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Auteur: 레몬과 향수
종령각 이층 누각.

유지영은 부스스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이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유난히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회랑 아래에서는 하인들이 정원을 단장하며 내일 있을 성년례가 떠들썩할 거라며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아픔이 몰려왔고, 곧바로 이 모든 게 꿈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녀는 죽임을 당한 뒤 성년례 하루 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때 밖에서 고씨 어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부인께서 대전으로 들라 하십니다. 경성에서 사람이 온 듯합니다.”

전생의 배준형도 성년례 하루 전에 인주에 도착해 그녀에게 혼약을 청했다고 했다.

그녀는 얼른 일어나 대전으로 향했고, 정원에 들어서니 비단옷을 입은 호위들이 허리에 검을 차고 대기하고 있었다.

“세자, 선주와 혼인하고 싶으시다고요?”

“그건 안 됩니다. 세자는 원래 지영이와 정혼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놀란 목소리가 대전 안에서 울려 퍼지자 유지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부인, 지영이는 제게 그저 여동생 같은 사람이고, 선주야말로 제가 진정으로 연모하는 이입니다. 만약 이런 감정을 가지고 지영이와 혼인한다면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지요.”

목소리를 들으니 전생에 그녀와 한 이불을 덮고 살았던 배준형이 분명했다.

“이번 생에 저는 선주 한 사람만 사랑할 것이고, 이 마음은 절대 변치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정왕부가 유씨 집안과 혼약이 있었다고는 하나 정확히 누구와 혼인할 것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거늘, 어찌 선주는 안 된다고 하십니까?”

비단 두루마기를 입은 배준형은 대전에 우뚝 서서 우아한 기품을 뽐내고 있었다. 준수한 외모에 온화한 성격까지, 그는 경성의 뭇 여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신랑감이었다.

한때는 유지영도 그런 그를 마음에 품었던 적이 있었다.

몇 년 전, 배준형은 유씨 저택에서 일 년 정도 지낸 적이 있었다. 나중에 정왕부로 돌아간 후에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매년 명절 때는 그녀에게 선물을 보내곤 했었다.

그렇게 양가는 유지영의 성년식이 마치자마자 바로 혼약을 정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지금 배준형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유선주와 혼인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유지영은 그 순간 배준형도 회귀했음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과거 그녀는 그의 나약함과 가식적인 면모를 뼈저리게 증오했었다. 한때 절절했던 사랑도 결국 그가 권세를 얻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긴 지금, 그녀는 저 가식적인 가면을 벗기고 그의 날개를 꺾어 지옥으로 떨어뜨리리라 다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유지영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씨 집안의 적장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생모는 궁중에 계신 서 태후였다.

과거 서 태후는 입궁하기 전 혼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국모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점술가의 말이 궁중에 계신 선제에게 전해져 강제로 입궁해 황후가 되었다. 그때 태후는 뱃속에 유지영을 품고 있었다.

서 태후가 선제와 어떤 협상을 이뤄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선제는 서 태후가 아이를 낳는 것에 동의했다. 단지 아이의 출생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한때 친우이자 유씨 집안의 맏며느리였던 담혜정에게 딸을 맡기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건강이 좋지 않았던 담혜정은 유지영이 여섯 살 나던 해에 지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 뒤로 유지영은 유씨 노부인의 슬하에서 컸다.

그동안 유씨 집안이 인주에 거주했던 이유는 태후가 유지영의 출생의 비밀이 알려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황제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친왕의 자손들 중에서 자질이 높은 자를 골라 태자에 책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배준형은 태후의 간택을 받았다.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단지 유지영의 부군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배준형은 이 진실을 알지 못한 상태였다.

짝, 짝!

유지영은 손뼉을 치며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지영이?”

집안의 둘째 며느리인 송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유지영을 바라보더니 다가와 난감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람들 앞에서 송씨는 친딸인 유선주보다 유지영을 더 아끼는 것처럼 연기하며 인자하고 선하다는 명성을 쌓았다.

