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찌는 듯한 한여름의 늦은 밤.
낡은 선풍기가 덜덜거리며 돌아가던 자취방 창밖으로, 거친 오토바이 배기음이 다가와 멎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띠리릭- 도어록이 열리고, 땀과 흙먼지, 그리고 옅은 피비린내를 달고 들어온 시은이가 현관 벽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시은아! 너 꼴이 왜 그래. 다친 데는? 일은 어떻게 됐어?" "아… 물 좀 줘. 갈 길이 한참 멀다." 내가 다급히 건넨 차가운 생수를 단숨에 반 병이나 비워낸 시은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의 터진 입술이 열리고, 오늘 밤 벌어진 위장 수사의 전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 "미끼를 완전히 물었어." 시은이가 툭 던진 첫마디였다. 그동안 학교에서 3학년 MZ조폭 끄나풀 녀석들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둔 결실이었다. 오늘 하교 시간, 3학년 무리의 우두머리가 민재를 은밀히 불러냈다. '오늘 밤 변두리 폐당구장 쪽으로 물건 하나 배달 갈 건데, 그 깡다구 좋은 전학생 년도 데려와라. 입 무거워 보이니까 잔심부름이나 좀 시키게.' 통을 좁게 줄인 낡은 교복 바지에, 맨발로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끄는 폼새. 시은이는 완벽한 불량학생의 모습으로 민재와 함께 폐당구장으로 향했다. 당구장 안쪽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덩치 큰 양아치들은 시은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대충 걸친 교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녀의 예쁘장한 외모를 확인한 녀석들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번졌다. "야, 넌 꼴랑 쇼핑백이나 나를 와꾸가 아닌데?" 녀석 중 하나가 낄낄거리며 다가왔다. "오늘 지하 VIP 룸에 손님들 오거든. 거기서 진짜 '물건' 세팅하고 서빙 좀 해라. 팁은 배달 뛰는 거 열 배로 쳐줄 테니까." 단숨에 투약 현장 핵심부로 진입할 기회였다. 시은이는 짐짓 돈에 혹한 척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녀석들은 안쪽의 굳게 닫힌 철문을 열어주었다. 눅눅한 곰팡이와 짙은 담배 냄새가 찌든 지하실 룸. 은밀한 투약 현장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시은이는 방 안을 빠르게 훑던 중, 그녀의 시야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꽂혔다. 룸 안쪽 낡은 소파.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어깨를 늘어뜨린 채, 초점이 풀린 눈으로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여자. 10년 전, 17살의 이시은을 모함해 기획사에서 쫓겨나게 만들었던 동기 '박유나'였다. "……박유나?" 시은이의 굳은 목소리에,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유나가 몽롱한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녀는 시은이를 알아본 순간, 약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실없이 웃으며 다가왔다. "어…? 시은이…? 이시은…?" 유나는 반가움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뒤섞인 기괴한 표정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시은이의 교복 셔츠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 "너 왜 여기 있어… 교복은 또 뭐고… 여기 오면 안 돼. 가. 빨리 가. 빨리 나가, 이년아…." 유나가 혀 꼬인 목소리로 시은이를 억지로 룸 밖으로 밀어내려 하자, 소파 건너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건달 두 명의 눈매가 험악해졌다. "뭐야? 고딩이라며. 너네 아는 사이야?" "이거 냄새가 좆같은데. 저 년 주머니 뒤져봐. 짭새 프락치 아니야?" 건달들이 테이블 위에 있던 잭나이프와 쇠파이프를 집어 들고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민재는 사색이 되어 구석에 얼어붙었고, 유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살벌한 긴장감 속에서, 시은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굳이 더 연기할 필요 없겠네." 시은이는 발을 털어 질질 끌고 온 삼선 슬리퍼를 벗어 던졌다. 차가운 지하실 콘크리트 바닥에 그녀의 맨발이 닿았다. 다음 순간, 칼을 쥔 놈이 거칠게 달려들자 시은이의 몸이 짐승처럼 튀어 나갔다. 