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반지가 식었다.목소리가 끊긴 뒤에도 엘로라는 한참 눈을 뜨지 못했다.창밖의 달이 구름 뒤로 숨었다가 다시 나왔다.빛이 침대 위로 내려앉아, 그녀의 배에 손을 얹고 잠든 칼리안의 흑발을 희게 적셨다.배 위의 손바닥은 따뜻했다.멀리 회랑 끝에서 근위병 교대하는 쇳소리가 짧게 울렸다가 잦아들었다.나였어.그때는, 형을 미워했으니까.귓바퀴 안쪽에 그 목소리가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에녹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갈라지고, 오래 뭔가를 눌러 참아 온 목소리.그녀가 붙잡을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미워했으니까.미워하니까, 가 아니었다.'말해야 해?'로이센 탑에서 그녀는 이 사람에게 거짓말을 했다.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다.넘기기 전에 먼저 말하겠다고, 제 입으로.그런데 이건 그녀 것이 아니었다.에녹이 검은 반지와 단둘이 나눈 말을, 그녀가 문틈으로 훔쳐 들은 것이었다.목구멍이 바짝 말라 침이 넘어가지 않았다.이불을 쥔 손가락 마디가 저려 왔다.배 속에서 아이 하나가 꿈틀했다.손바닥 바로 밑이었다.곧이어 다른 하나도.일어나라고 쿡쿡 찌르는 것처럼.엘로라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폐하."칼리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붉은 눈이 반쯤 열려 그녀를 찾았다."왜. 애들이 차?"잠에 잔뜩 젖은 목소리였다.말보다 손이 먼저 그녀의 배를 감싸 쥐고 있었다."아니요. 할 말 있어요."칼리안이 상체를 일으켰다.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남은 잠기운이 싹 걷혔다.
지도에 그려진 그대로였다.수도 외곽, 들꽃이 무릎까지 차오른 언덕 꼭대기.늙은 참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넓게 펼치고 있었고, 그 아래로 작은 마을의 붉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내려다보였다.풀 비린내 섞인 봄바람이 언덕을 쓸고 지나갔다.참나무 밑동 곁에 이끼 덮인 비석이 하나 있었다.글자는 거의 다 뭉개져 있었다.세드릭이 무릎을 꿇고 손바닥으로 이끼를 긁어냈다.초록 부스러기가 손톱 밑에 끼었다.그 밑에서 이름이 드러났다.리스벳.그 아래, 조금 더 작은 글씨.세드릭의 어머니.세드릭은 일어나지 않았다.손가락이 비석의 홈을 몇 번이고 더듬었다.이끼가 한 점도 남지 않을 때까지.엘로라와 칼리안은 몇 걸음 떨어져 그 등을 지켜보았다.참나무 잎이 바람에 쏴아 뒤집혔다.마을 쪽에서 아이들 깔깔대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올라왔다.어느 집 지붕 위에서 빨래가 펄럭였다.아무 일도 없는 오후였다."후작이 직접 새긴 거래요. 세드릭의 어머니, 라고.""…….""족보엔 안 올렸으면서.""그런 인간이었지. 끝까지."칼리안이 짧게 대꾸하고는 세드릭 쪽으로 걸어갔다.그 옆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황제가, 시종장 어머니의 무덤 앞에."세드릭.""예.""에반디스 묘역으로 옮길까. 아니면…….""아닙니다."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여기 두겠습니다.""이유는.""어머니 태어난 마을이 보이는 자리입니다. 아버지가 그거 하나는 제대로 하셨습
형 집행일이 정해진 다음 날이었다.선황 시해에 길을 터 준 죄, 재무청 횡령, 그레고르 살해.칼리안은 판결문 끝에 이름을 적는 동안 펜 끝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서명을 마치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곁에 선 세드릭을 오래 보았다.세드릭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지 않았다.제 아비의 죽음에 서명하는 친구를, 그는 원망하지 않았다.그날 밤, 간수가 서쪽 별채로 전갈을 들고 왔다.에반디스 후작이 아들을 찾는다고."같이 가.""혼자 가겠습니다.""세드릭.""이번엔 칼로 가는 게 아니니까요."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문가에서 그 등을 지켜보던 엘로라는, 세드릭의 걸음이 평소보다 반 박자 느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세드릭은 횃불 하나만 들고 내려갔다.계단은 늘 그 자리에 있던 계단이었다.한 칸 한 칸이 이십 년보다 길었다.감옥 맨 밑바닥 칸.후작은 짚더미 위에 있지 않았다.철창 앞에 서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왔구나.""부르셨습니다."철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섰다.원로원에서 서로를 고발하고 고발당한 지 두 달.옆 칸에서 율리안이 벽에 등을 붙인 채 그들을 보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천장의 물방울만이 이따금 둘 사이로 떨어졌다."사흘 뒤면 나는 죽는다."후작의 목소리는 남의 장례 날짜를 읊듯 담담했다."네 증언 덕분이지. 아비로서 그게 자랑스럽다 하면, 믿겠느냐.""아니요.""그래. 나도 안 믿는다."후작