송씨는 외출할 때마다 유지영과 유선주를 꼭 데리고 다녔는데, 동갑인 두 자매는 사이가 좋기로 소문이 났다.

겉으로는 딸인 유선주와 유지영을 제 자식처럼 아끼며 전혀 홀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세가의 서녀 출신인 송씨가 유지영의 명성을 더럽히기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았다. 전생에 유지영은 온갖 오명을 뒤집어썼음에도 불구하고, 아무에게도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숙모님.”

유지영은 담담히 손을 빼고는 배준형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 세자께서 하신 말씀은 다 들었습니다. 세자께서 선주를 연모하시어 혼인하고 싶다 하셨는데, 숙모님은 어찌하여 굳이 저를 엮는 건가요?”

배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와 선주는 서로 연모하는 사이다. 지영이 너는 언니로서 동생을 축복할 줄도 알아야지, 괜한 시기심에 선주를 원망하지 말거라.”

전생에 그는 다른 여인에게 조금만 다정하게 굴어도 시샘하고 불만을 퍼붓는 유지영을 보곤 했다.

처음에는 어린 마음에 신선하고 귀엽다고 느꼈고, 유지영의 화려한 외모 또한 마음에 들었기에 신혼 초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유지영에게 좀처럼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고, 정왕부는 황위 경쟁 한복판에 있었기에 첩을 들이지 못하게 하는 그녀에게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자들은 모두 자식을 보았는데 홀로 후사를 보지 못하여 경성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속도 모르고 허구한 날 애정을 갈구했고, 배준형의 마음도 점차 멀어져갔다.

그리고 훗날 유지영이 더럽혀진 몸으로 돌아왔을 때는 역겨운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그 당시 그는 그녀가 빨리 죽어주기만을 바랐다.

이기적이고 막무가내인 유지영보다는 착하고 대범한 유선주가 좋았다. 유선주는 유지영처럼 그를 아래에 두고 자존심을 짓밟지 않고, 늘 공경하는 시선으로 우러러보았다. 게다가 유선주는 어릴 때부터 복덩이라는 별명도 있었으니, 경성의 모든 사내가 욕심내는 신부감이었다.

결국 그는 그런 유선주와 혼인해 온 경성의 부러움을 샀다.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질 만큼, 배준형은 한시라도 빨리 유선주와의 혼사를 정하고 싶었다.

“지영아, 홧김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유씨 집안의 적장녀는 너이지 않니. 너도 세자와의 혼인만 손꼽아 기다리는 걸 온 집안이 아는데 선주가 어찌 네 사람을 가로채겠어.”

송씨가 다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 순간 배준형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대전 안의 시녀들마저 비웃음을 머금었다.

“가서 둘째 아가씨를 모셔오너라!”

송씨가 앙칼진 목소리로 명했다.

“감히 언니의 정혼자를 탐내다니! 내 이것을 그냥!”

송씨는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성이 난 척 유지영의 자존심을 짓밟고, 모두에게 그녀가 수치심도 모르고 제 것이 아닌 사람을 탐낸다고 전했다.

“숙모님!”

유지영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제가 언제 정왕 세자와의 혼인을 손꼽아 바란다고 말한 적 있나요? 조금 전에 이미 명확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세자께서 선주를 연모하여 혼인하고 싶으시다는데 그게 저와 대체 무슨 상관이죠?”

“지영아, 홧김에라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지.”

송씨의 말에 유지영도 차가운 비웃음으로 응수했다.

“제 거절이 숙모님께는 홧김에 한 말로 들렸나 보군요. 숙모님은 절 수치도 모르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만들 속셈인가요?”

송씨가 흠칫하더니 당황한 눈으로 유지영에게 소리쳤다.

“지영아, 어찌 웃어른에게 예의 없이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

배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훈계하듯 말했다.

송씨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 괜찮습니다. 세자께서 갑자기 혼약을 바꾸고 싶다 하시니, 지영이가 많이 당황했나 봅니다.”

이때 유선주가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하늘거리는 흰 비단치마를 입은 청순한 얼굴의 단아한 미인이었다.

