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동상이몽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지안이 잘 벼려진 칼처럼 단답했다. "싫은데? 내가 왜." "아, 좀 그러지 말고." "진짜 안돼." "왜 안되는데." 지안이 말을 더듬거리면서 할 말을 똑똑히 전했다. "나, 나 바빠." "안 바쁜 거 다 알고 있어." "...너도 참 너다." "응, 그래. 나도 알아." 도윤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하는 대답에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친 지안이 말했다. "너는 내가 그렇게 싫어해도 자꾸 또 다가오고 싶냐? 내가 뭐가 좋다고..." "그야 처음으로 사귄 친구니까." "이제 이 말도 질린다. 근데 너 친구 많잖아." "그건 그냥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고." 그 말에 지안은 문득 궁금증이 확 일었다. 그래서 도윤에게 툭 하고 물었다. "그럼 나는 뭔데?" "으음... 글쎄다. 그것보다 더 소중한 사람?" 갑작스런 질문에도 도윤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런 오글거리는 대답을
آخر تحديث: 2026-07-19
Chapter: 14.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도윤의 말에 지안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얘가 이제는 별 미친 소리를 다 하네, 진짜.”“...치, 진짠데.” 도윤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모르겠네.' 그러자 끝내 그가 실토했다. “사실 왁스 바르다가 잘못 발라서 너 오기 전에 샤워 한 번 더 했어.”“아니 야, 근데 우리 오늘 집에서 공부만 하는 거 아니었냐.”“맞는데.”“그럼 왜 그러는 거야, 도대체.”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진짜 몰라서 물어?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아, 그런 거였어?”“그래.” 이게 도대체 무슨 대화인지 모르겠다. '...슬슬 뇌가 망가질 것 같아.' 어쩌면 줄줄 녹아서 사라질지도 모른다.상상이 또 과한 망상이 되어 괴상한 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끔찍한 상상이 현실이 되기 전에 지안은 일단 얼른 자리를 피했다. “나 잠깐 화장실 좀.”“화장실 저쪽이야.” 지안이 손을 씻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저 놈이 보인 행적으로 따지면 꼭 날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럼 나 따먹히는 거 아니냐.’ 살면서 게이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지안은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지금이
آخر تحديث: 2026-07-18
Chapter: 13. 양아치의 전교 1등 비법 “뭐, 나름.“ 이번에는 딱히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뭐, 사실이었으니까.' 학교 수업도 열심히 듣고, 야자에 학원도 열심히 다녔다. 그런데도 수업은 물론 학원도 개인 과외도 받지 않는 듯한 저 놈이 자신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건 불공평했다. 원래 인생은 불공평하다지만, 이제라도 그 비결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언제 알려줄 건데?”“우리 주말에 만날까?” 그 제안에 떨떠름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주말까지 너를 봐야 하냐.”“싫어? 아니면 말고. 이번 시험에 또 나한테 지겠네.” 이번에도 또 발리기는 죽어도 싫었다. 지안은 석차 1등이라는 숫자에 눈이 멀어 도윤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 같이 공부할게.” 그게 자신에게 어떤 여파를 가져올지 꿈에도 모르고. 그러자 도윤이 말했다. “그럼 우리 집으로 와.”“뭐? 그냥 독서실 가면 되지.”“독서실은 조용해서 가르쳐줄 수가 없잖아.” 조용히 납득한 지안은 다음 대안을 떠올렸다. “카페 가자.”“시끄러워.”“그럼 도서관은?”“슬슬 시험기간이라 자리 없을 걸.” 하여간 그의 말재간에는 당해낼 턱이 없었다. “알았다, 알았어.”“그럼 나
آخر تحديث: 2026-07-17
Chapter: 12. 입맞춤? 지안은 제 손등에 닿는 말캉거리는 촉감이 소름돋았다. “아, 좀!”“아하하-!” 그러자 도윤의 낮은 웃음소리가 퍼졌다.어째 이상하게 자신이 싫어하면 할수록 도윤은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제 이놈의 웃음소리만 들어도 이골이 날 정도야.' 지안이 골머리를 앓으면서 말했다. “제발 좀 부탁인데 좀 닥쳐주면 안 되냐.”“와아- 나한테 육성으로 그런 부탁하는 애 처음 봐.” ‘그야 그렇겠지. 지금까지 너한테 그렇게 말하는 애는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 이어진 도윤의 부탁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한테 입 맞춰봐. 그럼 조용히 해줄게.” 만약에 도윤을 맨 처음에 만났을 때 그런 요청을 들었다면 당황했을 터였다.하지만 변덕이 심한 그의 행동에도 이제는 질릴 대로 익숙해진 상황이었다.지안은 전에 도윤이 했던 대로 그의 하얗고 혈관이 도드라진 손등에 입을 맞췄다. 쪽- ‘이 정도면 됐겠지 뭐.’ 별 감흥도 없었다. 생각보다 그의 손이 차가웠다는 것만 빼면? 그리고 이제 슬슬 여름이 다가오는데도 조금 건조했달까. “우리 벌써 서로 입 맞추는 사이가 된 거야?”“말은 똑바로 해라. 네가 협박만 안 했어도 난 안 했어.”“그럼 앞으로도 협박만 하면 해주겠다는 의미?” 머리가 어지러웠다.
