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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화

Author: 레몬과 향수
유지영은 두 주먹을 꽉 쥐고 냉소를 터뜨렸다.

"외숙모는 이제 없지만, 너희에겐 엄연히 아버지와 친누이가 있지 않느냐. 아무리 그래도 사촌 누이인 내게 찾아올 차례는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분가할 때 나와 내 아버지는 집안의 재산을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 온갖 잇속은 너희 둘째네가 다 챙겨가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 아직도 만족을 못 하는 것이냐?"

그녀는 체면도 따지지 않고 두 형제의 얄팍한 속내를 정통으로 까발렸다.

두 아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정랑아, 넌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읽고 세상 이치를 배웠지. 그런데 어찌 이리 사리 분별을 못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 우기느냐. 아니면 우리 아버지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품어서는 안 될 헛된 속셈이라도 품은 것이냐?"

사실 유정랑은 아주 어릴 적부터 장차 국공부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주입받아 왔다.

비록 지금은 쫓겨난 처지이나, 유국공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언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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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안을 거슬러   제484화

    북명연의 저 안하무인인 태도를 보니, 유지영은 기가 막혔다. 하지만 지금은 이를 악물고 분노를 삼켜야만 했다.이연령은 그 와중에도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댔다."지영아, 홀몸도 아닌데 진정하거라. 일전에 내가 제를 올리고 황도로 돌아오던 길에 실수로 부딪혀 그대의 심기를 거스른 적 있었지. 그러니 속으로 나를 원망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그녀는 짐짓 대인배라도 된 양 손을 내저으며 괘념치 않겠다는 태도를 취했다."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어. 어찌 죄 없는 아이까지 들먹이며 내게 누명을 씌우려 하였느냐. 부디 다음번엔 이러지 말길 바랄게."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방 안에 있는 모든 이가 똑똑히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북명연이 비웃음을 흘렸다."연령 군주는 참으로 관대하기도 하지. 양심을 속이고 악행을 저지르는 어떤 사람과는 아주 딴판이야."단어 하나하나가 도발이었고, 쏘아보는 눈빛엔 노골적인 경멸이 가득했다.마치 유지영이 뒤에서 추악한 짓이라도 저지른 듯한 취급이었다.북명연은 명언을 향해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명언,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명언은 굳은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보아라, 내 호위가 바로 증인 아니냐."북명연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혀를 쯧쯧 찼다.유지영은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북명연을 흘겨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는 운민을 향해 입을 열었다."육공주께서 저리 원하시니 관아에 고발하거라."운민은 대답과 함께 유지영을 부축하던 손을 놓고 밖으로 향했다.이연령의 안색이 미세하게 굳었다."지영아, 정녕 끝까지 우길 작정이니?""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뭘 그리 발끈하는가?"북명연은 계속해서 빈정거렸다.하지만 운민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운민이 모퉁이를 돌자, 이연령은 미간을 찌푸린 채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그녀의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유지영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의자에 앉았다. 몹시 평온한

  • 피안을 거슬러   제483화

    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신중해서 그럴 것이다. 현재 형님은 육공주의 호위일 뿐이니, 고분고분 따르는 것이 본분이겠지. 지금은 우리와 가까이에 계시니 차차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유지영은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는 듯하여 더는 묻지 않았다.하지만 근심이 가득해 밤새 뒤척였다.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배현준은 이미 군영으로 가고 없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이연령이 경왕부로 사죄하러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어제 연령 군주는 태후 마마께 크게 꾸지람을 듣고 밤새 궁중 법도를 필사했다고 합니다."운청이 말했다.비밀이랄 것도 없는 일이라 조금만 수소문해 보면 알 수 있었다.유지영이 망설이고 있을 때 운민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어제 북명연이 보낸 법랑 팔찌가 들려 있었다."이 팔찌에 구성초가 섞여 있습니다. 극히 차가운 성질을 지닌 낙태약입니다. 살짝만 닿아도 유산을 할 수 있고, 심하면 산모와 태아 모두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그 말에 유지영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북명연!유지영은 일찍부터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이토록 대담하게 팔찌에 대놓고 독을 쓸 줄은 몰랐다.그녀는 책상에 반쯤 팔을 걸친 채 가볍게 탁자를 두드렸다.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첫 만남에서 이토록 잔인한 짓을 하다니.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시녀가 다시 와서 보고했다."세자비 마마, 북신 육공주께서 오셨습니다.""감히 제 발로 찾아오다니!"운민이 주먹을 꽉 쥐며 이를 갈았다.유지영은 두 사람이 어떻게 공교롭게 같이 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둘 다 불순한 의도를 품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운청에게 손짓하여 낮은 목소리로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운청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그 후 유지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운민의 손을 잡고 대청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초췌한 얼굴의 이연령과 북명연 두 사람이 보였다.북명연 옆에는 명언이 서 있었다. 그는 허