유지영의 공격적인 말투와는 달리, 유선주는 대범하게 예를 행했다.

“세자와 어머니를 뵙습니다.”

“마침 잘 왔다. 어서 너는 세자와 혼인할 마음이 없다고, 이 혼사는 원래부터 지영이의 것이었다고 말하거라.”

송씨는 일부러 언성을 높이며 근엄한 척 말했다.

유선주는 눈시울을 확 붉히더니 애처롭게 유지영과 배준형을 번갈아 보았다.

“어서 말하라는데도! 절대 지영이의 세자비 자리를 빼앗지 않겠다고!”

송씨가 계속 재촉했다.

배준형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유지영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네가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난 절대 너와 혼인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엔 오로지 선주뿐이야.”

그러고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선주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내가 꼭 너여야만 한다고 한 거니까.”

유선주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장녀는 지영 언니이니 저는 언니의 정혼자를 빼앗을 수 없어요. 게다가 내일이 바로 언니의 성년례이고, 집안에서는 이미 대외적으로 언니가 내일 혼약을 정할 거라고 선포하였는데 어찌 저 때문에 가문의 체면에 먹칠할 수 있겠어요. 세자 오라버니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는 받을 수 없어요.”

사람들이 아는 유선주는 온순하고 욕심이 없는 착한 처자였다.

그리고 유지영은 그녀와 반대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유지영은 배준형의 입에서 더 듣기 싫은 말이 나오기 전에 유선주의 말을 가로챘다.

“세상에 사내가 정왕 세자 한 명뿐인 것도 아닌데, 네가 좋으면 가지면 되지 왜 굳이 내게 죄명을 뒤집어씌우려는 거니?”

유선주는 고개를 들더니 어리둥절한 눈으로 유지영을 보았다.

“언니?”

“선주야!”

배준형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더니 싸늘한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영도 허락하였으니 너는 그저 정왕부의 혼약을 받아들이면 된다. 아마 내일 성년례에서 지영이가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겠지.”

유선주는 불안한 눈으로 송씨를 바라보았다.

송씨 역시 의심의 눈초리로 유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갑자기 성격이 바뀌었지?’
Continuez à lire ce livre gratuitement
Scanner le code pour télécharger l'application

Latest chapter

  • 피안을 거슬러   제30화

    담혜정이 인주로 갔을 당시 오랜 시간 병을 앓았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송씨가 말한 것처럼 혼수를 모두 탕진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과거 담혜정이 시집을 올 때, 어마어마한 혼수와 점포, 장원을 가지고 왔다. 매년 담씨 가문에서 보낸 명절 선물만 십이 년 동안 모아도 적지 않았다.“게다가 아주버님께서 전방에 계시며 수시로 집안 돈을 끌어다 쓰셨습니다. 삼년 동안 가져간 돈만 이만 냥이 넘어요. 어머니, 형님의 혼수는 모두 거기 들어갔습니다.”송씨는 혼수 품목을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그 동안 저도 최선을 다해 아끼며 살림하였는데 고생했다는 말은 못 들어도 원망만 들으니 너무 서럽습니다.”말을 마친 송씨는 눈시울을 붉혔다.유씨 노부인은 혼수 품목을 유지영에게 건넸다.“지영이 너도 들었지? 네 숙모가 어린 너를 생각해서 혼수를 잠시 보관해 주었는데 그동안 너희가 쓴 돈이 적지 않아서 너에게 돌아갈 몫이 줄어든 게야.”장부와 품목 모두 유지영의 손에 건네졌다.송씨는 유지영이 장부를 봐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대충 얼버무려 적고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유지영은 장부를 펼치고는 첫 장부터 눈살을 찌푸렸다.“팔 년 전 십일 월에 약을 세 번을 지었군요. 한첩에 삼백 냥, 총 구백 냥이고요.”송씨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어머니 탕약에 들어가는 약재가 워낙 희귀 약재만 들어가서 지출이 어마어마했어. 탓을 하려면 사실 네 어머니의 병세를 탓해야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감당을 못해서 진작에 저세상으로….”유지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숙모님, 어머니께서 돌아가신지 햇수로 구 년입니다. 그런데 이 약은 대체 어디에 쓰였나요?”그제야 송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장부를 가로채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일년 동안 기록한 약값만 삼십만 냥이군요.”유지영은 장부를 꽉 쥐고 계속해서 말했다.“이 많은 은자의 출처가 불분명하다니. 점포를 열 개는 차리고도 남겠어요. 게다가 약을 지은 기록만 있고 어떤 약재가 얼마나 들어갔는지는 적지도 않으셨네요.”송씨는