آخر تحديث: 2026-07-16
Chapter: 11. 그의 시험에 들다 마치 머리에 빠직 마크가 달리는 것 같았다.도윤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태를 참다 못한 지안이 그만 버럭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아, 좀! 하지 말라고!""하여간 쪼끄만 게 성질은." 도윤이 그리 말하는 통에, 지안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지안의 표정이 썩어들어가자 그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나랑 가기 싫으면 지금 말해, 물론 안 들어줄 거지만.""알겠어, 알겠다고..." 지안이 도윤의 손을 잡을 기색이 영 없어보였다.그러자 도윤은 곧바로 지안의 팔을 지그시 끌어당겼다. '결국 모든 게 제멋대로라니까.' 지안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듯 급식실로 갔다. ‘누가 보면 어떡하지.’ 다른 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연신 주위를 힐끗거렸다.다행히 그들이 늦게 출발한 터라 복도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사람이 거의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지안이 넌지시 물었다. “근데 너는 남자애들끼리 손도 잡아?”“아니. 너한테만 그러는 건데 싫어?”“당연히 싫지.”“그럼 좀 익숙해져봐. 원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래. 너도 할 수 있어.” ‘유캔두잇 같은 대답이 듣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눈치 없는 거야, 아님 눈치 없는 척 하는 거야?’ 그게 끝이었다.도윤은 더 이상 이런 대화
آخر تحديث: 2026-07-15
Chapter: 10. 내 손 잡아 지안은 앙칼지게 그의 말을 비비 꼬았다. “지랄, 네가 깨물면 나는 사망이다.”“너 그렇게 개복치였어? 이거 몰랐는데. 일단 알았어, 염두에는 둘게.“ 일부러 배알 꼴리라고 한 말이었지만 어쩐지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어보였다.결국 지안이 자신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많이 쉬면 복이 날아간다고 하던데.""어, 너 때문에 이미 내 복 다 없어졌어.""괜찮아. 그럼 네가 채워주면 되지, 뭐." 도윤은 쓸데없이 이럴 때에만 긍정적이기 그지없었다.지안은 도윤을 뚫어져라 노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게 전부 다 이 새끼 때문에…!' 지안이 계속 쳐다보자, 도윤의 볼이 살짝 발그레해더니 그가 말했다. “...그렇게 열렬하게 쳐다보면 아무리 나라도 좀 부끄러운데.” 그 모습에 질린 지안은 눈을 질끈 감으며 한 마디 한 마디 짓씹듯이 말했다. “그냥 그런 말 따위를 애초에 하지 말라고, 같은 남자끼리 진짜 징그럽게.”“다시 한 번 말해봐.”“뭐?”“내가 징그러워?” 도윤이 그렇게 물으면서 지안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지안은 그제서야 그에게 위압감을 느끼며 한두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야, 야아. 거기서 딱 멈춰라.”“내가 왜?“”니 덩치 존나게 커서 무서우니까 더 다가오지 말라고!“
آخر تحديث: 2026-07-14
Chapter: 34. 끝도 없는 혼란그의 발밑에는 공간의 경계선이 무너진 틈새로 아카디아 대륙 전체의 소스 코드가 거대한 홀로그램처럼 어지럽게 회전하고 있었다."세실리아 에델하르트 영애. 영애가 이 세계에 불법 접속한 이방인이라는 건 이미 시스템의 로그에 전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애가 나타난 순간부터 원작의 모든 남주들은 에러를 일으켰고, 세계선은 완전히 왜곡되었지요. 그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아니, 내가 이 세계에 오고 싶어서 왔어요? 트럭에 치여 눈을 떠 보니 이 모양 이꼴이었는데, 왜 나한테 원망이야!"세실리아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던 평범한 청춘이 이 이세계에서 악덕 시스템과 미쳐버린 남주들 사이에 끼어 고생할 이유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에반은 세실리아의 억울한 외침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이유야 어쨌든 결과는 변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의 메인 코어가 부서졌다면, 새로운 관리 프로그램을 가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의 코어 드라이브로 가장 적합한 것은…… 바로 이방인의 영혼이지요."에반의 손끝에서 번쩍이는 은빛 코드가 뱀처럼 스물스물 기어 나와 세실리아를 향해 뻗어 나갔다."지랄 염병 떨고 있네."카이로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검에서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한 백색 마력이 폭발했다. 그것은 시스템의 법칙을 초월한, 오직 세실리아를 지키기 위해 누적된 의지의 밀도였다.쿠구구구구―!방 안의 벽면이 통째로 갈라지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져 내렸다. 에반의 표정에 처음으로 당황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에러를 넘어선 괴물의 폭주 앞에서, 개발자의 코드조차 버텨내기 버거워 보였다.세실리아는 자신을 감싸 안은 카이로스의 단단한 가슴을 느끼며, 엉망진창으로 찢어지는 세계의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 지독한 난장판 속에서 과연 그녀의 진정한 퇴근은 언제쯤 찾아올 것인지, 그녀는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에반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은빛 코드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방 안의 가구와 벽지를 모래
آخر تحديث: 2026-07-31