  • 피안을 거슬러   제482화

    영보전의 연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방금 전 유지영과 이연령 사이에 있었던 마찰은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배이수는 뻔뻔하게 북명연의 곁을 맴돌았다.북명연이 아무리 내쫓으려 해도 막무가내였다.북명연에게 다가와 술을 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몇 잔의 술이 들어가자 그녀도 뺨이 붉게 달아오르며 취기가 돌았다.배이수가 한 발짝 더 다가가려 하자 명언이 그를 막아섰다. 명언은 북명연을 부축하며 말했다."공주님, 취하셨습니다."배이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질책했다."네놈은 뭘 하는 놈이냐?"명언이 대답했다."소인은 공주님을 모시는 호위로, 공주님의 안위를 지키는 자입니다."보는 눈이 많은 탓에 배이수는 명언에게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목소리를 낮춰 위협했다."공주께서 취하셨으니 후원으로 모시고 가 쉬게 하거라. 내 너에게도 섭섭지 않게 챙겨주마."명언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북명연의 곁을 굳건히 지키며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배이수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었다. 눈빛에 사나운 기운이 스쳤지만, 별다른 수가 없으니 낭패한 얼굴로 제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건양제는 간간이 배이수를 흘끔거렸는데, 그 눈빛에는 실망감이 역력했다.그 시선을 받은 배이수는 두려우면서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술이 몇 차례 돌자 북명연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이내 건양제가 손을 휘젓자 연회가 끝났고, 사람들은 하나둘 궁을 빠져나갔다.길게 이어진 회랑.다시 눈을 뜬 북명연의 얼굴에는 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린 채 곁에 있는 명언을 흘겨보며 물었다."본궁이 화친을 하러 왔는데, 네가 보기엔 누가 가장 적합한 것 같으냐?"명언이 낮게 대답했다."배이수는 공주님보다 두 살이나 어린 데다, 그저 잘 보이려 아부할 뿐 연모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다른 자들 역시 군왕의 신분을 노리고 다가오는 것이니, 부마를 고르실 땐 가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명문가의 적장

