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전 9시 12분.은서율은 침대 위에 옷을 세 벌이나 펼쳐놓고 있었다.최태혁이 침실 문을 열었다.“서율아, 아침 먹자.”“잠깐만요!”서율은 황급히 옷들을 가렸다.태혁이 웃었다.“뭘 숨겨?”“오늘 데이트 옷이요.”“내가 보면 안 돼?”“안 돼요. 오늘은 처음 만나는 사이잖아요.”“아직 데이트도 시작 안 했는데?”“그러니까 미리 보면 안 되죠.”태혁은 문틀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그럼 아침은 같이 먹어도 됩니까, 은서율 씨?”서율은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그 정도는 허락해드릴게요.”“아이고 영광입니다.”오후 1시 47분.서율은 약속 장소인 작은 미술관 앞에 도착했다.오늘만큼은 각자 따로 출발하기로 했다.크림색 원피스에 얇은 카디건을 걸친 서율은 입구 근처에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최태혁 : 3분 뒤 도착합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서율은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처음부터 늦으시면 감점이에요.》정확히 3분 뒤.짙은 회색 재킷을 입은 태혁이 나타났다.그는 서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은서율 씨?”“네.”“최태혁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태혁이 손을 내밀었다.서율은 그의 손을 잡았다.“저도 반가워요.”태혁은 그녀를 잠시 바라봤다.“사진보다 훨씬 아름다우시네요.”서율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그런 말씀 자주 하세요?”“마음에 드는 사람한테만 합니다.”“처음 만났는데 벌써 마음에 드세요?”태혁은 망설이지 않았다.“네.”서율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주인…….”말이 튀어나오려던 순간 그녀가 입을 막았다.태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뭐라고 하셨습니까?”“아무것도 아니에요!”오후 2시 23분.미술관에는 일상의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서율은 오래된 버스 정류장을 찍은 사진 앞에 멈췄다.태혁이 물었다.“이 사진이 마음에 드세요?”“네. 특별한 장면도 아닌데 자꾸 보게 돼요.”“왜 그런 것 같습니까?”“누군가를 기다리는 장소라서요.”태혁은 사진을 바라봤다.“저는
오전 9시 18분.은서율은 작은 방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최태혁이 뒤에서 다가왔다.“왜 그렇게 심각해?”“주인님, 문제가 생겼어요.”“무슨 문제?”“이 방에 있는 물건들을 어디로 옮기죠?”태혁은 문 안쪽을 들여다봤다.여행 가방 3개와 계절용품 상자들이 벽을 따라 쌓여 있었다.“정리하면 되지.”“그 말이 제일 무서워요.”“왜?”“정리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가잖아요.”태혁은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그럼 오늘 하루는 여기 쓰자.”“주인님 일정은요?”“오늘 없어.”서율은 고개를 돌렸다.“그럼 저 도망 못 가겠네요?”“응. 같이 해야지.”오전 11시 06분.두 사람은 바닥에 상자를 펼쳐놓고 물건을 분류했다.서율이 낡은 종이봉투 하나를 발견했다.“어?”태혁이 고개를 들었다.“왜?”“이거 우리 신혼 때 사진이에요.”봉투 안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서율은 그중 한 장을 꺼냈다.신혼집 바닥에 나란히 앉아 컵라면을 먹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주인님, 이거 기억나요?”태혁이 사진을 보고 웃었다.“이사 첫날이네.”“식탁도 없었잖아요.”“냉장고도 다음 날 왔고.”“그런데 저때도 주인님이 제 라면에 계란 넣어주셨어요.”태혁은 사진을 받아 들었다.“네가 배고프다고 했으니까.”서율은 웃다가 다른 사진을 발견했다.이번에는 태혁이 잠든 서율에게 담요를 덮어주는 모습이었다.“이건 누가 찍었어요?”“카메라 타이머 맞춰놓고 찍었지.”“왜요?”“그때 네가 처음으로 우리 집에서 편하게 잠들었다고 생각했거든.”서율은 잠시 사진을 바라봤다.그리고 태혁의 팔에 매달렸다.“주인님, 이 사진 도서관에 놓아요.”“좋아.”오후 1시 42분.방 정리를 마친 두 사람은 바닥에 나란히 앉았다.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다.서율은 빈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여기에 책장을 놓고, 저쪽에 의자를 두면 되겠어요.”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조명은?”“따뜻한 색으로요.”“책장은 어떤 걸로 할까?”“원목이요.