금고 안이 가라앉았다.쏟아진 장부들 위로 촛농이 똑똑 떨어져 굳었다.깨진 유리 조각을 누군가 밟았는지, 바스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났다.칼리안은 동생을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다만 그 팔이 돌처럼 굳었다."……누가 그래.""반지가요."에녹이 검게 변한 반지를 내려다보았다."해독제가 넘어올 때 들렸어요. 반지가 형님 손에 닿아 있었거든요.""뭐가 들렸는데.""약방에서요. 그 종이 보셨을 때.""…….""정말 짧았죠. 눈 한 번 깜빡할 만큼. 근데 형님은 생각하셨어요."에녹이 고개를 들었다."이 녀석이 또, 라고."엘로라는 손끝이 차갑게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녀가 반지 너머로 칼리안의 마음을 엿들었듯, 에녹도 들은 것이다.반지는 마음을 잇는다.숨기고 싶은 마음까지 가리지 않고.독이 처음 삼킨 것이 하필 그 한순간이었다.칼리안이 팔을 풀었다.동생을 바닥에 기대 앉히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눈높이가 같아졌다."그래. 의심했어."에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 종이 보는 순간. 네가 침대 맡에서 해독제 쥐고 서명하라던 얼굴이 떠올랐어.""…….""그래서 생각했지. 이 녀석이 또.""……변명 안 하세요?""할 거야. 들어."칼리안이 숨을 한 번 골랐다."그다음 순간에 엘로라가 말렸어. 레이너드 피 글씨 기억하라고.""…….""그
세라피나가 은바늘로 제 검지 끝을 찔렀다.맺힌 핏방울이 잔 위로 떨어졌다.첫 방울에 호박색 액체가 희미하게 빛을 머금었고, 두 번째에 그 빛이 짙어졌다.세 번째 방울이 닿자 잔 속이 맑은 은빛으로 뒤집혔다.칼리안을 살렸던 그 밤과 같은 빛이었다.엘로라가 잔을 받아 에녹의 입술에 댔다.손이 덜덜 떨려 잔 가장자리가 그의 이에 딱딱 부딪혔다.칼리안이 그녀의 손목 밑을 받쳤다.에녹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은빛 액체가 그의 목울대를 타고 넘어갔다.칼리안이 숫자를 셌다.엘로라가 따라 셌다.세라피나가, 율리안이, 세드릭이 차례로 입을 보탰다.금고 안 모든 입술이 같은 숫자를 밀어냈다."열.""……열하나."에녹의 입술에서 푸른 기가 걷히기 시작했다."열둘."엘로라가 쥔 손가락 끝에 피가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열셋."에녹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켁, 하고 기침이 터졌다.눈꺼풀이 들렸다.갈색 눈이 초점을 더듬다가 형의 얼굴에 가 박혔다.칼리안이 동생을 끌어안았다.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등을 감싼 팔뚝과 어깨만이 떨렸다.엘로라는 그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세라피나가 그녀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동생의 손이 차가웠다.바늘 자국 난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엘로라는 그 손을 두 손바닥 사이에 넣고 호, 입김을 불었다.칼리안이 늘 그녀에게 해 주던 것처럼.배 속의 두 맥이 그제야 한숨 돌린 듯 느슨해졌다."언니, 그거 폐하가 하시는 거잖아요."
"에녹!"칼리안이 의자째 나동그라진 동생에게 몸을 던졌다.세드릭은 그 틈에 율리안의 허리를 낚아채 바닥에 처박았다.유리 조각이 흩어진 금고 바닥 위로 쓴 아몬드 냄새가 번졌다.칼리안의 단검이 결박을 끊었다.눈가리개를 잡아 뜯었다.갈색 눈이 떠 있었다.입술 가장자리가 벌써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형님…….""말하지 마.""형수님은요…….""말하지 말라고!""……괜찮으세요?""괜찮아. 네가 막았어. 또."에녹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푸른 입술로."맨 앞에서……. 또…….""그래, 잘났다. 그러니까 닥치고 숨이나 쉬어."엘로라가 그 곁에 주저앉았다.배가 무거워 무릎이 꺾이듯 바닥에 떨어졌다.에녹의 손을 붙잡았다.벌써 얼음 같았다.반 시진.율리안이 그렇게 말했다.'해독제.'그 밤의 호박색 병.에녹이 들고 왔던, 마지막 하나가 빠진 병.로이센 왕족의 피 세 방울.병은 여기 없었다.오스발드의 처방은 늦추기만 할 뿐이었다.그걸 끝까지 아는 사람은 지금 세드릭의 무릎 밑에 깔려 있었다.엘로라의 어금니가 딱 맞물렸다.관자놀이에서 맥이 쿵쿵 울렸다."율리안 시의님."율리안이 바닥에 뺨을 댄 채 눈만 굴려 그녀를 보았다.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병이 엉뚱한 사람에게 꽂힐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해독 처방, 알죠.""…….""늦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