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너 진짜 경찰 된 거야? 와… 어제 싸우는 거 보니까 장난 아니더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응?"
끔찍한 마약 사범으로 체포된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기괴할 정도로 해맑고 뜬금없는 인사. 조서 파일을 철제 탁상에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시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차갑게 헛웃음을 쳤다. "그래. 10년 전에 네가 내 꿈 박살 내준 덕분에 아주 잘 지냈다. 잡소리 그만하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시은이의 차갑고 날 선 목소리에, 유나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증발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짐승처럼 어깨를 크게 움츠리며 고개를 미친 듯이 가로저었다. "모, 몰라! 나 진짜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냥 어제 대기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눈 떠보니까 거기 지하실이었어! 진짜야, 나 믿어줘 시은아!" 벌벌 떠는 유나의 모습에 시은이는 혀를 찼다. 마약 사범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흔히 내뱉는 뻔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되고 자료가 쌓일수록, 서류를 넘기는 시은이의 미간은 점점 더 좁아졌다. 증거들이 소름 끼칠 정도로 너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작정하고 박유나 한 명을 옭아매기 위해 치밀하게 짜 맞춘 시나리오처럼 말이다. 압수된 마약 봉투에는 유나의 지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봉투를 건넸을 공급책의 지문은 화학 약품으로 꼼꼼하게 문질러 지운 흔적이 감식 결과 고스란히 드러났다. 유나의 지문만 의도적으로 남겨둔 형태였다. 게다가 조사를 통해 드러난 유나의 현실은 처참했다. 화려한 연예계 생활은 껍데기일 뿐, 그녀는 오래전부터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소속사 팀 내에서도 철저하게 고립되어 스케줄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가장 결정적인 단서는 국과수에서 날아왔다. 유나가 매일 복용하고 있다던 공황장애 약 캡슐. 그 성분을 분석한 결과, 캡슐 안에 신종 마약 성분이 교묘하게 섞여 들어가 있었다. 누군가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무너져가는 유나에게 몰래 약을 먹여 중독자로 만든 뒤, 현장이 발각될 경우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울 꼬리 자르기용 희생양으로 세운 것이 분명했다. . . "…처음엔 그냥 살기 위해서 발악하며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 내 무릎 위에 발을 얹은 채 빈 맥주캔을 찌그러뜨리며, 시은이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새 살이 돋기 시작한 그녀의 발바닥 아치 부분에 조심스럽게 거즈를 덧대며 시선을 맞췄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내 물음에 시은이는 찌그러진 맥주캔을 탁자에 툭 내려놓았다. 피곤함이 묻어나는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서늘하고 단단한 불꽃이 일었다. "나 그 기집애 아직도 용서 안 했어. 내 10년 전 꿈을 망쳐놓은 건 여전히 밉고 치가 떨려. 근데…." 시은이가 트레이닝복 바짓자락을 꽉 쥐었다. "억울하게 뒤집어쓰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잖아. 누군가 작정하고 그 바보 같은 기집애를 시궁창에 쳐박은 거라면, 내 손으로 그 진짜 쓰레기 새끼들 잡아서 족칠 거야." 단호하게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여린 발바닥 위로 마지막 반창고를 꼼꼼하게 붙여준 나는, 구급상자를 덮으며 조용히 그녀의 곁에 기대앉았다. . . 다음 날, 수원북부경찰서 취조실. 서늘하고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은 방 안, 맞은편 철제 의자에 웅크린 박유나는 안색이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철문을 열고 들어온 시은이를 보자, 유나는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탁자 위로 뻗었다. "시은아." 물기 어린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유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만지작거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늦었지만… 너한테 이제라도 사과하고 싶어." 