오전 8시 17분.은서율은 눈을 뜨자마자 침대 옆 협탁을 바라봤다.짙은 남색 봉투 두 통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주인님.”최태혁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대답했다.“응.”“편지 읽어도 돼요?”“벌써?”“어제 내일 읽기로 했잖아요.”태혁은 시계를 확인했다.“아직 아침도 안 먹었는데.”“편지는 아침에 읽어도 되죠.”서율은 몸을 일으켜 봉투를 집었다.태혁이 웃었다.“그렇게 궁금했어?”“네. 주인님이 무슨 약속을 적으셨는지 궁금해요.”태혁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약속?”“어제 편지 쓰실 때 표정이 꼭 무슨 비밀을 숨기는 것 같았거든요.”“읽어봐.”오전 8시 29분.서율은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익숙한 태혁의 글씨가 나타났다.서율아.우리가 결혼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가끔 네가 처음 내 이름을 불렀던 날을 떠올려.그때는 네가 내 옆에서 이렇게 편하게 웃는 사람이 될 줄 몰랐어.서율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편지는 이어졌다.네가 글을 쓰느라 밤을 새우던 날도, 결과가 좋지 않아 속상해하던 날도 기억해.그런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억은 특별한 날이 아니야.아침에 졸린 얼굴로 나를 찾거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났다며 달려오는 평범한 순간들이야.서율은 눈가를 문질렀다.“주인님…….”“왜?”“이런 말씀을 편지에 쓰시면 어떡해요.”“울라고 쓴 건 아닌데.”“안 울었거든요.”태혁은 웃으며 휴지를 건넸다.서율은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그리고 10년 전 네게 했던 약속을 아직 기억해.《언젠가 우리 둘만의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말. 이번에는 꼭 지키고 싶어.》서율은 고개를 들었다.“도서관이요?”오전 9시 06분.서율은 식탁에 앉아서도 편지를 내려놓지 못했다.“주인님, 그 약속 기억하고 계셨어요?”“응.”“저는 까먹고 있었는데.”태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결혼하기 전에 네가 그랬잖아.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하루 종일 글 쓰고 싶다고.”서율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아……
오전 9시 26분.은서율은 거실에서 머리를 묶으며 휴대전화를 확인했다.한유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작가님, 안녕하세요! 2인 인터뷰 전에 잠깐 만나서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서율은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물론이죠. 언제가 편하세요?》잠시 후 답장이 왔다.《오늘 오후는 어떠세요? 인터뷰 질문보다 작품 이야기를 편하게 나누고 싶어요.》서율은 일정을 확인했다.“주인님!”주방에서 최태혁이 대답했다.“응?”“저 오늘 한유리 배우님 만나고 올게요.”“인터뷰 때문에?”“네. 미리 이야기 나누자고 연락 오셨어요.”태혁은 그녀의 머리끈이 느슨하게 묶인 것을 보고 다가왔다.“가만있어 봐.”“왜요?”그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됐어.”서율은 거울을 보며 웃었다.“주인님, 이런 것도 잘하시네요.”“10년 동안 연습했잖아.”오후 1시 38분.서율은 약속한 카페에 도착했다.한유리는 먼저 와 있었다.“작가님!”“배우님, 오래 기다리셨어요?”“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두 사람은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았다.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사실 촬영 끝나고도 해온이가 자꾸 생각났어요.”“어떤 부분이요?”“마지막 장면이요.”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유리는 잠시 말을 골랐다.“해온이가 역 밖으로 걸어 나갈 때, 저는 해방감을 느꼈거든요. 그런데 동시에 조금 슬펐어요.”“왜요?”“그동안 붙잡고 있던 기억을 놓아야 하니까요.”서율은 조용히 웃었다.“저도 그 장면을 쓸 때 그랬어요.”“정말요?”“네. 자유로워진다고 해서 지나온 시간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유리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오후 2시 17분.유리가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작가님, 사실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어요.”“말씀하세요.”“해온이는 마지막에 행복해졌을까요?”서율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유리가 덧붙였다.“촬영할 때도 계속 고민했어요. 해온이가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배우님