  • 피안을 거슬러   제29화

    두 사람의 시녀들이 각자 가서 갈아입을 옷을 챙겨왔다.깊은 밤, 유선주가 갑자기 물었다.“언니는 여전히 정왕 세자를 마음에 두고 있네요. 제가 양보할게요.”갑작스러운 전개에 유지영은 피식 웃고는 못 들은 척했다.유선주는 그런 유지영을 빤히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하룻밤이 지난 후, 날이 밝았다.시녀들이 먹을 것을 가져왔다. 유선주의 시녀는 따뜻한 국과 밥, 그리고 고기반찬을 가져왔다.반면 홍주는 퍼석한 만두를 가져오며 눈시울을 붉혔다.“군주님, 소인이 무능하여 이런 것밖에 못 가져왔습니다.”“언니, 먹고 싶으면 제 걸 조금 덜어드릴게요.”유선주가 선심을 쓰듯 말했다.집안살림을 장관하는 송씨가 손을 써두었다는 것은 눈 감고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무덤덤하게 만두를 깨물며 말했다.“사당에서 고기를 먹는 건 부처님을 능멸하는 행위인데 꾸중이라도 들으면 어쩌려고.”유선주는 그러거나 말거나, 밥을 맛있게 먹었다.둘은 식사를 마친 후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이때 바깥이 소란스럽더니 노부인의 측근 시녀인 해월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다.“군주님, 담씨 가문에서 사람이 오셨다고 노부인께서 모셔오랍니다.”담씨 가문이 오늘 방문한 건 필히 혼수때문일 것이다.유지영은 일어서서 뻐근한 무릎을 대충 문지르고는 대청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외숙모 한씨가 분노한 얼굴로 노부인과 대치하고 있다가 유지영을 보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지영아, 네 외할머니께서 어제 성문 앞에서 벌어진 일을 듣고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라고 하더구나.”한씨가 말했다.상석에 앉은 유씨 노부인은 손에 염주를 들고서 담담히 말했다.“지영아, 떠도는 소문은 믿을 게 못된다. 그동안 국공부는 너를 홀대한 적도 없는데 소란스럽게 혼수 품목을 조사한다면 네 숙모들이 얼마나 상심이 크겠니.”한씨가 피식거리며 말했다.“노부인, 말씀이 심하시군요. 저희는 그저 손버릇이 더러운 종이 주인의 물건을 탐했나 하여 알아보러 온 것뿐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물며, 이 일을 경성

