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창고 밖에서는 김 선생의 구두 발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정적 속,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어둠 속에서도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시은이의 까만 눈동자와 끈질기게 시선이 얽혀들었다. 시은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감아안으며 그대로 입술을 덮었다. "읏…." 시은이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던 놀란 숨을 내가 깊게 삼켰다. 그녀의 두 팔이 자연스럽게 내 목을 감아왔다. 문밖에서 김 선생이 창고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덜그럭 소리가 들려왔지만, 조심스럽던 입맞춤은 그 위태로운 긴장감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짙고 거칠어졌다. 서로의 숨이 얽히는 소리만이 좁은 창고 안을 뜨겁게 채우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으로 갔나…." 김 선생의 중얼거림과 함께 구두 발소리가 계단 아래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천천히 입술을 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둠 속에서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는 시은이의 어깨를 가볍게 쥐고 물었다. "어쩌자고 애들하고 술을 마셨어. 들키면 어쩌려고." 내 물음에 시은이는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스윽 닦아내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수아가 가방에 몰래 챙겨왔더라고. 안 마시려고 했는데… 옛날 생각도 좀 나고, 오늘 기분도 좋아서 나도 모르게 반 병이나 마셔버렸네." 시은이의 대답에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10년 전, 우리의 수학여행 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 . 10년 전 그날 밤도 그랬다. 방에서 비밀리에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복도 끝에서 '미친개' 학생주임의 서슬 퍼런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이 열리고 술판이 들통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순간. 구석에 앉아 있던 시은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얼어붙어 있던 내 손목을 덥석 낚아챘다. "야, 윤태경. 뛰어!" 시은이는 1층 창문을 훌쩍 뛰어넘어 나를 끌어당겼다. 미친개가 "거기 서라, 이 녀석들아!" 하고 고함을 치며 손전등을 비췄지만, 시은이는 내 손을 꽉 쥔 채 어두운 리조트 뒤편 해변 산책로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려서 숨어든 곳은, 바닷가 구석의 좁은 보트 보관 창고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깨를 맞댄 채 거친 숨을 고르던 순간.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는 내 손등을, 시은이의 따뜻한 손가락이 살며시 감싸 쥐며 툭 내뱉었었다. '쫄지 마, 빵셔틀.' . . "…태경아?" 시은이의 부름에 나는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창고의 어둠 속에서도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10년 전엔, 네가 내 손 잡고 미친개 피해 도망쳐 줬잖아." 내 가라앉은 목소리에 시은이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젠 내가 네 손 잡고 빠져나갈 차례야. 밖의 저 양반한테서 어떻게든 널 빼낼 테니까, 넌 그냥 내 뒤에 있어." 내 덤덤한 고백에 시은이는 픽 웃으며 내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창고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뜨거워진 몸을 식히기 위해 리조트 뒤편의 산책로로 걸음을 옮기던 찰나였다. "어이, 윤 선생!" 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이 번쩍이며 김 선생이 나타났다. 그의 험악한 시선이 내 뒤에 선 시은이를 향했다. "그 녀석 아까 여학생 방에서 끌고 나오더니, 또 뭘 잘못했길래 데리고 나간 거야?" 나는 표정을 차갑게 굳히며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녀석이 아까 장기자랑에서 부른 노래를 방에서 앵콜 공연을 하고 있길래 밖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정신 차리라고 모래사장 오리걸음 돌렸습니다." 내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은이가 다리를 절뚝거리는 시늉을 하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흐으윽… 선생님, 저 다리 풀려서 진짜 못 걷겠어요오…." 무대 위에서 스피커를 찢을 듯 노래하던 강력반 형사가, 눈물을 쥐어짜 내며 엄살을 피우고 있었다. 그 실감 나는 연기에 김 선생은 미간을 좁히며 나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혼낸 거 맞소?" "네. 내일 아침까지 반성문도 써오라고 시켰습니다." 내 단호한 대답에 김 선생은 혀를 차며 손전등을 내렸다. "윤 선생도 참 징해. 알았소. 밤이 늦었으니 얼른 방에 들여보내." 김 선생이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시은이가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야, 윤태경. 너 거짓말 진짜 뻔뻔하게 잘한다?" "네 연기력이 더 훌륭하던데." 우리는 참았던 웃음을 동시에 터뜨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단단히 깍지 껴 잡았다.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는 산책로를 따라, 우리는 발을 맞춰 걸었다. 어느새 여학생 숙소가 있는 건물 입구 앞. 나는 맞잡았던 손을 풀며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들어가. 가서 애들이랑 적당히 놀고 자. 내일 일정 피곤할 테니까." "알았어, 빵셔틀 쌤. 내일 봐." 시은이는 눈꼬리를 접으며 웃어 보이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기분 좋은 밤바람을 깊게 들이마셨다. 