Chapter: 33. 진상 파티지직, 지지직―!방 안을 가득 메운 마력의 잔여물이 마치 수명이 다 된 형광등처럼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리온의 어깨뿐만 아니라, 에드릭이 쥐고 있던 은빛 창의 끝부분도 투명한 노이즈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시스템의 메인 코어가 흔들릴수록, 그 코드를 부여받아 태어난 원작의 남주들은 존재의 기반부터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크윽…… 이 몸뚱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리온은 이를 악물며 흐트러지는 어깨를 억지로 붙잡았다. 그의 금발 사이로 식은땀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오만했던 황태자의 위엄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눈앞의 이방인을 향한, 제정신이 아닌 집착뿐이었다."세실리아. 네가 저 괴물 같은 북부 녀석의 품에 안겨 있다고 해서, 우리가 너를 포기할 줄 알았나? 이 세계의 모든 설정이 박살이 나도, 내 영혼에 박힌 너와의 서사는 지워지지 않아.""아오, 진짜 지독하다 지독해!"세실리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을 삼켰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할 때도 이토록 피곤한 진상들은 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악당이라면 칼이라도 휘둘러 보겠건만, 이 남자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억울하고 절실하다는 표정으로 목숨을 걸고 있었다."내버려둬라, 리온."카이로스는 여전히 차갑고 오만한 태도를 유지한 채, 세실리아의 곁을 든든하게 지키며 발을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검병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마력은 다른 이들의 노이즈와는 달리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단단했다. 수백 번의 회귀를 거치며 시스템의 간섭을 아예 지워버린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초월의 힘이었다."너희들이 그토록 집착하는 원작의 서사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어. 이 아이는 너희 같은 데이터 쪼가리를 위해 만들어진 인형이 아니란 말이다.""카이로스……."세실리아가 고개를 살짝 들어 그의 옆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듬직하긴 한데, 이 남자의 독점욕 역시 다른 의미로 만만치 않아서 문제였다.바로 그때였다.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آخر تحديث: 2026-07-31
Chapter: 32. 집착의 연대기"너희들이 시스템의 굴레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나는 수백 번의 시간 동안 이 아이를 잃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세계의 모든 에러를 끌어안고 이 자리에 도달했지. 너희 같은 데이터의 잔해들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에드릭이 거칠게 소리치며 한 걸음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의 단단한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기사단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건대, 내게는 이 세계의 시스템이 어떻든 상관없다! 다만 내 기억 속에 새겨진 단 하나의 결말…… 그 유일한 존재가 저 영애라는 것만은 변하지 않아! 네가 마음대로 이 세계의 룰을 망가뜨리고 영애를 독점하려 든다면, 내 검은 네 목을 향할 것이다!" 마탑주 아셀 역시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를 바닥에 쿵 내리찍었다. 마력의 파동이 바닥을 타고 거미줄처럼 퍼져 나갔다. "에드릭의 말이 맞군. 시스템의 코어가 붕괴하면서 마탑의 모든 기록이 백지화되었지만, 내 영혼에 새겨진 마력의 잔여물은 여전히 세실리아 영애를 가리키고 있다. 너희 두 사람만의 세계로 끝날 거라 착각하지 마라." 세실리아는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진짜 제발들 좀 진정하세요! 나는 그냥 게임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조연 엑스트라라니까요? 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목숨을 걸고 그러는 건데요!" 세실리아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도 불구하고, 남주들의 눈빛은 오히려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들에게 세실리아는 더 이상 원작 속의 정해진 대사를 읊는 엑스트라가 아니었다. 붕괴된 세계와 뒤틀린 세계선 속에서 유일하게 진짜 살아 숨 쉬는 현실이자, 자신들의 존재 이유 그 자체가 되어버린 유일한 구원이었다. 카이로스는 세실리아의 귓가에 조용히 입술을 가져다대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시끄럽군. 저런 잡음들은 신경 쓰지 마라, 세실리아. 네가 원한다면 저 성가신 녀석들의 기억을 통째로 지워버리든, 이 대륙을 통째로 침묵시키든 내가 전부 해줄 테니까." "그
آخر تحديث: 2026-07-31
Chapter: 31. 북부 양아치그대 방 안의 공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었다.창밖으로 내리쬐던 따스한 햇살마저 북부 대공이 뿜어내는 서늘한 기운에 밀려 자취를 감추는 것 같았다.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하지만 몸은 경직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가까이 다가오는 카이로스 발테온의 붉은 눈동자는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그것은 수없이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오르며 절망과 집착을 삼켜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짙은 심연이었다."…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세실리아가 마른기침을 삼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평생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진상 손님을 상대할 때도 이토록 압도적인 공포를 느낀 적은 없었다.이건 생존 본능이었다.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저 남자는 위험하다고.원작의 설정 따위는 이미 아무런 의미도 없을 만큼, 이 세계의 법칙을 벗어난 초월적인 위험체였다. 카이로스는 세실리아의 코앞까지 다 와서야 멈춰 섰다.그의 키는 거대했고, 입고 있는 검은 군복 형식의 코트에서는 옅은 피비린내와 함께 북부의 만년설 같은 한기가 느껴졌다.그가 천천히 입을 열자, 낮고 무거운 음성이 세실리아의 고막을 때렸다."숨어봤자 소용없다, 세실리아. 네가 이 저주받은 회귀의 루프를 몇 번이나 깨부수든, 나는 언제나 너를 찾아내어 이 지옥에서 끌어낼 테니까.""아니, 그러니까요! 저는 그쪽이 말하는 세실리아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아니, 평범하진 않고 여튼 대충 살아가던 사람인데요!" 세실리아는 억울하다는 듯 양팔을 휘저었다. 하지만 카이로스는 그녀의 변명을 들을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의 시선은 오직 세실리아의 눈동자에 박혀 박탈당한 시간들을 원망하듯 일그러져 있었다.방 문밖에서 급박한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쾅-!거칠게 문이 열리며 화려한 금발을 휘날리는 제국의 황태자.그러니까 리온 에르하르트가 뛰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초조함으로 엉망이었다. 원작에서 냉정하고 오만하기만 하던 황태자의 모습은 어디