그녀는 놈의 손목을 낚아채 반 바퀴 비틀어 꺾고는, 그대로 무릎을 올려 놈의 명치를 무자비하게 찍어 눌렀다. "컥!" 뒤이어 쇠파이프를 들고 덤벼드는 놈의 궤적을 간발의 차로 피한 시은이는, 탁자 위의 두꺼운 유리 재떨이를 집어 들어 놈의 머리통에 거칠게 내리꽂았다. 쨍그랑-! 파편이 바닥으로 사방팔방 튀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뒹구는 거친 바닥을 맨발로 디디며 엉켜 붙느라, 시은이의 뽀얀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낭자하게 배어 나왔다. 주먹으로 뺨을 한 대 얻어맞아 입술이 터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놈의 목통을 졸라 시멘트 바닥에 거칠게 패대기쳤다. 퍽! 콰당탕! 단 몇 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피를 토하며 신음하는 건달들. 유리 파편이 밟혀 피투성이가 된 맨발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서 있는 시은이. 구석에 처박힌 민재와 유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공포에 질려 넋을 잃고 있었다. . . "…그래서 유나는 일단 우리 쪽 안전가옥으로 빼돌렸고, 민재 녀석은 벌벌 떠는 거 겨우 입단속 시켜서 택시 태워 보냈어." 시은이가 덤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마치며 바닥에 뻗은 두 발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황급히 구급상자에서 핀셋과 소독약을 꺼내와 그녀의 발아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발바닥 전체가 거친 콘크리트 바닥에 쓸려 엉망진창이었고, 곳곳에 뾰족한 유리 파편들이 박힌 채 피가 굳어 있었다. 상처에 소독약을 붓는 내 손끝이 파들파들 떨렸다. "너 진짜… 이렇게 무식하게 몸 굴릴래? 무전 쳐서 밖에서 대기하던 팀원들이라도 불렀어야지!" "유나가 내 교복 붙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무전 칠 시간도 없이 급박했어. 그리고 나 안 죽었어." 내가 속상함에 언성을 높이자, 시은이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소독약이 따가운지 발끝을 흠칫 움찔거렸다. 10년 만에 마주친 끔찍한 악연 앞에서도, 기어코 맨발로 유리밭을 구르며 사건의 중심부로 파고든 그녀. 나는 그 좁은 어깨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나도 버거워 보여, 무거운 한숨을 꾹 삼키며 핀셋을 고쳐 쥐었다. "따가워도 조금만 참아." 나는 시은이의 발목을 단단히 쥐고, 발바닥 살갗에 깊이 박힌 피 묻은 유리 조각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빼내기 시작했다. 유리 조각이 빠져나올 때마다 시은이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고, 내 심장도 그만큼 날카롭게 베이는 듯 욱신거렸다."너 진짜 경찰 된 거야? 와… 어제 싸우는 거 보니까 장난 아니더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응?" 끔찍한 마약 사범으로 체포된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기괴할 정도로 해맑고 뜬금없는 인사. 조서 파일을 철제 탁상에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시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차갑게 헛웃음을 쳤다. "그래. 10년 전에 네가 내 꿈 박살 내준 덕분에 아주 잘 지냈다. 잡소리 그만하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시은이의 차갑고 날 선 목소리에, 유나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증발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짐승처럼 어깨를 크게 움츠리며 고개를 미친 듯이 가로저었다. "모, 몰라! 나 진짜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냥 어제 대기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눈 떠보니까 거기 지하실이었어! 진짜야, 나 믿어줘 시은아!" 벌벌 떠는 유나의 모습에 시은이는 혀를 찼다. 마약 사범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흔히 내뱉는 뻔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되고 자료가 쌓일수록, 서류를 넘기는 시은이의 미간은 점점 더 좁아졌다. 증거들이 소름 끼칠 정도로 너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작정하고 박유나 한 명을 옭아매기 위해 치밀하게 짜 맞춘 시나리오처럼 말이다. 압수된 마약 봉투에는 유나의 지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봉투를 건넸을 공급책의 지문은 화학 약품으로 꼼꼼하게 문질러 지운 흔적이 감식 결과 고스란히 드러났다. 유나의 지문만 의도적으로 남겨둔 형태였다. 게다가 조사를 통해 드러난 유나의 현실은 처참했다. 화려한 연예계 생활은 껍데기일 뿐, 그녀는 오래전부터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소속사 팀 내에서도 철저하게 고립되어 스케줄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