조서를 넘기던 시은이의 손이 멈칫했다. 시은이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유나를 쏘아보았다. "이제 와서 네가 사과하면, 망가졌던 내 10년이 뭐 달라지니?" 날 선 시은이의 대답에 유나의 앙상한 어깨가 잘게 떨렸다. 후두둑, 굵은 눈물이 탁자 위로 떨어져 번졌다. "알아. 돌이킬 수 없다는 거…." 유나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근데, 내가 그때 널 지키지 못한 게 평생의 한이 됐어. 몇 년 전부터 네 생각이 매일 났고, 죄책감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우울증이랑 공황장애 약 없이는 버틸 수가 없었어… 나 편하자고 이러는 게 아니라, 진짜로 널 만나서 너무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싶었어." 시은이의 미간이 좁혀졌다. '널 지키지 못했다'는 말이 묘하게 거슬렸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그 일진 패거리들 돈으로 매수해서 학폭 뒤집어씌웠으면서, 누굴 지켜?" 그 말에 눈물을 쏟아내던 유나가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퉁퉁 부은 눈에 억울함과 당혹감이 가득했다. "내가…? 내가 매수했다고? 아니야, 시은아! 내가 왜 널…!" 유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철제 탁자를 짚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거 내가 한 거 아니야. 강혜림 언니가 한 짓이었어." 예상치 못한 이름. "…강혜림?" 시은이는 조서를 쥐고 있던 손에 빳빳하게 힘을 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박유나. 지금 빠져나가려고 아무 이름이나 대는 거면…." "진짜야! 나도 나중에야 알았어. 언니가 일진 애들한테 돈 주고 다 꾸민 일이라는 거. 그거 알고 나서 다 폭로하려고 했는데… 언니가 협박했어. 입 뻥긋하면 내 가족들까지 다 매장해 버리겠다고…." 유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흐느꼈다. "미안해. 무서워서 입 다물었어. 근데 도저히 더는 못 견디겠어서, 그저께 대기실에서 혜림 언니 만행 폭로하는 글을 쓰고 있었어. 언론에 다 터뜨려 버리려고. 근데…." 유나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었다. "약 먹을 시간이 돼서 캡슐을 삼켰는데, 그 뒤로 눈앞이 핑 돌더니 기억이 끊겼어. 눈 떴을 때가 지하실이었고." 시은이는 터질 듯한 심장 박동을 억누르며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 지하실에서 널 납치해 간 놈들 중에 얼굴 기억나는 사람 없어?" 유나가 두 팔을 감싸 안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눈을 떴을 때… 나한테 억지로 약을 더 먹이려던 그 남자… 목에 커다란 뱀 문신이 있었어…." 순간, 시은이의 심장이 차갑게 굳었다. 뱀 문신. 10년 전, 나를 인질로 잡고 시은이를 짓밟았던 태성공고 패거리의 우두머리. '독사'의 흉측한 상징이었다.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비로소 잔혹한 제자리를 찾았다. 유나의 폭로를 막기 위해 강혜림, 그리고 그녀와 손을 잡은 독사 패거리가 유나의 공황장애 약에 신종 마약을 섞어 먹인 것이다. 아예 구제 불능의 마약 중독자로 만들어, 그 입을 영원히 막아버릴 속셈이었다."너 진짜 경찰 된 거야? 와… 어제 싸우는 거 보니까 장난 아니더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응?" 끔찍한 마약 사범으로 체포된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기괴할 정도로 해맑고 뜬금없는 인사. 조서 파일을 철제 탁상에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시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차갑게 헛웃음을 쳤다. "그래. 10년 전에 네가 내 꿈 박살 내준 덕분에 아주 잘 지냈다. 잡소리 그만하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시은이의 차갑고 날 선 목소리에, 유나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증발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짐승처럼 어깨를 크게 움츠리며 고개를 미친 듯이 가로저었다. "모, 몰라! 나 진짜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냥 어제 대기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눈 떠보니까 거기 지하실이었어! 진짜야, 나 믿어줘 시은아!" 벌벌 떠는 유나의 모습에 시은이는 혀를 찼다. 마약 사범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흔히 내뱉는 뻔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되고 자료가 쌓일수록, 서류를 넘기는 시은이의 미간은 점점 더 좁아졌다. 