آخر تحديث: 2026-07-31
Chapter: 30. 또 다른 에러 코드의 시작카이로스가 검병에 가볍게 손을 올리며 서늘하게 으르렁거렸다."시스템이든 메뉴얼이든 사라졌다면 더더욱 내 눈앞에서 꺼져라. 그 애는 이미 내 선택을 받았으니까.""헛소리 마라, 대공! 원작의 룰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영애를 향한 우리의 권리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리온이 발끈하며 검을 뽑아 들려 하자, 에드릭과 아셀, 루시안과 벨테르까지 똑같이 덤벼들었다.그들은 일제히 각자의 무기와 마력을 꺼내 들며 정원을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만들었다.아침 햇살 아래 펼쳐진 제국 최고의 공략 대상들과 북부 대공의 난투극.세실리아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내 평화로운 일상은 언제쯤 찾아오는 거야…!"하지만 그 아우성 속에서도 카이로스는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아쥐며 낮게 속삭였다."평화는 모르겠다. 하지만 네 곁에서 저 성가신 녀석들을 쫓아내는 일만큼은 평생 지루하지 않게 해줄 테니까."에러가 가득했던 세계는 끝났지만, 남주들의 유별난 집착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세실리아의 파란만장한 제국 라이프는, 사실상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주택의 정원을 가득 채운 공략 대상들의 아우성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황태자 리온은 여전히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카이로스를 노려보고 있었다.에드릭과 아셀, 루시안과 벨테르 역시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며 이 평화로운 아침을 완벽한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아이고, 진짜 머리야."세실리아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주저앉을 뻔했다.‘시스템이 박살 나고 관리자 구체가 부서졌으면, 이제 좀 조용히 살아갈 줄 알았더니…’남주들은 데이터가 초기화된 코드처럼 오히려 더 악랄하고 끈질기게 그녀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것이다.바로 그때였다.지직- 지지직-!완전히 소멸한 줄 알았던 허공의 대기 속에서, 아주 가늘고 미세한 파란색 노이즈가 다시 피어올랐다.네모난 창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필름에 생긴 스크래치처럼, 세계의 이면을 가로지르는 은빛 균열이었다."…이건 또 뭐야?"세실리아가
آخر تحديث: 2026-07-31
Chapter: 29. 계속되는 집착시스템의 관리자 구체가 산산조각 나며 거대한 노이즈가 걷힌 자리. 그곳에는 비로소 진짜 생명력으로 숨 쉬는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더 이상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선택지를 강요하던 푸른색 경고 창도, 세계선의 붕괴를 알리는 기계적인 경보음도 들리지 않았다. 사방은 눈이 부실 만큼 평화로웠고, 아침 햇살은 그저 따스하게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정말…… 완전히 끝난 거야?" 세실리아는 카이로스의 품에 기대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은 게임 속의 배경 그래픽이 아니라, 구름이 흘러가고 바람이 스치는 진짜 하늘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카이로스의 단단한 체온만이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 네가 보던 그 지독한 게임의 세계는 없다." 카이로스는 낮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수백 번의 회귀 동안 절망에 찌들어 있던 그의 붉은 눈동자는 이제 오직 평온함과 나른한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계의 굴레에서 벗어난 북부 대공은 더 이상 파멸의 화신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다정한 연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평화가 찾아왔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일이 얌전하게 정돈되는 것은 아니었다. 쾅-! 주택의 정원 입구 쪽에서 조용한 아침을 깨우는 무례한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거기 안에 누군가 있다는 건 다 안다! 당장 문 열어!" 익숙하고도 오만한 목소리. 황태자 리온 에르하르트였다. 그의 뒤로는 제각기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지은 채 걸어오는 에드릭 아르벤과 아셀 루미에르. 그리고 남부 대공 루시안과 성기사장 벨테르까지 줄줄이 따라붙어 있었다. 원작의 공략 대상들이 완벽한 패키지로 다시 찾아온 것이다. "아니, 저 사람들 또 왔어?!" 세실리아는 기가 막히는 듯 이마를 짚었다. 시스템이 터지고 세계가 구원받았으면 각자 알아서 잘 살 것이지, 왜 또 여기까지 몰려와 이 지랄인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이로스의 얼굴
آخر تحديث: 2026-07-19
Chapter: [황태자 외전 2] 결핍이 해소되다방 안에는 조용한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었다.나는 천천히 걸어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손끝으로 이불의 매끄러운 감촉을 쓸어내렸다. 예전 같았으면 이 조용한 방마저도 나를 짓누르는 감옥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고, 바깥에서는 끊임없이 내게 완벽한 후계자의 가면을 쓰라고 강요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오는 듯한 환청에 시달렸겠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가슴속을 무겁게 짓누르던 납덩이 같은 집착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더 이상 피비린내 나는 회귀의 굴레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공기는 달콤했고, 숨쉬기는 편안했다. 내가 저지른 일들, 그리고 그 안에서 상처 입고 부서졌던 수많은 파편들이 머릿속 스쳐 지나갔다. 