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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형제의 밤

Autor: 비밀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11-04 17:00:00

에녹의 방은 동쪽 회랑의 맨 끝에 붙어 있었다.

황족의 거처라기엔 민망할 만큼 좁고 수수했다.

그가 고른 방이었다.

성 루미아 수도원의 독방과 엇비슷한 크기로.

넓은 방에선 잠이 안 온다면서.

칼리안이 그 문을 두드린 건 이튿날 저녁이었다.

노을이 회랑 창마다 붉게 엉겨 붙어 있었다.

안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한참 만에 문이 열렸다.

에녹이 서 있었다.

왼손을 소매 깊숙이 감춘 채.

"……형님."

"들어가도 돼?"

에녹이 말없이 비켜섰다.

"형님이 제 방에 오신 거, 처음이에요."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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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군이 뻐꾸기 황녀에게 집착한다   242. 떠나는 삼촌

    에녹이 반지를 붙잡고 비틀었다.꿈쩍도 하지 않았다.이를 악물고 한 번 더.살갗이 벗겨지며 손가락 마디에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반지는 빠지기는커녕 살 속으로 한 겹 더 파고드는 것 같았다.에녹의 얼굴이 하얗게 일그러졌다."그만해.""……조금만.""그만하라고!"칼리안이 그 손을 낚아챘다.에녹이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젖은 눈이 형을 올려다보았다."들으셨죠. 형님도.""……응.""이게 제 안에 있어요. 밤마다 떠들어요.""…….""형님이 너 의심했다고. 애들 태어나면 넌 또 맨 뒷줄이라고. 용서는 동정이라고."에녹이 피 맺힌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근데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말해.""그게 제 목소리라는 거요.""…….""반지가 지어낸 게 아니에요. 원래 제 안에 있던 거예요. 반지는 그걸 크게 틀어 줄 뿐이고요."칼리안은 대답하지 못했다.동생의 손을 쥔 채 검은 반지만 내려다보았다.반지 표면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져 비쳤다."그러니까 저, 여기 있으면 안 돼요.""헛소리.""형님 옆에 있으면 이게 매일 커질 거예요. 형님 볼 때마다. 애들 볼 때마다.""…….""그러다 제가 이 목소리를 믿게 되는 날이 오면요."에녹이 고개를 떨궜다."그땐 형님이 절 막아야 하잖아요. 칼로.""에녹.""그게 싫어요. 형님이 또 저를 그런 눈으

  • 폭군이 뻐꾸기 황녀에게 집착한다   241. 형제의 밤

    에녹의 방은 동쪽 회랑의 맨 끝에 붙어 있었다. 황족의 거처라기엔 민망할 만큼 좁고 수수했다. 그가 고른 방이었다. 성 루미아 수도원의 독방과 엇비슷한 크기로. 넓은 방에선 잠이 안 온다면서. 칼리안이 그 문을 두드린 건 이튿날 저녁이었다. 노을이 회랑 창마다 붉게 엉겨 붙어 있었다. 안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한참 만에 문이 열렸다. 에녹이 서 있었다. 왼손을 소매 깊숙이 감춘 채. "……형님." "들어가도 돼?" 에녹이 말없이 비켜섰다. "형님이 제 방에 오신 거, 처음이에요." "그래?" "의자가 하나밖에 없는데요." "서 있으면 돼." 탁자 위에 펜과 종이가 어질러져 있었다. 같은 말을 몇 번이고 쓰다 만 흔적이었다. 형님께. 형님께. 형님께. 그 뒤가 한 줄도 이어지지 않았다. 군데군데 잉크가 둥글게 번져 있었다. 눈물인지, 펜촉을 너무 오래 대고 있던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에녹이 허둥지둥 종이를 덮었다. 칼리안이 그 손목을 붙잡았다. "쓰려던 거, 말로 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스발드가 너한테 편지 두 통 맡겼지." 에녹의 손목이 칼리안의 손 안에서 뻣뻣하

  • 폭군이 뻐꾸기 황녀에게 집착한다   240. 엿들은 고백

    반지가 식었다.목소리가 끊긴 뒤에도 엘로라는 한참 눈을 뜨지 못했다.창밖의 달이 구름 뒤로 숨었다가 다시 나왔다.빛이 침대 위로 내려앉아, 그녀의 배에 손을 얹고 잠든 칼리안의 흑발을 희게 적셨다.배 위의 손바닥은 따뜻했다.멀리 회랑 끝에서 근위병 교대하는 쇳소리가 짧게 울렸다가 잦아들었다.나였어.그때는, 형을 미워했으니까.귓바퀴 안쪽에 그 목소리가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에녹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갈라지고, 오래 뭔가를 눌러 참아 온 목소리.그녀가 붙잡을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미워했으니까.미워하니까, 가 아니었다.'말해야 해?'로이센 탑에서 그녀는 이 사람에게 거짓말을 했다.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다.넘기기 전에 먼저 말하겠다고, 제 입으로.그런데 이건 그녀 것이 아니었다.에녹이 검은 반지와 단둘이 나눈 말을, 그녀가 문틈으로 훔쳐 들은 것이었다.목구멍이 바짝 말라 침이 넘어가지 않았다.이불을 쥔 손가락 마디가 저려 왔다.배 속에서 아이 하나가 꿈틀했다.손바닥 바로 밑이었다.곧이어 다른 하나도.일어나라고 쿡쿡 찌르는 것처럼.엘로라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폐하."칼리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붉은 눈이 반쯤 열려 그녀를 찾았다."왜. 애들이 차?"잠에 잔뜩 젖은 목소리였다.말보다 손이 먼저 그녀의 배를 감싸 쥐고 있었다."아니요. 할 말 있어요."칼리안이 상체를 일으켰다.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남은 잠기운이 싹 걷혔다.