증거들이 소름 끼칠 정도로 너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작정하고 박유나 한 명을 옭아매기 위해 치밀하게 짜 맞춘 시나리오처럼 말이다. 압수된 마약 봉투에는 유나의 지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봉투를 건넸을 공급책의 지문은 화학 약품으로 꼼꼼하게 문질러 지운 흔적이 감식 결과 고스란히 드러났다. 유나의 지문만 의도적으로 남겨둔 형태였다. 게다가 조사를 통해 드러난 유나의 현실은 처참했다. 화려한 연예계 생활은 껍데기일 뿐, 그녀는 오래전부터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소속사 팀 내에서도 철저하게 고립되어 스케줄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
"읏…."마지막 유리 조각이 살갗을 빠져나오자, 시은이가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꽉 깨물었다.나는 피 묻은 파편을 은색 트레이에 내려놓고, 소독약을 적신 거즈로 시은이의 발바닥을 꾹 눌렀다. 하얀 거즈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상처가 깊어. 며칠은 제대로 걷지도 못할 거야."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붕대를 감기 시작했지만, 시은이는 대답이 없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소파에 기대앉은 시은이의 시선은 허공을 향해 멍하게 흩어져 있었다.10년 전,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던 박유나를 그 눅눅한 지하실에서 마주한 충격이 여전히 시은이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박유나."시은이의 입술이 달싹이며 건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그 기집애, 뼈만 남아서 덜덜 떨고 있더라. 초점도 다 풀려서 나를 보면서 실실 웃기나 하고."시은이의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하얗게 질린 손마디가 잘게 경련했다."내 10년을 망친 년인데… 막상 약에 쩔어서 바닥을 기는 꼴을 보니까, 속이 후련하기는커녕 피가 거꾸로 솟아."시은이의 눈동자에 서늘한 불꽃이 일었다.그녀는 갑자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붕대가 감긴 발을 억지로 바닥에 디디며 겉옷을 집어 들었다."나 지금 다시 가봐야겠어.""뭐? 어딜 가. 지금 걷지도 못하잖아!""그 지하실 놈들 대가리, 오늘 당장 모가지를 비틀어서라도 대체 누구한테 약을 받은 건지, 왜 유나가 저기서 저 꼴로 있는지 다 토해내게 만들 거야!"시은이가 절뚝거리며 현관 쪽으로 걸음을 뗐다.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은이의 앞을 가로막고, 겉옷을 쥔 그녀의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비켜, 윤태경.""못 비켜.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찌는 듯한 한여름의 늦은 밤. 낡은 선풍기가 덜덜거리며 돌아가던 자취방 창밖으로,거친 오토바이 배기음이 다가와 멎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띠리릭- 도어록이 열리고, 땀과 흙먼지, 그리고 옅은 피비린내를 달고 들어온 시은이가 현관 벽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시은아! 너 꼴이 왜 그래. 다친 데는? 일은 어떻게 됐어?""아… 물 좀 줘. 갈 길이 한참 멀다." 내가 다급히 건넨 차가운 생수를 단숨에 반 병이나 비워낸 시은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의 터진 입술이 열리고, 오늘 밤 벌어진 위장 수사의 전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미끼를 완전히 물었어." 시은이가 툭 던진 첫마디였다. 그동안 학교에서 3학년 MZ조폭 끄나풀 녀석들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둔 결실이었다. 오늘 하교 시간, 3학년 무리의 우두머리가 민재를 은밀히 불러냈다. '오늘 밤 변두리 폐당구장 쪽으로 물건 하나 배달 갈 건데, 그 깡다구 좋은 전학생 년도 데려와라. 입 무거워 보이니까 잔심부름이나 좀 시키게.' 통을 좁게 줄인 낡은 교복 바지에, 맨발로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끄는 폼새. 시은이는 완벽한 불량학생의 모습으로 민재와 함께 폐당구장으로 향했다. 당구장 안쪽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덩치 큰 양아치들은 시은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대충 걸친 교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녀의 예쁘장한 외모를 확인한 녀석들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번졌다. "야, 넌 꼴랑 쇼핑백이나 나를 와꾸가 아닌데?" 녀석 중 하나가 낄낄거리며 다가왔다.
