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튿날, 칼리안은 곧장 왕궁으로 향할 채비를 서둘렀다. "지하 서고라니, 그런 게 존재한다는 얘기는 나도 들어본 적이 없어." 세드릭이 지도를 살피며 낮게 말했다. "왕궁 설계도를 다시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구역이 있다면, 아주 오래된 도면에나 남아 있을 겁니다." "국립 문서보관소에, 개국 초기의 설계도가 남아 있을 거야. 그걸 찾아봐." 아르멜이 낮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엘로라는 은빛 열쇠를 목에 걸린 작은 주머니에 소중히 담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 열쇠가, 정말 그 봉인을 열 수 있는 거라면." 로웰이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가씨, 부디 무리하지 마세요. 헬레네 님의 편지에도, 분명 위험할 수 있다는 암시가 있었잖아요." "알아요. 그래도, 이제는 정말 끝까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칼리안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낮게 말했다. "함께 가자. 너 혼자 짊어질 일이 아니야." 엘로라는 그 다정한 말에 옅게 고개를 끄덕이며, 열쇠가 담긴 주머니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때, 에녹이 다급한 얼굴로 서재로 뛰어들어왔다. "큰일입니다. 태후궁 쪽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됐
로웰은 늦은 밤 갑작스레 찾아온 두 사람을 보고,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 폐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엘로라가 다급히 물었다. "유모, 혹시 제가 어릴 때 가지고 있던 낡은 상자, 기억나세요?" 로웰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상자라니요." "분명, 나무로 만든 작은 상자였어요. 안에, 뭔가 소중한 게 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로웰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기억하고 계셨군요." 칼리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 상자가, 지금 어디 있지." "제 방, 오래된 궤짝 안에 보관해두었습니다. 헬레네 님이, 절대 함부로 열지 말라고 당부하셨거든요." 엘로라의 눈이 커졌다. "헬레네 님이, 직접 남기신 거예요?" "네. 아가씨를 맡기시던 그날, 저에게 함께 건네주셨어요. 때가 되면, 아가씨께 전해드리라고 하시면서." "그런데, 왜 지금까지 말씀 안 해주셨어요?" 로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죄송해요. 언제가 그 '때'인지, 저도 확신이 서질 않아서요. 자칫, 이르게 열었다가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어요
저택에 도착하자, 남아 있던 이들이 안도와 걱정이 뒤섞인 얼굴로 일행을 맞았다. 칼리안은 곧장 아르멜과 세드릭을 서재로 불러, 가져온 서책들을 정리하게 했다. "시간이 없어. 최대한 서둘러 해독해야 해." 아르멜이 서책들을 하나하나 펼쳐보며, 낮게 말했다. "헬레네 님의 필체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급해진 걸 보니 뭔가 쫓기듯 기록하신 것 같습니다." "내용은." "봉인 방식과, 그레이스 가문의 오래된 역사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입니다. 다만." "다만, 뭔가." 아르멜의 표정이 무겁게 굳었다. "가장 마지막 서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레이스의 진짜 힘은 핏줄이 아니라, 대대로 지켜온 것에 있다.'" 칼리안이 낮게 눈을 좁혔다. "지켜온 것이라니."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문장 다음 페이지가 통째로 뜯겨 있습니다." 세드릭이 서책을 살피며 낮게 중얼거렸다. "누군가, 일부러 뜯어낸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칼리안은 뜯겨나간 페이지의 흔적을 손끝으로 짚으며, 낮게 물었다. "누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짐작 가는
저택으로 돌아가는 여정 내내, 마차 안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했다. 엘로라는 무릎 위에 헬레네의 서책을 올려둔 채, 몇 번이고 같은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진짜 열쇠는 그레이스의 피가 아니라...' 칼리안이 그녀의 곁에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 아르멜과 세드릭이, 나머지 서책들도 함께 살피고 있으니까." "…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급해져요." "왜, 뭔가 걸리는 게 있어?" 엘로라는 손목의 옅어진 문양을 내려다보며, 낮게 입을 열었다. "제 힘이 열쇠가 아니라면, 대체 뭐가 진짜 열쇠일까요. 그리고 그게, 저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걸까요." 칼리안은 그 물음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나도, 아직은 모르겠어. 하지만 함께 찾아가면 되지." 엘로라는 그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늘, 이렇게 곁에 있어줘서." 마차 밖으로, 벨하른을 벗어나는 국경 표지판이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다른 마차에서는, 에녹이 여전히 말없이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세드릭이 그 곁에 앉아,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버틸 만합니다. 그보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이튿날 아침, 일행은 벨하른을 완전히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신전 잔해를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아르멜은 밤새 낡은 양피지를 살피며, 조금씩 문자를 해독해나가고 있었다. "…일부는, 읽어냈습니다." * 칼리안이 다가와, 낮게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지." "'그레이스의 피는 열쇠일 뿐, 완성의 근원은 다른 곳에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두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다른 곳이라니." "그 뒷부분은, 완전히 지워져서 알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그레이스의 힘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 리안느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저희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큰 무언가가 얽혀 있다는 뜻이겠군요." 엘로라는 그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제 힘이, 전부가 아니라면. 대체, 뭐가 더 있는 거지.' 세드릭이 낮게 덧붙였다. "헬레네 님이 남긴 편지에도, 완성 의식에 대한 경고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문서와 편지를 함께 놓고 봐야 진짜 의미를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대로, 편지를 다시 살펴보지."
칼리안이 그것을 받아 살피며, 낮게 눈을 좁혔다. "글자가, 거의 지워졌군. 그래도, 문양은 알아볼 수 있어." 뱀이 자기 꼬리를 문 문양 옆에, 낯선 고대 문자 몇 개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아르멜이 그것을 조심스레 접어 품에 넣었다. "이건, 저택으로 돌아가서 다시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엘로라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손목의 문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헬레네 님이 숨긴 진짜 비밀이라니. 대체, 뭘 말하는 걸까.' 그녀의 머릿속에, 아까 들었던 그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에녹은 여전히 형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한 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칼리안이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어깨를 짚었다. "괜찮나." "…예. 그냥, 생각할 게 좀 많아서요." "천천히 생각해. 지금 당장, 결론 낼 필요는 없으니까." 에녹은 낮게 고개를 끄덕이며, 겨우 시선을 돌렸다. "돌아가야죠. 여기서, 더 지체할 이유는 없으니까." 일행은 무너진 신전을 뒤로한 채, 천천히 은신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밤하늘은 어느새 완전히 원래의 어둠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모두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무거운 안개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