로젤리나를 향해 겨눴던 칼날, 어머니의 눈에 맺혔던 눈물, 그리고 스스로를 벼 끝까지 몰아넣었던 수백 번의 죽음과 삶. 그 모든 끔찍한 연쇄가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내 손바닥을 들어올렸다.과거라면 이 손은 언제나 차가운 피로 물들어 있거나, 혹은 누군가의 목을 조르기 위해 긴장해 있었을 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손은 평온했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지만, 그렇기에 무엇이든 새로 쥘 수 있는 빈손이었다. * 문밖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크리스, 안에 있어? 나 좀 들어가도 돼?”로젤리나였다. 내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문이 살짝 열리고, 솜사탕 같은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그녀는 이제 이 황궁에서 가장 귀한 대우를 받는 공녀이자, 나를 이 지옥 같은 루프에서 건져낸 유일무이한 구원자였다.예전의 나였다면 당장 표정을 구기거나, 혹은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밀어내려 애썼을 것이다. 내 영역에 누군가 들어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싫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 미소는 껍데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진짜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옅은 미소였다.“그래, 들어
آخر تحديث: 2026-07-31
Chapter: [황태자 외전] 크리스의 결핍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는 언제나 똑같은 얼굴이 있었다. 금발, 벽안, 웃을 때 살짝 휘어지는 눈매. 사람들은 다 이걸 좋아했다. 천사 같다고 했다. 완벽하다고 했다. 근데 웃긴 건, 나는 저 얼굴이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다는 거다. ‘저건 내 얼굴이 아니야.’ 내 진짜 얼굴은 저 안 어딘가에 숨어있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그냥 껍데기였다. 껍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껍데기한테 웃어주는 사람들. 껍데기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진짜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만 빼고. 어머니는 가끔, 아주 가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숨이 막혔다. 마치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근데 그게 좋았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 어느 날은 어머니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크리스, 너는 왜 그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보니.” “어머니를 보는 거예요.” “나 말고 다른 사람들 말이야. 오늘 시종 아이 말이야, 왜 그렇게 쳐다봤어.” “그냥요.”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그 아이가 나를 무서워하는 표정을 보고 싶었다. 사람들이 나를 무서워할 때, 그 눈에 비치는 내가 진짜 나 같았다. 웃어주는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나는 가짜였는데, 무서워하는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나는 진짜였다. 이상하지. 사랑받을 때보다 미움받을 때가 더 나 같다는 게. 황제는 나를 후계자라고 불렀다. 후계자, 라는 말은 좋았다. 근데 그 말 안에 내가 없었다. 그냥 자리였다. 누가 앉아도 상관없는 자리. “너는 내 아들이니 잘해내야 한다.” 아들, 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 안에도 내가 없었다. 그냥 핏줄이었다. 핏줄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핏줄은 그냥 이어질 뿐이다. 나는 자리도 아니고 핏줄도 아니고 싶었다. 그냥 나이고 싶었다. 근데 아무도 나를 나로 봐주지 않았다. 어머니만 빼고. * 회귀를 시작한 첫날, 나는 기뻤다. ‘다시 할 수 있어.’ 뭘 다시 할 수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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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3. 남주들과의 재회그날 밤, 이봄을 재우고 나서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언젠가는 진짜 다 말해줘야겠죠.” “그래야죠. 근데 지금은, 이 정도 동화로도 충분한 것 같아요.” “맞아요.” 창밖으로 가을바람이 스쳤다. 이결이 이도담의 어깨에 기대며 조용히 말했다. “가끔 생각해요. 만약 그때 당신을 못 찾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 하지 마요. 결국 찾았잖아요.” “그렇긴 하죠. 근데 그때마다, 새삼 감사해요. 이렇게 평범한 하루하루가 얼마나 큰 행운인지.” “로또보다 큰 행운이죠.” 이도담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결도 따라 웃었다. “맞아요. 로또보다 훨씬.”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에게 기댄 채, 창밖의 가을밤을 함께 바라보았다. 낯설었던 세계는 이제 완전히 그들의 집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 어느 가을 저녁, 이결의 집 마당에 갑자기 빛이 일렁였다. “…이거, 설마.” 이결이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빛이 사그라들자, 그 자리에는 낯익은 두 사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었다. “여, 여기가 어디야.” 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옆에는 러스티가 검집을 움켜쥔 채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칼? 러스티?” 이결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전하?!” “아니, 이제 전하 아니지. 어떻게 여기…” 칼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훑어보았다. 평범한 셔츠에 편한 옷차림, 어딘가 여유로운 표정. 예전의 황태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이게.” 이결도 영문을 몰라 물었다. 그때 시스템의 옅은 목소리가 마당 위로 퍼졌다. [특별 서비스입니다. 