10년 전 수학여행의 지독했던 악몽이 씻겨 내려가는 밤이었다.창고 밖에서는 김 선생의 구두 발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정적 속,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어둠 속에서도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시은이의 까만 눈동자와 끈질기게 시선이 얽혀들었다.시은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감아안으며 그대로 입술을 덮었다."읏…."시은이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던 놀란 숨을 내가 깊게 삼켰다.그녀의 두 팔이 자연스럽게 내 목을 감아왔다.문밖에서 김 선생이 창고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덜그럭 소리가 들려왔지만, 조심스럽던 입맞춤은 그 위태로운 긴장감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짙고 거칠어졌다.서로의 숨이 얽히는 소리만이 좁은 창고 안을 뜨겁게 채우고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밖으로 갔나…."김 선생의 중얼거림과 함께 구두 발소리가 계단 아래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천천히 입술을 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어둠 속에서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는 시은이의 어깨를 가볍게 쥐고 물었다."어쩌자고 애들하고 술을 마셨어. 들키면 어쩌려고."내 물음에 시은이는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스윽 닦아내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수아가 가방에 몰래 챙겨왔더라고. 안 마시려고 했는데… 옛날 생각도 좀 나고, 오늘 기분도 좋아서 나도 모르게 반 병이나 마셔버렸네."시은이의 대답에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10년 전, 우리의 수학여행 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10년 전 그날 밤도 그랬다.방에서 비밀리에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복도 끝에서 '미친개' 학생주임의 서슬
고등학교 시절의 꽃, 수학여행. 목적지는 탁 트인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동해 바다였다. 숙소인 해변가 리조트에 짐을 풀고 백사장으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멀찍이 그늘에 서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은이는 28살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파도를 피해 도망치며 쉴 새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있던 시은이가 나를 발견했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장난기로 반짝이더니, 옆에 있던 민재와 아이들을 불러모아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야! 호랑이 쌤 덮쳐!!" 시은이의 외침과 함께,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어, 어? 야, 너희들 뭐 하는… 으아악!" 반항할 새도 없이 녀석들에게 팔다리가 들린 나는 그대로 얕은 바닷물 속으로 속절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짠물이 코로 훅 들어왔다. 물기를 털어내며 기가 막혀 허우적거리자, 내 코앞에서 배를 잡고 숨이 넘어가게 웃고 있는 시은이가 보였다.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은 채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호랑이 선생님! 바닷물 시원하죠?!" 나는 겉옷을 대충 벗어 던지고 물장구를 치며 아이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시은이는 내 물세례를 피하며 비명을 지르고 도망쳤고, 나는 그런 그녀의 뒤를 쫓으며 원 없이 웃었다. 선생의 체면 같은 건 이미 파도에 휩쓸려간 지 오래였다. .. 문제는 저녁 장기자랑을 불과 몇 시간 앞둔 때 터졌다. "아악!" 리조트 로비 계단에서 장난을 치며 뛰어내려 오던 민재가 발목을 심하게 접질린 것이다.
5월 15일, 스승의 날. 출근길, 평소라면 무거운 공기만 감돌았을 교무실 복도였지만 오늘만큼은 내 발걸음도 미세하게 가벼웠다. 하지만 그 소박한 기대는 2층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산산조각이 났다. "이지안! 전학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남의 학교 애들을 패고 다녀?!" 복도 한가운데서 생활지도부장 김 선생이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코피가 터진 채 훌쩍이는 민재, 잔뜩 겁에 질려 눈물을 훔치는 수아, 그리고 짝다리를 짚고 선 시은이가 있었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시은이의 상태부터 살폈다. 찢어진 셔츠와 긁힌 뺨.하지만 빳빳하게 든 그녀의 고개엔 일말의 반성 대신 차가운 냉기만이 서려 있었다. "김 선생님.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내가 다가가 앞을 막아서자, 김 선생이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윤 선생 마침 잘 왔소. 이 전학생 녀석이 등굣길 골목에서 옆 학교 애들 셋을 피떡으로 만들어 놨어!놈들 다 구급차 실려 가게 생겼다고!" "선생님, 아니에요!" 김 선생의 호통에 수아가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 "그 새끼들이 먼저 민재 때리고 제 머리채까지 잡았단 말이에요!지나가던 3학년 선배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지안이가 뛰어들어서 저희 살려준 거예요!" 수아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시선이 복도 끝으로 향했다. 며칠 전 점심시간, 시은에게 담배를 건넸던 3학년 무리가 창틀에 기대어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우두머리 격인 녀석이 시은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짧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이유가 어찌 됐든 폭력은 폭력이야! 당장 징계위원회 열어서…."