오전 9시 32분.은서율은 거실 소파에 앉아 질문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최태혁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준비됐어?”“잠깐만요, 주인님.”서율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진짜 인터뷰처럼 해주세요.”“알겠습니다, 은서율 작가님.”태혁이 진지하게 말하자 서율이 웃음을 터뜨렸다.“아, 그렇게 부르니까 이상해요.”“인터뷰라며.”“그래도 주인님이 그러시니까요.”태혁은 질문지를 펼쳤다.“그럼 시작할까요?”서율은 허리를 곧게 폈다.“네.”“《없는 역에서 내리는 여자》를 처음 구상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서율은 준비한 답변을 떠올렸다.“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던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역이었나요?”서율이 멈칫했다.“그건…….”“준비한 질문에 없었어?”“네.”태혁이 웃었다.“실제 인터뷰에서도 그럴 수 있잖아.”오전 10시 16분.서율은 질문지 여백에 새로운 답변을 적었다.“역은 사람들이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는 장소잖아요.”“응.”“누군가는 내리고, 누군가는 계속 타고 가고요. 해온이는 처음에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라요.”태혁은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그런데 마지막에는 누가 내려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내리죠.”“그게 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구나.”“네.”서율은 펜을 내려놓았다.“주인님, 이상하지 않아요?”“뭐가?”“대본 쓸 때는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말로 설명하려니까 어렵네요.”태혁은 질문지를 접었다.“그럼 외우지 마.”“네?”“지금 나한테 설명한 것처럼 이야기해.”서율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더 자연스럽겠네요.”태혁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대신 인터뷰 중에 나한테 하듯 ‘주인님’이라고 부르면 안 돼.”서율은 쿠션을 집어 들었다.“그럴 리가 없잖아요!”오후 1시 48분.서율은 정이현과 통화하며 제작발표회 준비 사항을 확인했다.“질문 범위는 대
오전 8시 42분.은서율은 식탁에 앉아 휴대전화를 뒤집어놓았다.최태혁이 커피를 내려놓으며 물었다.“왜 휴대전화 안 봐?”“보면 자꾸 시간만 확인하게 돼요.”“아직 1시간 넘게 남았어.”“그러니까요.”서율은 커피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주인님, 저 너무 긴장돼요.”태혁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발표가 취소되는 것도 아니잖아.”“그건 그렇지만요.”“그럼 아침부터 먹자.”“입맛이 없어요.”태혁은 작게 자른 샌드위치를 그녀의 접시에 놓았다.“한 입만.”서율은 그를 바라보다 웃었다.“주인님, 저 어린애 아니거든요.”“알아. 그런데 긴장하면 밥 안 먹는 건 10년째 똑같아.”결국 서율은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오전 9시 53분.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다.방송사 공식 홈페이지의 편성 공지 페이지였다.서율이 태혁의 손을 꼭 잡았다.“주인님, 손 아프세요?”“아니.”“제가 너무 세게 잡고 있죠?”“괜찮아.”그때 메일 알림이 울렸다.《드라마 공식 편성 확정 안내》서율은 숨을 삼켰다.“왔어요.”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열어봐.”서율은 메일을 클릭했다.《없는 역에서 내리는 여자》 편성 확정첫 방송 : 11월 13일 금요일 오후 9시 50분총 6부작 · 매주 금요일 1회 방송공식 예고편 및 상세 홍보 일정은 추후 공개서율은 화면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주인님…….”“응.”“진짜 방송해요.”태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축하해, 서율아.”서율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저 날짜까지 나왔어요.”“그러네.”“이제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TV로 보는 거잖아요.”태혁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동안 고생 많았어.”그 말을 듣는 순간 서율의 눈가가 붉어졌다.“주인님, 저 울 것 같아요.”“울어도 돼.”“화장도 안 했는데.”“집인데 무슨 상관이야.”서율은 결국 웃으면서 눈물을 닦았다.오전 10시 21분.공식 편성 공지가 올라오자 제작사에서 전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