"읏…."마지막 유리 조각이 살갗을 빠져나오자, 시은이가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꽉 깨물었다.나는 피 묻은 파편을 은색 트레이에 내려놓고, 소독약을 적신 거즈로 시은이의 발바닥을 꾹 눌렀다. 하얀 거즈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상처가 깊어. 며칠은 제대로 걷지도 못할 거야."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붕대를 감기 시작했지만, 시은이는 대답이 없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소파에 기대앉은 시은이의 시선은 허공을 향해 멍하게 흩어져 있었다.10년 전,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던 박유나를 그 눅눅한 지하실에서 마주한 충격이 여전히 시은이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박유나."시은이의 입술이 달싹이며 건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그 기집애, 뼈만 남아서 덜덜 떨고 있더라. 초점도 다 풀려서 나를 보면서 실실 웃기나 하고."시은이의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하얗게 질린 손마디가 잘게 경련했다."내 10년을 망친 년인데… 막상 약에 쩔어서 바닥을 기는 꼴을 보니까, 속이 후련하기는커녕 피가 거꾸로 솟아."시은이의 눈동자에 서늘한 불꽃이 일었다.그녀는 갑자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붕대가 감긴 발을 억지로 바닥에 디디며 겉옷을 집어 들었다."나 지금 다시 가봐야겠어.""뭐? 어딜 가. 지금 걷지도 못하잖아!""그 지하실 놈들 대가리, 오늘 당장 모가지를 비틀어서라도 대체 누구한테 약을 받은 건지, 왜 유나가 저기서 저 꼴로 있는지 다 토해내게 만들 거야!"시은이가 절뚝거리며 현관 쪽으로 걸음을 뗐다.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은이의 앞을 가로막고, 겉옷을 쥔 그녀의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비켜, 윤태경.""못 비켜.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찌는 듯한 한여름의 늦은 밤. 낡은 선풍기가 덜덜거리며 돌아가던 자취방 창밖으로,거친 오토바이 배기음이 다가와 멎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띠리릭- 도어록이 열리고, 땀과 흙먼지, 그리고 옅은 피비린내를 달고 들어온 시은이가 현관 벽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시은아! 너 꼴이 왜 그래. 다친 데는? 일은 어떻게 됐어?""아… 물 좀 줘. 갈 길이 한참 멀다." 내가 다급히 건넨 차가운 생수를 단숨에 반 병이나 비워낸 시은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의 터진 입술이 열리고, 오늘 밤 벌어진 위장 수사의 전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미끼를 완전히 물었어." 시은이가 툭 던진 첫마디였다. 그동안 학교에서 3학년 MZ조폭 끄나풀 녀석들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둔 결실이었다. 오늘 하교 시간, 3학년 무리의 우두머리가 민재를 은밀히 불러냈다. '오늘 밤 변두리 폐당구장 쪽으로 물건 하나 배달 갈 건데, 그 깡다구 좋은 전학생 년도 데려와라. 입 무거워 보이니까 잔심부름이나 좀 시키게.' 통을 좁게 줄인 낡은 교복 바지에, 맨발로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끄는 폼새. 시은이는 완벽한 불량학생의 모습으로 민재와 함께 폐당구장으로 향했다. 당구장 안쪽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덩치 큰 양아치들은 시은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대충 걸친 교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녀의 예쁘장한 외모를 확인한 녀석들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번졌다. "야, 넌 꼴랑 쇼핑백이나 나를 와꾸가 아닌데?" 녀석 중 하나가 낄낄거리며 다가왔다.