좁은 자취방에서 서로의 온기를 확인했던 그 뜨거웠던 밤 이후, 학교에서의 우리는 전보다 훨씬 더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겉으로는 여전히 무자비한 '호랑이 담임'과 '구제 불능 전학생'이었지만, 교차하는 시선 속에는 오직 둘만이 아는 은밀한 열기가 맴돌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복도 순찰을 돌던 나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는 시은이의 모습 때문이었다. 나는 멈칫하며, 그녀의 짙은 립스틱과 지나치게 짧은 치마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복장 불량. 학생부 문서보관실로 따라와." 나는 차갑게 명령하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시은이는 아이들이 보는 앞이라 작게 콧방귀를 뀌었지만, 이내 묵묵히 내 뒤를 따랐다. 창문 하나 없이 캐비닛만 빼곡하게 들어찬 좁고 어두운 문서보관실. 시은이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철컥, 소리가 나도록 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서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뒷걸음질 치던 시은이의 등이 차가운 캐비닛에 닿았다. 나는 양팔을 뻗어 캐비닛을 짚고, 그녀를 내 넓은 어깨와 가슴팍 사이의 그림자 안에 완벽하게 가두어버렸다. 시은이가 얼굴을 들려던 찰나,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에 발린 짙은 립스틱을 스윽, 거칠게 문질러 닦아냈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이런 진한 화장에 치마를 줄여." 나의 짙고 억눌린 목소리가 좁은 방 안을 울렸다. "아무리 수사 때문이라도, 내 눈 돌아가는 꼴 보고 싶어?"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시은이가 어이없다는 듯 따져 물었다. "아니, 왜 10년 전하고 비밀번호가 똑같아? 1204. 설마 하고 눌러봤는데 덜컥 열려서 소름돋았네. 어쩌려고 비번도 안 바꾸고 살아, 위험하게." 그녀의 타박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 언제든 들어오라고 안 바꾼 건데." 내 무심한 대답에 시은이의 잔소리가 뚝 끊겼다. 그녀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이내 붉어진 귀끝을 숨기려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바닥으로 피했다. 나는 그 틈을 타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 씻고 와. 밥 해줄게." 도마 위에서 양파와 소고기를 써는 동안, 시은이는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내 뒷모습을 빤히 구경했다. "야, 고기 냄새 장난 아니다. 근데 우리 이 좋은 안주에 술은 없어?" 시은이가 짓궂은 눈웃음을 지으며 묻자, 나는 프라이팬의 불을 줄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우리 진짜 알코올 중독인 거 아니냐. 만날 때마다 술이네." "뭐 어때. 형사가 흉악범들 상대하려면 알코올 소독은 필수야." 뻔뻔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주방 구석의 작은 와인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눕혀두었던 레드와인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왔다. "그래, 뭐 내일 주말이니까." 내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묵직한 와인병을 보며 시은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오, 뭔가 좀 비싸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두는 사이,시은이는 익숙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좁은 주방의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매콤하고 익숙한 냄새가 방 안을 채웠다. 좁은 도마 위에서 고기를 썰고 찌개를 끓이는 뒷모습. 10년 전, 내 18세 생일날,좁은 방에 찾아와 묵묵히 찌개를 끓여주던 그날의 어깨가 눈앞의 실루엣에 고스란히 겹쳐졌다. "앉아. 다 됐어." 작은 밥상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치찌개와 하얀 쌀밥, 그리고 노릇하게 구워진 소고기가 올려졌다. 시은이는 냉장고를 열어 차가운 소주 한 병과 유리잔 두 개를 꺼내 왔다. 자리에 마주 앉은 그녀가 내 잔에 투명한 액체를 채워주며, 픽 하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 둘이 마주 앉아서 소주 마시는 건 처음이네." "그러게. 10년 전엔 기껏해야 캔맥주 몰래 마시는 게 다였는데." 유리잔이 짧은 마찰음을 내며 부딪혔다. 알싸한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꼿꼿하게 서 있던 시은이의 어깨에서 조금씩 힘이 빠졌다. 첫 잔이 비워지고 두 잔, 세 잔. 말없이 비워지는 술잔의 속도가 꽤 빨랐다. "천천히 마셔. 빈속이잖아." 내가 만류하려 했지만,시은이는 대답 대신 마지막 남은 소주를 내 잔에 마저 털어 넣었다. 바닥을 드러낸 초록색 빈 병을 가볍게 흔들어 보던 그녀가,문득 생각난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잠깐만 기다려 봐. 오늘 같은 날 마시려고 아껴둔 진짜 좋은 술 있어." 자리에서 일어난 시은이가 구석에서 묵직한 나무 케이스 하나를 꺼내 왔다. 찰칵,걸쇠를 풀고 그녀가 밥상 한가운데에 내려놓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