  • 피안을 거슬러   제28화

    연회가 끝나고 일가족이 국공부에 돌아갔을 때는 이미 밤중이었다.유씨 노부인은 마차에서 내리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였다. 옆에 있던 시녀가 노부인을 부축했고 송씨가 비명을 질렀다.“어머니!”유씨 노부인은 불쾌한 얼굴로 손만 휘휘 저었다.저택에 들어선 후에야 노부인은 말했다.“다들 대청으로 모이거라.”송씨 일가와 셋째네 일가 모두 대청에 불려갔다. 유씨 노부인은 다짜고짜 유선주에게 말했다.“유수각은 원래 지영이가 살던 곳이니 오늘 바로 거처를 옮기거라.”유선주는 멈칫하더니 서러운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봤다.“할머니, 단하각도 저는 괜찮습니다.”유지영이 담담히 말했다.유씨 노부인은 단호히 단언했다.“이 집안은 유국공부이지 상서부가 아니다. 유국공부의 적장녀는 너이니, 모든 건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야지. 하물며 유수각은 원래 너의 처소 아니냐.”유씨 노부인의 고집에 유선주도 별다른 수가 없어 애써 대범한 척 답했다.“제가 어리석었네요. 언니의 거처를 빼앗으려 하다니. 제가 옮기겠습니다.”그제야 노부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송씨는 얼굴을 부여잡고 하소연했다.“오늘 지영이 넌 혼자 예쁨을 받고서 우릴 위해 한마디도 하지 않더구나. 우리가 가족이니?”유씨 노부인도 그 말은 인정하는 바이기에 반박하지 않았다.유지영은 곤혹스럽다는 듯이 물었다.“그럼 숙모님은 제가 비녀 얘기를 인정해야 했다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제가 정왕 세자가 싫어서 경왕 세자와 정을 통하고 판을 짰다고 말해야 했다는 건가요?”“너!”송씨는 분노에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입만 살아서는 막무가내로 구는구나. 태후께서 좀 예뻐하신다고 웃어른에 대한 공경이 아예 없어.”그 외에는 더 시비를 걸 건수가 없었다.“지영아, 오늘 네가 좀 심하긴 했어.”유씨 노부인이 음침한 얼굴로 말했다.“네 숙모는 언제나 집안을 먼저 생각하는데 너도 적장녀로서 책임을 져야지.”유씨 노부인은 유지영이 국공부를 위해 말 한마디 하지 않아 모두의 웃음거리로 만든 것이 불만이었다.유지영은

  • 피안을 거슬러   제27화

    사죄라는 말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정왕비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서 태후를 바라보았다.“마… 마마….”정왕비는 전혀 내키지 않은 얼굴로 애원하듯 태후를 바라보았다.서 태후가 되물었다.“내 경성에서 정왕비의 위명은 익히 들었네. 정왕비가 입 한번 벙끗하면 모두가 따른다지. 그래서 그런가 태후인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보군.”그 말이 떨어지자 분위기는 더욱 얼어붙었다.태자가 정해지지 않았음에도 정왕부는 마치 태자가 된 양, 거만하게 굴었다. 하지만 태후의 불만을 산다면 언제든 후보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그들도 모르지 않았다.적어도 지금의 서 태후는 배현준을 좋게 보고 있었다.한참의 고민 끝에 정왕비는 이를 악물고 유지영을 향해 말했다.“장녕 군주, 아까의 일은 내가 경솔하였네. 뜬구름 잡는 소문만 믿고 그대를 오해하였어.”말을 마친 그녀는 유지영을 향해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유지영도 담담한 미소로 응했다.“오해였다고 하니 저도 더 이상 캐묻지 않겠습니다.”정왕비는 서 태후의 눈치를 살피고는 억지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역시 듣던 대로 사려가 깊군.”“되었네. 오늘은 지영이를 환영하기 위한 자리이니 쓸데없는 얘기는 여기까지 하지.”서 태후가 손을 휘휘 저으며 사건을 마무리지었다.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서 태후가 갓 경성에 올라온 장녕 군주를 각별히 아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연회가 다시 시작되자 정왕비는 이를 갈며 배준형을 나무랐다.“만반의 준비를 했다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저쪽에 약점을 잡혀서 태후마마의 귀에까지 전해지게 만들어?”유지영의 혼사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경솔하게 유선주와 정혼한 것은 약조를 저버린 행위였다.배준형은 입술을 깨물며 작게 답했다.“제가 경솔했습니다.”“태후께서 많이 노하신 것 같아. 절대 배현준 그놈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된다. 태후께서 장녕 군주를 각별히 아끼시는 것 같구나.”정왕비는 굳은 표정으로 유씨 노부인 일가를 쳐다보다가 눈빛