  • 폭군이 뻐꾸기 황녀에게 집착한다   239. 이름 있는 무덤

    지도에 그려진 그대로였다.수도 외곽, 들꽃이 무릎까지 차오른 언덕 꼭대기.늙은 참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넓게 펼치고 있었고, 그 아래로 작은 마을의 붉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내려다보였다.풀 비린내 섞인 봄바람이 언덕을 쓸고 지나갔다.참나무 밑동 곁에 이끼 덮인 비석이 하나 있었다.글자는 거의 다 뭉개져 있었다.세드릭이 무릎을 꿇고 손바닥으로 이끼를 긁어냈다.초록 부스러기가 손톱 밑에 끼었다.그 밑에서 이름이 드러났다.리스벳.그 아래, 조금 더 작은 글씨.세드릭의 어머니.세드릭은 일어나지 않았다.손가락이 비석의 홈을 몇 번이고 더듬었다.이끼가 한 점도 남지 않을 때까지.엘로라와 칼리안은 몇 걸음 떨어져 그 등을 지켜보았다.참나무 잎이 바람에 쏴아 뒤집혔다.마을 쪽에서 아이들 깔깔대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올라왔다.어느 집 지붕 위에서 빨래가 펄럭였다.아무 일도 없는 오후였다."후작이 직접 새긴 거래요. 세드릭의 어머니, 라고.""…….""족보엔 안 올렸으면서.""그런 인간이었지. 끝까지."칼리안이 짧게 대꾸하고는 세드릭 쪽으로 걸어갔다.그 옆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황제가, 시종장 어머니의 무덤 앞에."세드릭.""예.""에반디스 묘역으로 옮길까. 아니면…….""아닙니다."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여기 두겠습니다.""이유는.""어머니 태어난 마을이 보이는 자리입니다. 아버지가 그거 하나는 제대로 하셨습

  • 폭군이 뻐꾸기 황녀에게 집착한다   238. 아버지의 마지막

    형 집행일이 정해진 다음 날이었다.선황 시해에 길을 터 준 죄, 재무청 횡령, 그레고르 살해.칼리안은 판결문 끝에 이름을 적는 동안 펜 끝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서명을 마치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곁에 선 세드릭을 오래 보았다.세드릭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지 않았다.제 아비의 죽음에 서명하는 친구를, 그는 원망하지 않았다.그날 밤, 간수가 서쪽 별채로 전갈을 들고 왔다.에반디스 후작이 아들을 찾는다고."같이 가.""혼자 가겠습니다.""세드릭.""이번엔 칼로 가는 게 아니니까요."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문가에서 그 등을 지켜보던 엘로라는, 세드릭의 걸음이 평소보다 반 박자 느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세드릭은 횃불 하나만 들고 내려갔다.계단은 늘 그 자리에 있던 계단이었다.한 칸 한 칸이 이십 년보다 길었다.감옥 맨 밑바닥 칸.후작은 짚더미 위에 있지 않았다.철창 앞에 서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왔구나.""부르셨습니다."철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섰다.원로원에서 서로를 고발하고 고발당한 지 두 달.옆 칸에서 율리안이 벽에 등을 붙인 채 그들을 보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천장의 물방울만이 이따금 둘 사이로 떨어졌다."사흘 뒤면 나는 죽는다."후작의 목소리는 남의 장례 날짜를 읊듯 담담했다."네 증언 덕분이지. 아비로서 그게 자랑스럽다 하면, 믿겠느냐.""아니요.""그래. 나도 안 믿는다."후작

  • 폭군이 뻐꾸기 황녀에게 집착한다   237. 의심

    금고 안이 가라앉았다.쏟아진 장부들 위로 촛농이 똑똑 떨어져 굳었다.깨진 유리 조각을 누군가 밟았는지, 바스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났다.칼리안은 동생을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다만 그 팔이 돌처럼 굳었다."……누가 그래.""반지가요."에녹이 검게 변한 반지를 내려다보았다."해독제가 넘어올 때 들렸어요. 반지가 형님 손에 닿아 있었거든요.""뭐가 들렸는데.""약방에서요. 그 종이 보셨을 때.""…….""정말 짧았죠. 눈 한 번 깜빡할 만큼. 근데 형님은 생각하셨어요."에녹이 고개를 들었다."이 녀석이 또, 라고."엘로라는 손끝이 차갑게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녀가 반지 너머로 칼리안의 마음을 엿들었듯, 에녹도 들은 것이다.반지는 마음을 잇는다.숨기고 싶은 마음까지 가리지 않고.독이 처음 삼킨 것이 하필 그 한순간이었다.칼리안이 팔을 풀었다.동생을 바닥에 기대 앉히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눈높이가 같아졌다."그래. 의심했어."에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 종이 보는 순간. 네가 침대 맡에서 해독제 쥐고 서명하라던 얼굴이 떠올랐어.""…….""그래서 생각했지. 이 녀석이 또.""……변명 안 하세요?""할 거야. 들어."칼리안이 숨을 한 번 골랐다."그다음 순간에 엘로라가 말렸어. 레이너드 피 글씨 기억하라고.""…….""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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