  • 피안을 거슬러   제481화

    팽팽한 대치 속에 상 내관이 허리를 굽히며 들어왔다."세자, 폐하께서 세자비는 좀 어떠신지 물어보고 오라 하셨습니다."배현준은 입술을 꾹 다물더니 있는 그대로 답했다."넘어지면서 놀라긴 하였으나 당장은 큰 이상이 없다고 전해 주게."상 내관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가와 귓속말을 몇 마디 남겼다. 배현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려 유지영에게 이따가 다시 데리러 올 테니 푹 쉬고 있으라고 일렀다."전 괜찮습니다." 유지영이 답했다.조령 장공주가 손을 휘휘 저었다."다들 그만 물러가거라. 대전에 아직 손님들이 있지 않으냐."구경꾼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이연령만이 떠나기 직전까지 유지영을 뚫어지라 노려볼 뿐이었다. 분통이 터졌지만 지금으로선 이를 악물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연령아, 경 세자비가 푹 쉴 수 있게 이만 가자꾸나."조령 장공주가 이연령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사방이 고요해지자 유지영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매만졌다."세자비 마마,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운청이 조심스레 물었다."괜찮아."유지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방금 전 이연령이 남긴 말을 곱씹어 볼수록 어딘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 한구석에 의구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한편, 대전에서는 연회가 계속되고 있었다.이연령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자녕궁으로 돌아가 곧장 태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 서 태후의 발치에 엎드린 그녀가 울부짖었다."태후 마마, 소녀는 아버님께서 대체 어찌 돌아가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경 세자비는 어찌하여 저희 아버지는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니며 유국공과 견줄 자격도 없다고 모욕하는 것입니까?"그녀가 도착하기 전, 영옥은 이미 이연령과 유지영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는 소식을 전한 후였다.연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두통이 일어 자리보전하고 있던 서 태후였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 뛰어 들어온 이연령을 본 서 태후는 미간을 찌푸렸다."할 말이 있다면 일어나서 하거라.""태후 마마…."이

  • 피안을 거슬러   제480화

    이연령은 멍해졌다. 허공에 뻗은 손을 채 거둘 새도 없이, 비단옷을 입은 인영이 번쩍 나타나더니 허리를 굽혀 유지영을 안아 들고 사라졌다."태의!" 배현준이 다급하게 외쳤다."세자비 마마, 제발 무사하셔야 합니다." 운청이 그 뒤를 따르며 울먹였다.소란은 내전까지 전해졌다.건양제가 상 내관에게 눈짓을 보내자, 상 내관이 즉시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폈다.연회장에 있던 많은 이들도 목을 빼고 문밖을 내다보았다. 누군가 수군거렸다."방금 경세자가 세자비를 안고 가는 걸 본 것 같은데?""세자비는 회임 중이잖소."사람들은 호기심에 술렁였다.전각 밖, 창백하게 질렸던 이연령의 얼굴이 음침하게 변했다. 영옥이 다가왔다."군주, 경세자비는 너무 간악합니다. 어찌 저런 식으로 군주를 모함한단 말입니까? 소인이 똑똑히 보았습니다. 분명 일부러 넘어진 것입니다."이연령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내가 상대를 너무 얕봤어."멍청한 줄로만 알았는데 이토록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음침한 얼굴로 영옥에게 귓속말을 했다."자녕궁으로 가서 경세자비의 태기가 불안정하다고 전하거라""예."옆 편전.배현준은 조심스레 유지영을 평상에 눕혔다.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유지영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그 뒤를 바짝 따라온 이연령이 초조한 듯 울먹이며 말했다."경세자비, 어쩌다 그리 조심성 없이 넘어진 거야? 크게 다친 곳은 없고?"유지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이연령을 쳐다보며,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연령 군주, 어째서 저를 밀친 겁니까?""경세자비, 뭔가 오해한 모양인데 내가 언제 널 밀었다고 그래?"이연령 역시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배현준을 쳐다보더니 손가락 세 개를 치켜들었다."내 이씨 가문 전체를 걸고 맹세할게. 오늘 난 세자비의 몸에 털끝 하나 대지 않았어. 내 말이 거짓이라면, 우리 이씨 가문은 비참한 최후를 맞을 거야."단호한 말투에