5월의 끝자락. 초여름의 끈적한 열기가 교정에 내려앉은 오후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구관 복도를 순찰하던 내 곁으로, 아이들과 매점을 다녀오던 시은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걸음을 나란히 했다. 그녀는 다른 녀석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하더니, 뾰족한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기대감이 잔뜩 서린 까만 눈동자. 하지만 나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오늘? 목요일이잖아. 분리수거 하는 날." 내 건조한 대답에 시은이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집어삼키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내 셔츠 소매를 꼬집듯 틀어쥐었다. "그래, 분리수거나 실컷 해라, 윤태경. 재활용도 안 되는 인간아." 시은이는 뾰루퉁한 얼굴로 휙 돌아서서 교실을 향해 쿵쿵거리며 걸어갔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애써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아야만 했다. .. [시은아, 나 오늘 교무실에 급한 업무가 좀 남아서. 도어록 비밀번호 치고 먼저 들어가 있어.] 시은이에게 거짓말 문자를 남겨둔 나는, 지금 내 자취방 한가운데서 앞치마를 두른 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형광등은 끄고 구석의 노란 스탠드 조명들만 켜두어 방 안을 제법 그럴싸한 무드로 꾸며놓은 참이었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아침부터 푹 끓인 미역국과 갈비찜 냄새가 달큰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테이블 중앙에는 단맛이 적고 묵직한 바디감이 일품인 레드 와인의 코르크를 따서 열어두고, 얇고 유려한 곡선의 크리스털 와인잔 두 개를 나란히 세팅했다. 평소 같으면 늘어난 반바지에 티셔츠 차
창고 밖에서는 김 선생의 구두 발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정적 속,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어둠 속에서도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시은이의 까만 눈동자와 끈질기게 시선이 얽혀들었다.시은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감아안으며 그대로 입술을 덮었다."읏…."시은이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던 놀란 숨을 내가 깊게 삼켰다.그녀의 두 팔이 자연스럽게 내 목을 감아왔다.문밖에서 김 선생이 창고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덜그럭 소리가 들려왔지만, 조심스럽던 입맞춤은 그 위태로운 긴장감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짙고 거칠어졌다.서로의 숨이 얽히는 소리만이 좁은 창고 안을 뜨겁게 채우고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밖으로 갔나…."김 선생의 중얼거림과 함께 구두 발소리가 계단 아래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천천히 입술을 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어둠 속에서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는 시은이의 어깨를 가볍게 쥐고 물었다."어쩌자고 애들하고 술을 마셨어. 들키면 어쩌려고."내 물음에 시은이는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스윽 닦아내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수아가 가방에 몰래 챙겨왔더라고. 안 마시려고 했는데… 옛날 생각도 좀 나고, 오늘 기분도 좋아서 나도 모르게 반 병이나 마셔버렸네."시은이의 대답에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10년 전, 우리의 수학여행 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10년 전 그날 밤도 그랬다.방에서 비밀리에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복도 끝에서 '미친개' 학생주임의 서슬
고등학교 시절의 꽃, 수학여행. 목적지는 탁 트인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동해 바다였다. 숙소인 해변가 리조트에 짐을 풀고 백사장으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멀찍이 그늘에 서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은이는 28살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파도를 피해 도망치며 쉴 새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있던 시은이가 나를 발견했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장난기로 반짝이더니, 옆에 있던 민재와 아이들을 불러모아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야! 호랑이 쌤 덮쳐!!" 시은이의 외침과 함께,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어, 어? 야, 너희들 뭐 하는… 으아악!" 반항할 새도 없이 녀석들에게 팔다리가 들린 나는 그대로 얕은 바닷물 속으로 속절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짠물이 코로 훅 들어왔다. 물기를 털어내며 기가 막혀 허우적거리자, 내 코앞에서 배를 잡고 숨이 넘어가게 웃고 있는 시은이가 보였다.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은 채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호랑이 선생님! 바닷물 시원하죠?!" 나는 겉옷을 대충 벗어 던지고 물장구를 치며 아이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시은이는 내 물세례를 피하며 비명을 지르고 도망쳤고, 나는 그런 그녀의 뒤를 쫓으며 원 없이 웃었다. 선생의 체면 같은 건 이미 파도에 휩쓸려간 지 오래였다. .. 문제는 저녁 장기자랑을 불과 몇 시간 앞둔 때 터졌다. "아악!" 리조트 로비 계단에서 장난을 치며 뛰어내려 오던 민재가 발목을 심하게 접질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