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어떻게 민 사장님과 알아요?

민도준은 권하윤을 힐끗 바라봤다. ‘잤던 사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흘러나왔지만 도로 삼켰다.

“만난 적 있어요.”

들려오는 대답에 권하윤은 겨우 안도했다. 적어도 한고비는 넘긴 셈이니까.

하지만 민상철은 의심을 떨쳐내지 않았다. 민도준 성격에 한 번 만난 적 있다고 인사를 건넬 성격은 아니었기에 이번에는 시선을 권하윤 쪽으로 옮겼다.

“승현 약혼녀라고 했나?”

“네.”

“이리 와서 술 한잔 따라 봐.”

가문 어르신께 술을 붓는 건 무한한 영광이었다. 때문에 민승현마저 흥분한 눈치였다. 그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권하윤을 다그쳤다.

“할아버지한테 잘 보여. 실수했다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권하윤은 그런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할아버지가 뭔가 눈치챘을까 걱정되는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민상철의 뒤쪽으로 걸어가 메이드의 손에서 술을 받아 쥐고는 빈 잔에 술을 따랐다.

“할아버지, 술 받으세요.”

하지만 민상철은 술잔을 받지 않고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훑었다. 마치 심사라도 하듯이.

권하윤은 손이 저려왔지만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그 시각 허리를 숙이고 있는 권하윤의 몸매를 훑던 민도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권하윤의 손이 미세하게 떨릴 때쯤 민상철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승현과 약혼할 때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내 서재에 있는 매화도를 선물로 주마. 약혼 선물이다 생각하고 받아 가.”

권하윤이 입을 열기도 전에 민승현이 먼저 흥분 가득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선물을 받은 것보다 그걸 할아버지한테서 받았다는 게 더 영광스러웠다. 곧이어 할아버지가 자기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자리라도 내어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연회가 거의 막바지에 이를 때, 권하윤은 고개를 숙인 채 자기 존재감을 최대한으로 낮췄다. 더 이상 눈에 띄지 않겠다는 노력이었다.

중도에 셋째 숙부가 백제 그룹 대표직이 비었다고 은연중 자기 생각을 드러냈지만 가족 연회에서 회사 일을 말하지 말라는 민상철의 한마디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던 그때 누군가 싸늘해진 분위기를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공 씨 가문 셋째가 해원에서 경성으로 올라왔다던데 경성에 있는 가문과 혼인하려는 것 같더라고요.”

“공 씨 가문은 해원에서 영향력 있는 거 아니었어? 왜 경성까지 왔지?”

친척들끼리 떠들어댔지만 뒤에 나온 말은 더 이상 권하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 씨 가문이라는 말에 그녀는 이미 등골이 오싹해났다.

뇌리 저편에 고이 처박아 뒀던 기억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공포감을 애써 숨기며 스스로를 위로하기 바빴다.

‘괜찮아. 그 사람이 나 모를 거야. 서로 만나지만 않으면 안전해.’

하지만 권하윤의 이상함이 곧바로 민도준의 눈에 들어왔다.

‘공 씨 가문 얘기만 듣고도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떠는 꼴이라니. 점점 재밌어 지네.’

…….

민도준 덕분에 존재감을 숨기며 투명인을 자처하던 권하윤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존재가 되었다.

민도준이 민상철에게 불려 서재에 들어간 사이 사람들은 그녀를 에워쌌다.

민도준을 언제 봤냐 어디서 봤냐 친하냐 등의 질문 세례에 권하윤은 대충 파티에서 봤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때.

“언니 정말 대단하네요. 여기에서 민 사장님과 만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언니만 기억에 남았대요? 어떻게 한 건데요?”

강민정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치 그저 궁금해서라는 듯 해맑은 표정이었지만 말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녀는 솔직히 권하윤이 와인잔 때문에 망신을 당하는 걸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실패한 것도 모자라 오히려 할아버지한테 눈도장까지 찍었으니 속이 뒤틀렸다. 게다가 권하윤이 저도 한 번 만나본 적 없는 민도준과 만나고 그의 눈에 들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하지만 민승현은 그런 그녀의 질투를 눈치채지 못하고 오히려 권하윤을 다그치며 물었다.

“그만 뜸 들이고 빨리 말하는 게 어때? 다들 궁금해하는데.”