오랜 인연들의 재회를 위한 일회성 통로를 열어드렸어요.] “그런 것도 있었어?” [가끔은 저도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니까요.] 목소리가 사라지자, 세 사람은 한참을 서로 마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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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2. 자라나는 아이이봄이 세 살이 되던 해, 가족은 작은 마당이 딸린 집으로 이사했다. 회사 근처보다는 조금 멀었지만, 아이가 뛰어놀 공간이 필요하다는 이도담의 의견에 이결도 흔쾌히 동의했다.“여기, 봄이 놀이터로 딱이네요.”“그러게요. 저도 어릴 때 이런 마당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이결의 말에 이도담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가 자란 궁전에는 넓은 정원이 있었지만, 마음 편히 뛰어놀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이제라도 봄이랑 같이 뛰어놀면 되죠.”“…그래야겠네요.”이결은 주말마다 이봄과 함께 마당에서 시간을 보냈다. 흙을 만지고, 개미를 관찰하고, 작은 화분에 씨앗을 심었다.“아빠, 이거 뭐예요?”“씨앗이야. 심으면 나중에 꽃이 필 거야.”“얼마나 있어야 돼요?”“글쎄, 봄이가 며칠 더 세는 법을 배우면 같이 세어볼까.”이봄은 매일 아침 화분을 확인하러 마당으로 나갔다. 싹이 트던 날, 아이는 온 집안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엄마! 아빠! 나왔어요, 나왔어!”이결과 이도담이 놀라서 뛰쳐나왔다. 작은 새싹 하나에 이토록 기뻐하는 아이를 보며, 이결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신기하다, 그렇지.”“응! 아빠, 나 이거 키운 거예요?”“그럼, 봄이가 물도 주고 햇빛도 보여줬잖아.”이봄이 뿌듯한 얼굴로 새싹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보며 이결은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자신은 한 번도 무언가를 스스로 키워본 적이 없었다. 늘 누군가 대신 해주었고, 그는 그저 결과만 받아 누리는 삶을 살았었다.‘이 아이는, 나랑은 다르게 자라고 있구나.’그 사실이 뿌듯하면서도 어쩐지 뭉클했다.*시간이 흘러 이봄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이결은 회사에서 작은 팀을 맡게 되었다. 스토리 기획팀의 팀장으로, 신입 시절부터 차근차근 실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결이 씨, 축하해요.”“다 당신 덕분이에요. 처음에 이 세계 적응 도와준 것부터, 지금까지 계속.”“에이, 그건 옛날 얘기고. 이젠 완전히 여기 사람 다 됐잖아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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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1. 아기가 태어나다출산일이 다가올수록 이결은 점점 안절부절못했다. 육아책을 열 권 넘게 사들이고, 밤마다 이도담의 배에 손을 얹고 말을 걸었다.“아가야, 아빠는 준비됐어. 언제든 나와도 돼.”“너무 재촉하지 마요, 애가 스트레스 받겠다.”“그런가요. 미안, 아가야.”진통이 시작된 건 새벽이었다. 이결은 그동안 익힌 침착함을 완전히 잃고 허둥댔다.“병원, 병원 가야죠!”“알아요, 그러니까 옷부터 제대로 입어요. 지금 위아래 짝짝이야.”“그,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요.”“신경 써야죠, 병원 가서 그 꼴로 서있을 거예요?”이도담은 진통 와중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이결을 다독이는 상황이었다.병원으로 가는 내내 이결은 이도담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괜찮아요? 아프면 말해요.”“결이 씨가 더 아파 보이는데요.”분만실 밖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이결에게는 그 어떤 전쟁보다 길게 느껴졌다. 회귀를 반복하던 시절보다도, 이 몇 시간이 더 아득했다.“전하, 아니 결이 씨, 좀 앉으세요.”간호사가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보고 말을 건넸다.“…앉을 수가 없어요.”그는 복도를 서성이며 온갖 생각에 잠겼다. 회귀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자신이, 이제는 새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을 기다리며 이렇게 떨고 있다는 게 낯설었다.‘이게 진짜 산다는 거구나.’마침내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이결은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축하드립니다, 건강한 딸이에요.”품에 안겨온 작은 생명체를 처음 마주했을 때, 이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렸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너무 작고 여려서, 잘못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았다.“이름은 정했어요?”이도담이 지친 얼굴로 웃으며 물었다. 이결이 조심스럽게 답했다.“도담도담 자라라고, 이도담 씨 이름에서 따서 짓고 싶은데. 어때요?”“그럼 성은요?”“…봄, 이라고 하는 건 어때요. 이 아이가 태어난 계절이니까. 그리고, 저한테 봄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요.”“이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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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0. 둘의 결혼결혼식은 조촐했다. 이도담은 화려한 걸 원하지 않았고, 이결도 마찬가지였다. 큰 예식장 대신, 작은 정원을 빌려 가까운 사람들만 초대했다. “그 세계에서 이미 한 번 결혼했었잖아요, 우리.” “그건 강제였잖아요. 이번엔 다르죠.” “그건 그렇죠.” 준비는 소박했지만, 마음만큼은 그 어느 결혼식보다 진심이었다. 이도담의 아버지가 눈물을 훔치며 그녀의 손을 이결에게 넘겨주었다. “내 딸, 잘 부탁하네.”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그 표현, 좀 무섭다니까요.” 이도담이 옆에서 픽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하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결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했다.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게 낫네.” 주례는 없었다. 대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짧은 편지를 읽어주기로 했다. 