곳에서 죽음은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시체를 처리한 뒤, 그자는 곧장 서왕을 데리고 가려 했다.완부옥은 그를 향해 소리쳤다.“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대답은 없었다. 그저 서왕을 밀어내듯 이끌 뿐이었다.하지만, 그들은 이미 내공
그 뱀은 영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슥, 하고 순식간에 주실 안으로 기어들어가더니 어디에 숨어버렸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뱀을 잡기 위해선 황후의 물건들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고, 이는 반드시 폐하께 고해야 할 사안이었다.때마침 소욱은 밤이 깊어도 봉구안이 그리워져 자유각을 찾았다.호위들은 이 일을 곧장 아뢰었다.소욱의 눈썹이 짙게 찌푸려졌다.그는 친히 방으로 들어가 사방을 뒤적이다, 마침내 침상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뱀을 발견하였다.그 순간, 그는 뱀의 눈과 마주쳤다.소욱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이놈을 당장 잡아내라…”막 명하려던 찰나, 그는 그 뱀이 어딘가 익숙하단 걸 느꼈다.이 뱀은… 분명 완부옥이 기르던 그 뱀과 닮아 있었다.완부옥과 서왕이 함께 실종된 걸 떠올린 소욱은 곧 심중에 짚이는 바가 있었다.그는 즉시 명하여 뱀을 그물망에 넣게 한 뒤, 서왕부로 보내어 확인하게 하였다.서왕부의 호위, 유화가 그 뱀을 확인하였다.그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억누르며 가까이 다가갔고, 잠시 후 단호하게 말했다.“왕비마마께서 기르던 뱀입니다.”자유각.소욱은 전갈을 받은 후, 이 일에 더없이 의아해졌다.완부옥의 뱀이 어찌 자유각까지 온단 말인가?설령 이 뱀이 길을 안다 하여도, 돌아간다면 당연히 서왕부로 가야 할 터였다.그는 곧 봉구안에게 전령 비둘기를 날렸다.그 시각, 봉구안은 황성을 갓 벗어난 참이었다.편지를 받아든 그녀는 곧장 완부옥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예전에 완부옥이 똑같은 짓을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곧장 회신을 써서 다시 소욱에게 전했다.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봉구안은 잠시 고심한 끝에, 두 번째 편지를 써 보냈다.그 안엔 한 마디 당부가 적혀 있었다.[폐하, 부디 경솔한 행동은 삼가 주시옵고, 무엇보다 폐하의 안전을 우선으로 삼으소서.]소욱은 첫 번째 편지를 받고 곧장 진한길을 불렀다.“서왕의 흔적을 찾을 실마리를 얻었다. 몇 사람을 데려가 뱀을 풀고, 그 자취를 따라가 보아라.”“예, 폐
지하궁은 온통 어둠뿐이었다.완부옥과 서왕은 감금되어 있던 방을 빠져나왔으나, 사방이 캄캄하여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었고, 출구를 찾는 것조차 막막하였다.서로 떨어질까 염려된 완부옥은 명령조로 말했다.“제 옷소매를 붙잡아요. 바짝 따라와요.”“알겠다.” 서왕은 그녀의 뒤를 따르는 수행자처럼 움직였다.그가 조심스레 속삭였다.“조심하거라. 혹시 저들이…”“쉿. 소리 들리십니까?”완부옥이 숨을 죽이며 물었다.그 순간, 어둠 속에서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둘은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인 채, 벽에 몸을 바짝 붙여 섰다.다행히도 어둠이 그들의 몸을 감추었고, 다가오던 자는 그들을 발견치 못한 채 멀어져갔다.발소리가 사라지자, 완부옥은 서왕의 귀가에 바싹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벽을 더듬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출구가 보일 겁니다.”서왕이 대답하였다.“네가 앞장서거라. 나는 네 옷자락을 붙잡으마.”“……”‘참, 한 손가락도 까딱 안 하려 드는군.’예전 소환과 함께 위기에 빠졌을 때는 달랐다.그저 조금 투정만 부리면, 소환은 그녀를 안고서 척척 길을 찾아주곤 했다.‘하… 또 소환이 그리운 하루네.’완부옥은 ‘짐짝’ 하나를 등에 지고서 벽을 더듬으며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한 걸음마다 온몸이 긴장되었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적들의 기척에 늘 귀를 곤두세워야 했다.지나치게 어두운 환경에 눈이 점점 아파왔고, 이윽고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걸음을 멈췄다.서왕은 그녀가 지친 줄 알고 말했다.“내가 앞장서마. 넌 내 옷자락을 붙잡거라.”완부옥은 비웃듯 말했다.“이제야 남자였던 게 기억난 겁니까?”“……”그녀의 말은 확실히 가시가 있었다.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모든 위기는 결국 그녀가 그를 구하려다 엮인 결과였다.명색만 아내인 그녀가 이토록 의리를 지닌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다.그리하여 둘은 번갈아가며 벽을 더듬었고,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게 돌고 돌다가 결국, 처음 그 시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