  • 피안을 거슬러   제479화

    북명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폐하, 제가 아직 경성의 귀공자들을 전부 알지 못하니, 서두를 것 없습니다."건양제는 그 말을 듣고 더는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다.사람들은 조용히 가무를 감상했다.연회가 중반에 접어들 무렵, 유지영은 귀띔을 받고 핑계를 대어 밖으로 나왔다. 바깥 복도에 서서 바람을 쐬니, 사방이 고요했다.그녀는 회랑 아래 서 있는 한 인영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송백처럼 꼿꼿한 자태로, 한 손은 허리춤의 검자루에 얹은 채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자, 유지영은 속으로 유씨 노부인과 차남댁 식구들을 향한 증오심이 다시금 정점으로 치솟았다.그녀의 오라비는 본디 달처럼 빛나는 세가의 귀공자여야 했다. 줄곧 아버지 곁에 머물렀더라면, 필시 만인의 칭송을 받는 기품 있고 우아한 소년 장군이 되었을 것이다.이토록 온갖 풍파를 겪으며 육공주의 막료가 되어, 얼굴조차 감히 드러내지 못하는 신세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마음이 아파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얼굴에 와닿는 산들바람에 서늘한 기운이 묻어났다. 운청이 망토를 가져와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고는 말없이 곁을 지켰다. 발소리가 들려오자 유지영은 시선을 거두고 가까운 곳을 바라보며, 짐짓 괴로운 기색을 띠었다."경세자비."술기운을 풍기며 이연령이 다가왔다. 두 뺨이 약간 달아오른 그녀가 짐짓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육공주를 일부러 오해하게 만들려던 건 아니었어. 어쨌든 내가 말을 잘못한 거니, 난 그저... 됐어. 미안하게 됐네."유지영이 고개를 돌려 이연령을 쳐다보았다."경세자비는 수구를 던져 혼처를 정한 걸 후회한 적 없어? 정군왕 세자가 훨씬 다정하고 세심한데, 둘 사이의 갖은 오해들 때문에 서로를 놓쳤잖아."이연령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는 태어난다 해도 그리 행복하지 않을 거야. 네가 그저 오기 하나로 배현준에게 시집간 거, 다 알아."적막한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유지영은

  • 피안을 거슬러   제2화

    종령각 이층 누각.유지영은 부스스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이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유난히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회랑 아래에서는 하인들이 정원을 단장하며 내일 있을 성년례가 떠들썩할 거라며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아픔이 몰려왔고, 곧바로 이 모든 게 꿈이 아님을 직감했다.그녀는 죽임을 당한 뒤 성년례 하루 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이때 밖에서 고씨 어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 부인께서 대전으로 들라 하십니다. 경성에서 사람이 온 듯합니다.”전생의 배준형도 성년

  • 피안을 거슬러   제1화

    7월의 장안 거리는 굉장히 시끌벅적했다.마차 한 대가 성문 입구에서 멈추었다.털썩!유지영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마대에 담겨 바닥에 내던져졌다. 온몸으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특히 하반신에서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다.“읍….”지나가던 백성들이 소리를 듣고 마대를 풀어주었다.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사내의 옷가지를 걸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하얗고 가는 목덜미 아래에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이 사람은 정왕 세자비 아닌가?”누군가가 유지영을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옷매무새가 이 모양인 것을 보아 불결

  • 피안을 거슬러   제10화

    동금은 원래 표사의 딸이었으나 부모를 잃은 뒤 전당포에 팔려간 데다가, 전생에서는 실족사로 죽기까지 했다.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생에 유지영을 배신하지는 않았다.매일 고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송씨에게서 문서를 기어코 받아낸 것을 보면 눈치도 빠르고 수완도 있는 듯했다.나머지는 아직 관찰 대상이었다.“오늘부터 종령각을 배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유지영은 근엄한 표정으로 엄명을 내렸다.나머지 사람들은 주향 일당이 내쳐지는 것을 보았기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방으로

  • 피안을 거슬러   제9화

    “선주는 참 복도 많아요. 이 집안의 복덩이라니까요.”이내 셋째 부인이 아부를 떨기 시작하자, 송씨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지영아, 그동안 경왕 세자의 평판이 어떤지 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혼인한 뒤에는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네가 잘 붙들어야 한다. 어차피 훗날 경왕부 작위를 잇게 되면 먹고사는 걱정은 없을 테니, 제발 사고를 쳐서 우리 집안에 피해가 가는 일만은 없게 하거라.”유지영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당장 침소로 돌아가 한숨 자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다행히도 노부인이 이제 돌아가도 좋다는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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