이도담이 먼저 종이를 펼쳤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사랑이 뭔지 잘 몰랐어요. 로또처럼 운으로 얻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이제는 알아요. 사랑은 운이 아니라, 매일 선택하는 거라는 걸요. 힘든 날에도, 화가 나는 날에도, 그래도 당신을 선택하겠다고 다짐하는 것. 그게 진짜 사랑이라는 걸 당신을 통해 배웠어요.” 이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가 이어서 편지를 읽었다. “저는 평생 껍데기로 살았어요. 진짜 저를 봐준 사람이 없었거든요. 사람들은 제 얼굴을, 제 지위를, 제 쓸모를 사랑했지 저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한 적은 없었어요. 근데 당신은, 제가 제일 미친 짓을 했을 때도, 제가 가장 볼품없었을 때도 저를 봐줬어요. 그래서 저는 이제, 평생 당신 곁에서 진짜 제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도, 그 자체로 사랑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매일 느끼게 해드릴게요.” 박수 소리가 정원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낯설었던 세계가, 완전히 그들의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피로연에서는 칼과 러스티 이야기가 잠깐 화제에 올랐다. “그 두 사람,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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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6. 갈대같은 마음두 사람은 인파를 헤치며 축제의 중심지인 광장 중앙을 향해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길가에서는 광대들이 화려한 불 쇼를 선보였다. 아이들은 부모의 손을 잡고 신나게 뛰어다녔다.* 이윽고 간 길거리 상점. 엘로라는 그곳에서 파는 노란 설탕 과자를 샀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었다. 황궁의 일류 요리사가 만든 정교한 디저트보다 훨씬 거친 맛이었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달콤했다. “맛이 어떠냐?” “최고예요! 칼리안도 한 입 드셔보실래요?” 엘로라가 과자를 그의 입가로 내밀자 칼리안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주저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손가락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과자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너무 달아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군.” “후후, 축제 음식은 원래 이 달콤한 맛에 먹는 거라고요.” 엘로라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자 칼리안의 눈동자에도 아주 희미한 만족감이 머물렀다. 칼리안은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제국 전체를 피로 물들여서라도 이 순간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칼리안, 저기 불꽃놀이가 시작되려나 봐요!” 밤하늘 위로 첫 번째 불꽃이 굉음과 함께 힘차게 쏘아 올려졌다. 어두운 하늘은 순식간에 오색빛깔의 찬란한 빛으로 화려하게 물들어갔다. 엘로라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불꽃을 응시했다.
آخر تحديث: 2026-08-23
Chapter: 75. 단 하룻밤의 꿈제국의 수도 에테르노의 밤.그곳은 평소보다 훨씬 소란스럽고 생동감이 넘쳐흘렀다.일 년 중 가장 성대하게 열리는 제국 최대의 축제.‘에테르노의 밤’이 마침내 시작된 덕분이었다.높디높은 황궁의 육중한 담벼락 너머.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들뜬 함성과 노래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경쾌한 선율.그것은 성벽을 타고 넘어와 집무실의 무거운 정적을 가볍게 두드렸다.“우와…”엘로라는 집무실 창가에 바짝 붙어 서서 멍하니 그 황홀한 풍경을 바라보았다.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금빛과 붉은 빛의 등불로 넘실거리며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황궁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과는 대조적으로, 그곳에는 사람 사는 냄새와 따스한 온기가 가득했다.“그렇게나 저 바깥세상이 좋은 것이냐.”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온 칼리안이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으며 나지막이 물었다.등 뒤에서 전해지는 그의 서늘하면서도 단단한 체온에 엘로라는 깜짝 놀라 몸을 잘게 떨었다.“아, 칼리안. 언제 오셨어요?”“네가 저 시끄러운 소음과 불빛들에 정신을 완전히 빼앗겨 있을 때부터 줄곧 여기 서 있었다.”칼리안의 붉은 눈동자가 창밖의 북적이는 저자거리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그의 눈빛은 여전히 맹수처럼 날카로웠지만, 엘로라를 담는 시선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유순했다.“그토록 가보고 싶은 것인가.”“네? 하지만 저는 제국의 황후인걸요. 제가 함부로 나갈 수는 없잖아요.”엘로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처지를 되새겼다.“제가 직접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축제는커녕 온 거리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 거예요.”뻐꾸기처럼 남의 둥지에 얹혀살던 시절부
آخر تحديث: 2026-08-23
Chapter: 74. 폭군의 그림자황궁의 집무실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책상 너머로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칼리안은 펜을 쥔 채 엘로라를 뚫어지게 쳐다봤다.그녀는 소파에 앉아 정무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시선이 너무 뜨거웠다.엘로라는 결국 고개를 들었다.“칼리안, 일 안 하세요?”“하고 있다.”“나만 보고 계시잖아요.”“너를 보는 게 내 일이다.”칼리안이 뻔뻔하게 대꾸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커다란 그림자가 엘로라를 덮쳤다.칼리안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로이센의 잔당들이 아직 수도에 숨어 있다.”“기사들이 잡고 있잖아요.”“부족해. 내 눈앞에 없으면 불안하단 말이다.”그의 손가락이 엘로라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지독한 소유욕이 느껴졌다.엘로라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가슴에 기댔다.“저 도망 안 가요. 이제 제 집은 여기니까요.”“입으로만 하는 약속은 믿지 않아.”칼리안이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차라리 너를 내 몸에 묶어두고 싶군.”말뿐이 아니었다.그의 눈에는 정말로 그럴 것 같은 광기가 서려 있었다.엘로라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렸다.“느껴져요? 뛰고 있잖아요. 당신 곁에서.”칼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삼켰다.숨이 막힐 듯한 입맞춤이었다.*다음 날, 황궁 정원은 연회 준비로 분주했다.엘로라가 정식 황후로 인