5월의 끝자락. 초여름의 끈적한 열기가 교정에 내려앉은 오후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구관 복도를 순찰하던 내 곁으로, 아이들과 매점을 다녀오던 시은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걸음을 나란히 했다. 그녀는 다른 녀석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하더니, 뾰족한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기대감이 잔뜩 서린 까만 눈동자. 하지만 나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오늘? 목요일이잖아. 분리수거 하는 날." 내 건조한 대답에 시은이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집어삼키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내 셔츠 소매를 꼬집듯 틀어쥐었다. "그래, 분리수거나 실컷 해라, 윤태경. 재활용도 안 되는 인간아." 시은이는 뾰루퉁한 얼굴로 휙 돌아서서 교실을 향해 쿵쿵거리며 걸어갔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애써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아야만 했다. .. [시은아, 나 오늘 교무실에 급한 업무가 좀 남아서. 도어록 비밀번호 치고 먼저 들어가 있어.] 시은이에게 거짓말 문자를 남겨둔 나는, 지금 내 자취방 한가운데서 앞치마를 두른 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형광등은 끄고 구석의 노란 스탠드 조명들만 켜두어 방 안을 제법 그럴싸한 무드로 꾸며놓은 참이었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아침부터 푹 끓인 미역국과 갈비찜 냄새가 달큰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테이블 중앙에는 단맛이 적고 묵직한 바디감이 일품인 레드 와인의 코르크를 따서 열어두고, 얇고 유려한 곡선의 크리스털 와인잔 두 개를 나란히 세팅했다. 평소 같으면 늘어난 반바지에 티셔츠 차
창고 밖에서는 김 선생의 구두 발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정적 속,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어둠 속에서도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시은이의 까만 눈동자와 끈질기게 시선이 얽혀들었다.시은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감아안으며 그대로 입술을 덮었다."읏…."시은이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던 놀란 숨을 내가 깊게 삼켰다.그녀의 두 팔이 자연스럽게 내 목을 감아왔다.문밖에서 김 선생이 창고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덜그럭 소리가 들려왔지만, 조심스럽던 입맞춤은 그 위태로운 긴장감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짙고 거칠어졌다.서로의 숨이 얽히는 소리만이 좁은 창고 안을 뜨겁게 채우고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밖으로 갔나…."김 선생의 중얼거림과 함께 구두 발소리가 계단 아래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천천히 입술을 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어둠 속에서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는 시은이의 어깨를 가볍게 쥐고 물었다."어쩌자고 애들하고 술을 마셨어. 들키면 어쩌려고."내 물음에 시은이는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스윽 닦아내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수아가 가방에 몰래 챙겨왔더라고. 안 마시려고 했는데… 옛날 생각도 좀 나고, 오늘 기분도 좋아서 나도 모르게 반 병이나 마셔버렸네."시은이의 대답에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10년 전, 우리의 수학여행 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10년 전 그날 밤도 그랬다.방에서 비밀리에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복도 끝에서 '미친개' 학생주임의 서슬
고등학교 시절의 꽃, 수학여행. 목적지는 탁 트인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동해 바다였다. 숙소인 해변가 리조트에 짐을 풀고 백사장으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멀찍이 그늘에 서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은이는 28살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파도를 피해 도망치며 쉴 새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있던 시은이가 나를 발견했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장난기로 반짝이더니, 옆에 있던 민재와 아이들을 불러모아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야! 호랑이 쌤 덮쳐!!" 시은이의 외침과 함께,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어, 어? 야, 너희들 뭐 하는… 으아악!" 반항할 새도 없이 녀석들에게 팔다리가 들린 나는 그대로 얕은 바닷물 속으로 속절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짠물이 코로 훅 들어왔다. 물기를 털어내며 기가 막혀 허우적거리자, 내 코앞에서 배를 잡고 숨이 넘어가게 웃고 있는 시은이가 보였다.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은 채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호랑이 선생님! 바닷물 시원하죠?!" 나는 겉옷을 대충 벗어 던지고 물장구를 치며 아이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시은이는 내 물세례를 피하며 비명을 지르고 도망쳤고, 나는 그런 그녀의 뒤를 쫓으며 원 없이 웃었다. 선생의 체면 같은 건 이미 파도에 휩쓸려간 지 오래였다. .. 문제는 저녁 장기자랑을 불과 몇 시간 앞둔 때 터졌다. "아악!" 리조트 로비 계단에서 장난을 치며 뛰어내려 오던 민재가 발목을 심하게 접질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