사실을 말하면 아마 여기가 발칵 뒤집힐 거다. 그 생각에 권하윤은 속으로 냉소했다.

“솔직히 저도 민 사장님과 말 섞지 못했는데 누군가 저를 승현 씨 약혼녀라고 소개한 덕에 저한테 먼저 인사하더라고요. 그래서 말 조금 섞어본 게 다예요.”

“정말?”

민도준이 자기를 좋게 봐주고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에 민승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자기만의 생각에 빠진 그는 다른 사람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그 사람들 중 강민정도 속해 있었다.

집안 어르신인 민상철에게도 멋대로인 민도준이 민승현의 체면을 봐서 먼저 인사를 건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또 민승현이 아니면 권하윤이 민도준과 엮일 일은 없었다.

그 순간 강민정은 어제 권하윤이 이상한 자세로 걷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두 사람이 뭔가 있었던 거야?’

하지만 곧바로 생각을 부정했다. 그런데 남녀 사이의 관계 빼고는 민도준이 권하윤을 기억할 일은 없었다.

-

그 시각, 서재.

“동림 쪽 땅 손에 넣었어?”

민상철의 말에 민도준은 무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먹을 수 있겠어?”

“제 식욕 좋은 거 아시면서.”

고요함 속에서 수많은 대화가 오가고 난 뒤 민상철은 겨우 물러났다.

“도준아, 너 민씨 가문 사람이야. 나도 이제 늙었겠다 민씨 가문 후계자 자리도 비어 있겠다 너도 우리 가문을 위해 힘써야 하지 않겠어?”

마치 뭔가를 암시하는 듯했지만 솔직히 아무런 약속도 없는 빈말뿐이었다.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낚싯대에 고기를 매달아 놓고 나더러 쫓아오라는 건가?’

어이없고 같잖았다. 그런 그의 눈빛에 민상철은 어색한 듯 주제를 바꿨다.

“아까 보니까 권씨 가문 딸내미를 아는 것 같던데 둘이 무슨 사이냐?”

“아하, 권하윤이요?”

민호준은 혀로 입술을 슥 훑더니 입을 열었다.

“맛있어 보여서 기억에 남던데요.”

“그게 무슨 망발이야!”

민상철은 바로 호통쳤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진지하지 못한 태도에 그저 민도준이 권 시 가문 여자라는 이름에 흥미가 생겼다고 생각하고 흘러 넘겼다.

“권씨 집안이 뒤에서 더러운 짓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그래. 네가 정말 마음 붙이고 살고 싶다면 네 형과 형수더러 네 짝 물색하라고 하마.”

민상철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궁 씨 가문 딸내미는 어때?”

“괜찮네요.”

민도준의 시원시원한 태도에 놀라기도 잠시.

“할아버지도 오랫동안 외로우셨겠는데 제가 한 번 저의 할머니가 되는 게 어떻겠냐고 잘 설득해 볼게요.”

“당장 나가!”

민상철은 불같이 화냈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를 이렇게까지 소리치게 만드는 것도 어찌 보면 참 대단한 일이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민도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서재를 빠져나왔다.

“도준아.”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도준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휠체어에 앉아 미소 짓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민도준의 표정은 잠시 어두워졌지만 이내 미소를 띤 채 상대에게 다가갔다.

“형이 웬일이야? 나를 다 불러 세우고? 왜? 나한테 붙여둔 사람이 영 별로라서 이제는 직접 나서려고?”

민재혁은 비아냥거리는 민도준의 태도에 난감한 듯 웃었다.

“도준아 무슨 그런 말을 하고 그래? 할아버지 들으시면 화내시겠다.”

“마침 형이 원하던 거 아닌가?”

“됐다, 너와 나 사이에 오해가 쌓인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나도 이제 설명할 생각 없어. 오늘 별채에 머물 건지 아니면 죽원에 머물 건지 물어보려 부른 거야. 네가 정하면 방 치워놓으라고 말할게.”

“누가 여기 남는대?”

“내일 둘째 숙부와 숙모 기일이잖아. 할아버지가 제사 준비하라고 사람들에게 일렀는데 아들인 네가 없으면 숙부 숙모가 얼마나 슬퍼하시겠어.”

“이젠 나를 붙잡아 두려고 죽은 사람까지 내세워?”

“뭐가 됐든 효도가 가장 중요한 거 아니겠어?”

“그래 남을게.”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