آخر تحديث: 2026-08-22
Chapter: 73. 태양의 반려회의가 끝난 뒤, 집무실에는 다시 두 사람만의 시간이 찾아왔다.칼리안은 의자를 당겨 엘로라에게 바짝 다가앉았다.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엘로라는 피하는 대신 그의 어깨에 가볍게 기대어 숨을 골랐다.“엘로라.”“네?”“이제 아무도 너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그가 이어서 말했다.“가짜니, 뻐꾸기니 하는 그따위 상스러운 말들은 내 제국에서 영원히 지워버렸으니까.”칼리안의 적안이 형형하게 빛났다.그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건 맹세였다.엘로라는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저도 이제 제 자리가 어디인지 잘 아니까요.”그녀는 더 이상 뱁새의 알을 밀어내는 비정한 새가 아니었다.어머니 헬레네가 남긴 힘으로 제국을 지키고, 칼리안의 곁에서 당당히 빛나는 태양의 반려였다.칼리안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미소를 지었다.*오후에는 황궁 대정원을 산책했다.봄기운이 완연한 정원에는 엘로라가 좋아하는 은방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칼리안은 그녀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칼리안, 저기 봐요.”“올해는 유난히 꽃이 빨리 폈네요.”“네가 좋아하니 꽃들도 서두른 모양이지.”칼리안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엘로라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소리가 정원을 가득 채울 때마다, 칼리안은 기꺼이 다시 한번 폭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이 평화를 깨뜨리는 자가 있다면, 제국 전체를 불태워서라도 그녀를 지키고 말 거야.’휘이잉-그때 바람이 한 차례 세게 불었다.그는 잠시 멈춰 서더니 엘로라의 머리카락에 붙은 작은 꽃잎을 떼어내 주었다.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뺨을 스쳤다.그러자 엘로라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آخر تحديث: 2026-08-22
Chapter: 72. 둥지의 주인칼리안은 엘로라의 앞에 서서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전쟁을 하시려는 건가요?” 엘로라가 묻자 칼리안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제 쪽으로 당겼다. 그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들이 너를 가짜라고 불렀어.” “저는 신경 안 써요. 당신만 옆에 있다면요.” “나는 신경 쓰이는데 어떡하지. 너를 모욕하는 모든 혀를 잘라내고, 너를 부정하는 모든 땅을 불태울 거다.” 그는 엘로라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의 집착은 이제 제국을 삼킬 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엘로라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등 뒤로 손을 뻗어 그를 마주 안았다. “그럼 제가 보는 앞에서만 하세요. 당신이 괴물이 되는 걸 저만 볼 수 있게.” 칼리안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서늘하면서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너는 참으로 잔인하구나.”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폭군은 황후를 위해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고, 황후는 폭군을 제 둥지 안에 가두려 했다. 누가 누구를 소유하고 있는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칼리안은 그녀의 체온을 온전히 느끼며 생각했다. 이 손에 쥔 세계가 부서진다 한들 그녀가 제 곁에 머문다면 그 어떤 파멸조차 두렵지 않았다. *
آخر تحديث: 2026-08-21
Chapter: 71. 가장 다정한 구속황궁으로 돌아온 뒤. 칼리안의 집착은 병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정무를 볼 때도 엘로라를 제 집무실 소파에 앉혀두었다. 시야에서 한순간이라도 사라지면 그는 폭주했다.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시종의 소리에도 칼리안은 검자루를 잡았다. 그의 예민함은 극에 달해 있었다. 엘로라는 소파에 기대어 책을 읽는 척했다. 하지만 페이지는 한참 전부터 넘기지 못했다. 칼리안의 시선이 등에 꽂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서류를 보다가도 수시로 고개를 들어 엘로라를 확인했다. 그녀가 그곳에 있는지. 자신을 떠나지 않았는지. “칼리안, 저기 있어요.” 엘로라가 결국 책을 덮으며 말했다. 칼리안은 펜을 내려놓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은 여전히 핏빛으로 젖어 있었다.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계속 보세요? 정무에 집중하셔야죠.” “네가 숨을 쉬는 소리를 들어야 집중이 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로라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황제가 한낱 사생아 출신 황녀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하지만 칼리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엘로라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너를 로이센에서 데려온 뒤로, 잠을 잘 수가 없어.” “…….” “눈을 감으면 다시 그 푸른 안개가 나타날 것 같아서.” 칼리안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آخر تحديث: 2026-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