  • 피안을 거슬러   제26화

    배현준은 원래 제멋대로이고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성격이었다. 평소에도 사람들은 그를 피해 다니기에 급급했다. 근래 들어 어쩐 일인지 서 태후의 눈에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궁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물론이고 특별히 혼인까지 하사해 주었다.이 순간도 서 태후는 대견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배현준을 바라보고 있었다.누군가는 눈을 비비며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재차 확인했다.태후께서 배현준에게 저렇게 자애로운 표정을 짓는 날이 오다니.그와 반대로 배준형을 향한 서 태후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고 입가에는 은은한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준형이 네가 이렇게 나를 실망시키다니.”실망이라는 한마디에 배준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할마마마?”서 태후는 손을 휘저어 배준형의 말을 끊고 유씨 노부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그대는 집안의 어른으로서 어릴 적부터 지영이를 보살폈으니, 저 아이의 천성을 잘 알았을 거네. 그러니 그대가 한번 말해 보게. 도대체 지영이라는 아이가 어떤 성정을 지닌 아이인지?”유씨 노부인은 아픈 다리를 주무르다가 갑작스러운 말에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서 태후의 얼음장처럼 차디찬 눈빛과 뼛속까지 파고드는 통증에 노부인은 마른침을 삼켰다.“지영이는 학식이 뛰어나고 예절을 잘 지키며 성품도 온화한, 사려 깊은 아이입니다.”“어머니?”송씨는 조급해졌다. 그 말은 꼭 오명을 유선주에게 뒤집어씌우는 꼴과 다름없었다.“닥치거라!”서 태후의 얼굴빛이 음침하게 변했다.소 상궁이 앞으로 나서더니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무엄하구나! 태후께서 말씀을 물으시는데 어찌 함부로 대화에 끼어든단 말이냐! 예법도 모르는 건방진 것 같으니라고!”짝!말을 마친 소 상궁은 거침없이 송씨의 귀뺨을 때렸다.송씨가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고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사람들은 넋이 나간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서 태후가 이토록 형부상서 부인인 송씨의 체면을 짓밟을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소 상궁은 손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장녕 군주께

  • 피안을 거슬러   제25화

    서 태후는 다시 배준형을 돌아보았다.“너희 둘 중에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였다. 준형아,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배준형은 고작 혼사 하나 때문에 이미 정해진 일을 태후가 왜 이렇게 캐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배준형은 이를 악물고 잡아뗐다.서 태후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송씨와 유선주를 바라보았다.송씨는 유지영을 손가락질하며 비명을 질렀다.“지영아! 어찌 태후마마 안전에서 거짓말을 하느냐! 경왕 세자가 수구 경쟁에 참가하였는데 누가 감히 그분과 경쟁하겠어?”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송씨는 아직도 판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모든 잘못을 유지영에게 뒤집어씌우려 들었지만 그럴수록 태후의 분노만 거세질 뿐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애초에 태후는 이 일을 추궁할 마음이 없었다.그런데 배준형이 불쑥 나서서 유선주를 치켜올린 것이다.혼인을 하사한 그날부터 서 태후의 가슴 한편에는 분노의 불길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기어이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으니, 서 태후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그날 청혼하러 같이 왔다는 중매 어멈은 어디에 있느냐?”서 태후가 느닷없이 물었다.배준형의 눈빛이 순간 움츠러들었다.“할마마마, 오늘은 유국공부를 환영하는 자리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의논해도 되지 않습니까.”“할마마마!”나른하면서도 무심한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오더니 배현준이 느긋한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왔다.머리에 옥관을 쓰고 청색 비단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은 기품이 넘치고 원래 준수한 얼굴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다.“제가 너무 늦게 도착했군요. 송구합니다.”배현준을 보자 서 태후의 입가에 한가닥 미소가 걸렸다.“또 폐하께 붙들려 있었느냐?”배현준은 말없이 미소 짓고는 유지영을 보자마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장녕 군주 아닙니까? 왜 꿇고 있습니까? 군주가 무슨 잘못이라도 하였습니까?”서 태후는 대답 대신 물었다.“내 네게 묻겠다.

Plus de chapitres
Découvrez et lisez de bons romans gratuitement
Accédez gratuitement à un grand nombre de bons romans sur GoodNovel. Téléchargez les livres que vous aimez et lisez où et quand vous voulez.
Lisez des livres gratuitement sur l'APP
Scanner le code pour lire sur l'application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